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 소개 (1) >
도둑단에게 도둑맞은 비밀 장부 회수.
셈 강 하역장 탈환.
O구역을 점거한 비소속 갱단 퇴치.
탈옥수 추격.
란다 최외곽 밀주 공장 파괴.
그 외 기타 등등..….
지난 며칠 동안 올리버는 크라임 펌, 용병단, 사업가 등에게 여러 일을 수주받아 꽤 많은 일을 처리했다.
돈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아직까지는 여유로운 편이었다.
그럼에도 이리 일 한 것은 다름 아닌 여유시간을 얻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일을 한꺼번에 많이 해두면 휴식이란 명목으로 좀 쉴 수 있었기에 말이다.
아, 물론, 강요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을 배려해주는 포레스트에 대한 올리버 나름의 예의일 뿐이었다.
해결사가 이런 식으로 협조해줘야 고객과 해결사 사이에 낀 중개인도 일하기 수월하다고 코코나 아서, 알 등이 이야기해줬다.
실제로 포레스트도 올리버의 태도를 보고 이해했는지 올리버가 한 며칠 쉬겠다고 했을 때 이유도 묻지 않고 선뜻 고개를 끄덕여줬다.
‘자네가 이렇게 일했으니, 한동안 일을 안 받아도 불평하는 사람은 없겠지. 타이밍도 나쁘지 않고.…. 좋네, 쭉 쉬게.’
그렇게 얻은 휴식 기간 동안 올리버는 잠시 거처를 멀린의 대저택으로 옮겨 수업을 받았다.
수업이라고 뭐 아주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자기주도학습이라고, 멀린이 정해준 교재를 알아서 읽고,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만 질문하면 되었다.
글을 읽을 줄 알고, 배울 의지만 있다면 이쪽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끝까지 책을 다 읽은 후에는 마지막으로 학습한 내용을 멀린에게 강의하는 식으로 정말 제대로 이해한 건지 평가받으면 됐다.
보는 시야에 따라선 시대착오적이고, 꽤나 부담스러울 법한 교육법이었지만, 올리버는 꽤 만족하고 있었다.
책을 스스로 읽어 내용을 이해하는 것도 즐거웠고,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문답을 나누는 것도 즐거웠고,
남에게 지식을 전하는 것도 꽤 즐거운 작업이었기에.
하지만, 그중 가장 즐거운 것은 교육받는 학생의 자율권을 보장해준다는 거였다.
그래서 올리버는 틈틈이 저택 내 서재로와 다른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흠…. 역사도 재밌네.”
올리버가 마탑에 대한 역사책을 읽어보며 중얼거렸다.
란다와 그 역사를 같이한 마탑(魔塔)은 높은 위명을 자랑하는 동시에 신비주의를 품고 있어 책에도 그리 많은 정보가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올리버가 귀동냥으로 듣는 것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가령, 마탑의 본 뿌리는 여러 마법 학파의 일개 지부가 그 시작이라던가.
"마탑에 들어가기 전 미리 공부라도 해보려는 건가?”
어느새 뒤로 다가온 멀린이 책 내용을 살피며 물었다.
다가오는 걸 느끼지 못했다. 아무래도 마력을 강화해 감정을 더욱 철저히 숨긴 것 같았다.
간혹 희미하게 감정을 읽을 수 있었는데, 그는 이를 눈치채자마자 바로 대비했다.
조금 아쉬웠지만, 올리버는 내색하지 않고 차분히 대답했다.
"오셨습니까?”
"반응이 재미없구만.”
"아, 죄송합니다. 그럼 다시 할까요?”
"다시 하긴 뭘 다시 해. 그보다 그 책은 재밌나?”
올리버가 읽고 있던 책을 살피곤 대답했다.
"예, 나름 재밌습니다. 몰랐던 사실도 알게 됐고요.”
"마탑의 뿌리에 관한 거라던가?”
멀린이 올리버가 유심히 보던 부분을 똑같이 살피며 물었다.
"예. 전 마탑이 각 학파의 본산(本山)인 줄 알았거든요.”
올리버가 솔직히 말했다.
사실, 마법사 주류 사회에 속한 사람이라면 바보라고 놀렸을 법한 수준의 발언이었지만, 놀랍게도 일반인들은 대부분 이렇게 인식하고 있었다.
현재, 셀랜드.… 아니, 선택받은 국가권에서 가장 큰 마법조직이 란다의 마탑(魔塔)이었으니.
일종의 정보격차와 마법 사회의 폐쇄성으로 생긴 오해.
이를 알고 있던 멀린은 혀를 차는 대신 친절히 설명해줬다.
"뭐, 오해할만하지. 자잘한 거 빼고, 규모와 자본 면에서는 마탑이 가장 번영하고 있으니.”
"어떻게 이렇게 된 거죠?”
"사실 자연스러운 거야.”
"예?”
"란다는 탄생부터 마법사와 깊게 연관되어 있어, 그렇기에 마법사에 대한 규제가 다른 곳에 비교하면 거의 없다시피 하지.”
올리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재앙(大災缺)의 여파를 수습하는데, 마법사들이 힘을 썼으니. 란다의 탄생은 마법사와 땔 수 없었다.
"제한이 없고, 견제도 없는 도시라. 호기심이 충분히 일지. 그래서 이 나라뿐 아니라, 해외에 본산을 둔 학파에서도 이쪽에 지부를 냈네. 자기들이 하기 꺼려지는 연구를 하청시킬 목적으로.”
멀린은 그 말과 함께 책상 위에 마력으로 그림을 그렸다.
"책상 더럽혀지는데요?”
"알게 뭔가. 내 돈 주고 내가 산 건데.”
"아..…."
탁자 위에 작은 동그라미와 그곳으로 몰려드는 화살표가 그려졌다.
"분명, 시작은 그게 맞았어. 각 학파의 란다-지부는 학파 본산의 연구하청에 불과했지.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 철수하면 되는. 하지만 없다시피 한 규제 덕분에 연구속도와 결과는 우상향을 그리고, 이후 더 많은 연구를 받게 되지. 자율권과 지원금도 당연히 상승하고.”
화살표가 더 많아지며, 동그라미도 점점 커졌다.
"나중에는 그 자율권을 바탕으로 자체적인 사업을 벌이지. 기업이 의뢰한 기술 개발 제휴나, 생산 협업 같은. 그러니까 돈이 몰리며 또 규모가 커지지.”
동그라미가 다시 한번 커졌다.
"이로 인해 학파들에서 란다 지부의 중요성이 점차 커지며, 어느 순간부터 각 학파의 대리 경쟁의 장이 되었어. 하지만, 이때 또 변수가 생기지.”
"무엇이죠?"
"란다 지부에서 근무하던 마법사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학파가 아닌 란다에 좀 더 두기 시작한 거야.”
"자네 표정을 보니 이해하지 못한 것 같군. 이해하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엄청난 일이야. 보통 마법사들은 자신이 소속된 학파에 정체성을 두고 있거든. 마법사 사회의 주류가 되기 위해서는 학파가 필수적이었으니까."
“..…아, 근데, 란다는 스스로 자립했군요.”
"맞아. 학파도 이 사실을 깨달았지만, 때는 너무 늦었지. 마탑 지부가 학파의 본산과 그 규모가 엇비슷해졌으니.”
팔랑.
멀린이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란다에 있는 각 학파의 지부는 비밀스럽게 만나 협정을 맺었어. 굳이 먹을 게 많은 이 동네에서 구태여 우리끼리 싸울 필요가 무엇 있겠느냐고. 사실, 틀린 말이 아니야. 밥그릇이 겹치는 구석이 있지만, 대화로 해결할 만큼 먹을 게 넘치니. 그래서 작당하고 그냥 자기 들끼리 합쳐버렸어. 그리고 그게 지금의 마탑(魔塔)이지.”
"각 학파에서는 이를 수락했습니까?”
"안 하면 자기들이 뭘 어쩌겠나? 이미 상황이 바뀌었는데, 학파에서 자체적인 교육기관을 설립해도 반대하지 못하고 오히려 승인해줬지. 현재 대부분 학파는 학파 본산과 마탑 지부가 동등, 혹은 역(逆) 종속된 기형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
올리버는 멀린이 펼친 페이지를 읽었다.
멀린의 말처럼 직접적이진 않지만, 에둘러 해당 정보를 알려주고 있었다.
올리버가 자기 심정을 이야기했다.
“..…재밌네요.”
"역사는 재밌는 법이지. 어떤 이야기보다도 흥미롭고….. 개연성, 드라마. 뭐 하나 빠지지 않으니.”
멀린의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닌 어떠한 뼈가 느껴졌다.
이에 관해 물어보려는 찰나 멀린이 먼저 질문했다.
"그래서 자네가 마탑 역사책을 읽고 있어 좀 기특하기도 했네. 대답해봐. 미리 마탑 공부라도 해보려는 건가?”
처음 멀린이 했던 질문. 올리버가 고개를 저었다.
"비슷하긴 한데, 조금 다릅니다.”
"호..…. 어떤 식으로 다른가?”
올리버는 옆에 쌓아둔 책을 바라봤다.
마탑과 각 학파에 관한 역사책뿐 아니라, [종교와 믿음의 역사]라는 책도 있었다.
"이것에 관해 알아보려고 했습니다.”
올리버가 꺼낸 책은 다름 아닌 손으로 직접 쓴 마법 연구 일지였다.
사실 말이 마법 연구 일지였지, 전격 마법사의 일기처럼 작성자의 개인 사정도 적잖게 담겨 있었다.
“마탑 학생의 연구 일지군. 어디서 났나?”
"일하는 도중에 얻었습니다.”
"일이라면 해결사 일?”
"예.”
멀린은 대충 무슨 일인지 파악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의 벽으로 심계(心界)를 가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순 없었지만, 특별한 감정은 없는 듯했다.
“..…마탑 경쟁에서 탈락한 젊은이군."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마법일지의 주인은 에이드리로, 순수 마력 학파의 전(前) 학생이자, 머피의 경쟁업체였던 개발금지 구역 내 밀주 공장 주인이었다.
일지의 초반부에는 충실히 마법에 관한 연구나, 수련에 대해만 서술했지만, 중반부쯤 가자 갑자기 개인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썩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전형적인 이야기군. 우연찮게 마법 재능이 발현돼 마법사 가문에 팔리듯 입양되나, 이윽고, 재능의 한계와 함께 팽 당하는.”
"그런 경우가 많은 편인가요?”
올리버가 확인차 물었다. 일지 내용을 봤을 때 의외로 그런 경우가 많은 것 같았다.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군.”
"음..…. 그럼, 마탑에서 뒷거래가 많이 일어나나요? 사실 그거에 대해 알아보려고 마탑 관련 책을 찾아본 겁니다.”
그랬다.
일지의 주인 에이드리는 재능의 한계 발현과 그로 인한 가문의 파양, 학비, 생활비의 지원 중단을 두려워했다.
겉으로는 아닌 척했지만, 글씨체와 미묘한 어감에서 두려움이 새어 나왔다.
다만, 그를 칭찬할 점은 그는 최대한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며, 동시에 계획을 세웠다는 거였다.
그는 마탑 곳곳에서 횡횡하는 ‘뒷거래’란 것을 언급하며, 그곳에서 자신을 운명을 개척하겠다고 했다.
마탑 출신 마법사라면 어디든 필요할 때가 있을 거라며 말이다.
실제로 실력이 좋았는지, 그는 그쪽과 관련이 되어 있다는 학생과 접촉해 어찌어찌 손을 담그고, 그곳의 생리에 대해 배워갔다고 했다.
참고로 마탑의 뒷거래는 생각보다 많은 종류가 있었다.
쓰이지 않는 실험도구나, 실패한 저품질 스크롤, 학생들이 만든 조잡한 포션을 뒤로 빼돌려 파는 ‘빼돌리기’.
해결사처럼 마법이 필요한 일을 받아 마법을 사용해주는 ‘알바’.
혹은, 마탑의 정보나, 마탑에서 취급하는 물건의 이동 루트를 넘기는 ‘귓속말’.
하지만 그중 가장 규모가 큰 건 교수까지 끼고 조직적으로 불법 포션이나, 스크롤 더 나아가 약, 마법주를 파는 ‘뒷공정’이었다.
에이드리의 일지 내용에 따르면 그 규모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고 했다. 란다 음지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할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에이드리가 마법주 생산 레시피를 훔치고, 마탑을 나오자마자 밀주 공장을 세운 거였다.
참고로 뒷거래의 규모도 규모였지만, 참가 인원도 다양했다.
에이드리 같은 먹고살기 위한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스릴을 즐기는 명문가 학생도 있었고, 조교와 직원 심지어 교수들도 있었다.
멀린은 올리버가 읽었던 부분을 읽었지만, 동요가 없었다.
마치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올리버가 이 사실을 말했다.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놀랄 게 무엇 있겠나? 세상의 모든 건 유통기한이 있는데.”
"유통기한요?”
"세상 모든 것은 뒤틀리고, 부패한다는 뜻이네."
멀린이 그 말과 함께 손에 마력을 끌어올려 일지에 마력을 쏟아부었다.
촤르륵. 촤르륵. 마력이 기계와 같은 소리를 냈고, 잠시 후 일지에 숨겨져 있던 마력이 반응하면, 허공으로 떠올랐다.
휙一!
멀린이 손으로 낚아채듯 일지에 적혀있던 마력 정보를 한 손에 낚아챘다.
"그건 뭡니까?”
"평범한 보안 마법이지. 중요한 정보를 마력에 적용해 숨기는. 들키지 않게 보안까지 신경 쓴 걸 보면 제대로 배운 친구군."
"무슨 내용이 있었는지 여쭤봐도 됩니까?”
"아니, 안 되네.”
“예?”
예상치 못한 대답에 올리버가 되물었다. 멀린의 대답은 단호했다.
"비용이라고 생각하게. 내가 이런 보안 마법도 있다는 걸 가르쳐줬잖나?”
아..…. 그렇게 말하니 또 할 말이 없었다.
멀린의 말마따나 그가 보여주기 전까지 이런 게 있는 줄도 몰랐으니.
올리버는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옳으신 말씀이군요.”
"인정할 줄 알다니 좋은 태도야. 상을 주도록 하지.”
"상이요?”
"그래, 자넬 마탑으로 데려갈 사람이자, 자네 임시 사형(師兄)을 소개해주지. 들어오게."
그 말과 함께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무슨 장치를 한 것인지 올리버는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남자의 얼굴을 보자 그건 더 이상 중요한 게 아니었다.
"만나서 반갑군.”
검은 장발에 붉은 피부를 가진 마법사. 케빈 던바가 말했다.
"아니면 오랜만이라 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