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마텔 (1) >
"지금 뭐 하는 건가요?”
사복 차림의 요안나. 그녀는 초콜릿 상자를 내민 올리버를 보며 물었다.
"어..…. 선물요?”
올리버가 확신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
"......."
어색한 침묵이 감돌기를 잠시 요안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장난치는 건가요?”
"제가 실수한 건가요?”
"느닷없이 초콜릿을 주는 저의가 뭐죠?”
"여성분들은 초콜릿을 좋아한다고 해서-”
“-이것 봐요.”
요안나가 낮지만 단호하게 소리쳤다.
"전 여자가 아니에요. 성기사죠. 지금 절 놀리려고 부른 건가요?”
아..…. 요안나는 진심으로 불쾌해하고 있었다.
마음속 깊이 품은 민감한 부분인 듯.
올리버는 정중히 사과했다.
"그.… 죄송합니다.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셔서요?”
"도대체 누가요?”
"제가 아는 책방 어르신께서요.”
"책방..…어르신요?”
"예. 중고 책방을 운영하는 어르신인데, 초콜릿을 선물로 가져가라고 말씀하셨거든요.”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그런 거예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질문에 대답한 것뿐인데…. 어쨌건 불쾌하게 해 드렸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올리버가 그리 말하며 초콜릿 상자를 도로 가져갔다.
요안나는 말없이 초콜릿을 바라봤다.
올리버가 다시 물었다.
"음.… 초콜릿 드실래요?”
“..…아뇨, 됐어요.”
"저는 초콜릿을 안 먹어서요. 딱히 쓸데가 없어서. 이왕 사 온 거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요안나가 잠시 고민하더니, 이윽고 눈을 질끈 감으며 초콜릿을 받았다.
"뭐..…. 어찌 됐건 고마워요.”
"아뇨, 저야말로 감사하죠. 이리 만나러 와주셨으니…. 그럼 성당으로 들어가실까요? 아, 그런데..…."
올리버가 성당을 보며 난감하게 말했다.
현재 성당은 갑자기 예배를 열어 보는 중. 저기서는 대화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음..…. 성기사님.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다른 데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예배를 보고 있는 성당에서 대화를 나누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
"동감이에요.…. 혹시 적당한 데 아시나요?”
올리버가 품 안에서 쪽지를 꺼냈다.
책방 노인이 알려준 말을 그대로 받아적은 것으로, 여성과 같이 가기 적당한 레스토랑과 상대 여성에서 15분 간격으로 해야 할 칭찬이 적혀 있었다.
대부분 예쁘다고 칭찬하는 것으로, 이걸 도대체 왜 적은 건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갔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건데, 레스토랑은 어떠신지요? 책방 어르신께서 알려주신 레스토랑이 근처에 하나 있기는 한데.”
"책방 어르신이라면, 아까 전 초콜릿을 선물로 주라고 하신 분요?”
"네."
"그럼 안 가고 싶은데요.”
올리버는 왠지 모르게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럼 공원은 어떻습니까?”
“….공원요?”
"예, 좀 멀리 가야 하긴 하지만 한번 가 보고 싶은 곳이 있는데 어떻습니까? 꽤 예쁜 곳입니다.”
***
딱- 딱- 딱-
택시에서 내린 올리버가 요안나와 함께 공원에 도착했다.
그냥 공원이 아니었다.
과거 조셉의 명을 받아 처음 온 공원으로, 처음 왔을 때처럼 무수히 많은 사람이 있었다.
아기 천사상이 오줌을 싸는 분수 주위로 아이들이 뛰어다녔으며,
근처 부스에서는 핫도그나 아이스크림을 팔았다.
지긋한 노신사는 벤치에 앉아 신문을 읽는가 하면, 부부로 보이는 한 쌍은 아이 손을 잡고 어딘가로 피크닉을 떠났다.
다들 즐거워 보였다.
알파벳 뒤 순서인 W, T, X구역과 비교할 수 없게 말이다.
"의외네요."
말없이 따라온 요안나가 대쯤 입을 열었다.
"무엇이 말씀이시죠?”
"이런 곳을 좋아할 줄 몰랐거든요.”
요안나의 말은 진심이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궁금했다.
"전 이런 곳도 좋아합니다. 감정들이 밝고 가벼워….. 나름대로 예쁘거든요.”
"예쁘다고요?”
"예, 감정요….. T, X구역, 와인햄에 비하면 예쁘죠. 혹시 아십니까?”
"아냐니, 뭘요?”
"이곳은 왜 T, X구역, 와인햄과 다른지. 여기는 밝은 데 반해 그쪽은 감정들이 대부분 어둡거든요. 옛날부터 궁금했는데..…. 혹시 성기사님은 그 이유를 아십니까?”
요안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저도 정확히는 잘 몰라요. 설명하기 쉬운 문제도 아니고요. 그래서 늘 기도하며 고민하죠.”
썩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었지만, 올리버는 딱히 따지지 않았다.
요안나는 진심을 이야기했기에. 애당초 그걸 물으려고 만난 것도 아니었고.
"그렇군요. 계속 걸으시면서 이야기 나누시겠습니까? 아니면 벤치에라도 잠시 앉으시겠습니까?”
요안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주변을 감상하였는데, 그러던 중 아빠, 엄마와 함께 걸어가는 아이에게 한순간 시선이 고정됐다.
"좀 앉죠. 피곤하데.”
"알겠습니다. 그럼, 저기 앉을까요?”
사람이 없는 벤치 구석을 올리버가 가리켰다.
"예, 좋아요.”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올리버가 요안나에게 그리 말하곤 잠시 자리를 비웠다.
잠시 후, 올리버는 아이스크림을 가지고 왔다. 부모와 함께 걷던 아이가 들고 있던 초콜릿 아이스크림으로.
"이건….?”
"아이스크림요. 싫어하시나요?”
요안나가 잠시 머뭇거리다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받았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대답과 함께 올리버는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 먹었다.
차갑고, 달콤했다. 딱 그뿐이었다.
“….아이스크림 좋아하나요?”
"글쎄요. 저는 이번에 처음 먹어 봅니다.…. 차갑고, 달콤하네요.”
올리버가 아이스크림을 다시 베어먹었다.
요안나도 아이스크림은 작게 한입씩 먹었다. 어째 기뻐 보이면서도 씁쓸해 보였다.
“….맛없나요?”
"아뇨, 맛있어요…..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이렇게까지 해주는 거죠?”
"티 났나요?”
"네..…. 경전에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많나 보죠?”
"예.”
올리버가 부정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경전을 몇 번이나 완독했지만,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신이 이 책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역시 가장 큰 문제는 이야기의 해석 부분이었다.
"경전은 원래 이해하기 어려워요. 하지만 끊임없이 읽고 가르침을 구하다 보면 언젠가 깨달음을 얻게 될 거예요."
"그럼, 다행이긴 하지만 그래도 잘 이해가 안 되네요.”
"이해하죠. 그래도 올리버 씨는 잘하고 계세요. 성당에도 계속 나오니까요.”
"아, 그건 성기사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만나 뵙고 싶긴 하지만, 달리 만날 방법이 없어서요.”
또 이상한 말을 했는지 요안나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난감하면서도 썩 싫지 않은 듯.
그녀가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
".....혹시 저 말고는 없나요?”
"예?"
"만나고 싶은 사람요. 아니면 만나는 사람 중에 즐거운 사람은 없나요? 가령, 그 책방 어르신은 어떤가요? 그분은 친구인가요?”
친구라…..
"글쎄요. 이야기는 나눴지만, 친구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왜 모르죠?”
"친구란 게 뭔지 잘 모르겠거든요.”
사전적 의미는 대충 알았지만. 올리버는 자신에게 친구가 있는지 의문이었다.
그 단어와 자신이 아는 사람들을 대입해 보려고 했으나, 머리에서 오류가 일어난 듯 엉키며 혼란만 주었다.
요안나가 말했다.
"친구란 별 게 아니에요.”
"그런가요?”
"예, 서로 이야기 나누어 웃을 수 있다면 그것도 친구라 할 수 있고, 서로 도와줘도 친구라 할 수 있죠."
웃는 건 뭔지 모르겠지만, 도와주는 사람은 대충 몇 명 떠올랐다.
"절 도와준 사람이라면 몇 분 계십니다….. 생각보다 좀 있네요.”
"그래요? 그거 다행이네요.…. 그럼, 혹시 당신이 먼저 도와준 사람은 없나요?”
올리버가 먼저 도와준 사람이라..…. 올리버가 고민해봤다. 한순간 캔트가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처음 먼저 도와준 것은 캔트였고, 이후 두더지와 글립을 쓰러뜨린 것은 보답 겸 개인적인 호기심이었다.
물론, 캔트 본인은 가난한 형제를 세울 수 있는 게 올리버 덕분이라 했지만, 그 역시 캔트가 어떻게 할지 보고 싶어서 한 일에 불과했다.
도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좀 더 고민해봤다. 머피가 떠올랐지만, 그 역시 대가를 받은 거였고, 제인 역시 먼저 베푼 호의에 보답한 것뿐이었다.
그렇게 고민하던 중 이윽고 한 명 떠올랐다.
“....로스번요.”
"로스번.…? 그게 누구죠?”
"제가 머물던 여관에서 일하던 사람입니다.”
"뭘 도와줬죠?”
"글자랑 숫자를 가르쳐줬습니다.”
"글자랑 숫자요?”
"예, 배우고 싶다고 하길래 가르쳐줬죠.”
"대단하네요. 정말로요.…. 왜 도와줬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대단해서요.”
"대단하다고요?”
"예, 겁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서 제게 글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했거든요. 그거, 대단한 거잖아요."
"뭐, 그렇긴 하죠. 용기란 대단하고도 중요한 덕목이니.”
"예, 그리고 성기사님도 용감하셨습니다.”
"저요?”
"예, 혹시 저랑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요안나가 움찔거렸다.
아무래도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그건 올리버도 마찬가지였다.
하수도, 어둠, 막힌 길, 위기, 조셉 필거렛….. 그 필거렛을 핌과 동시에 흘러들어온 조셉의 기억과 감정을.
"예.…. 기억나요.”
"그때, 성기사님은 정말 용감하셨습니다. 또 아름다웠고요.”
"아름다운 빛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사람이 죽기 전 찬란하게 빛난다는 그 빛이요?”
"예, 성기사님도 빛내셨지만, 그 누구보다 용감하셨죠….. 괜찮으시다면 혹시 대답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때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전에 한 번 여쭤봤지만, 대답을 못 들어서요.”
올리버가 외투에 넣고 깜빡 잊은 돈을 다시 찾은 느낌으로 물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신을 생각했어요.”
"그게 전부였나요?”
“….그리고 제 동생들도 생각했어요.”
"동생? 동생이 있으신가요?”
"예, 친동생은 아니지만요.”
"...??"
"전 고아원 출신이에요.”
"...!!"
올리버는 놀랐다.
설마 요안나가 자신과 같은 고아 출신이라니.
딱히 근거나 이유는 없었지만, 올리버는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이상한가요?”
“아뇨.…. 이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놀랍군요.”
"뭐가 놀랍죠?”
"그 뭐랄까….. 성기사님은 고아 같지가 않으시거든요. 제가 아는 고아들이랑 많이 달라서요.”
요안나가 살며시 웃었다.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아요. 모두 신의 사랑스러운 자식이죠.”
"그런가요? 탄광 감독관님들은 고아가 신에게조차 버림받은 저주받은 존재라 하던데요? 그 탓에 저희는 죽어서도 지옥에 갈 거라고 했습니다.”
"그건 그들이 틀린 거예요. 신께서는 모두를 사랑해요.”
요안나가 확신을 품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가 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 신께서 제게 재능을 줘 모두를 지킬 수 있게 해주셨고, 더 나아가 당신과도 이리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해주셨으니까요. 당신도 이렇게 수많은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요. 그게 신께서 우릴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아니면 뭐겠어요?"
뭔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진 않았지만, 굳이 따지지 않았다.
따지기 약간 어렵다고 해야 하나?
올리버가 다른 질문을 하려는 찰나 요안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음..…. 올리버.”
"예?”
"오늘은 이만 헤어질 수 있을까요? 슬슬 저녁 시간이라 돌아가야 할 것 같거든요.”
올리버가 시계를 봤다. 확실히 저녁 시간 때가 다 됐다.
"아..….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죠. 혹시 다음에 언제 또 만날 수 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글쎄요? ….평소대로 P구역 성당에 나와 주시면 제가 찾아갈게요.”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먼저 연락드릴 방법이 없을까요? 다름이 아니라 정말 궁금하거나, 말씀드리고 싶을 게 있으면 바로 연락드리고 싶어서요. 딱 한 번이라도 좋습니다.”
요안나는 그 말에 잠시 고민하더니, 이윽고 큰 결심을 하듯 말했다.
“..…정말 급한 일이면 P구역 성당 사제님께 말씀드리세요. 그럼 딱 한 번 와드릴게요. 제가 피치 못할 사정이 없다면요.”
"오.…. 그거면 충분합니다. 아주 감사합니다.”
***
요안나와 헤어지자, 해가 지평선 너머로 가라앉으며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저녁이 된 것이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
올리버도 오늘 하루를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집으로 돌아가 쉴 테지만, 올리버는 그러는 대신 즉석에서 목적지를 여관으로 변경했다.
이유는 다름 아닌 로스번을 만나기 위해.
한동안 완전히 잊고 지냈다가 요안나와의 대화 중에 다시 떠올랐는데, 그와 한 번 만나러 가겠다고 약속한 사실이 떠올랐다.
물론 한 번도 안 찾아갔지만.
약간 미안했다. 약속을 어긴 것 같아서.
그래서 뒤늦게라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여관을 방문하기로 했다.
여관은 여느 때처럼 노란 불빛을 쁌으며 1층에는 요리하는 냄새가 은은히 퍼져있었다.
"누구세..…어머. 오셨네요?”
여관 여주인이 올리버를 보며 말했다. 마치 올 줄 몰랐다는 태도였다.
"안녕하십니까? 잘 지내셨습니까?”
"예..…. 저야 물론 잘 지내죠. 당신은요? 온다고 할길래 안 와서 죽은 줄 알았어요.”
"일이 좀 있어서요…..."
올리버가 말끝을 흐리며 여관을 살펴봤다.
보통 이때쯤 감자포대를 옮기는 로스번이 나타날 차례인데, 어째서인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로스번은 어딨죠?”
“로스번요? 떠났어요.”
"떠나요?”
"예, 마탑 쪽에서 학생으로 후원해 주겠다고 해서요. 무슨 연구소라던데..…. 아, 마텔이라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