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 거래 (1) >
시침, 분침이 정확히 직각을 이루는 밤 아홉 시.
아서와 올리버는 약속 장소인 웨스트 중심 도로의 밀리언 잡화점의 문을 두들겼다.
맥보어와 도나는 건물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덜컥.
문을 열리는 도중 체인이 걸렸다. 작게 열린 문틈 사이로 한 남자가 얼굴 반쪽을 비추며 물었다.
“누구쇼?”
큰 코에 콧수염, 두꺼운 안경 너머로 비치는 날카로운 눈빛. 아서가 대답했다.
“약속 때문에 왔다. 여기서 만나기로 했거든.”
"......잠시만 기다리쇼."
잡화점 주인으로 보이는 사내는 문을 닫고는 절그럭 소리를 내 체인을 푼 다음 다시 문을 엳었다.
체크무늬 셔츠에 갈색 바지를 입은 그는 건장한 체격을 하고 있었으며, 한 손에는 더블 배럴 샷건을 들고 있었다.
“따라오시오.”
문을 닫은 다음 남자는 카운터 뒤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로 안내했다.
창고에는 여러 개의 선반이 벽을 빙 돌아 설치되어 있었고, 그 위로 통조림, 술, 밧줄 등 온갖 잡동사니가 쌓여 있었다.
남자는 창고 가운데 카펫을 들어 올려 그 밑 지하실 문을 열었다.
“들어가시오. 기다리고 있소.”
어두운 지하실은 찝찝했지만 별다른 방법도 없었기에 올리버와 아서는 지하실로 내려갔다.
지하실은 형광빛 마법주 같은 것이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고, 안으로 쭉 걸어가자 칼날이 여러 개 튀어나와 올리버와 아서를 겨눴다.
“와 주셨군요.”
올리버가 어둠 속 감정을 향해 말을 걸었다.
바로, 오늘 한 번 싸웠던 남자였다.
그는 올리버를 관찰하듯 가만히 바라보다가 칼날을 거두곤 손으로 불을 일으켜 주변을 밝혔다.
화르륵. 공기가 불타는 소리와 함께 주변이 밝아졌다.
오늘 봤던 남자와 그의 동료로 보이는 남성 셋이 더 있었다.
4대2 상황.
아서가 긴장했으나 올리버가 그의 의수 골렘에 손을 얹어 진정시켰다.
“진정하세요.…. 이분들 우릴 해칠 생각은 없어요. 아직은요.”
그 모습을 말없이 보던 켈 자유독립군 중 하나가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주변에 걸린 횃불에 불을 옮긴 다음 구석진 테이블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의자는 단 하나만 남았고, 그는 올리버를 가리키며 말했다.
“앉아.”
“예?”
“대화하고 싶다며….. 앉아.”
올리버가 하나 남은 빈 의자를 보다가 아서를 봤다.
자리를 양보하려던 것인데, 남자가 끼어들었다.
“저 늙은이 말고, 네가 앉아. 난 대가리하고만 대화해.”
“….이분이 대장입니다.”
“내 눈에는 아니야. 네가 앉아, 아니면 엎든가. 선택해.”
단호한 어투. 이 이상 딴 이야기를 하면 정말 자리를 엎을 기세였다.
올리버가 아서를 봤다.
아서는 잠시 고민하더니 올리버에게 가서 앉으라고 눈짓했다.
어쩌다 보니 올리버가 대표가 된 것이었다.
올리버가 의자에 앉자 남자가 입을 열었다.
“우선, 너-”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올리버가 대뜸 질문했다. 말이 끊긴 남자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뭐라고?”
“성함이 어떻게 되시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딴 걸 알아서 뭐하게?”
“아, 별 건 아니고, 성함을 모르면 이야기할 때 조금 불편할 것 같아서요…. 또 개인적으로 비슷해서요.”
“비슷?”
“예. 해머쉬란 분요. 같은 화염마법을 다루는 걸 넘어 마력의 흐름이라던가, 사용 방식이 비슷해서….. 말씀하기 싫으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그 순간 맞은편 남자의 감정이 요동쳤다.
분노, 슬픔 등의 감정이 조용히 들끓었고, 인내, 이성, 냉정 등의 감정이 이를 억지로 억눌렀다.
“..…쿼터스태프, 독특한 흑마법과 마법 사용자. 네가 데이몬과 앨리스터, 휴잇을 잡은 놈이군.”
“예, 그렇습니다.”
대답을 듣자 남자는 갑자기 자기 얼굴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가죽 가면 아래의 맨얼굴이 드러났다.
사자 갈기처럼 뒤로 넘어간 붉은 머리에 깔끔하게 면도한 수염, 각진 이마와 오뚝한 코, 뚜렷한 붉은 눈동자.
바로, 켈 자유독립군의 지도자 중 하나인 윌레스였다.
아서를 비롯한 윌레스의 부하들 역시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는지 놀랐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윌레스는 자기 말을 이어갔다.
“내 이름은 윌레스다. 켈 자유독립군 소속이지. 넌?”
“제 이름은 데이브. 란다 T구역의 해결사입니다. 만나 봬서 반갑습니다.”
“놀라지 않는군.”
“아뇨, 놀랐습니다.”
“우리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 여기까지 쫓아온 거지?”
“원한은 없습니다. 그저 일이라 찾아온 거죠.”
척.
윌레스가 칼을 올리버의 목 끝에 겨누며 말했다.
“해머쉬는 내가 손수 마법을 전수해준 녀석이야.”
“그렇군요.”
“데이몬은 시위 도중 왕국 진압군에게 부모를 잃고 이쪽으로 투신한 녀석이고, 앨리스터도 크게 다르지 않아.”
“네.”
“근데, 그냥 일이었다고?”
“그렇습니다.”
윌레스가 칼을 앞으로 내밀어 올리버의 살갗을 찔렀다.
"......."
“그럼, 여긴 무슨 일 때문에 온 거지? 이야기 여부에 따라 나도 내 일을 할 테니. 잘 생각하고 대답해.”
그는 진심이었다. 조심성과 이성 탓에 윌레스는 당장 소란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했지만, 동시에 마음속 깊이 들끓는 분노 탓에 이유만 주어진다면 기꺼이 싸울 의사가 있었다.
참으로 복잡한 감정이었다.
올리버가 주변을 둘러봤다. 지금 상황은 불리했다.
윌레스의 실력도 잘 모르고, 이 좁은 공간에서 화염 마법은 너무나도 치명적이었다.
뭣보다 제3의 마법사.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왕국군의 종군 마법사일 가능성이 높았는데, 윌레스를 어찌어찌 제압한다고 쳐도 그가 개입하는 순간 모든 일이 틀어지고 말 터였다.
정체를 들키면 말짱 도루묵이었으니.
'뭣보다 여긴 휴잇이 없어…..’
올리버는 지금 상황을 분석하고, 자기들의 목적을 상기했다.
윌레스가 거물인 건 맞았지만, 지금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 자신들의 목표는 휴잇의 확보 혹은 그의 도주를 돕는 것이었다.
“대답 안 하나?”
윌레스가 대답을 재촉했다.
“.…휴잇 씨를 확보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마법 해커 휴잇 씨요.”
아서를 에워싼 적들이 칼을 쳐들었다.
"하지만 다른 명도 받았습니다."
윌레스가 손을 들어 부하들을 멈췄다. 그리고 되물었다.
“..…무슨 명을 받았지?”
“그전에 휴잇 씨가 무슨 정보를 얻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내가 대답해 줘야 할 이유가 있나?”
“말씀해 주신다면 도와드릴 생각이거든요. 왕국군을 피해 도망칠 수 있도록 말이죠."
***
사람이 몰래 만나기 딱 좋은 밤 아홉 시.
의도치 않게 시작된 협상은 생각 이상의 결과를 거뒀다.
협상 당사자인 올리버도 예상치 못한 수준의.
휴잇의 확보, 혹은 휴잇이 얻은 정보를 얻어 도주를 도우라는 시의 의뢰 중 하나를 완벽하게 성공시킨 셈인데,
아서를 비롯한 그 동료들은 올리버가 이룬 성과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물론,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저쪽이 거짓말을 할 수도 있고, 반군과 너무 직접적으로 엮여 불안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는 아서의 말에 따라 모두 올리버가 협상한 대로 반군과 협력하기로 했다.
애당초 시의 의뢰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반군과 전쟁을 벌이던가, 협력하던가 둘 중 하나밖에 없었으니.
신분 노출과 휴잇의 위치 파악 등 고려할 것이 많은 이쪽으로서는 의뢰를 완수하기 위해선 차라리 협력이 그나마 성공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아서가 질서를 잡아준 다음 올리버 일행은 준비를 해 약속 장소로 이동했다.
약속 장소는 도시를 벗어난 외곽으로, 주변에 크고 작은 농가가 여럿 있었는데, 윌레스 일행은 그 농가 중 하나에 몸을 숨긴 상태라 했다.
“그 정도 정보까지 알려주다니….. 거짓말 같지는 않네.”
“걱정하지 마시죠, 도나 씨. 윌레스 씨도 뭔가 걱정이 있었는지 저희 제안을 반가워한 기색이 있었거든요.”
“아, 흑마법사니까 상대방의 감정을 꿰뚫어 보지?”
“그리 자세히는 아니고 대략적인 수준이지만요.”
“들어본 적 있어. 흑마법사의 수준이 극에 다다르면 생각도 읽을 수 있다 하던데. 그 정도인가?”
맥보어가 지나가듯이 물었다. 겉모습과 달리 순수한 호기심으로 묻는 거 같지는 않았다. 뭔가 탐색하려는 눈치였다.
악의는 없었으나, 이해타산적인 감정은 묻어 있었다.
올리버는 일단 대답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생각을 읽는 수준까지는 아니고, 의도나 태도 등을 볼 수는 있습니다.”
“부럽군. 카드 게임하면 무조건 이기겠어.…. 윌레스는 어떤 감정이었지.”
“어떤 감정이었냐면-”
“-곤란하던 차 어떻게든 이용할 수 있는 놈들이 생겨 다행이라는 기분이었지.”
갑작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윌레스와 그 동료로 보이는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하실에서 본 세 명도 있었다. 그들 하나하나 마법사급의 마력을 품고 있었다.
올리버는 감정을 봄으로 미리 눈치채 딱히 놀라지 않았지만, 아서 쪽 일행은 겉으로 내색지 않아도 많이 당혹스러워했다.
역시, 싸우지 않길 잘한 것 같았다.
어떤 식으로든 일단 싸웠으면, 이쪽도 피해를 피할 수 없었다.
“여긴 약속 장소가 아닌데?”
아서의 물음에 윌레스가 답했다.
“혹시나 해서 우리 쪽에서 찾아온 거야. 다행히 무슨 수작을 부린 것 같지는 않네.”
공기 중으로 마력을 뿌려 주변을 탐색한 윌레스가 말했다.
실 형태로 사방에 뻗은 마력이 허공을 가르다 나무, 바위 등에 부딪히며, 윌레스에게 주변 정보를 전달해줬다.
과거 마탑 학생이 한번 사용한 걸 본 적 있었다.
그 학생은 그리 쉽게 사용하지 못했는데, 윌레스는 숨 쉬듯 자연스럽게 사용했다.
아무래도 화염 마법만 다룰 줄 아는 게 아니라, 다방면으로 마법에 조예가 깊은 듯했다.
임시긴 해도 현상금 12억이 걸린 상대가 눈앞에 있자 도나와 맥보어는 긴장하며 여차하면 싸울 자세를 잡았고,
윌레스 측도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대치했다.
세상에서 가장 어색하고 기묘한 동맹이란 생각이 들었다.
"......휴잇은 어딨지?”
아서의 물음에 윌레스가 답했다.
“여기 없어. 이미, 이동하고 있지.”
“뭐?”
“뭘 놀라지? 휴잇과 만나기로 한 약속이라도 있었나?”
“휴잇이 알아낸 정보를 넘겨주겠다고 했잖나?”
“알아. 그건 내가 대신 말해주지. 나는 휴잇에게 전부 들었거든.”
“사실입니다.”
올리버가 말했다. 윌레스의 말은 진심이었다.
올리버의 보증에 일단 윌레스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윌레스가 입을 열었다.
“현재 북쪽으로 가는 주요 길목은 소수의 왕국군이 지키고 있어. 그리고 예비부대가 여차하면 지원할 준비를 하고 있지. 한 번이라도 걸리면 끝장이야.”
“그래서?”
“휴잇이 무사히 빠져나갈 동안 우린 왕국군을 습격해 그들의 이목을 빼앗을 거야. 그걸 좀 도와줘. 마법 장비 전문가와 저격수, 골렘 의수, 흑마법사면 적잖게 도움이 될 거 같으니.”
“지금 왕국군 습격하는 걸 우리더러 도우라는 건가?”
“어차피 일이잖아?”
올리버는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았다. 좀 많이 위험한 일이니, 조심해야겠다는 생각 정도만 할 뿐.
허나, 아서는 달랐다. 위험 부담을 짊어지는 불안감 외에도 개인적인 불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고민했다. 이번 일이 무사히 끝났을 때 얻을 수 있는 대가와 저울질하며.
윌레스도 이를 눈치챘는지 아서를 설득하려고 입을 열었다.
“마음에 안 내키는 거 같은데, 내가 주는 정보를 들으면 생각이 바뀔걸?”
“뭐길래 그리 자신만만해? 그런 것 치고는 너무 쉽게 거래하는 거 같은데.”
윌레스의 감정이 그 순간 작게 요동쳤다.
".....왜냐면, 단순히 우리의 전쟁만으로 쓸 사안이 아니거든. 그보다 더 중요한 거지. 인간으로서."
“….그게 무슨?”
“악마와 거래하고 있어. 왕가 인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