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 신자 (1) >
수부렙토르 대형 박물관 관장실.
그곳에 몇몇 남성들이 모여있었다.
사내들은 대부분 중년에서 노년 사이였으며, 공식적으로는 박물관과 연관이 없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제법 깊이 얽혀 있었다.
관장실을 제 안방처럼 쓸 만큼 말이다.
"후……. 피곤하군.”
누군가 입을 열었다.
특별한 메시지가 있는 발언은 아니었다.
1년에 한 번씩 있는 중요 행사 첫날부터 난리가 나 무산됐으니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다들 겉으로는 태연자약했으나, 뒷골목에서 구를 대로 구른 인간들.
모두 말없이 자신의 피해를 계산하고 있었다.
"음..…. 피해가 크구만.”
또 한 남자가 말했다. 대머리에 한쪽 눈이 없는 노인이었다.
동의하는 침묵이 대답으로 돌아왔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습격 건으로 크라임 펌의 이름에 먹칠을 한 것은 물론. 소문이 퍼지지 않게 입단속하고, 피해를 입은 VIP고객들에게 보상하는 등 적잖은 비용과 노력, 심력(心刀)이 소모될 것이 자명했다.
속이 쓰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마법사와 시(市)가 힘을 키우고 있는 지금에서는 특히 더 말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 있었다.
셀랜드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대 범죄 연합 조직 크라임 펌, 그 안에서 가장 위세가 높은 건 이곳 란다 지부였건만, 그 명성에 비해 란다 내에서 크라임 펌의 위치는 상대적으로 약자에 속했다.
하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크라임 펌 보다 더 깡패 같은 마탑과 시(市)가 존재했으니,
그것도 모자라 X,Y, Z구역과 같은 도저히 손댈 수 없을 정도로 거친 구역도 존재했다.
크라임 펌 특유의 조직력과 자본력, 음지 양지를 가리지 않은 거대 네트워크로 이 사실을 잘 숨겨왔으나, 슬슬 크라임 펌도 그 밑천이 보이고 있었다.
이 경매장 습격은 그 전조에 불과했다.
".…다들 긍정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우울하기 그지없는 와중 누군가 대뜸 입을 열었다.
그는 다름 아닌 란다 지부 R구역의 전(前) 이사 고든 굿하트였다.
"긍정적으로 보라니?”
"말 그대로입니다. 피해가 크다지만, 사실 이보다 훨씬 더 클 수 있었습니다. 그나마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된 거지요."
개소리하지 말라고 면박을 줬을 법한 말이지만, 사실 썩 틀린 말도 아니었다.
경매 첫날이라, 상대적으로 사람들이 적었고, 습격당해 경매장의 명성에 먹칠했지만, 큰 피해는 없어 그나마 체면은 지킬 수 있었다.
뭣보다 가장 중요한 경매품을 빼앗기지 않았다.
"그럼, 어떡하지?”
"이익을 약간 포기하도록 합시다. 우선, 경매부터 멈춥시다.”
"고작 식칼 든 깡패가 두려워 물러서자고?”
"식칼을 든 그 깡패가 검은손 조직원이란 이야기가 있잖습니까?"
꾸욱……. 모두 입을 다물었다.
"다소 자존심이 상하나, 그들과의 갈등은 최대야 피해야 합니다. 규모라면 우리 역시 뒤지지 않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그들과 우리는 근본이 다르지요. 더 위험합니다.”
감히 부정하는 자는 없었다.
크라임 펌과 검은손. 둘 다 거대 범죄조직이었으나, 그 근본은 전혀 달랐다.
크라임 펌은 뭐가 됐건 이익을 얻기 위한 기업체였다. 폭력은 수단의 일환일 뿐이었으나, 검은손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있어 폭력은 일상이었고, 때때로 목적일 때도 있었다.
제대로 아는 정보는 적었으나, 그들은 필요하다면 자기 파괴적인 미친 짓도 벌였다.
그런 쪽 인간들과 다투는 것은 이기든 지든 크나큰 피해를 각오해야 했다.
"이번 습격한 자는 셰이머스가 말하길 ‘인육 요리사’ 쪽일 가능성이 크다 했습니다.”
"사람 고기 먹는 놈들?”
"질병계열 흑마법, 식칼, 즉흥적, 탐욕적, 잔혹한 성품을 봤을 때 말입니다. 아실 분들은 아시겠지만, 인육 요리사의 주 활동지는 갈로스. 우리가 마음먹고 싸우려고 해도 바다 건너 있어 제대로 싸울 수가 없습니다.”
“그럼?”
"다른 손가락을 통해 중재를 요청해보도록 하지요. 정신이 반쯤 나간 이들이지만, 말이 통하는 자들도 존재하니까요.”
모두 그 의견을 의심하지 않았다. 소문에 따르면 시체 장사를 하는 고든은 퍼펫 계파와 거래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니.
화해할 거면 고든이 맡는 게 나았다.
"흑마법사 나부랭이들에게 머릴 숙여야 하는 게 실로 엿 같군.”
대머리 애꾸 사내가 호전적이게 중얼거렸다. 그 역시 현실을 인정할 줄 아는 현명한 자였으나, 그와 별개로 화가 나는 것은 화가 나는 것이었다.
"저도 같은 생각이나, 이게 최선입니다. 검은손과 달리 우리 크라임 펌은 돈에서 힘을 얻지요. 만약, 우리가 자존심을 세워 그들과 싸우려고 한다면 이기든 지든 크나큰 피해를 볼 겁니다. 최소한 패밀리의 지금 위치를 유지하긴 힘들겠지요.”
차분하지만 논리정연한 설명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이들 모두 란다 내의 숨은 거물들이었으나, 그와 동시에 그 자리를 노리는 자들도 안팎으로 많았다.
마음에 안 들면 총부터 갈기고 본다는 기존의 이미지와 달리 크라임 펌에서의 주 무기는 바로 인내심과 교활함이었다.
지금은 참아야 할 때였다.
"그럼, 물건은?”
"현재 공간학파 마법사 알바들을 통해 비밀창고에 분산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러면 습격자들이 와도 빼앗아 갈 수 없겠죠. 경매는 잠시 뒤로 미루고, 일단, 값비싼 물건부터 처리하도록 하지요. 어차피 그런 물건은 살 사람이 한정되어 있으니. 잘만하면 제값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었으나, 다들 동의했다.
자존심은 분명 중요한 문제였으나, 크라임 펌에는 그 못지않게 사업도 중요했다.
꺾인 자존심은 나중에 되찾을 수 있으나, 사업이 흔들려 서열경쟁에서 밀리면 그때는 끝이었다.
허나, 그렇다 해도 굴욕은 굴욕. 한 중년 사내가 중얼거렸다.
"역시, 우리도 뭔가 대비를 해야 되겠는데.”
그 대비란 다름 아닌 무력.
슬픈 말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이 도시에서 살기 위해서는 돈 이상의 것이 필요했다.
유치하지만, 동시에 치명적인 폭력이 말이다.
"어쩌다 한두 놈 스카우트하는 게 아닌, 제대로 운용할 수 있는 대규모 인력을 모아야 해. 제대로 된 전사로.”
"해결사나 비소속 갱 중에 힘 좀 쓰는 놈을 영입하는 게 어떨까?”
"무턱대고 영입하는 건 반대야. 셰이머스 같은 놈이 또 나오는 건 원치 않아. 그 미친놈은 같은 크라임 펌 소속을 상대로도 돈을 뜯는다고. 존중과 규칙을 모르지.”
"그렇지만, 그럼 어떻게 구해?”
"마탑에서 밀려난 떨거지들은 어때? 애송이들 공부만 할 줄 알지 길바닥 생활은 잘 모르는데?”
"안돼. 자존심 강하고, 고집도 세서 말을 잘 안 들을 거야. 우리 꼭대기 앉으려 할걸?”
"애당초 그런 놈들 중에서 말 잘 듣는 놈들이 있을까?”
"최소한 말은 통해야지. 아! 고든, 그 친구는 어때? 오늘 우릴 도와준? 데이브라고 했던가? 스카우트할 수 있겠어?”
"음..…. 일단 지켜보도록 하지요.”
“뭐?”
"단순한 해결사 같아 보이지 않거든요. 일단, 지켜봅시다.”
필거렛 브로커와 만난 데이브를 떠올리며 고든이 대답했다.
***
푸른 달이 뜬 어두운 밤하늘.
수많은 빌딩이 우뚝 선 J구역 한가운데.
한 명의 남성과 두 명의 여성이 차 앞에 서 있었다.
"그럼, 의뢰는 이걸로 끝인가요?”
"예, 경매가 사실상 끝났으니까요. 당연한 거지만, 보수는 약속대로 지급할 거예요.”
"알겠습니다. 저로서는 짧은 시간 안에 돈을 벌어 이득이지만, 아가씨는 손해겠군요."
"아뇨, 어차피 제 주머니 사정으로 살 수 있는 건 빤하니, 큰 문제는 없어요. 자산 대부분이 부동산이라 현금이 부족하거든요. 오히려 전 만족이에요. 거기다, 고든 님께서 보답으로 괜찮은 물건을 한두 개 넘겨주겠다 했고요.”
그랬다. 제인은 한 것이 없긴 했지만, 올리버 덕분에 최악은 면했다며 고든은 올리버를 데려온 제인에게도 호의를 베풀기로 했다.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 물건이라면 미란다와 연줄을 만들 가능성이 높았다.
“많이 힘드시겠군요.”
"사는 게 다 그렇죠.”
"잘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올리버의 말에 제인은 그를 빤히 바라봤다.
"괜찮으시다면 같이 식사라도 하실래요? 별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죄송합니다. 일이 생겨서요.”
말도 안 되는 뻔한 핑계. 하지만, 제인은 그 말을 믿기로 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중요한 일인가요?”
"음..…. 예, 아마도요.”
"그럼, 어쩔 수 없죠..…. 일이 잘 풀리면 알려주도록 할게요.”
"예,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제인과 올리버의 대화가 마무리되자, 코코가 끼어 들였다.
"책은 무사히 구입했어요. 곧 받을 수 있는데, 받은 책은 포레스트 님을 통해 드리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도 이번 건에 관해서 감사드려요. 기대하고 있었지만, 데이브 씨는 늘 그 기대 이상을 해주네요.…. 혹시, 정보가 필요할 때면 절 찾아오세요. 합리적인 가격으로 모실 테니까요.”
오, 꽤 놀라운 말이었다. 시스터후드는 쉽사리 거래를 트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거참 감사합니다.”
"후웃….. 화장도 마저 가르쳐드릴 테니 찾아오세요. 애들도 좋아할 거예요.”
“넵.”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제인과 코코는 차를 타고 떠났다.
올리버는 아무 생각 없이 떠나는 차량을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난 후 입을 열었다.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주인님.”
시커먼 어둠에서 필거렛 브로커..…. 아니, 마리가 나와 머리를 허리까지 숙여 대답했다.
"......."
올리버는 그런 마리를 말없이 바라봤다.
주인님이라..….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떠난 지가 1년 하고도 6개월 약간 안 되게 지났을 텐데 아직도 주인님이라니. 잠시 생각하고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다면 이야기 장소 좀 옮길 수 있을까요?”
***
깊은 밤. 개발 제한에 걸린 란다 최외곽으로 차 두 대가 달리고 있었다.
차량은 비교적 흔한 F-시리즈. 그렇다 해도 꽤 돈이 있어야 살 수 있는 차량이었다.
즉 눈에 띄지 않고도, 적당히 체면은 차릴 수 있는 차량이란 거였다.
잠시 후, 차는 외곽도로 갓길로 빠져 인적이 없는 숲속으로 들어가 멈췄다.
철컥-
F-시리즈 특유의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사람이 내렸다.
올리버와 마리. 그리고 마리의 부하로 보이는 흑마법사 다수였다.
여성 남성 골고루 섞여 있었으며 꽤 훈련받은 것 같았다.
‘그리고 날 좋아하지 않는군.’
올리버가 뒷차에서 내린 마리의 부하들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주인님.....”
차에서 내린 마리는 어느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냥 조아린 것도 아니라 땅에 이마가 닿을 정도로 깊숙이 조아렸다.
"아……"
올리버는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그 이유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뭐랄까..…. 그냥 좀 그랬다.
"마리......"
"예, 주인님.”
"일어나 주실 수 있나요?”
"제가 어찌 감히……."
왜 이러는지 올리버로서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올리버는 일단 마리부터 일으켜 세우는 데 초점을 맞췄다.
누군가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거북하기 그지없었다.
“부탁드려요. 일어나 주세요.”
부탁. 그 단어가 나오고 나서야 마리는 마침내 일어났다.
올리버는 마력이 담긴 시험관을 꺼내 추출한 후 불을 만들어 주변을 밝게 비췄다.
몇몇 이들이 놀랐지만, 마리는 차분히 올리버를 바라볼 뿐이었다.
올리버라면 능히 그럴 수 있다는 듯이.
올리버 역시 말없이 가면을 벗은 마리를 빤히 바라봤다.
기억하는 것보다 뭐랄까..…. 좀 변한 것 같았다.
머리카락은 풍성하게 길렀으며, 피부는 창백했으나 이전보다 훨씬 깨끗했으며, 윤기가 돌았다.
몸에는 향수를 발랐는지 향기가 나는 등 천사들의 집이나, 경매장에 참가한 여인들처럼 이래저래 많이 꾸민 티가 났다.
꽤 많이 변해 뭐라 말해야 할지 감이 안 왔는데, 그러던 중 코코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예뻐지셨네요.”
그 한마디에 마리는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감사하기 그지없는 말씀입니다. 주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