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 뒤처리 (2) >
팔랑.… 팔랑….. 팔랑…..
바깥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호텔 객실.
그곳에서 올리버는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은 다름 아닌 에디스에게서 받은 악마에 관한 서적으로.
이래저래 일이 있어 늘 첫 부분만 읽고 그 이상은 나아가지 못했는데, 예상치 못한 여유가 생겨 지금 정독하고 있었다.
책은 에디스가 말한 대로 악마에 관한 기초적인 정보만을 담고 있었다. 내용은 그다지 깊이 있지 않고, 간략한 개요만 다뤘다.
"흠......."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올리버는 최대한 좋게 생각해보려고 했다.
어차피 이쪽에 관한 제대로 된 지식을 갖추고 있지 못했으니, 처음 접하는 책으로는 이게 적당하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도 조금 아쉽네….”
올리버가 책 앞부분을 거의 다 읽었을 때쯤 중얼거렸다.
책 첫 부분에는 악마에 관한 간략한 설명이 쓰여 있었으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야기밖에 없었다.
악마는 지옥에 사는 사악한 존재이며, 인간을 타락시키고, 지상을 병들게 하려는 신에 반하는 존재.
그저 형태만 다를 뿐, 빤한 소리뿐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새로운 정보가 없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첫 번째 부분 끝자락에 가자 나름 흥미로운 구절이 있었다.
[지옥에는 끔찍한 죄를 저지른 수많은 죄인과 악마가 있으며, 그 거대한 지옥을 다스리는 일흔둘의 군주와 그 군주를 통치하는 거룩한 마왕이 하나 있다.]
한 명의 마왕과 72군주라..... 구체적인 숫자에 급격히 흥미가 동했다.
우스운 말일지 모르지만 이름조차 모르는 그들에게 왠지 모를 반가움마저 느꼈다.
그토록 원하던 지식의 한 조각을 얻었기 때문일까?
피곤한 눈을 비비면서도 올리버는 다음 부분으로 넘어갔다.
72군주에 대한 설명이 쓰인 부분으로, 기대감은 곧 실망감으로 변하고 말았다.
분량이 아주 얄팍했기 때문이었다.
72군주에 대한 설명은 대부분 한 장을 넘기지 못했고, 그 한 장 역시 온전히 채워진 것이 없었다.
제대로 읽을 수 있는 부분은 많아봤자 3줄을 넘지기 못했고, 적으면 한두 단어에 불과한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그 외에는 의미 없는 글자의 나열, 텅 빈 여백 혹은 악의적으로 덧칠된 잉크 얼룩, 겹쳐진 글자, 상하좌우가 뒤집힌 글자뿐이었다.
책이라기보다는 낙서장에 더 가까웠다. 읽는 사람에 대한 악의가 느껴지는 낙서장 말이다.
얽히고설킨, 엮이고, 덧칠된 글자는 보는 것만으로 어지러워 울렁증과 함께 눈에 피로를 유발했다.
"흠......."
그럼에도 올리버는 포기하지 않고 눈 사이를 주무른 뒤 다시 책을 봤다.
호출이 있을 때까지 호텔을 벗어나지 말라고 포레스트가 말했으니. 그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응?"
올리버가 한 부분에서 멈췄다.
상대적으로 온전한 페이지가 있는 게 아닌가?
[50위 군주. 말을 탄 노인.]
그 단어를 보는 순간 올리버는 조셉이 떠올랐다.
폐병원에서 싸웠던 그 순간을.
조셉의 몸 한쪽이 날아갔을 때 그가 등장했다.
말을 탄 노인. 주변에 널브러진 시체가 합쳐지며 그 모습을 보였다.
아직도 똑똑히 기억했다.
썩은 살점과 두개골이 엮여 작은 말이 됐고, 팔과 다리, 창자가 노인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뇌리에 박힐 정도로 강렬한 이미지.
허나, 그와 별개로 위압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만만하거나 우습다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존재는 지금 생각해도 싸움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그런 존재였다.
단순히 강하다 약하다 떠나 그냥 차원이 다른 존재.
그러자 너무나도 당연한 의문이 새삼 들었다.
왜 그때 그 존재는 자신을 보고도 공격하지 않은 걸까? 분명, 조셉과 거래했던 것 같은데.
그 존재는 공격하긴커녕 오히려 위압감을 줄여 올리버를 배려하고, 손을 가슴에 대고 허리를 숙여 정중히 인사까지 했다.
진작 가졌어야 했을 의문이었는데..…. 도대체 왜 그랬을까?
"흐음..…. 예의 바른 분이신가?”
올리버가 합리적인 추론을 중얼거리며, 그 밑 페이지를 읽어봤다.
신이 도우신 건지 해당 부분은 비교적 손실이 적었다.
“50위의 군주 말을 탄 노인. 원래 천사였으나 스스로 지옥에 떨어진 존재. 그가 지옥을 택한 이유는.…. 이 부분은 못 읽겠네 .…. 늘 창백한 말을 타고 다니며, 무엇이든 만드는 걸 좋아한다. 그 중….. 사람? 사람 맞나? 사람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며, 수많은 지식에 통달해 도움만 청하면 이들에게 원하는 지식을 전수해준다. 그 대신 가르침을 얻은 자는 죽은 후 노인의 영원한 노예가 되어 봉사해야 한다. 오……."
올리버는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제대로 읽을 수 있는 페이지를 만난 게 이토록 기쁘다니.
거기다 나름 흥미롭기도 했다.
악마도 사람을 가르치는 걸 좋아한다니.
물론, 죽어서 영원히 그의 종복이 된다는 부분은 걸리긴 하지만, 말만 잘하면 다른 대가를 치르고 가르침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악마가 가르친다면 뭐든 대단하지 않겠는가? 이 부분에 관해 시간을 들여 천천히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성을 느꼈다.
'그런데 왜 스스로 지옥에 떨어진 거지?’
파테르 경전에서 말하길 천국은 세상 모든 기쁨과 안식, 평화가 가득한 곳인데, 반해, 지옥은 칠흑 같은 어둠이 365일 내내 내려앉으며 모순적이게도 유황불에 영원히 불타는 끔찍한 곳이라 했다.
그 정도로 환경에 차이가 나는데, 왜 말은 탄 노인은 굳이 지옥으로 갔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일부러 지운 듯한 흔적 때문에 더 신경 쓰이기도 했고.
……어쩌면 따뜻한 걸 좋아하는 걸지도. 나이가 들면 추위를 많이 탄다고들 하니.
탁-
올리버는 책갈피를 끼우고 책을 덮었다.
책을 너무 열심히 읽어서인지 눈이 침침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가급적이면 끝까지 읽을 생각이었는데, 임무의 여독이 다 풀리지 않은 것 같았다.
‘좀 이상하네.…. 충분히 쉰 것 같은데.’
의문스러웠지만 피곤한 것은 엄연히 사실. 그래서 잠시 쉬기로 했다.
때마침 점심시간 때이기도 했으니.
올리버가 자리에서 일어나 호텔 식당으로 걸어갔다.
***
스르르륵.
올리버가 호텔 식당에 방문했을 때, 제복을 입은 웨이터가 접시를 가득 실은 서빙 카트를 끌며 옆을 지나갔다.
지나가는 도중 고개를 숙였는데, 꽤나 바빠 보였다.
"식사하러 오셨습니까? 손님.”
다른 웨이터가 다가와 올리버에게 말을 걸었다.
"예…. 그런데, 저건 뭐죠?”
음식을 가득 실은 서빙 카트를 보며 올리버가 물었다.
"아래층에 가져갈 음식입니다. 작은 모임 중이거든요.”
"모임요?”
"젊은 신사와 숙녀분들의 친목 모임입니다.”
"아, 그렇군요.…. 식사하러 왔는데, 자리 있나요?”
"물론입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종업원은 숨 쉬듯 자연스러운 미소와 능숙한 몸짓으로 올리버를 안내했다.
평소보다 식당이 한적했는데, 그 덕분에 올리버는 늘 경쟁이 치열한 창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란다 바깥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이 자리를 탐내는 사람들이 많아 웃돈을 주고 예약하기도 한다고 하는데,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었다.
정작 올리버는 관심도 없었지만.
올리버는 메뉴판을 보는 척하다가 적당한 음식을 하나 주문했다.
"이걸로 하나 주시겠습니까? 핀리 씨.”
핀리라는 명찰을 찬 웨이터가 대답했다.
"예, 손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웨이터는 친절한 미소에 올리버도 화답하기 위해 미소를 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 시도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웃으려고 머릿속으로 생각해도 어색하게 뒤틀렸다.
“..…혹시, 뭐 불편하신 거라도 있습니까?”
올리버의 실패한 미소를 본 종업원이 걱정스럽게 질문했다.
올리버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고, 웨이터는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를 떠났다.
좀 아쉬웠다. 이 호텔에 온 이후 식당을 이용하고, 자연스럽게 직원과 대화하는 연습을 했지만, 미소만큼은 도저히 지을 수 없었다.
혹시 무슨 병인 걸까?
"괜찮으세요? 뭔가 실망하신 것 같은데.”
갑자기 들린 목소리. 묘하게 낯이 익었다.
고개를 들자, 낯익은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분홍빛 머리카락을 기른 아름다운 여성. 다름 아닌 제인이었다.
에디스의 혼외자식이나, 올리버가 한때 경호했던 사람.
“……아가씨?”
올리버의 짤막한 말에, 제인은 뭔가 아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맞은편 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아 입을 열었다.
"네, 저예요. 오랜만이네요.”
"예..…. 오랜만이네요.”
올리버가 대답했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에디스에게서 폭언을 듣고 호텔 방에 틀어박혀 호위 기간이 끝날 때까지 얼굴도 제대로 못 봤으니.
그 이후 올리버는 마텔, 켈 자유독립군 등 이래저래 많은 일을 겪었고.
올리버가 지난 일을 되돌아보는 사이 제인이 다시 말을 걸었다.
"할 이야기는 그게 전부인가요?”
“어….. 아마도요? 혹시, 제가 무슨 실수라도?”
"아뇨. 그냥 역시 특이하신 분인 것 같아서요. 보통 다른 남자들은 이럴 때 ‘잘 지냈나요?’, ‘예뻐지셨네요.’, ‘많이 달라지셨네요.’, ‘절 기억하시나요?’라고 인사하거든요.”
“..…그게 보통 예의인가요?”
"음, 아마도요?”
제인의 대답을 들은 올리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보통의 예의라..….
"잘 지내셨나요?”
"하..…. 예, 잘 지냈어요. 당신은요?”
"저요? ….음, 잘 지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하시는 일이 일이라 걱정됐거든요.”
"말씀 감사합니다.”
"외투가 멋있네요. 마법사 스타일인가요?”
제인이 올리버가 걸친 망토를 가리키며 말했다. 포레스트가 준 망토로, 설명서에 따르면 광범위한 마법 저항력이 있는 망토라 했다.
"뭐, 예…., 아가씨도 스타일이 많이 달라지셨군요.”
이 말은 진심이었다.
지금의 제인은 과거 봤던 모습과 아주 판이한 상태였다.
과거 제인은 풍성한 머리를 늘어트리고 불편해 보이던 드레스를 입어, 광고지에 나오는 전형적인 부잣집 아가씨 같은 모습이었지만,
지금 제인은 풍성한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올려 묶고, 드레스 대신 꽉 끼는 셔츠와 조끼, 승마용 바지를 입은 상태였다.
해결사 무리에서나 볼 법한 주체적인 스타일. 그러나, 그런 스타일이 제인의 매력을 한껏 부각해줬다. 훨씬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했고.
"흐흠..…. 좀 어울리나요?”
"제가 그런 쪽은 잘 몰라서….. 그래도 굳이 대답하시라면 아가씨다워 보입니다.”
"칭찬으로 들을게요. 어쨌건 다시 만나서 반갑네요. 여긴 어쩐 일이세요? 휴가?”
올리버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이 호텔에 머무는 이유는 안전상의 이유였다.
올리버가 알게 된 왕가의 사안은 너무나도 크고 중요했고,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 여기에 머물게 된 것이었다.
포레스트가 자신이 연락할 때까지 나오지 말라며 돈까지 챙겨줄 정도.
하지만 이를 있는 대로 설명할 수 없기에 올리버는 그냥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휴식입니다.”
"흐음, 그러시구나…..”
제인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올리버는 이야기 주제를 바꾸기로 했다.
"아가씨께선 여기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휴식인가요?”
"아뇨, 전 반대로 일하러 왔어요.”
"일요?”
"예, 모임에 참석하러 왔거든요.”
제인은 바닥 아래 쪽을 가리켰다.
"아, 그렇군요….. 무슨 모임이죠?”
"음. 별거 아니에요. 그냥 친목 모임이에요. 지루하고, 피곤한..... 그래서 전 여기 잠시 대피했고요. 그런데 짜자잔! 여기서 당신을 만났네요.”
"그렇군요.”
대답을 들은 제인은 섭섭한 감정을 살짝 빛냈다.
그녀는 손을 살짝 꼼지락거리다 입을 열었다.
“….저번에 헤어질 때 제대로 인사도 못 드린 게 죄송스러웠거든요. 죄송해요. 끝까지 절 지켜주셨는데.”
올리버가 고개를 저었다. 별것 아니라는 듯이. 진짜 별 게 아니었으니.
"그런 생각 안 하셔도 됩니다. 전 그냥 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시다니….. 다행이네요.”
이상하게도 제인은 말과 달리 다시 한번 아쉬움, 서운함의 감정을 빛냈다. 왜 이러는 걸까?
"......."
"......."
그와 함께 어색하게 감도는 침묵이 일었다. 제인이 작게 웃으며 물었다.
"당신도 많이 변하셨네요?”
"예?”
"처음 만나셨을 때는 이런저런 질문 많이 하셨는데. 갑자기 질문이 확 줄어서요. 혹시, 무슨 일 있나요?”
"아..…. 별일 아닙니다. 조금 피곤해서요. 방금 전까지 책을 읽었거든요.”
"책요? 무슨 책을 읽었죠?”
반사적으로 대답하려는 찰나 말이 목구멍에서 걸렸다.
아버님이 주신 악마에 관한 서적을 읽고 있었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는 없지 않은가?
대답할 수 없다라는 말과 적당히 둘러대는 말 중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중, 품 안에 있던 통신장치가 타이밍 좋게 울렸다.
삐- 삐- 삐-
올리버가 제인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통신장치를 받았다.
통신장치에는 당연히 포레스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그렇군요. 네? 제가요? .…상관은 없긴 한데. 예, 알겠습니다.”
몇 마디 주고받은 올리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이 생겨서 일어나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죠?”
"이쪽 일이라 말씀드리기 약간 곤란하네요. 만나 봬서 반가웠습니다.”
올리버는 형식적인 예와 말로 제인에게 인사하며 음식값과 팁을 두고 자리를 떠났다.
잠시 후, 웨이터가 스테이크를 한 접시 가지고 다가왔다.
"손님. 음식이..…. 응?”
"일이 있어 나갔어요…. 그 스테이크처럼 저한테 눈길 한번 안 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