< 193. 끝난 줄 알았던 일 (2) >
T구역 27번 거리에 위치한 포레스트 레스토랑.
그곳에 올리버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딸랑. 딸랑.
여느 때와 같이 잔잔한 종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그를 반겼다.
가게 종업원인 알이었다.
"오셨습니까? 데이브 씨.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별고 없으셨는지요?”
정중하게 인사하는 알. 올리버도 그에 정중히 화답했다.
"전 잘 지냈습니다. 알 씨는 잘 지내셨나요?”
"저야 사장님이 잘 보살펴주셔서요.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알을 따라갔다. 이번에 만날 장소는 레스토랑 사장실이 아닌 지하 중개인 사무실로,
길다란 계단을 타고 내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포레스트와 그 맞은편에 앉은 핑크빛 정장 사내를 볼 수 있었다.
안면이 사람이었다. 핑크맨 사무소의 경호팀장인 조나단이었다.
과거, 던칸과의 전투 후 등장해 제인의 신병을 넘겨달라 부탁한 남자.
"안녕하십니까? 데이브 씨. 오랜만입니다. 절 기억하시는지요?”
그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정중히 인사했다.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핑크맨 경호팀장 조나단 씨 아닙니까? 과거 제인 아가씨 건으로 만났죠.”
"정확합니다. 다만, 지금은 보직이 변경돼 일반 업무 팀장을 맡고 있습니다. 부디 기억해주시길.”
그는 말을 끝마치며 정중히 명함을 내밀었다. 전보다 더 정중해진 느낌이었다.
대화를 어느 정도 주고받자 포레스트가 끼어들었다.
"제가 나설 것도 없이 서로 인사를 주고받으셨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였고, 조나단도 별 거부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겉에서 풍기는 분위기처럼 자잘한 허례허식보다는 효율을 중요시하는 것 같았다.
올리버자 자리에 앉고, 분위기가 진정되자 포레스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데이브. 휴식 중인 자넬 부른 이유는 다름 아닌 조나단 씨가 직접 요청해서이네. 이례적이게도 핑크맨에서 지금 진행 중인 일에 자넬 고용하고 싶다더군.”
올리버는 처음 듣는 척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미 통신장치를 통해 어느 정도 이야기를 들은 상태였다.
현재 조나단이 맡은 임무는 크라임 펌이 의뢰한 도난 물건 회수로, 도난당한 물건은 다름이 아닌 이번에 엎어진 수부렙토르 경매장의 경매품이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자세한 내막은 듣지 못했으나, 크라임 펌에서 나눠 보관한 경매품 중 일부가 기어이 털리고 만 것이었다.
"물건이 물건인지라 우리 쪽에 의뢰를 맡겼지요.”
조나단이 말했다.
솔직히 크라임 펌의 선택은 나쁘지 않았다.
규모 면에서는 크라임 펌이 더 클지 몰랐지만, 물품 회수는 단순한 힘이 아닌 전문성을 요구하는 일.
그쪽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여러모로 효율적이었다. 전혀 이상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이상한 거라면 핑크맨이 외부 인력인 올리버를 고용하려는 거였다.
외부 인력을 고용하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지만, 보통 머릿수를 채우기 위한 용역이 일반적..…. 올리버는 그쪽과는 거리가 멀었다.
올리버는 포레스트가 사전에 조언한 대로 이에 관해 물어봤다.
"핑크맨에서 절 고용하신다고요?”
"예, 솔직히 흔한 경우는 아니죠. 독보적인 전투력이나, 특기를 가진 인력은 안전을 위해 우리 사무소 인원들을 주로 쓰니까요. 이상하게 생각하셔도 이해합니다.”
조나단은 순수하게 다 불었다. 어설픈 잔머리를 쓸 생각은 없는 듯했다.
"혹시, 특별한 이유가 있으십니까?”
"임무 특성 때문입니다.”
"임무 특성요?”
"예, 크라임 펌의 요청 자체가 조금 껄끄럽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다루는 경매품은 대부분 장물인지라, 저희 같은 사무소가 대놓고 움직이기 조금 그렇거든요.”
대충 무슨 말인지 이해됐다.
억울하게 물건을 빼앗긴 것은 분명 슬픈 일이지만, 경매품 자체는 대부분 위법한 물건. 이 일 자체가 불법이었다.
핑크맨이 란다에 흔하디흔한 용병대나 해결사 집단이면 문제가 안 될지 모르지만, 정치인, 경제인 때때로 정부의 의뢰도 받는 거대 사무소인 걸 고려하면 조심할 필요성이 있었다.
실제로 몇 번 신문에 구설수에 올라 청문회를 치르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서 이번 일은 핑크맨 사무소에서 받는 게 아닌, 제가 멋대로 받은 것으로 진행됩니다. 그럼, 만일의 사태가 일어나도 사무소는 피해가 적을 테니까요.”
일명, 꼬리 자르기. 란다에서 보기 드문 것은 아니었지만, 꼬리 역할을 맡은 이가 스스로 이런 말을 하는 건 드물긴 했다.
"대충 이해했습니다. 즉, 이번 일이 껄끄러워 핑크맨 사무소와 무관한 형태로 진행되며, 그로 인해 동원할 수 있는 인력이 부족해 절 고용하신다는 거군요.”
"바로, 그겁니다. 데이브 씨처럼 실력과 신용을 모두 갖춘 해결사를 찾기란 쉽지가 않더군요.”
아부성이 짙은 발언이었지만, 아주 빈말은 아니었다. 조나단은 나름대로 올리버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란다에서 손꼽히는 핑크맨과 일하는 것도 썩 나쁜 경험 같지는 않았지만, 그전에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었다.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시죠.”
"제가 잘 모르지만, 이번 임무는 꽤 어려운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품을 빼앗은 습격자가 검은손…. 정확히는 인육 요리사 계파일 텐데 괜찮은 겁니까?”
"......!!"
조나단의 포커페이스가 한순간 동요했다. 올리버가 이런 뒷사정을 알고 있는 게 어지간히 놀란 눈치였다.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이 정보는 머피를 통해 올리버도 간신히 얻은 것이니.
“….예, 맞습니다. 아직 확인된 사실은 아니지만, 거의 확신하고 있죠. 어떻게 아신 겁니까?”
"그냥 경매품이 털렸다니, 저번에 경매장을 습격한 이들이 떠올라서 그쪽이라고 지레짐작했습니다. 저도 그들이 궁금해 개인적으로 조사해 봤거든요.”
"아, 그렇군요. 저도 소문을 듣긴 했는데, 벌써 거기까지 알아내실 줄 몰랐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만약 그쪽과 같은 쪽에서 왔다면, 제가 싸운 분들보다 더 강한 분들이 왔을 거라 생각됩니다. 제가 아는 걸 핑크맨이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하고요.”
"요점이?”
"상대한 강적이고, 동원할 수 있는 인력도 한정되는데, 구태여 이 일을 맡은 이유가 뭔지 궁금합니다.”
몇 번의 문답을 통해 마침내 핵심에 도착했다. 조나단은 양손을 들어 보이며 시인했다.
"이거 못 당하겠군요. 제가 먼저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선수를 빼앗겼습니다..…. 솔직히 인정하겠습니다. 원래라면 수지가 안 맞는 일이라 거부해야 마땅하지만, 크라임 펌에 큰 대가를 제안해 수락했습니다.”
"큰 대가가 무엇이죠?”
"되찾은 경매품 일부를 양도받는 겁니다.”
올리버는 말없이 놀랐다. 말이 경매품이지 그리 쉽게 넘겨줄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다 빼앗길 바에는 일부라도 되찾자는 거죠. 알아본 바에 따르면 이미 거래가 성사된 물건도 있답니다. 이대로 빼앗기면, 거래는 엎어져 크라임 펌의 신용과 명성은 바닥에 처박힐 테니, 이런 조건까지 내건 걸 겁니다.”
올리버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나단은 나머지 카드를 마저 오픈했다.
"되찾은 경매품 중 지정 항목을 제외한 두 개를 넘겨드리겠습니다. 원하는 물건이 없으시다면 그에 준하는 금전적 보상을 하겠습니다.”
통신장치를 통해 포레스트가 말한 핵심이 드디어 나왔다.
그는 올리버를 부를 때 이렇게 이야기가 진행될 것을 미리 예상했고, 그래서 휴식 중인 올리버를 부른 거였다.
단순히 많은 수수료만 받는 큰 건이 아닌 올리버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었기에.
올리버는 이러한 사실을 숨긴 채 시치미를 떼며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
"경매품요?”
"예. 원하시는 물건이 있습니까?”
"..…예, 있긴 있습니다.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조나단이 예상이라도 한 듯 품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경매품 목록이었다.
"여기서 고르시면 됩니다. 아직 저희도 무엇을 요구할지 정하지 않아 만약 데이브 씨와 겹치면 대화로 조율하고 싶습니다.”
올리버는 서류를 살펴봤다. 악마에 관한 서적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올리버는 저도 모르게 이 책을 가지고 싶다고 말할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눈치 없는 올리버조차 흑마법사가 대놓고 악마의 서적을 탐내면 안 되는 걸 알기에.
물론, 코코를 통해 한번 받기는 했지만, 그건 포레스트와 코코가 그동안 쌓은 신뢰를 바탕으로 해 안전한 거였고, 핑크맨은 전혀 다른 경우였다.
자칫 뒷세계에서 견제와 박해를 받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기회를 놓치는 건 또 너무 아쉬웠다.
이 바닥에서 나름 명성을 쌓아 경제적 여유를 얻었지만, 그럼에도 자력으로 악마에 관한 서적을 얻긴 힘들었으니.
그쪽 계열 물건은 이름값이 조금 높아지고, 돈 몇 푼 더 버는 것으로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이렇게 눈앞에 온 기회를 날려버린다? 그건 너무 힘들었다.
욕구와 이성 사이에서 올리버가 흔들리는 와중 포레스트가 조용히 조나단에게 말을 걸었다.
"조나단 씨.”
"예, 포레스트 님.”
"괜찮으시다면 대답을 조금만 기다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대답을 드릴 테니 말이죠.”
시의적절한 포레스트의 말에 올리버는 그를 말 없이 바라봤다.
***
조나단은 포레스트의 말에 동의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침입자를 수색 중이라 아직 시간이 있다고.
조나단이 떠나자 중개인사무실엔 올리버와 포레스트 단둘만 남게 되었다.
“대단하십니다.”
"뭐가?”
"포레스트 님 말씀입니다. 조나단 씨의 의뢰 내용은 물론, 제안한 보수도 전부 예상대로 흘러갔잖습니까?”
그랬다. 올리버를 호출하기 전 포레스트는 조나단의 의뢰 내용을 바탕으로 의뢰 배경과 크라임 펌과의 거래 내용을 파악해 올리버가 얻을 수 있는 걸 이야기해줬다.
미리 알아볼 시간이 있었다지만, 그렇다 해도 정보의 질이 상당했다.
"받아먹기만 하는 인간은 될 수 없으니까.”
"예?”
"별거 아닐세. 그보다 자네도 대단하군. 의뢰 내용과 보수는 내가 알려줬지만, 적에 대해선 내가 이야기 안 해줬는데….. 이런 일이 있을 줄 예상한 건가?”
"아뇨.…. 그냥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알아본 겁니다.”
“그렇군. 그렇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마. 조나단이 꽤나 큰 인상을 받은 것 같으니.”
맞는 말이었다. 해결사 바닥에서 힘이란 중요한 거였지만, 힘이 전부냐면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일의 규모가 커질수록 힘 못지 않게 다른 부분도 중요했다.
상황을 볼 줄 아는 안목과 이를 근거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판단력과 결단력, 여차하면 도움을 청할 인맥, 심지어 운이라는 불확실한 영역도 필요했다.
이 부분을 갖췄느냐 못 갖췄느냐로 몸값이 바뀔 정도.
그런 의미에서 아까 전 올리버가 보여준 모습은 그냥 유지하는 게 나았다. 의도치 않게 알았다 해도 그 역시 실력이었으니.
"이 일은 어떻나?”
올리버는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포레스트 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리고 싶으면서도, 수락하라고 떠밀고 싶군.”
"어째서죠?”
"상대해야 하는 적이 너무 나쁘니까. 이 바닥에서 검은손과 엮이고 싶어하는 변태는 그리 많지 않아. 뒷골목의 도시괴담 같은 존재들이니.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핑크맨과 인맥을 쌓고, 크라임 펌에 빚을 지우며, 진귀한 경매품도 얻을 수 있으니 마냥 거절하라기도 힘들지. 결국, 자네 마음에 달린 문제야. 리스크를 감수할 생각이 있나?”
“..…솔직히 있습니다. 가지고 싶은 물건이 하나 있어서요.”
"뭔지 물어봐도 되겠나?”
"이 물건입니다.”
올리버가 목록에 한 부분을 표시해 내밀었다. 악마에 관한 서적이었다.
"역시나군."
"바로, 대답하고 싶긴 했지만, 참았습니다.”
이미 한번 악마의 서적을 받는 대가로 일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게 흔한 경우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바로 이야기하지 않고 침묵한 거였다.
"혹시, 받을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하진 않아. 흑마법사가 이 책을 찾는 게 조금 꺼림칙할 수 있지만, 설득할 포인트만 잘 잡으면 별문제 없이 넘어갈 수 있거든.”
"포인트요?”
"그래, 가령, 핑크맨들도 숨기고픈 이야기가 있을 테니 그걸로 넌지시 설득하는 거지. 그러면 우리 쪽에게 자연스럽게 관심을 멀리할 테니. 그럼, 이 물건을 받을 수 있도록 협상하겠네. 다른 물건은 더 없나?"
포레스트의 말은 허언이 아닌 근거가 있는 확신이었다.
핑크맨을 상대로 악마 서적을 뒤탈 없이 가져오겠다고 자신 있게 생각했다.
"음..…. 다른 하나는 천천히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런데, 괜찮으십니까?”
"뭐가?”
"제가 악마의 서적을 찾는 게 찝찝하지 않으십니까?”
"음..…. 그 이야기를 반년 더 일찍 해줬으면 좋은 대답이 떠올랐을 텐데, 지금 와서는 딱히 해줄 말이 없구만.”
맞는 말이었다. 이미, 코코 양을 통해 에디스에게서 악마의 서적까지 얻어 놓고 이런 말을 하긴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그냥, 자네 호기심이라고 생각하고 있네. 아니면 왜? 혹시 악마의 서적을 찾는 특별하고도 사악한 이유가 있나?”
"아뇨. 그건 아닙니다.”
"그럼 됐어. 솔직히 말해 나 같은 사람에게 악마니, 천사니 하는 이야기보다 당장 먹고사는 일이 먼저니까. 자네는 현재 나와 거래하는 해결사 중 실력과 신용이 가장 뛰어난 해결사네. 내 일은 자네를 잘 보조해 최대의 이익을 얻는 것이고. 그러니 프로답게 이상한 오지랖 부리지 말고, 각자 원하는 걸 말하고 맞추도록 하지.”
"예, 알겠습니다.…. 그럼, 이번 일 수락하겠습니다. 일정 좀 조율할 수 있게 시간 좀 주실 수 있나요?”
"물론, 어차피 바로 대답할 생각 없으니까 상관없어.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가 대답해 줄 생각이야. 그래야 몸이 달아오르지. 일단, 내 나름대로 모아놓은 자료를 넘겨주도록 하겠네.”
"무슨 자료 말씀입니까?”
"크라임 펌 물건을 훔친 일당들에 관한 내 자체적인 정보...... 왜 그러나? 받아먹기만 하는 인간이 될 생각 없다고 말했잖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