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일이 끝나고 (1) >
에디스 록과의 대화 후 열흘이 지났다.
올리버는 그 기간 중 닷새 동안 복합문화시설 <사파이어>에서 제인의 경호를 맡았다.
사실 말이 경호였지 그냥 쉬다 온 것에 불과했다.
에디스와의 대화 후 제인은 방안에 틀어박혀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고, 실질적인 경호 임무까지 핑크맨이 도맡았기에.
그러던 와중 에디스 역시 말없이 사라져버렸고, 올리버가 할 수 있는 것은 딱히 없었다.
그래서 올리버는 책이나 신문을 읽거나, 개인적인 흑마법 연습을 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중 경호 마지막 날 변호사를 대동한 에디스가 찾아와 정식으로 재산 일부를 양도하는 서류를 제인에게 내밀었다.
올리버는 그때만 제인의 곁을 지켰고.
그녀는 매우 차가운 태도로 사인하였으며, 그것으로 모든 임무는 끝났다.
하루에 두 번이나 죽을 뻔하다 끝마친 일치고는 어째 흐지부지한 감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기쁘기 그지없었다. 심심한 감은 있지만, 평화롭게 일이 마무리되는 게 좋지 않은가?
덕분에 올리버도 무사히 집에 돌아와 이리 흑마법 연습을 할 수 있었고.
파직——!!!
“—큭.”
올리버가 통증을 느끼며 손을 흔들었다.
뼈가 아리는 감각.
현재 감정과 생명력 그리고 마력을 뒤섞는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꽤 난항을 겪고 있었다.
감정과 생명력을 뒤섞는 건 약간 성가시다 뿐 그다지 어렵지 않았지만, 거기에 마력을 더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전혀 말이다.
던칸과의 싸움에서 실패한 건 전투 중이라는 다급한 상황 탓에 그런 줄 알았지만, 지금 다시 해보니 전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감정, 마력, 생명력. 이 세 개를 뒤섞는 건 몹시도 어려운 일이었다.
기껏해야 좁쌀만큼씩 섞어 억지로 찍어누르는 게 현재 최선이었다.
올리버는 처음으로 겪는 고난에 난감함과 함께 신선한 즐거움을 느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생각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 게 마냥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즐겁기까지 했다.
생소하고 신기한 것을 만난 즐거움.
만약에 이 고난을 극복하면 어떤 기쁨이 올지 상상이 안 갔다.
어쩌면 처음 조셉을 만나 감정을 다루는 법을 배웠을 만큼 감격스러울지도.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하군. 퍼펫 님이 그토록 꽁꽁 숨기고, 수많은 기구를 사용한 건 그냥 그런 게 아니라는 거……. 갑자기 죄송스러워지네.”
올리버는 진심으로 말했다.
아무리 죽을 수 있는 다급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만한 인공 영혼을 그냥 깨버려 사용하다니.
괜스레 퍼펫에게 미안해졌다.
그 정도 크기의 인공 영혼을 만든 거라면 보통 노력이 들어간 게 아닐 텐데.
"나중에 사과라도 해야 하나?”
올리버는 그리 말하고는 책꽂이에서 빈 공책을 꺼내 슥- 슥- 뭔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그 날 보았던 인공 영혼을 만들기 위한 기구와 장치.
완벽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대략적인 구조와 형태는 떠올랐다.
개중에 올리버가 아는 것도 몇 개 있었다.
하나하나 한두 푼 하는 물건이 아니었으며, 전부 다 합치면 수십억도 가뿐히 넘을 터였다.
당장은 꿈꿀 수 없는 장비지만. 그럼에도 올리버는 일단 기억나는 대로 그려나갔다.
혹시 모를 나중을 위해서 말이다.
"끼이이이이….."
그림의 거의 완성할 때쯤 실험실 한쪽 구석에서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도 짐승도 아닌 울음소리로, 그 발원지는 실험실 한쪽 구석에 놓인 탁자 위 시험관. 정확히는 그 안에서 요양 중인 차일드였다.
소리를 듣자마자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런 다음 차일드의 상태를 살폈다.
"무슨 문제 있나요?”
올리버의 질문에 차일드들이 끽끽대며 배고프다는 소리를 냈다.
올리버는 곧바로 시험관에서 생명력과 감정을 추출한 다음 또 다른 통을 꺼냈다.
철로 된 통은 우유통과 비슷했다. 그 안에는 하얀 우유 대신 투명한 액화 연료가 있었다.
정식 명칭은 ‘마석 액화 연료(hearthstone liquefied fuel)’로 줄여서 ‘HLF’ 혹은 ‘LF’라고 불렀다.
새롭게 개발된 마석 가공법으로 커팅이 아닌 액화시켜 사용의 편리성과 범용성을 높인 신식 기술의 결정체로.
올리버는 그 액체에 대고 손을 펼쳤다.
그런 다음 눈에 신경을 집중했다.
슈하하아아——!
추출되는 소리와 함께 투명한 마력이 올리버의 손안에 모였다.
처음 던칸과 싸울 때는 놀랍고 신기했지만, 이제는 꽤 익숙해졌다.
올리버는 아까 전에 했던 대로 감정과 생명력, 마력을 좁쌀 크기만큼 뜯어 뒤섞어봤다.
파직—! 파직—!
반발 작용이 일어나 통증을 줬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섞어 봤다. 그러자 차일드들이 끼익! 끼익! 거리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차일드는 감정, 생명력, 마력 뭐든지 맛있게 먹었지만, 그 세 개를 뒤섞은 인공 영혼을 가장 좋아했다.
여태까지 열심히 도와주고, 고생도 했기에 올리버는 번거로움을 감수하며 일일이 섞어줬다.
먹성이 좋아 밥을 먹이려면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지만, 그만큼 빠르게 회복하고, 성장해 손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겸사겸사 연습한다고 생각하면 됐으니.
‘그럼에도 좀처럼 실력이 늘지 않네.’
올리버가 아직 제자리걸음 중인 마력, 생명력, 감정 혼합을 상기하며 생각했다.
수십 번은 연습했음에도 실력은 처음 때랑 달라진 게 없었다.
웬만한 건 한두 번만 해봐도 감을 잡고 다섯 번 정도 하면 능숙해지는 것에 비하면 영 느렸다.
그보다 더 난감한 건 원인을 모르겠다는 거고.
하지만 올리버는 이에 실망하지 않았다.
이걸로 실망하기에는 아직 할 게 너무 많았으니.
차일드는 어찌어찌 잘 먹여 거의 회복한 상태지만 송장인형은 그렇지 못했다. 대부분 파손이 심한 상태였다.
특히, 선두에 세웠던 검사는 허리가 결딴나 폐기하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솔직히 그건 별문제가 아니야.’
올리버가 생각했다.
왜냐면 더 괜찮은 재료가 있었으니. 바로, 던칸.
현재 먹보 주머니에 보관 중으로, 아마, 검사를 대신해 더 좋은 송장인형이 될 수 있을 터였다.
문제라면 올리버가 송장인형을 처음부터 만들어 본 적이 없다는 거고.
약간 떨렸지만, 그것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글립의 일지와 퍼펫의 책을 통해 기초적인 방법은 알고 있었으니.
송장인형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비가 좀 비싸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그 역시 보수가 곧 들어오면 해결될 문제이기에 큰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진짜 문제는 인력.
모순된 말일 수 있으나 올리버는 혼자서 연구하고 싶은 동시에 도움을 받고 싶었다.
자잘한 뒷정리를 해주고, 송장인형 제조 중 보조적인 역할을 해줄 존재를 말이다.
실제로 글립의 일지와 퍼펫의 책에서 송장인형 제조는 적잖은 육체적 피로를 유발하기에 많게는 둘 셋의 보조 인력이 있는 게 좋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게 사람 하나를 통 채로 눕힌 채 작업을 해야 하니 자연스럽게 많은 힘이 들어갔다.
올리버는 제자를 들인 생각이 없었으니 이를 송장인형으로 해결해야만 했다.
보조 역할을 대신해줄 송장인형.
다행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송장인형은 기본적으로 재료가 된 육체의 스펙을 쓸 수 있으니,
조작계열 흑마법사나 의학에 지식이 있는 시체가 있으면 단숨에 고성능 보조를 얻을 수 있었다.
또 그런 시체는 블랙마켓을 통해 구할 수 있다고 했고.
"없는 게 없다더니….. 그럼 차일드도 하나 더 만들어야 하나?”
그때, 식사를 마친 차일드-퍼스트가 콕 콕 시험관에 부딪혀 올리버의 주의를 끌었다.
그런 다음 끼이익- 끼이익- 울며 뭐라 말했다.
마치 자신이 올리버를 도와주고 싶다고 말하는 거 같았다.
뭐, 그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차일드의 먹성이 워낙 좋아 유지비가 적잖게 들었으니.
아무 생각 없이 늘리는 건 경제적 관점에서 썩 좋은 일이 아니었다.
"생각해보죠.”
시험관을 살짝 문지르며 올리버가 말했고, 퍼스트는 똑같이 몸을 문지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기쁨의 빛을 뿜으며 말이다.
끽- 끽- 끽- 다른 차일드인 세컨드, 써드, 폴스가 불만스럽게 울었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올리버는 입에 손가락을 대며 다들 진정하라고 했다.
그런 다음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 외에도 또 뭘 해야 하지? 요안나 씨 만나서 질문도 좀 해야 하고, 책방에서 산 코드어 책도 다 읽었으니 다음 책을 사러 가..…. 아! 그리고 마리랑 다른 사람들 잘 있는지 수소문도 해야 하네.’
솔직히 멋대로 떠나 이제 와 수소문하는 것도 웃기긴 했지만, 올리버는 그럼에도 알고 싶었다.
다들 어떻게 지내는지. 상황만 볼 때면 다들 정신을 차리고 원래 대로 돌아온 것 같았다.
이는 기쁜 일이었다.
만약, 여유가 되면 한번 내려가 어떻게 지내는지 보고 싶기도 했다.
캔트를 다시 만났을 때의 그 재미를 느낄 수 있을까 해 말이다.
그것 외에도 에디스에게서 악마에 관한 책을 받으면 읽어봐야 했다.
가만 생각해보니 할 일이 참으로 많았다.
문제는 그중 대부분의 일은 보수를 받아야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점이었고.
슬슬 보수가 나올 때라는 생각이 들 찰나 때마침 신호음이 들려왔다.
삐— 삐— 삐—
포레스트가 준 통신장치. 올리버는 바로 받았다.
"안녕하세요. 예, 포레스트 님..…. 예, 그럼,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올리버는 그 말과 함께 통신장치를 끄곤 몸을 수건으로 닦았다.
그런 다음 양복으로 갈아입고 곧장 포레스트가 있는 포레스트 레스토랑으로 떠났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데이브 씨.”
달랑. 딸랑. 소리와 함께 열린 레스토랑. 언제나처럼 알이 반겨주었다.
"예, 반갑습니다. 알 씨. 포레스트 님 연락받고 왔습니다.”
"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저도 그것 때문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코코 양과 함께 계신 데 곧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올리버가 말했다.
보통 몇 분 정도 기다릴 때가 있었는데, 한시라도 빨리 보수를 받고 싶은 지금 상황에서 기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사무실로 들어가기 위해 식당 내부를 지나는 도중 올리버는 여러 시선과 함께 관심이라는 감정을 포착했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리자 군데군데 앉아 있는 근육질 사내나, 억세 보이는 여성, 양복 차림의 중년 신사, 안경을 쓴 학생 등이 고개를 숙이며 딴청 피우는 모습이 보였다.
올리버가 다시 가던 길을 가자 뒤통수 너머로 작게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 친구가 그 친구야? 오염구역?”
"어, 퍼펫과 싸워 살아남았다더군.”
"아닌 거 같은데? 가짜 퍼펫 아니야?”
"그건 아닐 거야. 거기 생존자 중 하나가 내 처남인데, 좀비 군대가 휩쓸었다더군. 우르르 몰려다니는 게 아니라 조직적으로."
“노스랜드 약탈자 헤로와 호프먼 패밀리의 힐턴도 해치웠다는데? 그것도 송장인형으로.”
"송장인형?! 그럼 소문이 설마-”
“-아아. 입조심 해. 송장인형이 꼭 그쪽과 관련 있어야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남의 사업장에서 그러는 건 아니지.”
올리버는 뒤가 근질근질했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솔직히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왜 그러십니까? 데이브 씨.”
올리버가 가던 길을 멈추며 말했다.
"아, 다들 어째 절 보고 뭐라 하는 거 같아서요.”
"주제넘은 말씀일 수도 있지만, 같은 게 아니라 맞습니다.”
"맞다고요? 갑자기 왜?”
"오염구역에 있었던 일이 알음알음 퍼지고 있거든요.”
아..…. 그러고 보니. 시(市)에서 비밀로 한다고 해도 결국 퍼져나갈 거란 이야기를 들은 적 있었다.
그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설마 진짜 퍼질 줄이야. 거리로 나오자 누가 지켜보던 시선이 느껴진 것도 그 탓일까?
"그런데 좀 이상하네요. 오염구역이 오래는 아니지만 그래도 시간이 꽤 지나지 않았습니까.”
"최근에 데이브 씨께서 던칸을 해치웠다는 이야기가 퍼져 재조명된 것 같습니다.”
“던칸씨를 해치운 게 대단한 건가요?”
올리버가 물었다.
던칸이 강한 건 맞았지만, 에디스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 그토록 유명한지는 의문이었다.
알은 이 역시 능숙하게 대답해줬다.
"해결사 바닥에서 은퇴한 지가 이십 년도 넘는 분이라 젊으신 분들은 몰라도,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분들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핑크맨으로도 눈에 띄는 활동을 하신 분이고요.…. 그런 분이 데뷔한 지 1년도 안 된 해결사에게 져 다들 놀란 눈치입니다. 그 여파로 다시 오염구역 건까지 재조명되는 거고요.”
“아….. 그렇군요.”
할 말이 마땅하지 않던 올리버는 그리 대답했다.
그런 다음 품 안에 넣어둔 필거렛을 매만졌다.
던칸의 감정으로 만든 필거렛으로. 일이 끝나자마자 이 작업부터 했다.
양이 꽤 많아 아슬아슬하게 2개비로 만들었다.
이 점을 고려하면 그리 이상하지도 않았다.
조셉 못지않게 아름다운 빛을 뿜은 그가 과거에 그 정도 명성을 쌓았다는 게.
다만 그 명성이 자신에게 좋을지는 의문이었다.
물론, 해결사로서 몸값을 높이려면 필요한 거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그러던 중 알이 올리버에게 공책 한 권을 건넸다.
"이건 뭐죠?”
"제가 종업원으로 하는 업무과와 이곳의 일상, 재밌던 일화나 가게 은어, 농담 따위를 쓴 공책입니다. 옛날에 종업원 일에 대해 가르쳐 달라고 하셨잖습니까?”
"아…."
올리버가 잊었던 과거 일을 떠올렸다.
책방 노인에게 자기가 레스토랑 직원이라고 거짓말을 했고, 그 거짓말을 메우기 위해 알에게 레스토랑 종업원에 대해 가르쳐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문제는 부탁만 해놓고 배우려고 잘 오지 않았다는 거고.
올리버는 사과했다.
"이런…..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데이브 씨께서 열심히 해결사 일을 해주셔서 전 감사할 따름입니다. 덕분에 사장님께서 과거의 명성을 되찾고 계십니다.”
"과거의 명성요?”
"아….. 그건 잊어주십시오. 제가 말할 영역이 아니라. 어쨌건 데이브 씨께서 열심히 해주신 덕분에 저희들 역시 큰 이익을 보고 있어 이리 드린 것뿐이니. 고마워하거나, 미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알은 그렇게 말했지만, 그럼에도 올리버는 미안하고 고마웠다.
가르쳐달라 해놓고 제대로 안 배우고, 이리 수고를 끼치다니.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그럼, 다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