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 첫 출근 (2) >
"예, 원소학파 타워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여쭤볼 수 있을까요?”
올리버가 말을 마치고 자연스럽게 말했는지 자체적으로 자신을 확인해봤다.
눈빛, 제스처, 말투 모두 문제없었다.
코코를 비롯한 천사의 집 사람들과 연습했던 대로 자연스러웠다.
공식적인 양지 생활이다 보니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것인데,
은빛 곱슬머리에 두꺼운 안경을 쓴 여성은 뭔가 이상한지 바로 대답해주지 않고 호기심, 수상함과 같은 감정을 작게 빛내며 올리버를 관찰했다.
기분 나쁜 것은 아니었다. 대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이었으니.
무엇보다 그 사이 올리버도 그녀를 관찰했으니 쌤쌤이었다.
'피로해 보이는 인상. 그에 반해 옷에는 주름이 없고, 감정도 차분해….. 란다 행정구역에서 봤던 엘리트들과 비슷한 느낌이야.’
서로가 관찰을 끝마쳤을 때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원소학파는 왜요?”
여성이 작은 경계심과 의구심을 빛내며 물었다. 혹시 뭔가 실수한 걸까?
"오늘부터 출근하기로 했거든요.”
올리버가 품 안에서 지갑을 꺼내 멀린에게서 받은 마탑 직원신분증을 보여줬다.
직원신분증에는 현재 올리버가 쓴 또 다른 가죽의 모습과 함께 직원 번호, 그리고 제2의 가명인 <제논 브라이트>라는 문구가 박혀있었다.
이름은 멀린이 지어준 거였고, 성은 데이브의 위장 성씨를 약간 변형시킨 것이었다. 그냥 가져올까도 했지만, 혹시 모르니 말이다.
“....교수님에게 고용된 개인 직원이군요.”
"예."
"어느 교수님이죠? 처음 보는 분이신데.”
"원소학파의 케빈 던바 교수님입니다.”
여성은 올리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여러 개의 탑이 하나로 연결된 형태의 탑으로, 톱니바퀴를 연상시키는 체계적이면서도 독특한 디자인의 건물이었다.
"저기예요. 정문으로 가면 건물 안내판이 있으니 그걸 참고하면 될 거예요.”
"아,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예, 당신도요.”
올리버가 도와준 여성분과 인사를 나눈 후 그대로 헤어졌다.
몸 안에 방대하면서도 순수한 마력을 가진 사람치고 꽤 친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늦진 않았군.”
원소학파 타워. 교수 연구실 안.
머리를 깔끔하게 묶어 정리한 케빈 던바가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그는 과거 봤을 때도 빈틈이 없었지만, 지금은 훨씬 더 빈틈이 없었다. 정장을 입었지만, 갑옷을 입은 것 같았다.
"앞으로 좀 더 일찍 오겠습니다.”
"아니, 굳이 그럴 필요 없어. 그런 거 비효율적이니까. 늦지만 마.”
"예, 알겠습니다.”
올리버는 정중히 대답했다.
마탑에 들어갈 수 있게 해준 것은 멀린이었지만, 리스크를 감수하는 것은 케빈. 그렇기에 올리버는 마탑의 혜택을 누릴 동안에는 그의 말을 최대한 잘 따를 생각이었다.
여기 들어온 것만으로 올리버는 예상치 못한 배려였으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용케 안 늦었네. 늦을 줄 알았는데.”
"사실 늦을 뻔했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마탑이란 곳이 크고, 넓어서 길을 헤맸거든요.”
"맞아, 지도가 필요할 정도지.”
"지도가 있습니까?”
올리버가 고개를 갸웃대며 물었다. 지도가 있는 게 신기한 한편 이 정도 규모면 있어도 이상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근데, 왜 멀린은 주지 않은 거지?
"어, 여기.”
케빈이 책상 위에 있던 지도를 올리버에게 줬다. 마탑 내부 지리와 각 건물이 표시되어 있었다.
"어르신께서 주시는 걸 깜빡한 걸까요?”
"아니, 그보다는 일부러 안 준 걸 거야. 그분은 자기 제자를 난감한 상황에 빠뜨리는 걸 좋아하거든. 조심성과 순발력을 키워준다고."
케빈은 스스로 말하면서도 믿지 않았지만, 올리버는 그렇구나 하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누가 가르쳐준 거지?”
"예?”
"여기가 원소학파 타워라는 거. 여기 녀석들 꽤 까칠해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답해주지 않을 텐데.”
그 말은 사실이었다. 처음 몇 번은 아무도 올리버를 상대해주지 않았다.
"아슬아슬할 타이밍에 한 여성분께서 도와주셨습니다.”
"신기하군..…. 쿼터스태프는 두고 왔나?”
케빈이 올리버를 훑어보며 물었다.
올리버는 고개를 저은 후, 품 안에서 작은 나무 작대기를 꺼냈다.
축소 마법으로 줄인 쿼터스태프였다.
멀린에게 속성으로 배운 마법으로, 마법 가방에 들고 다닐까 했지만,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꺼내기 쉽게 이리 품 안에 넣어두었다.
"여기 있습니다. 눈에 띈다고 하셔서.”
케빈이 막대기 주변에 전개된 마력 술식을 읽으며 말했다.
"축소마법.… 번거롭게 들고 다니는군.”
그 말은 사실이었다. 한번 마법을 건다고 끝이 아니라, 계속해 마력을 공급해야 유지됐으니까.
덕분에 올리버는 마력을 추출해 몸 안에 넣거나, 마력을 보충해주는 보충 포션을 정기적으로 마셔야 했다.
"곁에 있는 게 마음에 놓여서요.”
"그래? 아무런 마법이나 흑마법도 부여 안 된 물건인 것 같은데.”
"그렇긴 하지만 마음은 편안합니다.”
“..…뭐,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네 역할이 뭔지 들었나?”
"예, 어르신께 들었습니다. 전 교수님의 고귀한 자비(慈悲)로 고용된 마탑의 직원으로, 교수님의 일을 보조하며 틈틈이 마탑의 요청이 있을 때마다 노동력을 제공해야 합니다.”
"얼추 맞군. 이것들 받아.”
케빈이 책자 몇 개를 줬다. 제목을 대충 훑어봤다.
[마탑 교칙]
[교수 개인 직원의 의무와 혜택]
[시설 이용 규칙과 방법]
책 표지에 박힌 딱딱한 글씨체가 얼마나 규칙이 엄격한지 간접적으로 이야기해줬다.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숙지하는 게 좋을 거야. 마탑은 폐쇄적이고, 교칙이 경우에 따라 엄격하거든. 만약 네가 교칙을 어겨 불이익을 받게 된다면 난 도와줄 생각이 없어.”
즉, 알아서 잘 처신하라는 이야기. 올리버는 바로 대답했다.
"최대한 빨리 외우겠습니다.”
"그럼 이제 나가서 연구실 맞은편에 있는 기원실 청소나 해. 청소를 안 한 지 좀 됐다니 하루종일 청소해야 할 거야."
"예, 알겠습니다. 혹시, 제게 따로 하고 싶은 말씀은 없으십니까?”
"무슨 말!?”
"어찌 됐건 전 교수님의 직원이 됐는데, 혹시 주의 주고 싶거나, 요구하고 싶은 게 없을까 해서요….. 최대한 잘하고 싶거든요."
"..…약속 시간에 늦지 말고, 잔머리 굴리지 마.”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 외에는 없으십니까?”
"없어. 너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이 이상 할 이야기도 없지.”
"아..…. 예,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나가겠습니다.”
올리버가 고개를 숙인 다음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케빈이 올리버를 멈춰 세웠다.
"잠깐만.”
"예?"
올리버가 대답하자마자 케빈은 능숙하게 한쪽 손에 마력을 모아 술식을 부여, 응축해 손가락을 튕겼다.
딱! 소리와 함께 응축되어 있던 마력이 고루 퍼지며, 연구실 내부 벽면에 접촉해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외부와 단절시켰다.
무영창에 시전 속도도 그렇고, 발동 방식도 그렇고. 숨 쉬는 것처럼 능숙했다.
"개인적인 질문 하나 하지.”
"예, 말씀하십시오.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하겠습니다.”
"너 정도 실력자면 어디서든 연락이 올 것 같은데, 혼자서 해결사 일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나? 비효율적인 것 같아서 내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되거든.”
가려운 곳을 바로 긁기보다는 그 옆을 긁는 듯 케빈이 핵심을 피해 질문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케빈은 올리버를 경계하고 있었다.
마력으로 감정을 숨기려고 했지만, 멀린 만큼 실력이 좋지는 못해 올리버가 엿블 수 있었다.
"음.…. 그런 제안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거절했습니다.”
"어째서지? 해결사보다는 조직에 소속되는 게 여러모로 편할 텐데.”
맞는 말이었다. 해결사 일이 괜찮아 보여도 일이 고정적이지 못하고 위험한 하청을 떠맡는 게 본질이었으니. 조직에 속하는 게 전반적으로 더 나았다. 일반적인 시야에서는 말이다.
"조직에 소속되면, 제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야 할지도 모르거든요.”
"하기 싫은 일?”
"예, 가령, 아이나 여자 같은 일반인을 납치해 넘겨야 하는 것들요. 못할 건 아닌데..…. 좀. 그렇지 않습니까?”
올리버가 인형사 글립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세상 밖으로 처음 나와 켄트의 거지패에 머물 때 처음 만난 흑마법사.
문득, 그때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검은손으로 갔다면 어땠을지 궁금해졌다.
‘다른 건 올라도 악마에 관해서는 많이 배웠을 수도..…. 조금 아쉽나?’
"근데, 지금은 마탑에 소속되어 있잖아? 스승님을 제자로 모시고 있고.”
"아, 이 경우는 예외입니다. 서로 계약서를 써, 뜻이 안 맞을 경우 관계를 끊기로 했거든요. 마탑에 들어온 것도 그런 것의 연장선이니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케빈이 살짝 놀란 감정을 빛냈다. 무슨 말실수라도 한 걸까?
"그렇단 말이지…..”
"예.… 제가 혹시 무슨 실수라도?”
"아니, 실수한건 아니야.…. 아, 맞다. 경고하나 해두지.”
"예, 말씀하십시오.”
"지금 당장은 내가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별문제 없겠지만, 곧 너한테 이것저것 시비 걸고, 괴롭히려는 사람들이 다가올 거야.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 조용히 잘 견뎌.”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시비를 걸죠?”
"내 직원이니까.”
***
알 수 없는 말을 뒤로하고 올리버는 케빈이 말한 직원실에 들어갔다.
굴러다닐 정도로 쌓인 먼지와 쓰레기, 일부러 더럽힌 듯한 얼룩 등이 눈에 띄었다. 케빈의 말대로 지저분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일반적인 사람의 시야에 한한 것뿐.
여전히 생활 기준을 고아원과 광산 시절로 잡고 있는 올리버에게 있어 이 정도는 약간 지저분한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올리버는 케빈에게서 받은 청소도구로 청소하다, 약간 모자란 감을 느껴 챙겨 온 마법 가방에서 청소도구를 꺼냈다.
원래는 송장인형 제작이나, 재료 손질 후 뒷정리를 목적을 위해 산 물건으로, 성능은 이미 입증된 물건이었다.
"이제야 청소가 좀 되네.”
올리버가 자신의 청소도구로 직원실을 정리하며 중얼거렸다.
청소를 끝마친 후 올리버는 케빈이 준 마탑 내부 지도와 마탑 교칙, 교수 개인 직원의 의무와 혜택, 시설 이용 규칙과 방법 등을 전체적으로 훑어봐 중요한 것 위주로 먼저 파악해 나갔다.
그렇게 집중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퇴근 시간.
올리버는 연구실 앞에 갔지만, 아직 케빈은 돌아오지않아 비어있는 상태였다.
퇴근 시간까지 안 오면 알아서 퇴근하라고 하긴 했지만, 이래도 되나 싶었다.
수업 참관에 마탑 도서실 이용, 심지어 (올리버 기준) 커다란 사무실과 합법적인 급여까지 나왔는데, 이렇게 편해도 되는지 말이다.
그렇다고 올리버가 뭔가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었고, 일을 달라고 보채는 건 또 경우가 아닌 것 같았다.
"뭐, 있다보면 할 일이 생기겠지.”
올리버는 그리 생각하며 퇴근 준비에 들어갔다.
그때, 올리버는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케빈의 연구실은 타워 가장 끝에 있어 우연히 올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기에 이쪽에 볼일이 있는 사람인 듯했다.
이윽고 복도에 한 여성의 모습이 들어왔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이곳으로 길을 알려준 은빛 머리 여성.
그녀는 특유의 두꺼운 안경을 한번 들어 올리며 물었다.
"안녕하세요. 케빈 던바 교수님이 이번 학기에 무슨 수업을 할지 알고 싶어 찾아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