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초대 (2) >
뚜벅뚜벅.
올리버는 제인과 말없이 거지를 따라 하수도 안쪽으로 이동했다.
기본적으로 매우 어둡고 축축하였는데, 개중에는 냄새나는 구간도 있었고, 냄새가 나지 않는 구간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신경 쓰이는 점은 아주 복잡하게 길을 돌아간다는 거였는데, 걷기만 몇 시간은 걸은 듯싶었다.
제인도 그 점이 신경 쓰였는지 올리버의 옷을 살짝 잡아당기며 낮게 속삭였다.
“이거 괜찮은 거 맞나요?”
“예?”
"이거 괜찮은 거 맞냐고요. 엄청 깊게 들어왔잖아요? 비밀 통로 같은 것도 두 번이나 지났고.”
"글쎄요? 일단, 악의나 꿍꿍이는 없으셔서요.”
"그래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앞장서서 가고 있던 실크햇 거지가 말했다.
그는 T구역 거리에서 보였던 다소 경박한 태도를 버리고 차분히 말했다.
"결코, 해를 끼칠 생각은 없습니다. 아가씨. 제아무리 거지라도 적선해주신 분께 위해를 가할 정도로 도리를 모르진 않습니다.”
제인은 민망함 빛을 뿜으며 사과했다.
“아….. 죄송해요. 그저 불안해서요.”
"괜찮습니다. 거지란 그런 존재니까요.”
올리버는 흥미로웠다.
그렇게 오래는 아니었지만, 올리버는 캔트의 거지패에서 머물며 거지들을 봐왔는데, 그들은 거리의 약자답게 대부분 겁이 많은 편이었다.
허나, 눈앞의 거지는 그런 구석이 거의 없었다.
이런 종류의 거지는 딱 둘 뿐.
캔트처럼 자기 무력에 자신 있거나, 혹은 캔트와 같은 사람 밑에 보호받는 거지였다.
“..…저기 선생님.”
"선생? 하하….. 그냥 실크햇이라고 부르십시오. 선생이라니, 과분한 호칭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실크햇 씨. 절 보자고 하시는 분이 누구시죠? 아까 전에 그분이 기다리고 계신다고 하셨잖습니까?”
실크햇이란 거지는 생각하듯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래도 제가 말씀드리는 것보다 직접 만나 뵙는 게 나으실 것 같습니다. 곧 도착하니 기다려주십시오.”
그 말은 사실이었다.
마지막 통로의 샛길 틈으로 빠지자 웬 거지 소굴이 나타났다.
천장의 작은 균열 덕분에 햇빛이 들어와 안을 밝혔는데, 그 아래는 수많은 거지가 있었다.
지하의 마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모두 텐트나 움막 비슷한 것을 지어 살아가고 있었다.
“이거..... 대단하네요.”
제인이 말했다.
올리버도 이에 동의하는 바였다.
규모가 클 뿐 아니라 여자, 아이, 노인 구성원도 다양하였는데, 분위기도 괜찮아 보였다.
최소한 힘 있는 이가 다른 이를 착취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의외로 거지패에서 보기 드물었는데, 과거 올리버는 이와 비슷한 곳에 머문 적이 있었다.
"저 왔습니다. 오늘은 손님도 왔습니다.”
거지 소굴 가장 안쪽 그곳에 세워진 가장 커다란 텐트 앞에서 실크햇이 말했다.
텐트 안에서 부스럭부스럭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나왔다.
그는 비니를 쓰고, 허름한 롱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한쪽 다리를 절고 비교적 새것 같은 쿼터스태프를 들고 있었다.
“캔트?”
올리버가 저도 모르게 말했다.
제인이 놀라며 물었다.
"아시는 분이신가요?”
난감한 상황. 올리버가 머뭇거리자 캔트는 능숙하게 끼어들었다.
"그렇습니다. 아가씨. 과거 흑마법사님께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가난한 형제들’의 대가리 캔트라고 합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
제인이 능숙한 캔트의 인사에 당황했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으며 무릎과 고개를 살짝 숙였다.
"환대에 감사합니다. 캔트 씨. 전 제인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제인. 누추한 곳에 귀하신 분을 모셔 영광일 따름입니다. 대접할 것은 많지 않지만 부디 편하게 지내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괜찮으시다면 흑마법사님과 잠시 대화 좀 나눌 수 있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아.…. 저야 물론 괜찮지만, 그건 데이브 씨에게 묻-”
" -여기…. 만드신 곳입니까?”
거대한 거지 소굴을 둘러보며 올리버가 물었다.
거지들은 오순도순 모여 커다란 냄비에 잡탕을 끓이고 있었으며, 아이들은 뛰어놀거나, 주변 어른들 곁에 모여 글을 배우고 있었다.
“..…이곳이 캔트 님의 새로운 거지패입니까?”
"우리들의 거지패지요. 나와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알 수 없는 대화에 제인이 미간을 찌푸린 채 올리버와 캔트를 번갈아 봤는데, 그 순간 그녀는 놀라운 것을 볼 수 있었다.
"하…... 하, 하."
아주 한순간이나마 웃음 비슷한 것을 지은 올리버였다.
"어머?”
"허.…!”
제인, 캔트 너나 할 것 없이 놀랐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참으로 이상하고 설명하기도 힘든 현상이지만, 올리버의 웃음 비슷한 것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마치 기적이라도 목도한 사람들처럼.
정작 당사자는 이를 모르는 눈치였지만.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캔트 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흑마법사님.”
***
올리버는 제인에게 양해를 구한 뒤 캔트의 텐트에 들어갔다.
다른 텐트에 비해 커다래 안에 뭐가 있나 궁금했는데, 막상 들어가니 별 건 없었다.
그냥 잠잘 수 있는 침낭 하나, 앉은뱅이책상 하나, 걸어놓은 옷 몇 벌.
그나마 값비싸 보이는 거라면 낡아빠진 마석 램프 정도였다.
“휑하지?”
캔트가 앉을 자리를 정리하며 물었다.
"글쎄요? 깔끔한 것 같은데요.”
"자네다운 대답이군.”
“좀 넓은 것 같기는 합니다.”
"이해하게. 텐트를 크게 쳐야 위엄이 선다고 말해서. 보다시피 사람이 많잖나?”
"그렇군요. 근데, 어떻게 된 겁니까?”
올리버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자리라고 해 봐야 신문지 깐 맨바닥이었지만.
"뭐가 어떻게 돼?”
“이 모든 거요?”
캔트가 조용히 웃었다.
"자네 덕분이지.”
"저요?”
"그래, 자네가 준 돈이 엄청 많았잖나?"
올리버는 떠올렸다. 인형사 글립을 죽인 후 찾은 금고를.
먹보 주머니를 이용해 챙긴 후 캔트에게 그냥 넘어줬는데, 몇억 란다는 했던 거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꽤 큰 액수였다.
허나, 후회는 없었다. 재밌는 걸 봤으니.
"자네가 준 돈..….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그걸 기반으로 W구역의 거지패를 합치기로 했네.”
"음..…. 왜 합치신 거죠?”
“두더지 일을 겪고 나서 진정으로 안전해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강해질 필요성이 있다고 느꼈거든. 두더지 같은 놈이 또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 오해하지 말게. 두더지처럼 폭력을 써서 강제로 덩치를 키운 건 아니야.”
"안 합니다. 그리고 하셨다 해도 저한테 그리 말하실 필요 없습니다. 전 그냥 캔트 님이 뭘 할지 보고 싶어 그 돈을 드린 것뿐입니다.”
올리버가 진심으로 말했다. 그 돈으로 캔트가 뭘 해도 올리버는 화낼 생각이 없었다. 무엇을 하든 재밌을 테니.
“……그렇군. 자넨 그런 친구였지. 그동안 자넨 잘 지냈나?”
올리버가 고민 끝에 대답했다.
“저요? 음…... 잘 지낸 거 같습니다.”
"포레스트 그 친구는 잘 지내고?”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아.... 그런데 절 어떻게 알아보신 겁니까? 보시다시피 전 이걸 쓰고 있는데.”
올리버가 가죽 가면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어렵지 않아. 포레스트는 아무나 받지 않거든, 덕분에 새로 거래를 트는 해결사는 소수지. 자네가 떠났을 때와 시간을 비교하면 유추하기 그리 어렵지 않아. 그래도 자네가 데이브란 이름을 쓸 줄은 몰랐지만.”
“아.…. 아드님 이름을 쓴게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갑자기 그 이름이 떠올라서요.”
"불쾌하지 않아. 진짜로.”
캔트는 그리 말하며 웃었다. 뭔가 기뻐 보였는데, 올리버로서는 그 이유를 알기 힘들었다.
“....그건 그렇고 거지패가 정말 크네요.”
"운이 좋았어. 두더지 일을 겪고 나서 다른 거지들도 자기를 보호해줄 새로운 집단을 원하게 됐거든. 거지패 규모를 넘는 그런 거대한 집단.”
"그게 이 가난한 형제들입니까?”
"그래. 자네가 준 돈이 있어 다른 거지패를 설득하기 쉬웠지.”
"돈이 많다 해도 액수가 한정되어 있으니 쉽지 않을 텐데요?”
"그래서 사업의 규모도 늘렸지.”
"사업요?”
“그래, 갱들이나 사업가들의 물건, 편지를 대신 배달해주거나, 뒷골목 쓰레기통을 전부 뒤져 과거보다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해 이를 비싸게 되파는 거지. 그 외에도 수소문 같은 것도 하고.”
"수소문이 뭐죠?”
"식당이나 술집, 사교모임 같은 데서 풍문을 듣는 거야. 거기서 재밌는 이야기가 많이 나돌거든. 허술하리만치.”
"죄송하지만, 잘 이해가 안 되는데요? 어떻게 가난한 형제들이 그게 가능하죠?”
"사지와 외모가 멀쩡하고, 일할 의지가 있는 친구들을 찾아 씻기고 옷을 사 입히며, 방을 구해준 다음 우리가 목표로 삼은 식당이나 술집 같은 데 취직시켜. 대신 그 친구들은 그곳에서 일하며 들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가져오는 거지.”
“아......"
"덕분에 우리가 취급하는 정보는 더 다양해지고, 값어치가 높아졌네. 지금은 정기적으로 거래하는 곳도 생겨 수입도 제법 되고. 그 증거로 자네가 준 돈이 줄기는커녕 더 늘어난 상태네.”
캔트는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
"하지만 걱정은 말게. 수익은 공동 금고에 넣고 필요할 때만 모두가 보는 앞에서 꺼내니. 덕분에 모두 서로를 믿고 있어.”
"대단하네요. 그래도 여기 하수도에 자리 잡는 건 괜찮나요? 과거에 위험하다고 하셨던 거 같은데?"
"걱정 말아. 여긴 안전해. 이미 수차례 조사해봤으니. 거기다 우리 대가리 수도 스무 명 안팎이 아닌 수백 명이니 쉽게 건들진 못할 거야. 그래도 혹시 몰라 화기도 구비하고, 나름대로 주변과의 커넥션도 유지하고 있으니 갑자기 큰일이 생기지는 않을 거야.…. 그보다 자네 이야기 좀 해 보게. 듣자 하니 쫓기고 있던 거 같은데 어떻게 된 건가? 특히, 저 아가씨는 귀한 집 딸내미 같던데.”
올리버는 잠시 고민했다. 이야기할지 말지.
원칙대로면 말하지 않는 것이 옳겠지만, 상황 자체가 당초 계획이 너무 벗어나 버린 상태였다.
거기다 여차할 경우 캔트의 도움도 받아야 할지도 몰랐고.
결국, 고민 끝에 올리버는 상황을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헤……. 더럽고 변수 많은 일에 걸렸군.”
"포레스트님도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럴 줄은 몰랐네요.”
"큰일이구만.”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아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야.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쪽에서 자네를 배신자로 몰아갈 수도 있어.”
"저요? 왜죠?”
"흑마법사니까?”
"흑마법사라서 누명을 씌운다고요?”
“그래.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흑마법사에게 모든 잘못을 돌리는 건 일종의 놀이 같은 거거든. 그래서 도시 안에 흑마법사가 활보해도 딱히 먼저 건드리지 않는 거야. 나중에 샌드백으로 쓸려고.”
"저한테는 썩 좋은 이야기 같지는 않네요.”
"그렇지. 하지만 그쪽도 일을 크게 만들기 싫을 테니, 경찰에게까진 알리진 않을 거야.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생기는 셈이니.”
“그럼?”
"아마 자네를 포함해 아가씨를 죽인 후, 자네가 죽인 걸로 꾸미겠지. 포레스트랑 자네를 소개한 사람 모두 독박 쓰겠구만.”
“아, 그럼, 최대한 빨리 아가씨를 안전한 곳으로 모셔다드려야겠네요.”
“안전한 곳? 있나?”
"예, 본인이 말씀하시길 시스터후드라는 곳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하더군요. 어째 썩 내켜 하지는 않지만요.”
그러자 캔트가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난 알 것 같은데, 왜 내켜 하지 않은지.”
“예, 정말요?”
"정확히는 아니야. 나도 이곳에 들어온 이들에게서 들은 거라.…. 시스터후드에 대해서 얼마나 아나?”
"여성들이 모인 단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서로 돕기 위한.”
"아주 틀린 말은 아니야. 서로 상부상조하는 건 맞으니. 그렇다고 그게 전부라고 볼 수 없어.”
"그런가요?”
"그래, 이 도시는 복잡하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도 복잡하니. 같은 여자라 해도 서로의 약점을 잡기도 하고, 이용하기도 하지. 그래서 사생아에게 투자하는 거고.”
“투자라뇨?"
"말 그대로야. 정치인이나 자본가 등 유력 인사들일수록 사생아가 많지. 개중에 제대로 된 상속자가 없는 이들도 있고, 나중에 협박해 이용할 수 있는 사람도 있지. 그런 사람들의 사생아를 데려와 키운다고 하네. 나중에 써먹으려고.”
오.… 올리버는 약간 놀랐다. 상식 밖 이야기였다.
"그런데 사생아라도 어머니가 키우지 않습니까?”
“놀랍게도 사생아는 싼 편이라네. 수백만 란다면 되지.”
"아......."
"시스터후드는 그렇게 데려온 아이들에게 적잖은 교육을 해주지. 나중에 써먹으려면 똑똑해야 하니. 설사 못 쓴다 해도 조직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일꾼으로 써먹을 수 있고.”
올리버는 순간 코코 양이나 천사의 집 점원들, 엘리자베스가 떠올랐다.
그들이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게 비단 우연이 아닌 거 같았다.
“...만약에 원래의 목적대로 써먹을 수 있으면요?”
"유산을 받을 수 있게 도와주고 그중 일부를 투자 같은 형태로 시스터후드를 위해 써야 한다더군. 빚을 갚는 개념으로. 그런데 지금 도움까지 청해 빚을 더 쌓으면 나중에 더욱 목줄이 잡히겠지. 그 아가씨는 그게 싫은 거고.”
올리버는 그제야 제인이 보여준 불편한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최악의 상황인 이상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내켜 하지 않은 것도 이해됐다.
올리버는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딱 최소한 역할만 할지, 아니면 좀 더 열심히 일해 볼지.
"........"
"괜찮나?”
"예? 아, 예..... 저기 캔트님. 일은 열심히 하는 게 좋겠죠?”
"아마도? 돈값 이상 일해야, 다음에는 더 비싼 돈을 내려고 할 테니. 왜 그러나 불안한데.”
올리버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생각에 빠졌다.
"뭐..…. 아가씨가 이것저것 가르쳐 주시기도 했으니.”
"미안한데 무슨 말인가? 진짜 이해가 안 돼서 그래.”
"별거 아닙니다. 그보다 제 부탁 하나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대가도 지불할 수 있을 겁니다."
"뭔가?”
캔트가 불안한 기색을 보이며 물었고, 올리버가 대답했다.
잠시 후 캔트가 입을 열었다.
"미쳤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