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 복귀 (2) >
“하아아아아......."
포레스트가 대답과 동시에 의자에 앉았다.
그냥 앉는 것이 아닌 기운이 쫙 빠진 듯 축 늘어진 채 앉았다.
늘 옷차림과 자세에 신경을 쓰는 포레스트치고는 꽤나 보기 드문 광경.
어째 올리버는 이렇게 된 데에 자신의 잘못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레스토랑에 방문했을 때의 알의 반응과 올리버를 향해 원망 섞인 감정을 뿜는 포레스트가 그 근거였다.
쪼르르륵-
포레스트가 감정을 진정시키며 잔에 술을 따랐다. 평소처럼 약간만 따르는 것이 아닌 넘칠 정도로 한가득 따랐다.
그런 다음 음미하지도 않고 그냥 통째로 들이켰다.
꿀꺽. 꿀꺽. 꿀꺽.
탁하고 책상 위에 크리스털 잔을 내린 포레스트. 그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짧지만 수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는 한마디.
올리버가 대답했다.
“예, 오랜만입니다. 포레스트 님.”
“사실, 그리 오랜만인 건 아니지. 일주일도 안 지났으니. 그동안 잘 지냈나?”
“뭐, 그럭저럭 지냈습니다.”
“다행이군. 자넨 잘 지냈다니. 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나는 잘 못 지냈네….. 괜찮다면 이유를 물어봐 줄 수 있겠나?”
평소답지 않은 포레스트의 말투에 올리버는 일단 시키는 대로 따랐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며칠 전 중개인 공용 정보망에 한가지 소식이 전해졌네. 모두의 귀를 의심하는 소식이었지.”
“뭐였죠?”
“F구역의 한 마법사 연구소가 습격을 당했다 하더군. 출처도 불분명하고, 어딘지 알아낼 수도 없어 확인할 길이 없지만 말이야….. 덕분에 이쪽 바닥이 떠들썩해.”
“음..…. 그게 떠들썩할 만한 이야기인가요?”
“당연하지. 몇 번 이야기 했지만, 이 도시는 아슬아슬한 힘의 균형으로 유지되고 있네. 마탑의 마법사들은 그중 핵심축을 담당하고 있고. 그런 마탑 휘하의 연구소가 습격 당했다라….. 자칫 거대한 사건의 서막이 될 수 있어. 떠들썩할 수밖에.”
아……. 올리버는 새삼 자신이 큰일을 벌였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한번 방문한 것으로 이 정도일 줄이야.
“..…누가 습격했는지 알아내셨습니까?”
“아니, 습격당한 이들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습격한 인간을 알아낼 리 없지. 그래서 일각에서는 그냥 헛소문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돌고 있어.”
“그럼, 그게 맞지 않을까요?”
“아니, 그건 아니야.”
포레스트가 단호하게 대답하며 다시 술을 따랐다. 갈증이 해소됐는지 이번에는 평소 따르던 양만 따랐다.
그가 한 모금 마시며 다시 입을 열었다.
“중개인 조합이 란다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조직이긴 해도 정보수집 능력까지 낮은 건 아니야. 오히려 약하기 때문에 괜찮은 편이지. 헤임달 같은 조직과 거래하고 있고, 중개인 각자 나름대로 정보망을 가지고 있으니.”
“아, 그렇군요.”
“덕분에 현재 우리 중개인뿐 아니라 이 바닥 사람들이나 호사가들 역시 떠들썩하네. 도대체 어떤 미친 자가 전조도 없이 마법 연구소를 습격한 건지, 혹은, 마탑 세력 간의 경쟁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고 있어.”
“마탑도 서로 싸우나요?”
“한 지붕에 다섯 명만 있어도 바람 잘 날이 없는 법이야. 마탑이라고 다를 거 없지.…. 어느 쪽이든 사실이라면 자칫 큰 사건이 될 수도 있고. 그래서 다들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 밤새가며 일하고 있는 거네.”
“포레스트 님도 그것 때문에 피곤하신 거군요?”
“비슷하지만 달라. 난 자네가 어디 있는지 찾아봤거든.”
포레스트의 한 마디에 올리버는 덜컥했다. 아무 말도 아닌 것처럼 들리지만 모든 걸 알고 있는 한마디였다.
“자네와 내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기억나나?”
“……예."
“자네는 마텔에 관해서 물어봤지. 그리고 후원 같은 것도 하냐고 물어봤고.”
“예….. 기억납니다. 포레스트 님께서는 잊으라고 말씀하셨지요. 대세를 거스르지 말라고.”
“또 하나 더 있지. 그쪽에 관여하지 말라고 약속해 달라고 했지. 자넨 거절했고….. 다시 묻지. 지난 며칠간 뭘 했나? 참고로 거짓말을 할 거면 아무 말도 하지 말아주게. 슬퍼서 말이야.”
"......."
“데이브.”
“….마텔에 갔었습니다."
***
올리버가 고심 끝에 대답했다.
모른 척하거나 거짓말할 수도 있지만, 포레스트에게 통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무엇보다 지금이라도 솔직히 이야기하는 게 최소한의 예(禮)인 거 같았다.
대답을 들은 포레스트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그와 함께 그는 놀라움과 예상했다는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빛냈다.
사람의 감정이란 참으로 신비로웠다.
그는 말없이 술을 마시고는 한잔 더 따르며 입을 열었다.
“자세히 묻지는 않겠네. 자네와 난 일로 묶인 해결사와 중개인 사이일 뿐이니. 다만 한가지 확실히 하고 가지.”
“말씀하십시오.”
“난 자네와 정식으로 계약한 중개인일세. 이 도시에서 무슨 일을 벌일 때는 반드시 내게 이야기해주게. 내 허락을 구할 필요도, 내 말을 따를 의무도 없지만, 최소한의 통보는 해주게. 그래야만 나도 거기에 맞춰 대응할 준비를 할 수 있으니….. 난 먹여 살릴 직원들이 딸린 몸이네.”
포레스트는 이성과 약간의 분노, 절제 그리고 안도를 빛내며 말했다.
확실히 맞는 말이긴 했다.
올리버와 포레스트는 정식 계약을 맺은 관계니.
물론, 일에 한정된 사이일 수 있으나, 경우에 따라 올리버가 벌인 짓 때문에 억울하게 피해를 볼 수도 있었다.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
멀린의 외상값을 떼먹을 뻔한 일도 그렇고, 이번 일도 그렇고. 확실히 자신이 너무 경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포레스트 님..….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됐네. 다만, 한 가지 더 묻지. 마텔로 간 일은 잘 마무리됐나? 귀찮은 일 없이?”
올리버가 멀린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반드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약속하겠습니다."
“흐음..…. 좋네. 앉으시게.”
포레스트가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올리버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행동이나 감정 상태를 볼 때 이것으로 이번 일은 마무리된 거 같았다.
올리버가 권하는 대로 앉자, 포레스트는 눈 사이를 주무르면 마른세수를 했다.
많이 힘들어 보였다. 그럼에도 그는 단추를 잠그고, 옷의 주름을 펴는 등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많이 피곤하신 것 같군요.”
“아니라곤 못 하겠군.”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꼭 자네 때문만은 아니니 그럴 필요는 없네.”
“예?”
“다른 일도 있거든. 그리고 자네가 다음에 해야 할 일과도 관계가 있지.”
“다음 일요?”
“그래, 혹시 신문 보나?”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디스의 임무를 맡은 뒤부터는 정기적으로 신문을 사서 읽었다.
“그럼, 켈 자유해방군에 대해서 아나?”
올리버는 잠시 고민했다. 봤던 거 같은데.
“……예, 왕국군이 얼마 전 토벌했다고 하는데, 그 이상은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올리버가 솔직히 말했다. 란다 밖 일이고 상대적 관심도 덜한 거기에.
“그래도 들어 봤다니 다행이군. 켈 자유해방군. 간단하게 말하면 노스랜드의 독립군이야.”
“노스랜드요?”
“그래, 우리는 그들은 노스인이라 부르지만, 그들은 스스로 켈족이라고 부르거든. 그래서 켈 자유해방군이라 불리지.”
“아….. 그렇군요.”
“그래. 왕국에 병합된 지 백 년이 됐는데, 아직까지도 저항 중이지. 여하튼, 끈질긴 거 하나는 알아줘야 해.”
포레스트는 감탄 아닌 감탄을 했다.
“그런데 그건 왜 이야기하시는 건지요?”
“자네가 아까 전에 그랬지? 왕국군에 의해 켈 자유해방군이 토벌당했다고.”
“네.”
“하지만 완벽하게 다 처리한 것은 아니야. 여느 전쟁이 그렇듯 일부는 어찌어찌 도망치지.“
“그렇습니까?”
“그래, 하지만 그건 그리 큰 문제는 아니야. 대부분 일반병은 현실의 벽을 마주하곤 절망감을 품은 채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도시로 숨어들어 그냥저냥 살 거든. 다만, 문제는 간부들이야. 그들은 언제 싹 틀지 모르는 씨앗과도 같지. 그래서 왕국군도 그들만큼은 추격하는데 열심이야.”
“그렇군요."
“그런데, 그중 일부 세력이 이곳 란다로 들어온 거 같아.”
“란다요?”
“그래, 그리 이상한 건 아니야. 의외로 국내뿐 아니라 국외까지 적잖은 도망자들이 이곳 란다로 몰려오거든. 란다는 세계 최대도시니까. 사람이 많아 몸을 숨기기 좋고, 정보를 접하기도 좋으니. 하지만 무엇보다 자치권을 가진 자유도시라 왕국군도 함부로 못 들어오는 게 최대 장점이야.”
“아, 그렇군요.”
“물론, 매해 그거 때문에 왕국 중앙 의회와 시(市)가 다투지만. 뭐, 서로의 입장이 있으니 이해는 돼. 왕국군 입장에서는 불순분자를 뿌리 뽑아야 하고, 란다 시(市) 입장에서는 간신히 얻은 자치권을 침해받으면 안 되니.”
“서로 힘들겠네요.”
올리버가 별다른 감흥 없이 이야기했다. 잘 알지 못하는 이야기고, 관심마저 없으니 이해도 공감도 안 됐다.
포레스트는 아닌 눈치였지만.
“그럼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지.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그들이 충돌하지 않고 적정선에서 합의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자넨 알겠나?”
올리버가 모른다고 대답하려는 찰나 잠시 고민에 빠졌다.
올리버는 이제 세상에 대해 제법 진지하게 알고 싶었다.
그럼 당장은 관심 없더라도 이런 문제에 대해 알려고 노력할 필요는 있었다.
그래서 고민했다.
“잠시만요. 생각 좀 하게 기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지.”
올리버는 고민했다.
적을 추격 토벌하고 싶은 왕국군과 란다의 독립성을 지키고 싶은 시(市) 이 둘을 동시에 만족하게 할 방법을.
올리버가 고민 끝에 대답했다.
“..…시(市)에서 왕국군이 원하는 사람을 대신 잡아주는 건가요?”
“정답이네.”
포레스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 이쪽도 일정이란 게 있으니 늘 잡아다 바쳐줄 수는 없지만, 이번처럼 큰 이벤트가 벌어질 때는 협력하는 티를 내야 해서 굵직굵직한 자들을 체포해 넘기지.”
"......혹시 그 굵직굵직한 자들을 해결사가 체포해야 하나요?”
"그렇네. 오늘따라 날 놀라게 하는군.”
포레스트가 그 말과 함께 서류철을 내밀었다.
안에는 흑백사진과 함께 해당 인물에 대한 정보가 간략하게 적힌 서류가 묶음으로 있었다.
올리버는 해당 서류를 훌어봤다.
“1억 2천, 8천, 9천 5백, 2억 5천..…. 다들 포상금이 많네요?”
“왕국 입장에선 반군의 간부니 그 정도면 적당하지. 개중에는 마법사나 흑마법사도 있고. 혼자서 중대를 습격해 갈아 마시는 놈들도 있어. 그걸 고려하면 꼭 많다고 할 수 없네.”
“아..…. 그렇군요.”
올리버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목숨은 하나니.
“….그래서 해결사에게 맡기는 겁니까? 위험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네. 그런 종류의 도망자들은 X, Y, Z구역에 틀어박혀 있거든. 그곳은 경찰들도 들어가기 어려워. 오히려 경찰이라 더 힘들 수도 있고.”
잘 이해가 안 됐다. 경찰이라 오히려 들어가기 힘들다니.
X구역부터는 시의 통제권은 물론 뒷세계를 주름잡는 크라임 펌 조차 통제할 수 없는 무법지대라 그런 걸까?
‘그런데 왜 그런 거지?’
“무슨 생각하나?”
포레스트가 올리버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뇨, 별거 아닙니다.”
“뭐, 어쨌건, 시에서 협력을 요청한 인물들은 모두 의무적으로 그 서류철에 있는 관계자를 잡아야 하네. 당연히 그중 자네도 포함되어 있고.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핏 보면 부당하다고 볼 수 있었지만, 오염구역 청소와 같은 거로 생각하면 그리 이상하진 않았다.
중개인 조합이 란다에서 어느 정도 특혜를 보는 건 이와 같은 협력 때문이니까.
다만, 다른 쪽으로 의문이 갔다.
“왜 하필 절 지명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이에 관해 미리 알아놓은 모양인지 포레스트는 당황하거나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고, 선명한 눈동자로 대답했다.
“공식적인 입장은 어설프게 건드려 행여 놓칠까 봐 그렇다고 하네. 믿을 수 있는 실력자에게 맡기고 싶다는 거지.”
납득이 안 가는 대답은 아니었다.
어설프게 일을 풀어 현상 수배범들의 경계심만 높일 바에는 제대로 된 실력을 가진 소수 인력에게 일을 맡기는 게 시(市) 입장에서도 안심일 테니. 다만..….
“….비공식적인 이유는 뭐죠?”
“시 공무원들이 무슨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