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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흑마법사-138화 (138/633)

< 138. 가치 (3) >

한 점을 중심으로 천천히 회전하는 구름.

그와 함께 모이는 마력과 이윽고 내려친 한 줄기 번개.

푸른빛 번개는 섬광처럼 번뜩이며 지상에 거대한 상처를 남겼다.

하얀 눈 먼지가 일어나 안개처럼 주변을 흐릿하게 만들었으며, 올리버가 만든 얼음벽은 흔적도 없이 날려버렸다.

남은 거라고는 움푹 파여 그을릴 대로 그을린 얼음 지대뿐.

멀린은 조금 과했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신경을 꺼버리며 번개가 내리친 자리에 다가갔다.

손짓을 통해 가벼운 바람을 일으켜 눈먼지를 치우자 아무것도 남지 않은 땅이 보였다.

“내가 너무 과대평가했나? 아니지..…. 그렇다 해도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나?”

그때였다.

움푹 파인 얼음 땅 아래에서 무엇인가 튀어나왔다.

증오의 탄환으로 멀린은 예상치 못한 공격에 뒤로 한 발짝 물러나 종이를 한 장 찢어 가볍게 막았다.

위력은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의표를 찌르는 공격.

상황을 파악하는 도중 무엇인가 멀린의 발목이 붙잡았다.

얼음과 눈이 지저분하게 묻은 손이 땅 아래에서 튀어나와 멀린의 발목을 붙잡은 거였다.

"호......."

짧은 감탄을 내자 손은 멀린을 아래로 잡아당겼다.

멀린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은 채 얼음 땅 밑으로 끌려 들어갔고, 그 모습은 마치 흡사 개미지옥에 빠진 개미와도 같았다.

몇 초간의 침묵이 일더니 쾅一! 거리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지면에서 빙산이 솟구치며 두 명의 사람을 토해냈다.

멀린과 올리버로, 멀린은 빙산 꼭대기에 당당하게 서 있었으며, 올리버는 내동댕이쳐진 듯 바닥 위를 나뒹굴었다.

어느새 올리버의 옷은 걸레짝이 되었으며, 몸에는 가벼운 타박상과 찰과상이 가득 생겼다.

아니, 멀린을 상대한 것으로 이 정도면 다행이려나?

어쨌건 올리버는 필사적으로 비틀비틀 일어났다. 멀린을 상대로 한순간도 자세를 흩트릴 수 없었다.

이미 체력이 바닥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럴 수 없었다.

“대단하구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 고맙게도 멀린이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

올리버는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무엇이 말씀이신가요?”

“내가 번개로 내리찍으려고 할 때, 그 틈을 타 얼음 마법에 개입해 통제권을 빼앗은 다음 땅속을 들어가지 않았소? ....대단하오. 진심으로.”

얼추 숨을 고른 올리버가 대답했다. 몸에 한기가 점점 밀려왔다.

“칭찬 감사합니다. 살려고 애쓰다 보니…..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 좋았다. 남을 깎아내릴 때 많이 쓰는 표현이지. 운도 결코 그냥 따라주는 게 아닌데 말이오. 진심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하오. 보통 이 정도로 힘에 차이가 나면 사람들은 절망해 쉽게 포기하고 그러거든. 늙은이가 이런 말 하면 안 되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근성이 없소.”

“아직 죽고 싶지 않아 필사적인 것뿐입니다. 알고 싶은 게 많거든요.”

“무엇이 그리 알고 싶소? 무엇이 그리 궁금해 이토록 애를 쓰는 것이오?”

멀린이 자신의 몸을 둘러싼 타겟팅을 가리키며 말했다.

최대한 들키지 않게 설치했는데, 참으로 눈치가 빠른 분이었다.

올리버는 한 손에 마력, 다른 한 손에 감정을 추출해 그대로 땅에 댔다.

마법으로 땅에서 집채만 한 얼음을 뽑아냈고, 감정으로 그 얼음을 둘러 타겟팅을 덧씌웠다.

그런 다음 멀린 주변에 박아놓은 타겟팅과 연동시켜 4면으로 거대한 얼음덩어리를 날려 보냈다.

“허……."

콰과과과과광———!!!!

산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얼음이 서로 부딪혀 부서졌다.

커다란 충격과 함께 뿌연 눈과 얼음 조각이 멀린 주변을 새하얗게 뒤덮었다.

상식적으로 보자면 도저히 살아남을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지만, 문제는 멀린이 상식으로 계산되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

올리버는 양손으로 감정을 추출해 그림자에 넣은 후 좌우 양쪽으로 펼쳐 주변을 빙 포위한 후 그 중심을 향해 바늘처럼 작고 수많은 쉐도우 스파이크를 발동시켰다.

파바바바바바바바바바바바바바바바바밧——!!

공기를 찌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어디 있을지 모를 멀린을 공격했다.

그런데 웬걸.

손맛이 느껴지긴커녕 올리버 앞으로 보랏빛 마법 포털이 생기더니 그대로 수많은 쉐도우 스파이크가 올리버를 찔렀다.

“끄윽….!!”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수에 집중하느라 질은 낮춰 수십 개의 쉐도우 스파이크 중 두세 개만 블랙 슈트를 뚫고 들어왔다는 거였다.

통증에 잠시 숨을 돌리는 찰나, 커다란 바람이 불어 멀린이 있던 자리의 눈먼지가 잦아들었다.

그러자 보라색 포털을 도넛처럼 주변에 두른 멀린이 서 있는 게 보였다.

기껏해야 방어 마법으로 막을 줄 알았는데, 방어뿐 아니라 반격까지 동시에 하다니.

경험 역시 올리버를 훌쩍 앞서 나갔다. 그렇다고 절망할 생각은 없었지만.

“미니언.”

처음 땅속에 들어갔을 때 심어둔 미니언 다섯 기가 올리버의 부름에 솟아올라 멀린의 머리 위에서 폭격하듯 증오의 탄환을 뱉어댔다.

멀린은 이 역시 미리 간파한 듯 종이를 다섯 장 찢어 던졌다.

쏟아지는 증오의 탄환을 가르며 미니언이 반으로 쪼개졌다.

모든 공격이 허무하게 끝났다. 그래도 괜찮았다.

이 정도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건 진즉에 알았으니.

[블랙 슈트(black suit)]

[래이 더 파운데이션 (lay the foundations)]

[버닝 라이프(burning life)]

[머슬 업(Muscle Up)]

[테러블 앵그리(terrible anger)]

[엔도런스 스킨(endurance skin)]

올리버는 감정과 생명력, 마력을 한데 엮은 블랙 슈트를 두른 다음, 그 위로 수많은 질병 계열 흑마법을 덧씌웠다.

생명력을 대가로 신체 능력 및 공격력을 비약적으로 높이는 질병 계열 흑마법이 덧씌워질 때마다 블랙 슈트를 구성하는 생명력은 눈에 띄게 타들어 가며, 색이 짙어지고, 외형도 흉폭하게 변했다.

올리버는 그 상태로 달려들었다. 오래 끌어선 안 됐다.

파바바바바바방——팡!!

땅을 딛는 발길질에 대지를 흔들리며 올리버는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온몸의 무게와 힘을 실어 멀린을 향해 쿼터스태프를 내질렀다.

상당히 빠르게 접근했음에도 멀린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책을 고쳐 잡아 쿼터스태프의 공격 방향에 맞춰 책을 휘들렀다.

캉———————!!!!

거대한 질량을 가진 두 물체가 부딪히듯 소리와 함께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지고, 멀린이 올라선 빙산에 금이 갔다.

“허허..…! 아주 제-”

-[블랙 재블린]

올리버가 쿼터스태프에 블랙 재블린을 덧씌워 찌르는 공격력을 한층 높였다.

그와 함께 방패 겸 망치로 휘두르던 두꺼운 책은 우직- 소리와 함께 찢어지며, 그와 동시에 멀린의 가슴이 쿼터스태프에 꿰뚫렸다.

비록, 얼음으로 만든 분신에 불과했지만.

“아, 역시..…."

멀린의 얼음 분신이 깨짐과 동시에 빙산이 터지듯 깨지며 종이 세 장이 쏟아져 올리버를 공격했다.

팔뚝과 허벅지, 옆구리로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타격을 줬다.

블랙 슈트가 가볍게 찢어지며 올리버는 저 멀리 날아가 그대로 바닥에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온몸이 말 그대로 욱신거렸다.

하아. 하아. 올리버가 숨을 몰아쉬며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나 정말 체력이 바닥났는지 무릎 끓고 엎드리는 것이 한계였다.

빙산이 반으로 쪼개지며 그 안에 있는 멀린이 걸어 나왔다.

그는 조금도 지쳐 보이지 않았다.

“..…혹시, 그것도 얼음 분신이신가요?”

“글쎄올시다. 그건 젊은 친구께서 알아내셔야 할 문제 같소. 못된 어른들은 결코 진실을 알려주지 않소. 그게 자기한테 유리하니.”

“못된 어른요?”

“나 정도쯤 되는 인간은 대부분 못될 수밖에 없소.”

“친절하시네요….. 그런 걸 가르쳐주시다니.”

"......."

“책방 손님으로 책방 주인께 질문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해보시오.”

“문득 궁금해진 건데, 어르신께서는 왜 힘을 인간의 가치 척도로 삼으신 겁니까?”

“바보 같은 질문이구려. 힘이 인간의 가치이기 때문이오.”

“어리석어 그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좀 더 쉽게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멀린은 올리버를 잠시 바라보다 말했다.

“……어떻게 이 당연한 이야기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구려.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어봐도 되겠소?”

“예, 괜찮습니다.”

“그렇다면 그대가 구한 아이들을 예로 들겠소.”

“로스번요?”

“그렇소. 그대는 그 아이를 왜 구한 것이오.”

“대단한 아이니까요. 용감하고, 의지도 있고, 감정도 예쁘니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다른 아이들의 맏형 노릇하는 모습이 보기 좋더구려. 자기도 어려운 처지에.….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그 아이는 아무 힘 없는 고아에 불과하오. 널리고 널린 그런 고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요.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으나, 그건 정말 보기 드문 경우에 불과하오. 그 증거로 로스번 같은 아이들은 세상에 수없이 많지만, 대부분은 그 처지를 못 벗어나오. 그게 그 아이들의 가치인 거요. 힘이 없기에. 불편하지만 그게 진실이지.”

올리버는 멀린이 과거 했던 말이 떠올랐다.

대다수 사람은 진실을 불편하게 여긴다는.

“어째 좀 이해가 가시오. 젊은 친구?”

“..…반은요.”

“반?”

“예, 이성적으로는 그게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고아원에서도 광산에서도 이후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도 대부분 어르신이 말한 대로였거든요. 하지만, 동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째서요?”

“봤기 때문입니다. 나약하지만, 패배하지만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을."

올리버가 마리, 전격 마법사, 조셉, 캔트, 머피, 에디스, 제인, 던칸 등등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들은 약하거나 혹은 올리버에게 패했지만, 그들 나름대로 가치 있고 아름다웠다.

“무엇보다. 힘이 세야지만 가치 있다는 세상은 뭐랄까……. 시시한 세상이지 않습니까?”

멀린은 올리버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손뼉을 쳤다.

짝- 짝- 짝-

절제된 감정의 박수 소리는 분위기를 환기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거, 멋진 말이오. ‘시시한 세상이지 않습니까?’ 진짜 멋진 말이오. 내가 여자였으면 반할 정도로. 요즘 같은 세상에 맨정신으로 그런 말을 하는 젊은이가 있을 줄 몰랐소.”

“그렇습니까?”

“그렇소. 그런 멋진 말을 지껄이는 데는 그만한 능력을 증명해야 하거든. 그렇지 못하면 잔혹한 비웃음을 받소. 패배자의 개소리라고 말이오. 아이러니하지 않소? 이상을 말하기 위해선 현실적인 힘이 필요하다는 게.”

아……. 올리버는 뭔가를 깨달을 거 같았다.

무슨 말을 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는. 당연하지만 지금 이 순간 피부에 와 닿게 느껴졌다.

“그렇군요.….”

“그렇소.…. 그런 의미에서 묻겠소. 계속 나와 싸우겠소? 이쯤에서 그만둬도 되오. 볼 수 있는 건 다 본 것 같으니.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 덤비는 모습도 충분히 만족스럽고. 뭣보다 젊은 친구 상태가 이제 영 아닌 거 같은데.”

멀린이 올리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흩으며 말했다.

실제로 올리버의 상태는 영 아니었다. 옷은 이미 넝마가 됐고, 온몸이 반쯤 녹은 눈으로 범벅이 되었다.

하지만 올리버는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피곤하였음에도, 멀린의 말이 신경 쓰여서 그럴 수 없었다.

“..…만족스러우셨습니까? 저와의 싸움?”

멀린이 가만히 생각하다 엄지와 검지를 살짝 모았다.

“아주 아슬아슬하게 합격선이오.”

“그럼, 조금만 더 싸우겠습니다. 도와주신 것이 아깝지 않게요.”

“오, 그럼 좋기는 하겠는데, 그 상태로 싸울 수 있소?”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올리버가 그 말과 함께 품 안을 뒤졌다. 싸우느라 안이 엉망진창이 돼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잃어버렸나 싶은 그 순간 손에 무엇인가 잡혔다.

“그건..…."

“필거렛 입니다. 하나만 잠시만….”

올리버가 필거렛을 힘겹게 입에 물며 마력을 추출해 손에 작은 불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입으로 있는 힘껏 빨아 마셨다.

그와 함께 폐 속을 타고 들어오는 연기.

연기 속에는 던칸의 삶과 죽음 그리고 삶의 기억과 감정이 농축되어 있었다.

올리버의 얼굴에 작은 요동이 일었다.

[헬 서먼(Hell Sum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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