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 던칸 (1) >
"저기,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가씨.”
올리버가 한 자그마한 텐트 앞에서 물었다.
대답이 돌아왔다.
"예, 물론이죠.”
대답을 듣자마자 올리버는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텐트 안은 빈말로라도 깨끗하다고 할 수 없었는데, 여기저기 검은색 곰팡이가 펴져 있었다.
곱게 자란 사람이라면 기겁할 광경.
허나, 어째서인지 제인은 그곳에 태연히 앉아있는 것도 모자라 거지들이 준 잡탕죽까지 맛있게 먹고 있었다.
"……다들 친절하시더라고요. 배고플까 봐 식사도 내주시고요.”
"그렇군요. 음식은 입에 맞으십니까?”
"예, 꽤 괜찮네요. 그보다 이곳…… 대장님?”
"보통 대가리라고 부릅니다.”
"...그냥 대장님이라고 부를게요. 어찌 됐건 그분이랑 아시는 사이신가요?”
"뭐, 어쩌다 보니까요. 이런 식으로 도움을 받을 줄 몰랐지만요.”
"훗..…. 여기저기 은혜를 베푸셨나 보네요?”
"예?”
"아, 그냥 어릴 때 배운 말이에요. 세상을 살아가려면 은혜를 여기저기 베풀며, 또 받은 은혜는 잊지 말아야 한다고 배웠거든요."
"시스터후드에서 배운 것입니까?”
"......."
제인은 침묵하며 동시에 감정의 동요를 보였다. 허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약간 체념한 듯 말했다.
"아아..…. 저도 멀었네요. 좀 마음이 불편하다고 말을 너무 많이 말했어요..... 어떻게 아신 거죠? 제가 시스터후드에서 길러진 거요."
"저도 아까 전 들은 겁니다.”
"그래요?”
"예, 의외로 여기 사람들은 아는 게 많거든요.”
"진짜 의외네요….. 아니, 당연한 건가? 누구든 왕은 될 수 없지만, 거지는 될 수 있으니.”
제인은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하곤 재밌다는 듯 키득키득 웃었다.
허나, 웃는 겉모습과 달리 감정은 슬픔과 체념이 보였다.
“….괜찮으시면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뭐죠?”
"음.....죄송하지만, 그냥 편하게 말씀해주실 수 없을까요?”
"예?”
"아, 다름이 아니라 너무 답답해 보여서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말할 때마다 늘 생각하시고, 속마음을 억누르는 게..... 저한테는 안 그러셔도 되거든요.”
"..…무슨 뜻이죠?”
"그냥 말 그대로입니다. 아가씨께서 그러시는 이유가 남들의 호의를 사기 위해서인 거 같은데, 전 딱히 상관 안 하거든요. 또.… 여쭤볼 것도 있고. 나름 중요한 걸 수도 있어서 솔직히 대답해주셨으면 하거든요.”
"......."
제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았는데, 그렇다고 속까지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의 감정은 마치 끓는 냄비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는데,
답답함과 짜증, 분노, 불안이 희망, 인내와 같은 감정과 격렬하게 싸워댔다. 마치 당장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상태-
"-씨발!!!”
갑자기 제인이 있는 힘껏 외쳤다.
“….씨발! 씨발!! 빌어먹을 이런 개 좆같..…!”
제인은 놀랍게도 자리에서 일어서서 장장 3분 동안 온갖 욕설을 내뱉었는데, 올리버는 가만히 듣는 것 외에는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욕이 얼마나 찰지고 큰지 지상의 핑크맨에게 들리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그렇게 시간이 지나 욕이 끝날 때쯤 제인이 ‘하악….. 하악.…’ 숨을 몰아쉬며 올리버를 내려다보았다.
“……괜찮으십니까?”
"예, 씨발 엄청 상쾌하네요. 내 평생에 처음으로요….. 묻고 싶은 게 뭔데요?”
제인이 털썩 주저앉으며 물었다.
처음 다소곳하게 앉아있던 것과 달리 양다리를 쫙 펴서 양반다리로 앉았는데, 저 자세가 편한 듯했다.
“..…도움을 청할 곳이 시스터후드라고 하셨죠?”
"예. 여성을 위한 단체죠.”
제인은 잡탕죽을 먹으며 대답했다. 입에 그릇을 대고 우걱우걱 먹었다.
"도움을 청하면 아가씨께서 난감하실 수도 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우물우물 음식을 씹는 제인. 그녀가 꿀꺽 삼키며 말했다.
"맞아요. 얼추 들었을 테니 솔직히 말할게요. 최악은 아니지만, 차악 정도는 돼요. 시스터후드에 큰 빚을 지게 되니까요. 즉, 목줄이 잡히는 거죠.”
"그런가요?”
"예, 약간의 빚은 청산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의 빚은 죽을 때까지 지울 수 없는 법이거든요….. 제가 만약 아무런 도움도 안 받고 아버지 유산을 받는다면 전 큰 투자 한 번으로 키워준 대가를 청산할 수 있어요. 시스터후드도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거든요.”
"아, 그렇군요.”
"하지만 오해하지 마세요. 그건 그년들이 착해서가 아니니. 안 그러면 반항하고 배신하기 때문이에요. 일종의 묵시적 합의 같은 거죠. 서로 만족할 수 있는 적정선….. 하지만 여기서 빚을 더 지면 그때는 이야기가 달라져요.”
"저는 잘 이해가 안 되네요.”
"미묘한 파이 게임이라고 해두죠. 딱 잘라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다만, 제가 여기서 도움을 청하면 돈뿐 아니라 목숨도 빚지는 셈이고 이를 꼬투리 잡혀 평생 그들에게 협조해야 한다는 거예요.”
미묘한 파이 게임이라..….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이며 곰곰이 생각했다. 최소한 제인이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냥 궁금해서 여쭙는 건데, 그냥 무시하면 어떻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은혜를 안 갚으면요.”
“..…그럼, 제 치부가 세상에 알려지겠죠.”
"치부요?”
"시스터후드는 그런 일에 대비해 안전장치를 하거든요..…. 이 이상은 말 못 하겠네요. 제가 뻔뻔한 여자지만 수치심이 아예 없는 건 또 아니라서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구태여 캐묻지는 않았다.
그렇게까지 궁금한 게 아닐뿐더러, 제인이 진심으로 괴로워했기에.
“..…하아.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는 거죠?”
"만약에 도움을 안 받을 방법이 있으면 어떻냐고 여쭤보고 싶어서요.”
".…농담이죠?”
제인이 진심으로 물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죄송합니다. 전 농담을 잘못합니다. 배웠는데도 힘들더군요.”
"도대체 뭔데요?”
"술집에서 세 남자가 포커를 쳤습니다. 한 명은 노스인, 한 명은 왕국인, 마지막 한 명은 란다인. 이 세 명은-”
“-아뇨. 아뇨. 제가 시스터후드에게 도움을 안 받을 방법요. 혹시 도움을 청할 데가 있나요? 무력을 지닌?”
"아뇨. 그냥 저 혼자 지상으로 올라가 아가씨를 노리는 사람을 해치는 겁니다.”
“.…농담 그만하시라니까요. 빡치니까.”
"이번에는 농담 아닌데요? ....잠깐만요.”
올리버가 품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몇 달 전 신문이었다.
"이 기사 한번 읽어보실래요?”
".…노스랜드 탄광 진압 전에 같이 봤던 거네요.”
"네. 던칸 씨가 핑크맨 출신이라고 하셨죠?”
"네……."
제인이 뭔가 희미하게 감을 잡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보세요.”
올리버가 새로운 기사를 보여줬다. 기사 위에는 <과잉 진압 청문회!>라고 쓰여 있었다.
“....탄광 마을 과잉 진압에 따른 청문회 내용이네요. 하긴 초기 진압을 목표로 해 너무 많이 죽였으니까요. 심지어 애를 안은 엄마까지. 그런데 이게 뭐 어떻다는 거죠?”
올리버는 기사 내용을 읽으며 말했다.
"전 잘 모르겠지만, 이 청문회 때문에 진압 책임자를 몇몇을 해고하겠다는 이야기가 있다더군요.”
"보여주기일 뿐이에요. 현장에서 빼고 사무직으로 다시 고용하거나, 몇 달 쉬게 한 후 다시 고용하죠. 전부 요식행위예요.”
"그래도 기분 나쁘지 않을까요? 직원들요?”
"그거야….. 그럴 수도 있긴 하죠.”
그랬다. 특히, 실력이 뛰어난 자일수록 자존심이 강해 그런 연극에 따르는 것조차 굴욕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캔트가 말했다.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것인데, 던칸 씨는 핑크맨 일을 관두고 바로 에디스 님 밑으로 들어가신 겁니까?”
"아뇨, 그 전에 개인적으로 사무소를 차렸어요. 그러다 일이 안 풀려 망했고, 그때, 아버지..…아!”
제인이 뭔가 깨달은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핑크맨 중 상당수가 실업자가 되니, 아무래도 던칸 씨께서 젊은 날의 꿈을 이루려는 것 같더군요.”
제인의 표정과 감정은 말 그대로 혼란이었다.
“..…고작 그런 거로 이런 추측을 하는 건 과하지 않나요?”
"핑크맨들이 자주 가는 술집이 있다 합니다. 분홍빛 허벅지라고. 얼마 전 거기서 핑크맨 몇몇이 술 마시며 이직한다고 이야기했다더군요. 웬 투기꾼 밑에서 일하는 전직 핑크맨에게.”
"......."
"대우도 더 잘해주고, 물주로 귀족을 끼고 있어 그쪽 시장을 개척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에디스 마누라네요. 전에 한번 본 적 있죠.”
제인이 비죽 웃었다.
"어떻게 알아내신 거죠?”
"신문과 소문, 대화에서 정보를 뽑아 조합해서요. 이곳 가난한 형제의 최대 수입이라고 합니다."
"하..…. 란다가 재밌는 곳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재밌는 곳인 줄은 몰랐네요.”
"그런가요? 어쨌건, 제 생각에는 아가씨를 해치워 투자 비슷한 걸 받으려는 것 같은데, 아마 그쪽도 많이 초조할 겁니다. 아가씨가 무사하면 전부 엎어지는 거니. 즉, 던칸 씨도 나와 있을 가능성이 큰데, 이때 제가 던칸 씨를 해치우면 위험을 뿌리 뽑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당신이 위험하지 않나요?”
"원래 이 일 자체가 위험한 일입니다. 전 알고 하는 거고요.”
"그래도 이렇게까지 할 이유 없잖아요?”
"그런가요? 전 일단 아가씨 지키라고 고용됐으니, 이왕이면 가장 좋은 방법으로 지키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또, 아가씨께서 이것저것 가르쳐주셨고요.”
제인이 망설이다 말했다.
“..…보호받는 처지라 잘 보여야 했거든요. 시스터후드에서 배운 거예요.”
"압니다. 그래도 도움을 받은 건 받은 겁니다. 무엇보다......"
"...무엇보다? 뭐요?”
"전 아가씨가 좋거든요. 예뻐서요.”
올리버가 감정이 예쁘다고 말했는데, 그 순간 제인은 얼굴이 새빨개지며 아무 말도 못 했다.
".....혹시, 제가 무슨 말실수 했나요?”
***
"이쪽이다. 이쪽으로 도망쳤어.”
"사라졌어. 도대체 어디-윽!”
어두운 밤.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힌 뒷골목.
올리버는 지상으로 나오자마자 다수의 핑크맨과 술래잡기를 하기 시작했다.
올리버가 이기고 있었는데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해가 지자 거리에 남은 거라고는 부랑자 혹은 제인의 뒤를 쫓는 핑크맨 뿐이라 행동의 제약이 풀렸고,
적은 다수였지만, 올리버는 눈 덕분에 상대의 위치를 파악하기도 수월했다.
올리버는 이를 토대로 복잡한 뒷골목을 도망치다 적당히 공격해 뒤로 빠지면 됐는데,
여차할 경우 ‘이레이저 엑시트’나, ‘셰이드 클록’으로 모습이나 기척을 없애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핑크맨들이 놓치면 다시 공격.
"어디….컥!”
"여기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허나, 마냥 쉽지도 않았다. 핑크맨들의 반응 역시 점차 빨라졌기 때문이었는데, 그들은 한 명이 당하자 바로 은폐 엄폐하며 총을 쏴댔다.
번쩍이는 총구 화염에 세상이 밝아졌는데, 올리버는 블랙 실드로 방어하며 다시 도망쳤다.
"쫓아라! 놓치지 마!”
‘좋아. 아직 양은 충분해.’
올리버 품 안에 든 감정을 보며 생각했다.
캔트에게서 받은 감정으로, 혹시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면 자기 대신 제인을 시스터후드에 데려달라고 하자, 그가 건네준 것이었다.
덕분에 올리버는 부족한 감정을 보충할 수 있었고.
도대체 어떻게 구했냐고 묻자, 캔트가 자기도 한때 해결사라고 대답했다. 참 재주가 많은 분이었다.
[셰이드 클록]
올리버가 엷고 어두운 망토를 만들어 어둠 그것도 가장 깊고 그늘진 어둠에 은신했다.
그런 다음 미니언에 해잇 불릿을 넣어 만들었는데, 잠시 후, 양쪽에서 오던 핑크맨들에게 풀었다.
핑크맨들은 제각기 랜턴을 들고 왔기에 저 멀리서도 보였는데, 미니언은 교묘하게 사각으로 접근하더니 해잇 불릿을 뱉기 시작했다.
퓻-! 퓻-! 퓻-! 퓻-!
해잇 불릿 한 발당, 한 명씩 쓰러지는 핑크맨.
허나, 갱들과 달리 핑크맨은 바로 대응했는데, 뒤따라오던 인력이 미니언을 발견하곤 총으로 쏴 터트렸다.
두두두두두一! 펑! 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사라지는 미니언.
올리버는 그사이 공격할 준비를 했다. 바로, 그때였다.
"저기다!”
눈에 고글을 낀 핑크맨 둘이 올리버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 고글에도 마력이 감돌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탐색 기능이 있는 물건 같았다.
핑크맨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총을 쐈는데, 올리버는 양방향으로 블랙 실드를 전개했다.
타다다다다다당——! 탕一! 탕一! 탕타다다다다당———!
실드를 두드리는 납탄.
한발 한발은 위력이 낮았지만, 수가 많아지니 충분히 위협적이었는데, 좀처럼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모두 비켜!”
한 특이한 총을 든 핑크맨이 동료들을 밀치며 나타났다.
그가 든 총은 산탄총과 비슷한 형태였는데, 차이가 있다면 장전 손잡이에 시험관이 끼어있으며, 시험관 내부에는 마력이 감도는 물질이 들어 있다는 거였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었지만, 올리버는 본능적으로 꽤 위험한 물건임을 직감했다.
"불타라.”
그 말과 함께 핑크맨이 총을 쐈다.
시험관에 든 물질이 꿀렁꿀렁 총에 들어가더니, 총구에서 거대한 불덩어리가 날아와 올리버는 물론, 그 주변까지 삼켰다.
꽤 훌륭한 전략이었다.
일반 화기로 발을 묶은 다음, 강력한 중화기로 끝장낸다니.
핑크맨들도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는지 사격을 멈췄는데,
올리버는 블랙 마블과 블랙 실드를 폭발시키듯 깨 그 충격으로 화염을 걷어낸 후, 사방으로 쉐도우 텐타클을 뻗어 핑크맨에게 광역 공격을 가했다.
광역 공격이라 해봐야 그림자 촉수로 빠르게 찌르고 베는 정도였지만.
허나, 효과는 뛰어났는데, 아차 하는 그 순간 십수 명이나 되는 핑크맨들이 쓰러졌다.
소모한 감정이 적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쓰러뜨린 수를 생각하면 가히 효율적이었는데, 이대로라면 던칸이 나타나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듯했다.
그때였다.
무엇인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접근해 벽을 발판 삼아 올리버에게 달려들었다.
바로, 던칸이었다.
파캉—————!!!
마력을 실은 독특한 ㅓ형태의 막대기가 올리버를 후려갈겼다.
충격 탓에 올리버는 옆으로 날아가듯 밀리고 말았는데,
다행히 블랙 실드 세 겹을 동시에 펼쳐서 피해는 입지 않았다. 비록 3개 실드 중 2개가 처참히 박살 났지만.
예상대로 드루이드 스콧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강했는데, 그는 온몸에서 방대한 마력을 뿜으며 말했다.
"실력 좋은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스콧 씨랑 싸우면서 실드에 좀 더 신경 쓰기로 했거든요.”
올리버가 자신의 몸과 쿼터스태프에 블랙 슈트를 두르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