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 가치 (2) >
눈을 덮친 섬광.
그와 함께 중력이 사라진 듯 몸이 붕 뜨더니 올리버는 강렬한 바람이 사방에서 몰아치는 곳으로 떨어졌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정신이 없었다.
“괜찮으시오? 젊은 친구. 눈뜨시오.”
시야를 회복한 올리버가 멀린의 말대로 조심히 눈을 떴다.
눈앞에 이전과 전혀 다른 장소가 펼쳐졌다.
산은커녕 언덕조차 없는 탁 트인 평지, 구름이 가득 낀 우중충한 하늘, 푸른빛이 섞인 채 내리는 굵은 눈송이.
심지어 가만 보니 올리버가 디디고 있는 땅도 진짜 땅이 아니라 거대한 얼음이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에 올리버가 비틀비틀 일어나며 물었다.
“어르신. 여기는 어디인지요?”
“세상 끝 얼음의 땅이오. 세계를 정복한 연합 왕국은 물론, 인류의 그 누구도 정복하지 못한.”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정복하지 못한 이유는 얼추 알 것 같았다.
넓긴 했지만, 사방에 있는 거라고는 얼음과 눈, 그리고 하늘과 얼음 땅, 눈에 맺힌 순수한 마력뿐이었다.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었다.
“..…죄송하지만 저를 여기로 데려오신 이유가 무엇인지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온몸을 마력으로 덮은 멀린은 춥지 않은 듯 평범하게 말했다.
“아까 전에 말했지 않았소. 한번 붙어보자고 데려왔소. 주위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면 여기가 가장 적합하거든.”
올리버는 멍하니 있다 대답했다. 자신이 뭔가 놓친 게 있나 싶었다.
“죄송하지만, 어르신.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무엇이 이해 안 가시오?”
“제가 어찌해 어르신과 싸워야 합니까?”
“내가 원하기 때문이오.”
“왜 저와 싸우시길 원하시는 건지요?”
“음.…. 하긴 말해줄 필요가 있을지도. 우선 한가지 못 박고 가겠소. 난 나보다 강한 자를 찾는 변태는 아니오. 그냥 알고 싶을 뿐이오.”
“무엇을 말씀입니까?”
멀린이 올리버를 정중히 가리켰다.
“그대의 가치를 말이오.”
“…가치요?”
“그렇소. 내가 수고를 들여가며 구해준 사람이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지 알고 싶소. 사람이라면 다들 품는 감정이지.”
“그렇습니까?”
“그렇소. 이왕이면 가치 있는 사람을 구하고 싶은 법이지. 그런 의미에서 대답해 보시오. 그대는 사람의 가치가 어디서 오는 거라 생각하오."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그렇다고 당황한 건 아니었다.
마음속으로 구체적으로 품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올리버 역시 무의식적으로 인간에게 가치를 부여하고 매겼다.
그렇기에 전격 마법사와 조셉, 던칸을 적임에도 존중한 거였고, 조도 마무리 짓지 않고 살려둔 거였다.
올리버 역시 사람의 가치를 매기고 있었다. 문제는 이를 어떻게 말할지였다.
“음……. 감정이요.”
“감정?”
“예, 용기나 의지, 희망, 욕망, 야심, 인내 같은 거요.”
“흑마법사치고는 아주 낭만적인 대답이구려. 하지만 싫지 않아. 나와 관점이 다르지만.”
“어르신께서는 사람의 가치를 어디로 두시죠?”
“두말할 것도 없이 힘이요.”
“힘….. 말씀입니까?”
“그렇소. 다만, 여기서 주의할 게 있소. 내가 말한 힘이란 단순히 완력과 더 강력한 화력의 마법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요. 그것도 있지만 좀 더 포괄적이지.”
“잘 이해가 안 갑니다.”
“내가 말한 힘이란 다양하오. 아까 전에 예로든 완력과 마법일 수 있지만, 때때로 돈일 수도 있고, 세속적인 권력, 외모, 매력, 지혜, 지식, 능력, 인맥일 수도 있소. 하지만 이 모든 것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같소. 무엇인가 하려고 했을 때 이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요. 일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는 무언가 말이오.”
뭔가 모호한 말 같았지만, 올리버는 희미하게나마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올리버는 이번 마텔 건으로 자신이 엄연한 약자임을 깨달았다.
주변에서 해결사 다크호스라고 떠 받들어줘도 올리버는 객관적으로 보면 이 도시에서 약한 존재였다.
정말 강한 존재였다면, 굳이 힘을 쓰지 않고, 대화를 통해 마텔과 협상할 수 있었을 테니.
바로, 눈앞의 남자처럼 말이다.
그러자 문득 에디스의 말이 떠올랐다. R구역의 거물 중 하나인 에디스의 말이.
그는 해결사를 길바닥에서 핏값 고깃값이나 주워 먹고 사는 존재라고 칭했다.
그때는 올리버도 동의한다고 그냥 넘겼지만, 가만 생각해 보니 자신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거였다.
에디스의 말은 해결사의 본질을 꿰뚫는 거칠면서도 날카로운 말이었다.
그와 함께 왜 던칸이 핑크맨을 나와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사무소를 차리려는 건지도 이제는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광산을 떠나고, 조셉 패밀리를 떠나 이곳 란다에 정착하며 올리버는 자신이 세상에 대해 어느 정도 배웠다고 자부했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었다.
아직도 올리버는 제대로 아는 게 없었다.
“대충 내 말을 이해한 거 같소. 표정은 그대로긴 하지만. 내가 또 헛다리 짚은 것이오?”
멀린의 물음에 올리버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려. 다시 말하지만 난 이 힘을 인간의 가치 척도로 삼고 있소. 가끔씩 착한 사람들이 이를 부정하지만, 실제로 세상 사는 걸 둘러보면 그렇지 않거든.”
“혹시 예를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음, 어렴지 않소. 성격이 어지간히 더러운 게 아니면 힘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좀 더 너그러운 대우를 받소. 때때로 하나의 매력으로 여겨지기까지 하지. ‘강한 친구이기에 저런 것이다’ 같은….. 실상은 그냥 성격이 더러운 건데. 젊은 친구는 그런 적 없소? 남들에게 너그러운 대우를 받은 적 말이오.”
올리버가 고민해봤다….. 생각보다 많은 것 같았다.
“있는 것 같구려….. 나 역시 그와 같이 이치로 그대와 싸워보려는 것이오. 그대의 가치는 싸움을 통해 알 수 있을 것 같으니.”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이 싸우자는 이야기가 이제는 얼추 납득됐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어르신.”
“무엇이오. 슬슬 시작했으면 하는데, 오래 서 있으면 무릎이 시큰거리오.”
“전 어르신과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절 도와주신 고마운 분인지라.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멀린이 올리버를 빤히 바라보다 말했다.
“..…그렇소? 그런데, 난 딱히 싸워달라고 부탁한 게 아니오. 통보하는 거지”
그 말과 함께 멀린이 손을 들었다.
허공에서 손톱만 한 작은 종잇조각들이 날아오더니 멀린의 손에서 모여 책으로 합쳐졌다.
“오히려 다른 걸 부탁하고 싶소.”
"....?"
“가급적 죽지 마시오."
그 말과 함께 멀린은 책을 한 장을 찌익- 찢어 그대로 올리버를 향해 던졌다.
쏴악一!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종이가 올리버를 향해 총알처럼 빠르게 날아왔다. 올리버는 그 종이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공격. 어떻게? 막아야 하나? 피해야 하나?’
순간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착각이 들며 올리버는 머릿속으로 수많은 계산을 했다.
결국, 올리버 감정을 추출해 전신에 두른 후 가까스로 피했다.
정면으로 막자니 종이에 들어간 마력의 농도가 심상치 않았다.
쉭-! 바람을 가르며 옆으로 날아간 종이.
올리버는 스쳐 지나간 종이를 뒤돌아봤다.
종이는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다가 쾅一! 소리와 함께 땅이 뒤집히며 눈먼지를 일으켰다. 흡사, 폭격이라도 맞은 거 같았다.
".....!!"
충격적인 위력.
고작 마력을 담은 종이 한 장일 뿐인데.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이를 사용했을 때 멀린의 동작이 그리 크지도 오래 걸리지도 않은 거였다.
“막지 않고 피하다니. 좋은 판단이었소.”
올리버가 홱 하고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세 장의 종이를 찢은 멀린이 던질 자세로 기다리고 있었다.
“오..…. 이런.”
멀린이 팍! 하고 종이 세 장은 던졌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힘 조절을 한 듯 방금 던진 종이보다 마력 농도가 낮다는 거였다.
그래도 엄청난 양이었지만.
올리버는 감정을 추출해 검지손가락을 앞으로 내밀어 감정과 눈에 신경을 집중했다.
[해잇 불릿]
올리버가 증오의 탄환을 쐈다.
영격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럴 수준이 아니라는 건 이미 진즉에 알았으니.
‘하지만 궤도를 트는 거라면..….'
다행히 바람이 통한 건지 증오의 탄환은 날아오는 종이의 날이 아닌 면을 때려 약간이나마 궤도를 틀 수 있었다.
덕분에 크게 움직이지도 않고도 공격을 전부 피할 수 있었고.
아마, 올리버가 피하고자 크게 움직였으면 그 순간 멀린이 공격해 들어와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을 터였다.
“그럭저럭 괜찮은 방법이었소.”
저 멀리서 들려야 할 멀린의 목소리가 올리버 바로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와 함께 다리 한쪽에 뜨뜻한 감각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깔끔하게 찢긴 블랙 슈트와 그 아래로 피를 흘리는 자신의 허벅지가 보였다.
"윽......!"
올리버가 비틀거리며 신음했다.
상처 자체가 그리 깊지도 통증이 심한 것도 아니었지만, 정신적 충격은 컸다.
블랙 슈트가 이런 식으로 단번에 깨진 것은 이번이 세 번째.
첫 번째는 오염 구역의 퍼펫이었고, 두 번째는 마텔에서 만난 금발 마법사였다.
그렇다 해도 그들 역시 쉬이 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멀린은 너무나도 쉽게 해냈다. 하려고 하면 목도 벨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느새 원래 자리 반대편에 서 있는 멀린이 말했다.
“많이 아프오? 그렇게 깊게 안 벴는데?”
하아. 하아….. 올리버는 압도적인 힘의 격차를 느끼며 멀린을 바라봤다.
그가 지금 자신을 조롱하거나 놀리는 거라고는 생각 안 했다. 정말 힘의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나는 거뿐이었다.
“……엄청 강하시군요.”
“그렇소. 혹시, 겁먹었소?”
“약간요..…. 하지만 그래도 일은 하겠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올리버는 한 손으로 시험관에서 감정을 상당량 추출해 그림자에 넣었다.
[쉐도우 텐타클]
그와 함께 올리버의 그림자가 힘을 얻으며 멀린을 향해 빠르게 달려들었다.
평소 사용하던 것보다 훨씬 빠르고 강하게.
딱-
멀린이 손가락 끝에 마력을 끌어모으곤 손가락을 튕겼다.
그와 함께 술식이 발동하며 거대한 얼음벽이 솟구쳐 거대한 방벽을 형성했다.
마텔의 대머리 마법사와 같은 방어법. 두 번은 통하지 않았다.
“..…음!”
올리버가 그림자의 출력을 높여 얼음 장벽을 공격했다.
그림자 촉수와 칼날, 말뚝은 거대한 얼음 장벽과 격돌해 얼음 조각과 눈을 허공에 흩뿌리며 박살 냈다.
마력을 머금은 얼음이라 보통 단단한 게 아니었지만, 어찌어찌 박살 내 깨부술 수 있었다.
우르르르르..…. 쾅-! 콰쾅一!!
얼음 장벽이 부서짐과 동시에 그 뒤에선 멀린이 보였다.
올리버는 그를 향해 공격을 날렸다.
앞으로 쭉 뻗어가는 그림자.
멀린은 당황했으며, 그와 함께 그림자가 멀린의 몸을 꿰뚫었다.
"......응?"
“왜 그러시오?”
“어르신이....! ....응? 어르신?”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멀린.
올리버가 깜짝 놀라며 그를 봤다.
“얼음 마법과 골렘 제조 기술을 기반으로 한 분신 마법이오. 제법 잘 만들었지?”
“예, 그렇네요."
올리버가 그 말과 동시에 출력을 최대로 높여 쿼터스태프를 휘둘렀다.
적당히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쾅————!!!
올리버가 휘두른 쿼터스태프는 멀린이 든 책에 막혔다.
형태만 책이지 마력 덩어리나 다름없었다.
“반응 속도가 좋구려.”
멀린이 올리버의 얼굴 바로 앞으로 손을 들었다.
그와 함께 거대한 소리와 함께 충격파가 터지며 올리버를 저 멀리 날려버렸다.
저 멀리 날아간 올리버는 얼음과 눈이 쌓인 땅을 나뒹굴었다.
블랙 슈트 너머로도 추위가 생생히 느껴지며 그뿐 아니라 감각 기관까지 뒤집히며 세상이 핑글핑글 돌았다.
치명적이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큭.....! 움직여야.....'
멀린이 느긋하지만, 숨 쉴 틈 없이 공격했다.
책을 펼쳐 높은 밀도의 마력탄을 난사했다.
올리버는 감정이 아닌 마력을 추출해 얼음에 가져다 댔다.
[아이스 월(ice wall)]
솟구치는 얼음 장벽이 날아오는 마력탄 폭격을 막아줬다.
그럼에도 위력이 상당해 얼음 장벽이 흔들리며 요동쳐 이대로는 잠시만 버틸 뿐이었다.
피해야 했다. 어디로든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움직이려는 찰나 올리버는 자신의 팔과 다리가 봉인된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어느새 멀린의 마력을 머금은 얼음이 올리버의 몸을 감싸 붙잡은 것이었다.
쿠르르르르릉-
그와 함께 요동치는 하늘.
올리버가 고개를 들었다.
하늘이 한 방향으로 회전하며 서서히 마력이 집중됐다. 이건..….
“….오, 이런.”
회오리처럼 도는 구름 한가운데에서 푸른색 섬광이 빛나며 지상을 내리찍었다.
콰아아아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