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에디스 (1) >
“안녕하십니까?”
올리버가 핑크빛 정장 사내에게 똑같이 인사했다.
그가 먼저 정중히 인사했기에 호응한 것이었는데, 그렇다고 주변을 포위한 이십여 명의 사람들을 놓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악의나 살의는 없었지만, 여차하면 싸울 태세였다.
올리버는 상대가 적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질문했다.
“음..…. 죄송하지만 누구신지요? 핑크맨이신 것 같은데?”
핑크빛 정장 사내는 양손을 정중히 모으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핑크맨입니다. 하지만 오해 없으시길. 전 던칸이나, 맥맨과 같은 편이 아닙니다.”
“….죄송하지만 맥맨이 누구죠?”
남자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이곤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 소리에 맞춰 부하 하나가 잘린 머리를 하나 가져와 핑크빛 정장 사내에게 건넸다.
“이 친구입니다.”
핑크빛 정장 사내가 머리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거리가 있고, 어두워 제대로 안 보였기에 올리버는 뚜벅뚜벅 다가갔다.
핑크빛 정장 사내의 부하들이 올리버를 경계했지만. 사내는 그런 부하들을 제지하며 올리버가 자세히 볼 수 있게 들어주기까지 했다.
친절했다.
“……아. 인간 도살자 맥맨 씨군요. 기사에서 봤습니다.”
“예, 맞습니다. 그 맥맨 맞습니다.”
올리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스랜드 탄광 마을 시위를 진압한 핑크맨.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고 그 위에서 웃으며 사진을 찍었는데, 그 덕분에 청문회 주요 대상자 중 하나였다.
“뭐든 열심인 친구라 일을 맡겼는데, 너무 열심히 했더군요. 저희 일은 정치와도 밀접해 수위 조절이 중요한데, 이 친구는 그걸 이해 못 했습니다….. 아니면 안 한 거거나.”
"그래서 목을 자른 겁니까?”
"아뇨. 우리가 갱도 아니고….. 그저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잠시 쉬라고 했는데, 이에 불복하곤 회사 기밀을 빼돌려 이적하려고 해 징계한 것뿐입니다. 우리 회사는 이런 문제에 민감하거든요. 높으신 고객님들을 두고 있어서 말이죠.”
올리버가 뒤를 돌아 던칸을 봤다.
“혹시, 맥맨 씨가 던칸 씨와 협력하고 있었습니까?”
"협력했었지요. 이제는 아니지만. 데이브 씨께서 우리 측에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절 아시나요?”
"유능한 해결사는 늘 체크 하고 있어서. 이쪽 장사는 결국 인재가 핵심인지라 이해해 주리라 믿습니다.”
올리버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기쁠 것도 화낼 것도 아니기에. 대신, 상황을 파악했다.
“..…즉, 저와 싸우려고 온 건 아니라는 말씀이죠? 피곤해서 그런지 머리가 조금 안 돌아가네요.”
“예, 봐서 압니다. 싸울 생각은 당연히 없습니다.”
“아, 그럼, 다행이네요. 괜찮으시다면 저거 좀 주워가도 될까요?”
올리버가 핑크맨들 다리 사이에 떨어진 톤파를 가리키며 물었다.
던칸의 톤파로, 핑크맨들이 서로 바라보며 비켜서자, 올리버는 허리를 숙여 주울 수 있었다.
"고맙습니다.”
올리버가 톤파를 챙기며 인사했다.
단순하지만 마력을 담아 강도(剛度)와 위력을 조절할 수 있는 이 무기는 어떤 식으로든 쓸데가 있어 보였다.
어쩌면 연구용으로 쓸 수 있을지도 몰랐다.
사용해 본 바. 마법이나 흑마법이나 메커니즘은 같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빅마우스.”
제자리에 돌아온 올리버가 허리춤에 맨 가죽 케이스를 열어 빅마우스를 꺼냈다.
사람 크기만 한 빅마우스는 빵 반죽처럼 부풀어 올라 팔과 다리가 돋아났는데, 수많은 눈을 뒤룩뒤룩 굴리며 주변을 바라봤다.
“꾸르르르륵… !!”
낯선 이들을 경계한 건지 빅마우스가 낮게 울었다.
올리버는 그런 빅마우스를 진정시켰다.
“괜찮아요. 진정하세요….. 그보다 이거랑 저기 쓰러진 것 좀 삼켜주실래요?”
올리버가 던칸의 시체와 던칸과 같이 싸운 핑크맨 중 좀비화가 안 된 멀쩡한 시체를 가리키며 부탁했다.
"끄르륵..…."
빅마우스는 돈이 아닌 시체라 크게 실망한 눈치였지만, 그럼에도 묵묵히 시키는 대로 일했다.
참으로 착하다고 할 수 있었다.
"신기하군요.”
핑크빛 정장 사내가 말했다.
그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공손한 자세를 취한 채 말을 이었다.
"제가 정식으로 공부한 것은 아니지만 저 정도 크기의 먹보 주머니는 많이 위험하다고 알고 있는데.”
"만드신 분 실력이 좋은 거 같습니다.”
"어디 있으신 분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저희는 인재를 늘 원하거든요.”
“나중에 그분께 물어본 다음 말씀드리겠습니다. 멋대로 이야기하면 실례일 것 같아..... 그런데 말씀하실 건 그게 전부입니까?”
"아뇨, 공교롭게도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사실, 단순히 회사 내부 불순분자만 정리하려고 온 게 아니거든요.”
"혹시, 던칸 씨도 가져가려고 오셨습니까?”
올리버가 아쉬워하며 물었다.
"아뇨. 그건 아닙니다. 저희는 시체 따위 관심 없습니다. 심지어 흑마법사님이 소유한 시체라면 더 관심 없고요. 다만, 살아있는 사람은 관심 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요?”
"예."
그 순간 올리버는 미세하게 변하는 주변 핑크맨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일이죠?”
"제인 아가씨의 신병을 저희에게 넘겨주십시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이해가 안 되는데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에디스 님의 의뢰를 받아 이리 움직이는 거니.”
"에디스 님요?”
"예, 그분께서 비밀리에 연락책을 별장에 박아 두었는데, 갑자기 연락이 끊겨 저희에게 의뢰하셨습니다. 따님이신 제인 아가씨가 어떻게 됐는지 확인하고, 살아있으면 구하고, 죽었으면 관련자를 조사해달라고 말이죠.”
“호오..…."
보복이 아닌 조사라. 그리고 주의할 점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에디스의 반응속도는 몹시도 빨랐다. 습격이 일어난 지 하루도 채 안 됐으니. 마치,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핑크빛 정장 사내가 말했다.
"혹시 믿기지 않는다면-”
“-아뇨. 믿습니다.”
올리버가 말했다. 핑크빛 정장 사내는 진심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다행이군요. 그럼, 아가씨가 어디 있는지 대답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음…. 어디 맡겨놓았는데, 가서 모셔오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저희도 따라가도 되겠습니까?”
“? ..…어째서죠?”
“만일의 경우를 위해서일 뿐입니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저희는 저희 일에 충실한 것이니 오해하지 마시길.”
“오해 안 합니다. 다만, 그와 별개로 그 말씀은 정중히 거절해야 할 것 같습니다.”
“…거절요?”
핑크빛 사내가 한쪽 눈썹을 들어 보였다. 거절당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반응이었다.
그래서인지 영 언짢아 보였는데, 올리버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예, 아가씨가 계시는 곳은 제가 도움받은 곳인데, 이방인을 별로 안 좋아할 것 같거든요. 그러니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저희로서는 조금 난감하군요. 에디스 님께서 최대한 빨리 확보하라고 하셔서 말입니다.”
"그럼, 최대한 빨리 갔다 오겠습니다.”
"이해를 못 하셨군요. 에디스 님께서-”
"-에디스 님께서 저에게 의뢰하신 건 아가씨를 지키라는 것뿐 그 이상은 없었습니다. 전 해결사. 맡은바 의뢰는 최선을 다하지만, 그 외에는 글쎄요.”
"......."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올리버는 다음에 어떤 상황이 일어날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대개 이때 사람들은 힘을 써 자기 의사를 관철하려고 했는데,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서로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있을 텐데.
잠시 후, 핑크빛 정장 사내가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저희가 무례했군요. 그럼, 여기서 기다릴 테니. 최대한 빨리 와주십시오. 저희도 입장이라는 게 있어서 말입니다.”
예상 밖의 대답. 올리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최대한 빨리 오겠습니다.”
올리버는 그리 말하고는 제인 아가씨를 데리러 갔다.
“아..…. 잠시만요.”
올리버가 가다 말고 멈춰서 핑크맨 뒤로 널브러진 차일드와 송장인형을 챙기며 말했다.
다행히 쇠약해지긴 했지만, 차일드는 모두 무사했다.
"이제 진짜로 갔다 오겠습니다.”
***
올리버는 지하로 내려가 여러 하수구 통로, 땅굴을 통해 가난한 형제들이 있는 지하 거지촌으로 갔다.
길이 복잡해 아차 하면 헤맬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도착한 후 제인과 캔트에게 위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다.
제인과 캔트는 올리버가 던칸을 쓰러뜨린 것에 적잖게 놀란 눈치였으나,
새로 파견된 핑크맨의 제안을 듣고 그쪽으로 신경을 집중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긴 갑자기 핑크맨이 나타나 아버지 의뢰를 받아 지켜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되겠지.
배신당해 죽을 뻔한 게 하루도 채 안 됐으니.
그럼에도 제인은 잠시 고민하더니 그들을 따라가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캔트도 그게 옳은 선택이라고 동의해 줬다.
남자란 나이를 먹을수록 아이처럼 유치하고 변덕스러워 조금만 비위를 상하게 해도 약속을 손바닥처럼 쉽게 뒤집는다고.
만약, 아버지가 보내온 사람들을 무시하면 그걸 빌미 삼아 유산을 못 받을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제인도 이를 부정하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런 제인을 데리고 올리버는 지상으로 올라갔다.
단둘이 걷게 되었는데, 올라가던 중 제인이 올리버에게 말했다.
"신병을 넘기라는 건 자기들이 제 경호를 도맡겠다는 거죠?”
"그런 것 같습니다.”
“혹시 그들이 데이브 씨에게 가보라고 해도, 제 곁을 지켜주실 수 있나요? …..그게 제가 더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예, 원하신다면. 전 그러려고 고용된 거니까요. 아직 약속한 기간도 남았고.”
올리버가 그리 대답하자 제인은 눈에 띄게 안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보여주기식이 아닌 진심으로.
지상으로 도착하고 골목을 빠져나가자 잠시 후 대기하고 있던 핑크맨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핑크빛 정장을 입은 남자가 제인을 보자마자 정중히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핑크맨 사무소 경호 팀장인 조나단이라고 합니다. 아버님의 의뢰를 받아 왔습니다.”
핑크빛 정장 사내는 자신을 정중히 소개했다.
제인도 이에 호응해, 와주셔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고 인사했다.
"반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저희가 아가씨의 안전을 책임지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따라와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안전한 곳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정중하면서도 어딘가 압박이 있는 제안.
제인은 미소라는 가면을 쓰며 조심히 손을 들었다.
"예, 물론이죠. 다만,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부탁 말씀입니까? 예, 말씀하시죠.”
"절 지키러 와주셔서 너무 감사한데, 데이브 씨는 어떻게 되시는 거죠?”
조나단이 올리버를 쓱 봤다.
"에디스 님께서 저희에게 아가씨 호위 전권을 넘겼습니다. 충분히 수고하셨지만, 흑마법사께서는 이만 빠지셔도 될 것 같습니다….. 다만, 그와 별개로 아가씨께서 원하신다면 같이 데려가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런가요?”
"예. 아가씨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니까요.”
대답을 들은 제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조나단에게 감사 인사를 하며 웃어 보였다.
어느샌가 제인은 별장에서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 올리버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려 윙크한 것만 빼고.
협상 아닌 협상을 마치고 조나단은 부하들에게 고갯짓해 올리버와 제인 주변을 둘러싸 경호를 서게 했다.
그 상태로 좀 걷자 큰 도로와 그 위에 세워진 차를 볼 수 있었다.
일반적인 차량에 비해 상당히 튼튼해 보였는데, 특히 차를 덮고 있는 뚜껑은 거의 장갑 수준이었다.
"자, 타시지요. 안전한 곳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