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에디스 (2) >
제인, 올리버 그리고 조나단은 장갑차 같은 차량에 타 어딘가로 향했다.
웬만한 총격과 폭발에도 견딜 것 같은 이 자동차는 그 방어력에 걸맞게 속도가 꽤 느렸는데, 그렇다고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덕분에 바깥 풍경을 느긋이 볼 수 있었으니.
“..…이곳은 처음이신가요?”
올리버 옆에 앉은 제인이 물었다.
올리버는 푸른색 야경에서 시선을 떼며 대답했다.
"예. 이런 곳은 처음이네요….. 어딘지 아시나요?”
"글쎄요. 고층 건물이 즐비하고 비행선이 많은 걸 볼 때 J 혹은 D 구역인 거 같은데, 자세히는 모르겠네요. 저도 도시를 다 둘러보지는 못해서요."
제인이 그리 말을 마치며 조나단을 봤다. 조나간은 눈치껏 대답해줬다.
“J구역 맞습니다. 보통 인근 주민들을 위한 문화, 유흥시설이 몰려 있는 구역이죠. 덕분에 밤에도 이리 밝은 겁니다.”
실제로 밖은 밝았고, 그 아래로 무수한 사람들과 자동차가 움직이고 있었다.
비행선 역시 다른 구역보다 더 많이 보였는데, 그중 몇몇 대는 하늘에 닿을 듯 높은 건물 위로 착륙했다.
여태까지 올리버가 봐온 세상 중 가장 거대했는데, 같은 도시임에도 이토록 차이가 나는 게 신기하고, 또 이유가 궁금했다.
누구한테 물어봐야 알 수 있을까?
“J구역. 옛날에 몇 번 온 적 있죠. 교육차..…. 화려하고 즐거우며 수많은 돈이 오가는 곳이긴 하지만, 경호하기에는 썩 좋은 곳은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왜 여기 온 거죠?”
제인의 질문에 조나단이 대답했다.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소란이 많은 곳인 건 맞지만 그만큼 보안도 우수합니다. 최소한, 귀빈들이 지내는 곳은 중앙 의원이나 외국 왕족들도 지낼 만큼 안전하지요.”
"귀빈실은 하루에 기본 수백만 란다가 드는 곳이니까요..…. 혹시, 아버님이 거기 계신가요?”
뭔가 눈치챈 제인의 물음에 조나단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거기는 제가 대답할 영역이 아닙니다. 전 그저 맡은 임무를 수행하는 심부름꾼이라…..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아가씨는 이제 안전하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는 것뿐입니다.”
조나단의 말은 진심이었지만, 제인은 동의하지 않는지 급속도로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라 작은 분노와 혐오, 불안 등이 부글부글 끓었는데, 심호흡하자 그제야 간신히 안정을 되찾았다.
올리버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막대한 유산을 물려주는 아버지를 만나는 것치고는 어째 반응이 어색했다.
사이가 좋은 거 아니었나?
"아, 이제 거의 도착했군요.”
조나단이 주의를 환기하듯 말했다.
그의 시선 끝에는 몹시 큰 마천루가 딱하니 있었는데, 건물 전체에서 은은한 푸른 불빛이 빛나고 있었다.
흡사, 보석.
실제로 모두가 보이는 건물 위에 <사파이어>라는 조형물이 박혀 있었다.
과거 조셉과 같이 방문했던 호텔과 어딘가 비슷한 느낌이었다.
"..…호텔인가요?”
"호텔인 동시에 주점, 카지노, 극장, 백화점 등이 모인 복합문화시설입니다. 비교적 근래 생긴 곳이지요.”
조나단의 설명과 함께 차는 건물 정면을 지나 우측 도로로 빠져 지하로 들어섰다.
지하 주차장에는 값비싼 차들이 수없이 많이 모여 있었는데, 이렇게 많은 차가 주차된 것을 본 적 없는 올리버는 신기하기까지 했다. 그에 반해 조나단은 익숙하다는 듯 담담히 움직였다.
"괜찮으시다면 내려 주시겠습니까?”
"어디로 가는 거죠?”
"안전한 귀빈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다만, 그전에 옷가게부터 들리시죠. 귀빈실부터는 복장 제한이 있습니다.”
제인은 그제야 자신의 복장을 인지한 듯 실소를 지었다.
“..…오늘 많은 일이 있었거든요.”
“이해합니다. 따라오시죠. 지하실에 옷가게가 있는데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사파이어> 지하실에는 주차장뿐 아니라 화려하고 깔끔한 상점이 여러 개 있었는데, 각 상점에서 향수나, 브로치, 리본 따위를 팔고 있었다.
당연히 수많은 옷을 전시한 옷가게도 있었고.
조나단이 제인에게 정중히 말했다.
“여기 마음에 드시는 옷을 고르시면 됩니다.”
"시간 좀 걸리겠는데요.”
제인이 수많은 옷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해합니다. 여성분이시니. 천천히 고르십시오..…. 그리고 데이브 씨도 고르십시오.”
남의 일인 양 뒤쪽에 서서 기다리고 있던 올리버에게 조나단이 말했다.
"예? 저도 말씀입니까?”
“예, 앞서 말했다시피 복장 규정이 있어서 데이브 씨도 갈아입으셔야 합니다. 비용은 이쪽에서 처리하니 편하게 고르시면 됩니다.”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그와 별개로 올리버는 다소 난감했다.
여태껏 옷은 그냥 대충 입어 왔기에 복장 규정에 맞춰 입는 게 어떤 건지 감이 안 왔기 때문이었다.
포레스트처럼 양복을 대층 입으면 될까 싶었는데, 제인이 끼어들었다.
“괜찮으시면 제가 골라드려도 될까요?”
“예?”
"지켜주신 보답이라고 할까? 제가 골라드리고 싶어서요. 나름대로 패션 쪽도 공부해서요. 괜찮을까요?”
"물론요. 오히려 감사하죠.”
올리버가 진심으로 말했다.
옷에 관해 아는 거라고는 상의를 걸치고 바지는 다리에 넣는 것밖에 없었기에. 오히려 반갑기까지 했다.
그 대답이 썩 싫지 않았는지 제인은 살짝 미소지으며 옷을 하나씩 들어 올리버 앞에 대보았다.
"음..…. 이건 너무 늙어 보이고, 이건 너무 어려 보이네요. 흐음..…. 이건 어떠세요?”
제인이 심플한 하얀색과 검은색 정장을 권했다.
"요즘은 너무 화려한 걸 추구하니 심플하게 가는 것도 매력일 거 같은데. 특히, 데이브 씨에겐. 어떠세요?”
"좋습니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올리버.
제인이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이라도 고민하는 게 어떠세요?”
"아가씨께서 고른 거니 좋은 거겠죠. 저보다 옷은 더 잘 아실 테니까요.”
그 말에 제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저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전에도 그렇고. 혹시,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죠?”
"무엇을 말씀이죠?”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인의 그 말과 함께 옷을 벗으려고 했고, 올리버도 등을 뒤돌아 옷을 벗었다.
그때 조나단이 처음으로 당혹스러워하며 말했다.
"잠깐만요. 두 분..…. 옷은 탈의실에서 갈아입으셔야죠.”
***
"그러니까 오늘 너무 피곤해서 그랬어요. 잠도 제대로 못 잤고요. 별장은 불타며, 도망치고, 죽을 뻔도 해서요. 그러니 이상한 오해는 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엘리베이터 안.
제인이 옷가게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조나단은 “예.” “예.” 대답하면서도 절대 믿지 않았는데, 올리버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뭘 오해했는지도 몰랐기에.
제인은 그런 올리버가 답답한지 뭐라 말하려고 했으나,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올리버가 별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한 거였다.
띵동一
그 사이 엘리베이터가 목표 층에 도달했다.
황금색 바늘이 66층을 가리킨 거였는데, 문이 열리자 그곳에는 붉은 카펫이 깔린 고풍스러운 공간이 펼쳐졌다.
값비싼 연미복을 입은 노인부터 캐주얼한 복장의 젊은이, 구릿빛 피부에 머리에 두건을 쓴 외국인들도 보였다.
사람도 많고, 공간도 넓었는데 한쪽에서는 도박을 하고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술이나 차를 나눠마시고, 또 다른 곳에서는 라디오를 들으며 서류를 확인하고 있었다.
소리 차단 마법을 쓴 건지 넓은 공간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함에도 서로에게 전혀 방해를 안 줬다.
꽤나 생소한 광경. 이 역시 익숙한지 조나단은 정중히 손을 펼쳐 길 안내를 시작했다.
"따라오시지요.”
제인과 올리버는 조나단이 가리킨 방향을 따라 들어갔다.
커다란 홀을 벗어나 한 복도에 들어섰는데, 복도 중간중간에는 고풍스러운 문이 있었다.
안과 밖의 이동을 통제하는 듯 문에는 마력이 머금어져 있었는데, 호기심 삼아 눈에 신경을 집중해 안을 들여다보니 여러 감정을 블 수 있었다.
극도의 쾌락에 빠진 흥분 상태와 수치, 굴욕, 분노 등 안에서 뭘 하는 건지 궁금했다.
'음.......'
"여깁니다.”
한 방 앞에서 조나단이 멈춰 서며 말했다.
그는 과거 천사들의 집에서 봤던 유선 통신 장치를 들어 안에 대고 말했다.
잠시 후 얼굴에 토끼 가면을 쓴 여성이 나왔는데, 마치, 조나단과 제인을 못 봤다는 듯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들어와.”
익숙한 목소리. 바로, 에디스였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커다란 침대에 팬티와 런닝만 입은 상태였는데, 전과 달리 기분은 괜찮아 보였다.
“아버님…..”
제인이 방으로 들어가 인사했다.
"그래, 나다.”
"잠시, 란다를 떠난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가는 도중 생각이 바뀌어 그냥 돌아왔다. 왜 불만이더냐?”
"아, 아뇨.…. 그저 이렇게 다시 만나 뵈어 기쁠 따름입一”
"ㅡ하!”
에디스가 큰 웃음소리를 내며 제인의 말을 끊었다.
유산을 물려주려고 해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단순히 좋다, 싫다를 떠나 복잡한 감정이었다.
증오와 죄책감이 뒤섞였다고 할까?
존재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모순된 감정은 에디스의 안에서 강렬한 빛을 뿜으며 요동쳤다.
"이미 판은 결정됐다. 넌 유산을 받을 테니, 더 이상 멍청한 가식 떨지 않아도 돼. 그러니 그만둬라. 네 연기를 보는 건 나도 역겨우니. 창녀 같은 네 애미가 떠오르거든.”
느닷없는 독설에 제인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졌다.
마치, 일말의 희망마저 끊어진 듯한 절망, 분노….. 아니 그보다, 그래, 허무라는 감정이 빛났다.
개인적으로 올리버가 썩 좋아하는 감정은 아니었다.
“….그렇군요. 더 이상 사랑스러운 딸 연기 안 해도 된다는 거군요.”
“그래, 몇 년간 가면 쓰고 아양 떠느라 수고했다. 덕분에 나도 좀 웃었으니 더 이상 안 그래도 된다….. 수고비는 챙겨줄 테니 이만 꺼져라.”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만난 지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두 부녀의 관계는 완벽하게 파탄 났는데, 제인은 조나단의 안내를 받아 어딘가로 사라졌다.
올리버도 뒤따라가려고 하는 그 순간 에디스가 멈춰 세웠다.
“어디 가나?”
"저요?”
"그래, 씨부럴 너요. 여기 너 말고 또 누가 있나?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낀 거지만 귓구녕이 단단히 막힌 거 같아."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은 태도였지만, 올리버는 썩 싫지 않았다.
"아가씨를 따라가려고 합니다. 전 그걸로 고용됐으니까요.”
“그럼, 그건 잠시 취소하고 다른 의뢰 하나 하지.”
“다른 의뢰요? 죄송하지만 그건 포레스트 님을 통해서-”
"-좆이나 까시게. 내가 하겠다면 하는 거야. 비용도 치르지. 한….. 2억 란다?”
"...크군요. 아가씨를 지키는 비용과 같아요.”
"크지. 저런 사생아 년 지키는데 2억이니. 뭐, 덕분에 목줄을 잡을 수 있게 됐으니 그다지 손해는 아니지만.”
“목줄요?”
"왜? 던칸 녀석이 내 가족 새끼들이랑 붙어먹어 날 배신한 걸 몰랐을 것 같았나?”
"아셨습니까?”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뒷구멍으로 뭔가 하는 건 알았지. 야심이 많은 놈이었으니. 뭐, 잘 숨기긴 했지만. 사람 근본이라는 게 잘 변하지 않지.”
올리버가 잠시 생각했다.
"..…이해가 안 되네요?”
“뭐가?”
"그…. 배신할 줄 알았으면, 사전에 막을 수 있지 않았나요?”
"이 정도로 배신할 줄은 몰랐지. 그리고 무엇보다 사전에 막았으면 내 가족 놈들이 이 지랄을 벌일 증거를 잡았을 것 같나? 씨부럴 생각 좀 해.”
에디스가 진심으로 답답하다는 듯 술을 마셨다. 마법주였는데, 머피가 만든 상품은 아닌 것 같았다.
"제기랄 맙소사! ..…천사들의 집에서 먹는 것보다 약간 못하군. 지배인 불러서 따져야겠어.”
"그럼, 제인 아가씨에게 유산을 물려주려는 건 싫어하는 가족들을 협박할 거리를 찾기 위해서인가요?”
“아.…. 처음부터 노린 건 아니지만 대충 그런 셈이지. 내가 벌써 뒤진 줄 알고 뻘짓거리를 하고 있거든. 존중받는 방법이 뭔지 아나?”
"글쎄요?”
"널 좆되게 해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야. 그럼 나 같은 돼지에게도 미소를 지으며 친절을 베풀지. 안 그럼 좆되니까.”
단순한 말 같았지만, 올리버는 거기서 진심을 넘은 신념을 느낄 수 있었다. 흡사, 신을 향한 요안나의 믿음처럼.
호기심이 일었다.
"의뢰 내용이 뭔지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오, 이제 좀 사람 같군. 별거 아니야. 나랑 이야기 좀 나누지.”
"이야기 말씀입니까?”
“그래. 단, 솔직하게. 아주 씨부럴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해. 그럼, 아까 말한 대로 2억 주지. 웃는 것보단 쉽지?”
흠……. 2억이라.
"혹시 보수로 다른 걸 부탁드릴 수 있습니까?”
"다른 거? 왜? 두 배로 줄까?”
올리버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에디스 님도 제 질문에 대답해주십시오. 솔직하게요. 저도 당신께 궁금한 게 많거든요.”
그 순간 에디스가 놀란 표정을 짓더니 웃었다. 마치, 재밌는 거라도 봤다는 듯.
"하一! 재밌겠군.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