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 란다의 여성들 (2) >
제인 일행을 태운 차량은 란다 문하.유흥의 중심지인 J구역으로 향했다.
외곽에 엷게 퍼져있는 싸구려 카지노와 불법 하우스, 카바레, 주점 등을 지나 중심지로 들어서자 높은 빌딩과 푸르른 네온사인, 노란 빛 가로등, 마력광 따위가 반겨주었다.
J구역을 방문한 것은 이번으로 두 번째.
역시나 낮보다 밤에 더 활력이 넘치는 동네였다.
특히, 목적지인 수부렙토르 대형 박물관에 도착하자 그 정도가 절정에 달했다.
거리를 가득 채운 고급차량과 잘 차려입은 신사 숙녀들.
참으로 감탄이 나오는 규모.
그러나 감탄하는 건 올리버만이 아니었다.
“엄청나네…..”
이번 일의 당사자인 제인이 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당연하지. 원래부터 제법 규모가 있는 행사인데, 란다의 큰손과 크라임 펌까지 합세해 그 규모가 몇 배로 커졌으니.”
미리 설명을 들은 올리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포레스트가 말하길 아직까지 이 행사는 예술품 경매, 예술가 후원이라는 행색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 이면은 크게 변했다고 하였다.
코코의 말대로 란다의 큰손, 크라임 펌뿐 아니라 자체적인 어둠의 유통업자, 트레저 헌터(Tmasure Hunter)까지 합세해, 경매의 주력인 예술품은 이미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한 지 오래였으며,
해외에서 불법으로 약탈해온 유물이나, 예술품, 진귀한 마법 아이템, 고급 약품, 희귀서적 등 다양한 물건이 거래된다고 했다.
덕분에 고객층도 예술품 수집가에서 시의원, 자본가, 거물 해결사, 불법 콜렉터, 뒷골목 거물 등으로 넓어졌고,
그런 그들과 친분을 맺기 위한 야심가들이 합세해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는 행사로 변했다고 했다.
‘경매 이전에 란다 권력 사교의 장 역할도 하게 됐지. 경매 주최 측도 이게 수익이 짭짤하니 싫지 않은 눈치고.’
참가인원이 워낙 굵직하고, 미리미리 주최 측에서 약도 친지라 이맘때에는 경찰도 이곳에 다가오지 못한다 하였다.
란다는 참으로 재밌는 동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저기, 말씀드리기 죄송하지만, 차가 한두 시간 막힐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여기서부터는 내리셔서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운전석에 앉은 페니가 죄송스럽다는 듯 말했다.
제인은 시원하게 받아들였다.
털털한 그녀의 태도에 코코와 올리버도 따라 차에서 내렸다.
철컥하고 열린 문을 통해 내린 후 제인을 필두로 도보 위를 걷기 시작했다.
어시스턴트 역할의 코코는 제인 옆에 섰으며, 경호원 역인 올리버는 등 뒤를 따라붙었다.
올리버는 코코에게 교육받은 대로 과하지 않게 경계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차 안에서 봤던 거처럼 수많은 사람이 있었고, 대부분 경호원을 두고 있었다.
코코의 말대로 경호원이 강한 자일수록 어째 더 의기양양한 분위기를 풍겼다.
"아, 도착했다.”
작게 속삭이듯 말하는 코코.
앞을 보자 거대한 건축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J구역의 건축물 모두 그 크기가 큰 편임에도 불구하고, 수부렙토르 대형 박물관의 크기는 이를 압도했다.
건물의 높이는 빌딩에 비해 낮았지만 충분히 높았으며, 넓은 부지와 고대 제국풍의 웅장한 외관은 화려한 불빛을 내뿜는 최신식 빌딩 조차 조명 수준으로 전락시킬 정도로 화려했다.
"후우….. 가지.”
제인은 마치 싸우러 가는 사람처럼 두려움을 잠재우고, 긴장감을 죽이며 앞으로 걸어갔다.
'응?’
올리버가 이질감을 느끼며 눈을 굴렸다.
직원으로 보이는 건장한 사내들이 잘 보이지 않게 서 있는 채, 고객들을 살펴봤다.
그들은 그냥 훑어보는 것이 아니라 마력을 내뿜어 무엇인가를 확인했는데, 올리버의 느낌상 그 대상은 고객들 품 안에 있는 티켓인 것 같았다.
실제로 제인의 가슴 사이에 있는 티켓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시선을 돌렸으며, 반대로 티켓이 있는 척 몰래 들어오려던 사람에겐 사람을 보내 정중히 어딘가로 끌고 갔다.
"자, 잠깐만요.”
"소란 피우시지 마시고, 조용히 따라와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티켓이 마력을 뿜는 이유를 알 수 없었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사람 수십 명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통로를 지나자 입구보다 훨씬 거대한 홀이 눈에 들어왔다.
한 번에 수백 명도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은 홀에는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모여있었지만,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대리석 벽면에 박힌 부조상.
역사에 대해 알지 못하는 올리버조차 매우 오래된 이국의 물건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었다.
좌우에 배치된 거대한 비석과 유리관 안에 터키석으로 가공된 해골 등 박물관에는 예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올리버조차 가치를 짐작할만한 보물이 가득했다.
코코가 말하길 이 모두 연합 왕국이 세상에 문명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얻게 된 것이라 하였다.
“언제 봐도 대단하다니까. 온 세상의 역사가 바로 여기 있어. 연합 왕국 것만 빼고.”
몇 번 방문한 듯 코코가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제인에게 물었다.
"이제 어디 갈까?”
제인은 전투에 돌입하는 해결사나 갱처럼 각오를 다졌다.
"바로 볼일부터 봐야겠지. 일단, 그림부터 보러 갈까?”
***
박물관 안쪽에 들어가자 새로운 공간이 일행을 반겼다.
그곳은 또 다른 거대한 홀.
그 홀에는 마치 시(市) 방위군처럼 수백 점이 넘는 그림이 가지런하게 정렬되어 있었다.
눈이 휘둥그레질 지경.
코코가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일명 후원장이야. 수부렙토르 대형 박물관의 초창기의 경매 문화로, 잠재력 있는 무명 화가들의 물건을 입찰하는 방식이지.
제인은 사실상 알고 있을 테니, 아마, 올리버 들으라고 하는 말 같았다.
고용주 입장이긴 해도 그녀들은 호기심 많은 올리버를 잘 배려해주었다.
올리버도 이에 보답하고자, 경호에 열중하면서도 코코의 설명을 빼놓지 않고 자세히 들었다.
"경매방식은 소소해. 이렇게 그림 아래에 붙어있는 종이에 우리 티켓 번호와 입찰가를 적으면 돼.”
코코가 그림 아래의 종이를 가리켰다.
이미, 사람이 갔다 온 건지, 깔끔한 글씨체와 지저분한 글씨체가 차례대로 쓰여 있었다.
[£3,000,000]
[£3,600,000]
[£4,400,000]
"입찰 방식은 당연히 더 높은 쪽이 가져가는 건데, 보통 1.2배를 써. 하지만, 탐이 나는 물건이면 1.5에서 2배 혹은 3배를 써서 경쟁 자체를 물리칠 수 있지.”
마치 박물관 직원과 같은 친절하고 깔끔한 설명.
이곳 박물관에 익숙한 것으로 보아, 코코가 가진 경험이나 학식이 뛰어난 것 같았다.
"그림 양식이 다양하네.”
제인이 그림을 훑어보며 말했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과 고심하는 감정 상태로 봤을 때, 그냥 하는 말 같지가 않았다.
곧 코코가 이를 증명했다.
"정확해. 박물관과 거래하는 딜러들이 전 세계를 돌면서 찾아온 물건들이거든. 나라마다 선호하는 그림과 유행이 다르다 보니 스타일도 다를 수밖에 없어….. 참가한 화가들은 대부분 무명 화가야. 당장 물감값도 아쉬운.”
코코가 한 박자 쉬고 다시 말했다.
"하지만 이 중 두, 세 명은 재능을 인정받거나, 유행의 흐름을 타 어떤 식으로든 이름을 떨치게 되지. 그럼 여기서 산 그림은 수십 배 혹은 수백 배 가격으로 되팔려. 꽤 괜찮은 투자인 셈이지.”
호오..…. 올리버는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했다. 비슷한 수준의 그림인데도, 화가에 따라 다른 값어치를 받다니.
이에 관해 질문하고 싶긴 했지만, 경호를 위해 참기로 했다.
‘응?’
그러던 차 눈에 뭔가 들어왔다.
코코와 함께 제각기 의견을 주고받으며 그림을 살지 말지, 사야 한다면 얼마에 살지 의견을 주고받던 제인이 올리버의 이상을 눈치채며 말을 걸었다.
"데이브?”
"아.… 죄송합니다. 잠시 한눈을 팔았습니다.”
제인은 정신을 판 올리버의 행동에 불쾌해하는 대신 궁금증을 내보였다.
“….뭘 보고 있었죠?”
"말씀드려도 되나요?”
"물론이죠.”
"저 그림을 보고 있었습니다.”
올리버가 앞쪽에 있는 그림 하나를 가리켰다.
한 여성의 뒷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제인은 올리버의 말에 관심을 가지며 그쪽으로 또각또각 걸어갔다.
올리버와 코코는 그 뒤를 따랐고.
제인이 그림 앞에 멈춰 서며 자세히 살펴봤다.
여기 있는 수많은 그림과 마찬가지로 꽤 괜찮은 그림이었다.
그림을 빤히 바라보던 제인이 질문했다.
"이 그림에 시선을 빼앗긴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다른 작품에 비해 감정이 담겨 있거든요.”
“감정요?”
올리버의 대답에 제인이 흥미를 보였다.
"예, 다른 작품들도 감정이 어느 정도 묻어 있지만, 이 그림은 좀 더 깊게 담겨 있거든요. 홀에서 본 예술품이나, 조각상처럼요.”
"....?"
그 말에 제인과 코코가 제각기 놀란 반응을 보였다.
"홀에서 본 예술품이라면….?”
"비석이랑, 부조상 같은 거요. 비석에는 신중함, 책임감이, 부조상에는 자긍심이 묻어있었는데, 이 그림에는 슬픔과 그리움이 짙게 묻어있네요."
제인은 그 말에 코코와 몇 마디 상의하더니 종이표에 낙찰가액을 적었다. 원래 적혀 있던 것에 1.8배를 올려 적었다.
그리곤 말했다.
"혹시 더 말해줄 수 있나요?”
"경호원은 침묵해야 하지 않나요?”
"이제부터 아닌 거로 하죠.”
***
박물관에 들어온 지 1시간도 않아 어느새 올리버는 경호원 신분에서 벗어나 고용주인 제인을 위해 그림을 고르고 있었다.
물론 그게 싫은 건 아니었다.
여러 감정이 묻어난 예술품을 훑어보는 것은 올리버에게도 충분히 즐거운 일이었으니.
올리버는 경호원처럼 걷다가 눈에 띄는 그림이 있으면 멈춰서 조용히 귓속말했다.
"저것도 괜찮네요. 해변의 가족들.”
올리버가 한 가족이 해변을 거닐고 있는 그림을 가리켰다.
"무슨 감정이 깃들어 있죠?”
"기쁨, 부러움, 동경 그리고 강렬한 목표요.”
제인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코코 양과 그림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대화가 끝나자 제인은 앞의 일곱 점의 그림처럼 확신을 가지고 높은 액수를 적었다.
"이제 한 바퀴 돈 것 같네.”
"그러게.”
수백 점의 그림을 살피고, 관찰하며 걸은 제인과 코코는 지친 듯 말했다. 그렇다고 피곤한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올리버가 약간 걱정하며 되물었다.
"전 그저 감정이 배어난 것만 볼 줄 알지 진짜 가치 있는 작품이 뭔지는 구분하진 못합니다.”
"괜찮아요. 저도 그림 공부라면 그리 많이 해보지는 못했으니까요. 코코는 다르지만요.”
"내가 볼 때도 문제없어요. 애당초 여기까지 올 작품이면 이미 까다로운 딜러들을 만족시켰다는 거니까요. 이쪽 시장은 실력뿐 아니라, 운도 따라줘야 하는 영역이라 확실히 뜨는 그림 찾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에요. 그러니, 이런 식으로 골라도 문제는 없죠.”
그 정도까지 말하니 올리버도 그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여기 그림은 오늘 주인이 정해지지?”
"응. 워낙 소화해야 할 물량이 많다보니, 이런 류의 물건은 오늘 주인이 결정돼.”
"그럼, 우리가 찍은 물건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안쪽의 서적 시장에 가보자. 데이브 씨께서 고생해 주셨으니 우리도 보답은 해야지.”
서적 시장은 말 그대로 서적을 구매할 수 있는 곳으로, 일반인이 모르는 접선 방식을 통해 흑마법 서적과 같은 위법서적을 구매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게 다 끝나면 이제 좀 더 큰 경매장 가보자.”
코코가 동의하며 제인과 함께 발걸음을 맞췄다.
그림이 전시된 전시장을 빙 돌아 처음 왔던 장소로 돌아왔는데, 처음 올리버가 지목한 그림 앞에 웬 덩치들을 거느린 노인이 서 있었다.
그는 제인이 쓴 금액에 선을 두 번 그은 후, 2배 되는 금액을 당당히 적었다.
"어?”
인기척을 감지한 노인이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오래된 양복에 금테 안경. 바로, 블랙마켓에서 시체 구매를 도와주던 노신사였다.
"오랜만입니다. 데이브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