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 폴 카버 (1) >
우연.
놀랍게도 모든 것은 우연이었다.
아서가 말한 대로 윌레스는 소각장에 터를 잡아 몸을 숨겼다.
그뿐 아니라 란다에 제각기 숨어든 켈 자유독립군의 잔당을 모으며 세력 재건을 꾀하였는데, 이는 자칫 란다 시(市) 자치권을 위협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자치권을 부여한 도시에서 반군이 결집한 것이니.
그렇다고 이제 와 소란스럽게 경찰이나 시(市) 방위군을 이용할 수도 없는 노릇.
잘못하면 이목을 끌어 일이 더 커질 수 있었다.
그렇기에 시(市)는 실력과 신용이 보장된 퇴역 군인 출신 해결사들을 지원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바로, 아서를 비롯한 그 동료들을 이용해 말이다.
그런데 이거 웬걸?
짓궂은 농담처럼 아서가 윌레스를 습격한 타이밍에 맞춰 윌레스는 정예병들과 함께 시(市) 감옥을 습격했다. 수감 된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다시 말하지만, 이는 전부 우연이었다.
그러나 우연이란 한마디로 치부하기에는 출혈은 생각보다 컸다.
시국이 시국이라 나름대로 감옥의 방비를 높였음에도 습격한 적의 화력이 예상을 벗어나 다섯 구획으로 나뉜 감옥 중 세 개가 부서져 그 안에 수감된 수많은 잡범과 흉악범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시(市)에서 부랴부랴 경찰과 시 방위군 일부를 동원해 도망친 범죄자들을 다시 잡아들였다지만, 그럼에도 도망친 이들이 많았고, 란다는 때아닌 소란에 휩싸였다.
“안으로든, 밖으로든..…."
포레스트가 란다에서 발행되는 신문을 종류별로 가져와 책상 위에 놓으며 말했다.
어찌나 신문이 많은지 툭- 이 아니라 텅- 하는 소리가 났다.
부스럭. 부스럭.
포레스트가 신문을 펼치며 다시 입을 엳었다.
“오늘 <더 토커(The Talker)>에서 발행한 따끈따끈한 신문일세. 1면 기사를 읽어주지.…. 어제 늦은 새벽 시간 경, 시(市) 공공 감옥이 테러를 당했다. 당국은 이를 계획적인 테러로 규정했고, 유력 용의자를 Z구역 개발 반대 위원회로 추정하고 있다.”
"....?"
올리버가 고개를 갸웃댔다.
개발 반대 위원회는 뭐고, 추정은 뭔지 전혀 이해가 안 갔다.
“죄송하지만 포레스트 님. 시(市) 감옥을 습격한 건 켈 자유독립군의 윌레스 씨 아닌가요?”
“진실은 그렇지. 다른 기사도 읽어주겠네. <노 크레딧(NO Credit)>의 신문일세..…. 오늘 새벽에 있었던 감옥 습격의 배후에 흑마법사 집단이 있다는 익명의 제보자가 들어왔다. 며칠 전 경찰국에 붙잡힌 조직원을 구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흑마법사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다시 알리는 블라블라블라..…. 라고 쓰여있네. 기사 내용은 싸구려지만 사진을 잘 찍었군.”
포레스트가 신문을 올리버 쪽으로 돌려 사진을 보여줬다.
확실히 사진은 잘 찍혔다.
무너진 감옥 외벽과 그 틈새 사이로 쏟아지는 죄수들. 거기에 흑백 사진의 음영이 그 심각성을 한껏 부각했다.
그렇지만 의구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포레스트 님 말씀대로 사진은 확실히 잘 찍혔습니다. 그럼에도 의문은 가시지 않습니다. 감옥을 습격한 것은 윌레스 씨 아닙니까? 어제 통신장치를 통해 그리 말씀하셨잖습니까?”
“확실히 그랬지.”
“그런데 왜 신문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죠?”
“왜냐면 시(市)에서 요청했기 때문이네. 도시로 숨어든 켈 자유독립군 때문에 감옥이 털렸다는 걸 이야기했다간 보통 망신이 아니거든.”
“감옥을 털린 것 자체가 망신 아닙니까?”
“비겁하게 맞는 말 하지 말게. 내가 할 말이 없잖아?”
포레스트가 가벼운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어째 이런 일에 익숙한 것 같았다.
그는 양주를 따라 올리버에게 건네며 다시 말했다.
“..…솔직히 자네 말이 전적으로 옳네. 감옥이 털렸다는 것부터가 망신이지. 하지만, 이건 이미 흘린 출혈. 그렇다면 시(市) 입장에서는 출혈의 양을 최대한 줄이는 방향으로 가야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괜찮으시다면 이야기 좀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포레스트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주는 게 좋겠군. 자넨 알 자격 있으니. 우선, 란다가 자유 도시인 건 알겠지?”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란다는 분명 연합 왕국(United Kingdom)에 소속된 도시이지만, 왕가는 물론 중앙 의회의 통치도 받지 않는 자유 도시였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국가 안의 국가라고도 부르니 이들도 있으니.
“하지만 자유는 비싸네. 애당초 란다라는 도시의 탄생이 기적적인 확률로 발생한 거였거든. 대재앙이 일어나 기존 란다가 무너지고, 정치인과 자본가, 마법사 이 셋이 힘을 합쳐 이 도시를 건설했지. 말로는 몇 마디에 불과하지만 하나하나 말도 안 되게 힘든 일이야.”
올리버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피부에 와닿지 않았지만, 머리로는 대충이나마 이해됐다.
“하지만, 탄생했다고 끝이 아니야. 오히려 시작이지. 엄청난 세금을 냄으로써 란다는 자유 도시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거든. 그런데도 웃긴 건 사람들이 만족하지 않고 더 욕심낸다는 거야.”
“욕심요?"
“그래, 왕가(王家)는 란다를 다시 직할령으로 바꾸고 싶어 하고, 중앙 의회는 자유 도시 신분을 빼앗아 일반 행정구역으로 편입시키고 싶어 하거든.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자기 우리에 두고 싶은 거지.”
올리버는 이 이야기의 흐름이 대충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 알 거 같았다.
비슷한 이야기는 이미 몇 번 들었으니.
“그런데 란다는 그게 싫겠군요.”
“맞아. 정답이야. 그래서 매해 란다는 중앙의회와 왕가를 마주하며 보이지 않는 전쟁을 벌이지. 어떻게든 외부 세력으로부터 자치권을 지키기 위해. 그런데, 켈 자유독립군에 의해 시 감옥이 털렸다? 어떨 거 같나?”
“어……. 잘은 모르겠지만, 빌미를 주는 것 같네요.”
“정답이야. 상으로 한 잔 더 따라 주지.”
쪼르르륵.
“….그래서 일단 저런 찌라시들을 뿌리는 거야. 수많은 거짓말을 뿌리면 진실을 가리는 데 제법 시간이 걸리거든. 란다 자치에 관한 문제는 신문사나 라디오국도 시(市)와 입장이 같기에 협력해 주는 거야. 좀처럼 보기 드문 광경이니 기억해두게.”
올리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신문을 살폈다.
<라이어(Liar)>신문사에서는 감옥의 단원들을 구하기 위한 범죄조직의 습격이라 했으며, <지브리쉬(Gibberish)> 신문사에서는 근래 유행 중인 사이비 종파가 벌인 짓이라 보도했다.
하나같이 딴소리만 했는데, 개중에 몇몇 신문사는 켈 자유독립군을 언급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점에 대해 묻자 포레스트는 이리 답했다.
“진실이 아예 없는 건 눈에 띄거든. 사실도 어느 정도 실어야 해. 그래야 더 헷갈리지.”
“아, 그렇군요….. 그런데, 전혀 상관없는 이들을 이렇게 써도 되나요?”
“걱정하지 말게. 일부러 저렇게 넣은 거니. 모두 시(市)와 대립하는 존재이거나, 혹은 통제 대상인데, 이 상황을 이용해 이들에 대한 통제력을 높이기 위해 저런 기사를 쓴 거니. 일종의 포석인 셈이지. 이 난리 중에도 저러다니. 늙은이다 뭐다 해도 높으신 분들은 참 대단해.”
“아……."
그러고 보니 기사에 적힌 집단은 하나같이 흑마법사나 범죄자 같은 이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냥 감옥을 습격할만한 이들을 대충 골라 쓴 게 아니었다.
“이 도시는 자유롭지만, 그 자유만큼이나 강력한 통제력을 요구하거든.”
“대충 이해할 것 같습니다. 다만…..”
“다만?”
“란다에 이렇게 많은 집단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특히, 개발 반대 위원회는 도대체 뭐죠? 거기에 관한 기사가 특히 많은데요?”
“Z구역에 둥지를 튼 조직일세. 란다 재개발 때부터 시위하는 존재인데, 놀랍게도 중개인 조합도 잘 알지 못한다네. 광신도 혹은 종말론자 집단이라 하던데. 평소에 조용하다가 가끔씩 사고를 치는 이들이지.”
올리버가 별다른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도시는 거대한 크기와 높은 건물만큼이나 다양한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럼, 마지막으로 질문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이렇게 세세하게 설명해주신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포레스트는 기다리는 질문이 나온 듯 씨익 웃었다.
“..…시(市)에서 자네에게 직접 의뢰를 하고 싶다고 하네.”
***
포레스트가 말하길 한동안 란다의 음지와 양지는 비상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감옥의 죄수들이 대량으로 탈옥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경찰국은 물론 필요에 따라 시(市) 방위군도 동원될 것이라 했으며, 중개인 조합도 급한 불이 꺼질 때까지 이에 전적으로 협력하기로 했다.
그 말인즉슨 해결사들도 반강제적으로 동원될 것이라는 이야기.
충분한 보수는 받겠지만, 거절할 수 없었고, 그건 올리버도 마찬가지였다.
“잘 이해가 안 되는데요.”
레스토랑 종업원 알이 운전하는 차량 뒷좌석에 탄 올리버가 옆에 앉은 포레스트에게 물었다. 그는 책을 읽고 있었다.
“뭐가 이해가 안 되나?”
“란다가 지금 큰일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해결사들이 동원되는 것도 알겠습니다. 당연히 저도 일하는 것이 이해되고요.”
“다행이군. 그런데?”
“그럼 저도 다른 해결사분들처럼 뒷골목을 뒤져야지 왜 시(市) 내무부로 가고 있는 거죠?”
“왜냐면 의뢰에 앞서 시(市) 공무원이 자넬 불러 달라고 했기 때문이네. 직접 얼굴을 보고 의뢰하고 싶다고 하는데, 그게 뭔지는 안타깝게도 못 들었네. 자네가 직접 오면 이야기해준다더군. 이 부분에 관해서는 사과하겠네. 시 공무원은 그리도 녹록지 않은 이들이라. 일단, 협조적으로 나가는 게 맞거든.”
“아뇨, 그런 뜻은 아닙니다. 다만, 일이 뭔지는 궁금하긴 하네요.”
“곧 도착할 테니, 조금만 기다리게.”
포레스트의 말은 사실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도시 중심부인 B구역에 들어섰다.
처음 오는 곳으로, 꽤 인상적이었다.
빈민가이자 우범지대인 X구역, 노동자 구역, 여러 문화시설이 몰린 J구역, 심지어 오염구역도 둘러본 올리버지만, 행정구역인 B구역은 다른 구역과 그 결이 다른 위압감을 품고 있었다.
동네가 마치 거대한 요새들이 모여 만들어진 것 같았는데, 모든 건물이 사람을 위압하듯 크고 당당했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거리는 설명하기 힘든 품위와 질서가 있었고, 깔끔한 정장과 제복 차림의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모두 바빠 보였고, 빈틈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언제 봐도 숨 막히는 곳이군. 자네도 봐두게 이 도시의 엘리트들이 모인 곳이니.”
“다들 바빠 보이네요.”
“그렇네. 세금 도둑이라 욕먹긴 해도, 의외로 다들 열심히 일하고 있지. 앞으로 자네가 익숙해져야 할 곳일 수도 있어.”
운전 중이던 알이 대화 도중 끼어들었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사장님. 곧 내무부 건물에 도착할 거 같습니다.”
“알았네.”
대답과 함께 포레스트는 품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신분증 같았다.
거대한 건물을 여러 지나자 이윽고 차 머리가 한 지점을 향해 쭉 달려갔다.
짙은 담회색 빛깔의 직사각형 건물로 건물 주변에는 벽돌과 강철이 뒤섞인 성벽 같은 담장이 둘려 있었다.
경비원으로 보이는 사내는 두 발자국 나와 멈출 것을 손짓으로 명령했고, 알은 시키는 대로 차를 멈췄다.
경비원이 운전석에 앉은 알을 보자 낮게 중얼거렸다.
“붉은 피부?”
낮게 깔린 경멸감. 그때, 뒷좌석에 포레스트가 경비원을 불렀다.
“그저 운전사일 뿐이오. 경비원 선생.”
경비원은 고개를 돌려 포레스트 쪽을 바라봤다. 포레스트를 보자 알을 봤을 때 빛나던 희미한 경멸감이 사라졌다.
“이런 죄송합니다. 무슨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선생님.”
포레스트가 아까 전 꺼낸 신분증을 보이며 대답했다.
“내무부 소속 폴 카버 씨를 만나러 왔소.”
경비원이 통신장치를 통해 대화를 한두 마디 나누자 입을 열었다.
“약속이 잡혀 있으시군요.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실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