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 소개 (2) >
"아니면 오랜만이라 해야 하나?”
종군마법사 케빈 던바가 올리버를 보며 대뜸 말했다.
찰나와 같은 짧은 순간.
올리버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어떡하지? 모른다고 거짓말해야 하나? 내가 거짓말을 잘하던가? 그보다 멀린 님께서 말한 제자 분이 이분이었나? 뭐지? 우연? 아니면 처음부터 계획된 거?’
인위적이다 할 정도의 우연에 올리버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대답할 타이밍이 왔다.
이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인정하는 것과 진배없었다.
"오랜만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케빈 님.”
올리버는 고민 끝에 솔직히 대답하는 쪽을 택했다.
케빈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의외, 감탄, 희미한 만족, 신기함 등 그의 감정도 작게 빛났다. 최소한 불쾌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올리버는 조심히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다면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뭐지?”
"절 어떻게 단번에 알아보셨죠? 그때는 가죽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요.”
지금도 가죽 가면을 쓰고 있는 건 매한가지였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다.
케빈이 대답했다.
"난 관찰력이 좋거든. 분위기나 행동, 버릇, 말투를 잘 기억해. 무엇보다……."
“….무엇보다?”
"저 지팡이가 너무 눈에 띄거든.”
올리버는 옆에 세워둔 쿼터스태프를 봤다. 저도 모르게 ‘아..…' 소리가 나왔다.
"칼과 총이 기본이고, 골렘 의수, 기계장비, 육체 개조까지 하는 바닥에서 지팡이만 들고 다니는 놈은 잘 없지. 자연히 누군지 추론하기 쉬워지고.”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확실히 란다 뒷골목에서는 저게 더 눈에 띌지도.
그러자 문득 윌레스 도주 때 올리버가 관여한 게 걸리지 않았을까 싶었다.
이를 눈치챘는지 케빈이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 널 본 건 나밖에 없고. 난 이야기 안 했으니까.”
"감사합니다….. 근데, 그러셔도 되는지요?”
"좋아서 하는 게 아니었거든.”
"마법사들은, 최소한 학파에 정식으로 소속된 주류 마법사들은 왕국군에 의무복무를 해야 하거든. 기회라고 생각하는 친구도 있지만, 그냥 싫어하는 친구들도 있지. 이 친구도 그런 타입이고.”
멀린이 케빈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설명해줬다.
케빈은 자신의 어깨에 올라간 멀린의 손을 보곤 대뜸 말했다.
"스승님..…. 손 좀 치워주시겠습니까?”
"아, 실례.”
올리버는 두 눈을 빠르게 움직여 멀린과 케빈을 봤다.
올리버가 그동안 얻은 정보로 봤을 때 일반적인 사제관계와 거리가 있어 보였다.
저번에 한 지부 관계자는 멀린과 눈도 못 마주치며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는데, 케빈이란 이 남자는 멀린을 스승이라 불러도 꽤 뻣뻣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적잖은 분노와 원망을 멀린에게 가지고 있었다.
‘물론, 전부 그런 건 아니지만.….’
혹시 케빈이 멀린보다 더 센 건가? 라고 생각도 해봤지만, 1초도 되지 않아 이를 부정했다.
케빈은 분명 강했지만, 멀린과 감히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이 둘과 모두 싸워본 올리버가 그 부분은 장담할 수 있었다.
혹시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는 걸까?
"그렇다 해도 케빈에게 고맙다는 인사는 해두게. 자네 덕분에 순조롭던 군 복무 커리어에 얼룩이 생겼으니.”
멀린이 이번에 올리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올리버는 거부하지 않았다.
"어떤 것 말씀입니까?”
"자네 임무. 켈 자유독립군의 지휘관 중 하나인, 윌레스를 빼돌렸던 거.”
"......."
"혹시 오해는 하지 말고. 일부러 알아본 건 아니니. 다만, 내겐 수많은 정보가 있고, 또 머리가 있어서 자연스럽게 추론되거든. 이 친구.…."
멀린이 케빈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다 말고 어색하게 내렸다.
“.…이 친구 이야기도 들었거든. 자네가 생각났지. 걱정하지 마. 고자질할 생각은 없으니. 아직은.”
"감사합니다.”
"감사는 이 친구에게. 앞서 말했다시피 새하얀 커리어에 얼룩이 생겼거든. 덕분에 화려하게 마탑으로 복귀할 계획이 전부 어그러졌지. 바로, 자네 때문에.”
멀린이 올리버를 양손으로 과장되게 가리켰다.
올리버는 이를 인정하며 케빈에게 정중히 고개 숙였다. 안 숙일 이유가 무엇있단 말인가?
멀린의 말대로라면 그는 이미 올리버를 봐준 셈이었다
실제로 여태까지 별일이 없는 게 그 증거였고, 무엇보다 그와 싸운 덕분에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었다.
감사한 이유는 그 정도로도 차고 넘쳤다.
"진심으로 감사하고, 폐 끼쳐 죄송합니다.”
케빈은 고개를 저었다.
"널 위한 게 아니니 감사는 넣어둬. 무엇보다 너 진심이라는 게 뭔지는 아나?”
“예?”
알 수 없는 질문에 올리버가 멍청하게 되물었다.
진심이 뭔지는 아냐니..…. 근데, 문득 궁금해졌다. 진심이란 무엇일까?
"자자, 재미없는 이야기는 이 늙은이 없을 때 하고, 바로 일 이야기부터 들어가지. 무릎이 슬슬 아파오거든.”
멀린이 올리버의 어깨를 두들기며, 케빈의 어깨 바로 위 허공을 두들기며 말했다.
"데이브. 정식으로 소개하지. 임시 사형(師兄)이자, 자넬 마탑으로 데려가 줄 택시인 케빈일세..…. 케빈. 자네가 데리고 가야 할 짐 덩어리지. 거절할 수 없는.”
서로에게 어떻게 설명했는지 알 수 있는 호칭.
그러나 올리버는 딱히 상관하지 않았다. 마탑에 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을 받는 것이었고, 동시에 자신의 존재 자체가 얼마나 리스크인지도 인지하고 있었기에.
올리버가 한가지 짚고 넘어갔다.
"혹시, 처음부터 어르신께서 계획하신 겁니까? 사형님과 제가 일하다 만나고, 여기서 다시 만나는?”
"바보 같은 소리. 우연이야. 조금 지독한 우연이긴 하지만.”
마력으로 감정을 둘러 멀린의 속마음을 읽을 수 없었다.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저기, 사형님?”
"사형이라고 부르지 말고, 교수님이라고 불러. 난 교수거든.”
"아, 교수님….. 절 정말 데려가셔도 괜찮으십니까? 흑마법사를 마탑에 데려가시는 건데요.”
"상관없어. 어차피 내가 마탑 교수라는 것부터가 신성모독이라고 하는 양반들이 널린 곳이라….. 너 하나 데려간다고 문제가 하나 더 늘어나는 것밖에 되지 않아.”
케빈의 감정에 묘한 독기가 깃들어 있었다. 다소 복잡하고, 오래 숙성된 감정. 하지만 그와 별개로 올리버를 아주 억지로 데려가는 건 아닌 듯했다.
"아하..…. 감사합니다.”
케빈은 올리버의 인사를 무시한 채 멀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스승을 대하는 것치곤 묘한 태도였다.
"데려가는 건 데려가겠지만, 서류 작업에 들어갈 위장 신분이 필요합니다. 신분증도 없는 녀석을 데려갈 수 없으니.”
"그건 내가 준비하지.”
"전 신분증이 있습니다.”
"해결사로 활동하는 신분증 말고 깨끗한 신분증.”
케빈이 딱 잘라 말했다.
확실히 해결사 때 사용하는 신분증을 마탑에서 같이 사용하기에는 위험하기 그지없었다. 올리버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무슨 역할로 데려가야 할지 정해야 합니다.”
"그냥 잡부로 데려가면 안 되나?”
"스승님께선 그렇게 해도 상관없지만 전 안 됩니다. 마탑에는 절 싫어하는 인간들이 널려 있으니까요.”
"하긴, 인종차별주의자, 우생학에 심취한 미치광이, 마법사 우월주의자들이 득실거리는 곳이니.”
"그러니까 특별한 이유도 없이 제가 데리고 가면 수상하게 보는 눈이 많을 겁니다. 전 평소에도 개인 직원을 고용하지 않고, 또 제게 로비하는 인간들도 없으니까요,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건지 궁금해하겠죠."
"흐음..…. 내가 넘겨줬다 해도, 그럴듯한 이유는 있어야겠군. 하긴, 그냥 잡부라고 하기에는 뭔가 미심쩍어.”
올리버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죄송하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여쭤볼 수 있을까요?”
“아….. 별거 아니야. 자넬 직원으로 데려가는데 무슨 이유로 데려갈지 이야기하는 거야. 다른 교수들은 로비하는 사람들이 많아 별다른 특기도 없는 직원들을 데리고 다녀도 그러려니 하지만, 케빈은..…. 아니거든.”
케빈의 마음속에서 작은 짜증과 분노가 일었다.
납득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화가 나는 듯.
"..…즉, 제가 잡무 외 구체적인 특기가 있어야 한다는 건가요?”
"그게 좋지. 로비할 놈이 없으면 케빈이 직접 고용해 데리고 다녀야 하는 건데, 앞서 말했다시피 이 친구는 그런 적이 없거든. 오랜만에 나타난 불청객이 안 하던 짓을 하며 나타나면 호기심을 끌게 되지.”
불청객이라….. 뭔가 뼈가 있는 말 같았다.
멀린과 케빈의 기묘한 관계. 마탑을 대하는 케빈의 묘한 감정 등. 여러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묻고 싶었지만, 섣불리 물을 수 있는 것은 또 아닌 것 같았다.
일단, 올리버는 지금 상황에 집중하기로 했다.
"혹시, 코드어를 읽을 수 있는 건 특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무슨 말이야, 코드어라니?”
의심하듯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묻는 케빈. 그런 케빈과 대비되게 멀린은 기억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맞다….. 그러고 보니 자네 코드어 공부를 했지? 세계수에 접속할 수 없으면 잘 배우려고 하지도 않으니까. 마탑 내에서도 코드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적은 편이고. 이걸로 데려가면 되겠네.”
멀린이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려 만족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내가 저번에 책 준 것 같은데, 어디까지 읽었나? <코드어 기초 학습 2단계 (상)> 까진 읽었나?”
올리버가 고개를 저었다.
"아..…. 하긴, 좀 어려우니-”
“-아뇨, 그 뜻이 아니라, <코드어 심화 학습 (상)(하)>까지 전부 다 읽었습니다. 저번에 어르신께서 제게 준 책 전부요. 그리고 다 이해한 것 같습니다.”
“..…진짜?”
어째 못 믿는 듯한 멀린의 반응. 올리버가 다시 말했다.
"예, 어르신께서 시간 좀 들이면 다 읽을 수 있을 거라고 하셨잖습니까? 그 말만 믿고 틈틈이 시간 날 때 읽었습니다."
"그거 거짓말인데? 안 팔리는 악성 재고 처리하려고.”
"예??”
***
올리버가 사기를 당했다는 약간의 헤프닝이 있었지만, 어찌어찌 넘어가 올리버는 코드어 테스트를 치렀다.
멀린과 케빈이 작성한 테스트로, 채점을 위해 올리버는 잠시 밖으로 나갔다.
"놀랍군. 이 정도면 바로 모이라이 학파에 들어가 일할 수 있는 수준이군.”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케빈 던바가 특유의 딱딱한 태도로 물었다.
멀린이 테스트 용지를 건네주자 그는 말없이 읽었다.
“..…이게 독학이라고요?”
"최소한 내가 알기론. 저 친구가 거짓말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 왠지 그 생각은 안 드는군.”
케빈은 올리버가 나갔던 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기묘한 분위기의 흑마법사는 쉬이 거짓말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자신이 떠보자마자 바로 인정한 게 그 증거라면 증거.
"그렇다 해도 이해가 안 되는군요. 코드어가 독학할 수 있다고 독학할 수가 있는 게 아닌데요.”
케빈의 말은 트집이 아닌 엄연한 사실이었다.
책에 모든 내용이 담겨 있다곤 하나, 코드어의 악랄함을 따라가긴 힘들었다.
모든 언어를 하나로 해석할 수 있는 코드어는 단어가 늘어날 때마다, 문장이 길어질 때마다 문자의 규칙과 배열, 심지어 단어의 해석 법조차 변경돼 그 수준이 높아질 때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난이도를 자랑했다.
마치, 세계수가 사람이 접근하는 것 원치 않는듯 말이다.
"나도 자네 말에 동감하네. 그래서 전문 교육을 받아야 코드어 구사가 가능하지. 그런데, 지금 독학으로 코드어를 익힌 사람이 있군. 저 정도면 완벽 바로 아래 등급 아닌가?”
케빈이 든 테스트 용지를 가리키는 멀린.
케빈은 다시 테스트 용지를 확인했다.
다시 봐도 틀린 부분은 없었다. 일부러 틀리라고 만든 함정 문제도 있는데.….
"저 녀석 정체가 뭐죠?”
"그걸 알아내려고 자네에게 맡기는 거야.”
"예?”
예상치 못한 질문에 케빈이 바보처럼 되물었다.
그의 스승 멀린은 최고의 마법사만이 승계받을 수 있는 아카이브의 현 주인.
수많은 대마법사의 지식과 경험, 연구물, 마법을 물려받은 존재였다.
그런 그가 대답 대신, 모른다는 걸 돌려 말한다…. 또 같잖은 말장난인가 싶었지만, 멀린의 태도는 사뭇 진지했다.
"처음에는 일대일로 가르치려고 했지만, 생각이 바뀌었어.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오히려 침식되는 법이거든. 그러니 제3자로 빠져 관찰하기로 했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잘은 이해가 안 될지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는 이해하지 않나? 애당초 자네 성격에 이런 제안을 수락한 게 그 증거지.”
"스승님 명이라 따른 것뿐입니다. 거절하면 제 마탑 출입을 막을 수도 있으니 말이죠.”
“허허.…. 젊은 친구가 무슨 말을.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무슨 힘이 있긴요. 묠니르, 아그니, 가이아 등등 원래 독립되어 있던 학파를 하나로 통일해 원소학파를 세웠으며, 표면상으로 은퇴했어도 실질적으로 그랜드 마스터로 군림 중이신 분 아닙니까? 죄송하지만, 지금 하시는 행위는 겸손이 아닌, 오만과 기만입니다.”
케빈의 가시 박힌 말에 능글맞은 멀린의 표정은 살짝 움찔했다.
손가락에 가시라도 박힌 듯.
"뼈가 아프군.”
케빈은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의도적으로 이야기 방향을 바꿨다.
“..…물론, 흥미가 없다는 거짓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보통 실력자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러니 말씀해 주십시오. 구체적으로 어느 부분 때문에 곁에 두고 관찰하려는 겁니까?”
케빈의 진지한 질문. 분위기상 그에 걸맞게 대답해야 마땅했지만, 멀린은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잘 모르겠네.”
“예?”
“아카이브인 나조차 잘 모르겠다고 했네. 정체가 뭔지 감도 오지 않고. 아니, 정정하지. 감은 오는데 믿기진 않아.…. 그래서 살펴보려는 거라네.”
멀린이 과거 데이브에게서 받은 감정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저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