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 경호 (2) >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제인이라고 해요. 다들 만나서 진심으로 반가워요.”
한 여성이 말했다.
분홍빛 머리카락이 아주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여성이었는데, 그것도 모자라 마법 아이템 같은 것으로 몸 곳곳을 장식해 그 매력을 배가시켰다.
실제로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드루이드를 비롯한 해결사, 고용인 따위가 그녀에게 반사적인 호감을 품었는데,
특히, 해결사들의 경우에는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빠르게 빠져들었다.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었는데, 아마 평소의 올리버였다면 눈에 신경을 집중해 무슨 아이템을 착용하고, 무슨 약을 몸에 발랐는지 관찰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금 올리버의 머리에 다른 생각이 차 있었기에.
기프트란 거 아무리 봐도 내 레시피야….. 아니지. 아니지. 내 레시피라 해도 결국 감정을 두 개 섞은 것일 뿐. 단순한 발상에 불과해. 하려고 한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꼭 내 레시피라고 할 수 없어.’
올리버가 곰곰이 생각했다.
'..…그래도 비율이라던가 섞는 방식은 내 방식인 거 같은데.’
올리버가 필거렛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과거 조셉 패밀리 사람들을 가르칠 때도 같이 떠올렸다.
시작은 마리.
글을 가르쳐준 대가로 올리버는 그녀에게 흑마법을 가르쳐줬는데, 가르쳐줬다고 해도 크게 대단한 건 아니었다.
그저 부족한 기초를 다듬고, 몇몇 개 이론에 대해 조언해준 것뿐이었는데, 가끔씩 감정을 제대로 조작하지 못할 때 손을 대 간접적으로 요령을 잡아줬을 뿐이었다.
자전거를 뒤에서 잡아주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였다.
그리고 이후 어쩌다 보니 주인인 조셉 대신 패밀리의 임시 주인이 됐을 때, 의무에 따라 다른 이들도 가르쳐줬다.
처음에는 전부 일일이 가르쳐줬지만, 나중에는 인원수가 너무 많아져 실력이 뛰어난 상급제자들에게 일을 넘겼는데, 그건 약간 창피한 기억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남에게 자기 일을 떠넘기다니.
허나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기도 했다. 하루빨리 인수인계를 마쳤어야 했으니.
대신, 이에 대한 보상으로 올리버는 상급제자들의 성향을 파악해 그룹을 두 개로 나눈 뒤 각각 전투와 필거렛 제조를 집중적으로 교육 해줬다.
가령, 강해지고 싶은 마리에게는 전투를, 돈을 많이 벌고 싶은 피터에게는 필거렛 제조를.
그리고 니나 해결사에게 받은 그 필거렛은 올리버가 가르쳐준 제조법과 매우 흡사했다.
‘……음, 내가 전수해 준 게 맞다면 아무래도 그분들 잘살고 있는 듯하네.’
올리버가 결론 내렸다.
그도 그럴 것이 물건이 안정적으로 공급되고 있다는 건 조직 역시 안정됐다는 말이었으니.
그 말은 즉, 올리버가 떠난 후에도 다들 잘 지낸다는 이야기였다.
휴……. 올리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걱정됐는데, 참으로 다행이었다.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다들 처음에만 해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 개척하려는 의지가 강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런 것이 사라지더니 올리버의 안색만 살피기 시작했다.
특히, 마리의 경우가 가장 심했는데, 예상대로 자신이 사라지자 다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듯싶었다.
참으로 다행히 아닐 수 없었다.
‘내가 떠난 게 반년 전? 약간 더 됐나? 빠르다면 빠르군. 참으로 다행이야….. 나중에 한 번 찾아갈까?’
"저. 기. 요.”
그러던 중 누군가 올리버를 불렀다. 그것도 아주 코앞에서.
사색에서 빠져나온 올리버 앞에 핑크빛 머리의 여성이 상체를 내밀며 아래에서 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호 대상인 제인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모두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올리버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네?"
"다른 생각하고 계시는 것 같아서요.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나요?”
“아...., 죄송합니다. 별거 아닙니다.”
"그럼, 다행이고요. 다만, 전 여러분만 믿고 있는 처지라 그러니 조금만 더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주셨으면 해요. 부탁해요?”
제인이 생글생글 웃으며 올리버의 어깨에 손을 탁 댔다.
자연스러웠는데, 그와 함께 그녀의 팔에 낀 팔찌에서 미세하게 마력이 뿜어졌다.
‘뭐지?’
올리버가 닿은 부위를 살펴 봤으나, 딱히, 무슨 효과 같은 것은 없었다.
묻기도 애매해 그냥 넘겼는데, 그러자 어느새 만남은 끝나고 말았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앞으로 2주 동안 잘 부탁드려요.”
제인은 방긋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떠나자 던칸이 다시 나와 입을 열었다.
"저분이 여러분이 지켜야 할 대상입니다. 보다시피 어리고, 순진하시며, 착하신 분이죠.”
‘..…순진하시다라?’
올리버가 순간 의문을 품었다. 반대로 똑똑해 보이던데.
"그래서 저희에게도 잘 협조할 겁니다. 앞으로 2주간 아가씨는 이 저택을 벗어나지 않을 겁니다. 기껏해야 하루에 1시간 근처 산책 정도죠. 한마디로 경호하기 매우 쉽다는 겁니다.”
"요점이 뭐요?”
"저희 쪽 인원과 같이 하루에 번갈아가며 아가씨를 곁을 지키면 되는 겁니다.”
중년 해결사가 말했다.
"그럼, 우린 5일에 한 번씩 근무 서면 되는 건가?”
"아니, 난 빼줘요.”
니나가 말했다.
"난 능력 특성상 여기 고용인들과 협업해 이 근방 전체를 감시할 거거든.”
"능력?”
"어, 입 아프게 설명하는 것보다 보여주는 게 빠르겠지? 던칸, 시험해 봐도 되나요?”
"네. 원하시는 대로.”
니나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허리에 맨 짐을 풀기 시작했다.
제법 커다란 거라 뭐가 있나 싶었는데, 포장을 풀자 작은 머신 건이 나타났다.
“이런….. 군에서 전역한 후 처음 보는군.”
허나, 놀라움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니나가 고글을 쓰더니, 몸에서 마력을 뿜기 시작했다. 상당한 양이었다.
"..…다들 창밖을 봐. 저 멀리 커다란 나무 보여?”
"어, 보이네.”
"다들 잘 보고 있으라고.”
그녀는 혀를 할짝대며 머신 건을 들었다. 그리고는 벽을 향해 사격 자세를 취하고는 곧장 총에 마력을 담아 쏘기 시작했다.
그러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머신 건 총구 앞에 보랏빛 마법진이 펼쳐지더니 창밖에도 똑같은 마법진이 펼쳐진 거였다.
"파이어.”
두ㅡ두ㅡ두ㅡ두ㅡ두ㅡ두ㅡ두ㅡ두ㅡ두ㅡ두ㅡ두ㅡ
방안에 거대한 총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마법진을 통해 대량의 마력탄이 날아가 바깥에 있는 나무를 때렸다.
놀랍게도 위력이 상당했는데, 단 몇 초 만에 나무 몸통을 반쯤 갉아 먹더니 그대로 쓰러뜨리고 말았다.
모두 눈앞의 강력한 화력에 감탄을 금하지 못했는데, 그때 중년 해결사가 말했다.
"진짜 마총(魔統)이군. 마력 사용자인가?”
"어. 왜 내가 빠지는지 다들 이해하지?”
모두 고개를 끄덕였고, 그건 올리버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런 무기를 사용한다면 대상을 옆에서 지키는 것보다 그냥 혼자 활동하는 게 더 효과적일 테니.
도대체 저런 무기를 어떻게 만드는 건가 싶었는데, 때마침 중년 해결사가 잘 안다는 듯 중얼거렸다.
"공간학파와 브라우닝 사가 합작해 만든 SB-시리즈 최신품이군. 마력 사용자가 사용할 수 있는 무기는 대량생산에 적합하지 않아 전부 소량생산일 텐데. 용케도 이걸 샀구만. 한두 푼 하는 게 아닐 텐데.”
"월급 모았지.”
"월급이 적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가만히 듣고 있던 올리버가 대뜸 물었다.
한순간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는데, 그때, 니나가 특유의 호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보너스를 악착같이 모았거든.”
“아….. 그렇군요.”
"그래, 혹시 시비 거는 거야? 아까 전에 필거렛 안 줬다고?”
니나가 반농담조로 묻는 듯했으나, 그 내면 아래 미세하게 흔들리는 감정을 엿볼 수 있었다.
예민한 곳을 건드렸을 때 나타나는 분노.
올리버가 서둘러 사과하려고 할 때, 짝- 짝- 손뼉 치는 소리가 들렸다.
던칸이었다.
"우선 일부터 하도록 합시다. 여러분의 각 특성에 따라 역할을 분담할 테니, 모두 따라주십시오. 우선-”
***
이후, 역할이 나뉘었다.
나눴다 해도 딱히 크게 복잡한 것은 없었다.
평소 저택 주변의 경비는 던칸을 비롯한 에디스의 고용인과 니나가 맡았고,
드루이드 스콧과 마력 격투가 러셀, 참전군 해결사 고드리, 흑마법사 올리버 이렇게 넷은 다른 고용인들과 함께 번갈아 가며 2인 1조로 제인의 근처를 지키면 됐다.
그 사이 비번인 해결사들은 휴식을 취하며 여차할 경우 움직일 준비만 하면 됐는데,
얼핏 보면 빡빡해 보이나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휴식을 취할 공간은 저택 안이었고, 저택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이 최대한 편의를 봐줬기에 매우 편했다.
숙식 제공은 물론 신문도 요청하니 제공해주었는데, 그 덕분에 올리버는 첫날부터 일하지 않고, 신문과 요안나에게서 받은 파테르 경전을 읽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참고로 신문이라는 건 생각보다 재밌었는데, 그에 반해 경전은 아직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는 나중에 요안나를 만나면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특이하네요.…. 경전을 읽으시다니.”
집중해 경전을 읽을 사이 누군가 다가와 말했다.
앞을 보니 분홍빛 머리의 제인이 서 있었는데, 그녀는 하루마다 다른 옷을 입었다.
오늘 옷은 뭐랄까? 많이 추워 보이는 옷이었다. 코코 양을 따라간 천사의 집에서 일하는 아가씨들과 얼핏 비슷해 보였다.
분위기랄까 용도랄까.
시선이 읽힌 건지 제인은 팔을 펼쳐 보이며 몸을 돌았다.
과거 란다 공원에서 소풍을 나온 소녀처럼 발랄한 움직임이었다.
최소한 겉보기에는.
"후훗. 어때요? 옷 예쁘나요?”
“..…잘 모르겠습니다.”
"어머, 좀 안 어울리나요? 나름 신경 써서 산 건데..…."
제인은 시무룩해진 척 입술을 비쭉 내밀었는데, 올리버는 평소처럼 대답할 뿐이었다.
"아뇨, 전 정말 옷을 볼 줄 몰라 그렇습니다. 그쪽은 공부해본 적이 없거든요.”
“….하. 그런가요. 그럼, 다행이고요. 하지만 여성이 이런 질문을 하면 예쁘다고 하는 게 신사랍니다.”
"신기하네요. 코코 양도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말이죠….. 코코 양을 아시나요?”
"뭐, 어쩌다 보니요…. 그보다 경전은 왜 읽는 건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흑마법사가 경전을 읽는다는 게 조금 신기해서요."
제인은 아이처럼 방긋방긋 웃으며 얼굴이 가까이 가져다 댔다.
참으로 순진해 보였는데, 연기 솜씨가 아주 그만이었다. 왜 연기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올리버는 그녀의 등 뒤를 보며 대답했다.
"그런데 경호원분들은?”
"아? 너무 답답해서 잠시 혼자 있게 해달라고 했어요. 하지만 근방에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건 그렇고 질문에 대답 안 해주실 거예요? 약간 섭섭한데.”
제인이 웃으며 끈질기게 물었다. 느낌은 달랐지만, 에디스와 근본적으로 같다는 것을 느끼며 올리버는 순순히 대답해줬다.
"선물 받은 거라 읽고 있었습니다.”
"선물요? 흠….. 설마 여자?”
올리버가 잠시 생각했다. 요안나가 여자였던가?
"어.…. 예. 여자 맞네요.”
"오! 정말요? 그냥 농담 삼아 이야기한 건데….. 흠, 그럼 연인이신가요?”
"연인요? 아뇨, 그저 고마운 분입니다.”
"어머, 그래요? 무슨 고마운 일이 있나요?”
제인은 흥미가 생긴 척하며 근처의 의자를 가져와 올리버 옆에 앉았다. 아주 가까이.
"음..…. 제게 고마운 제안을 해주신 분이거든요.”
"그 제안이 뭔데요?”
“….말씀드리기 조금 난감하네요.”
"어머, 섭섭해라. 그럼, 신문은 왜 그렇게 많이 읽는지 이야기해주실래요? 제가 흑마법사는 처음 봐서 그래요."
제인이 그 말과 함께 올리버의 손에 자기 손을 올렸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딱 그뿐이었다.
"제가 기본 상식이 부족해 읽고 있었습니다. 코코 양이 신문이라도 읽으라고 그랬거든요.”
"그래요? 하긴, 흑마법사 중에는 지하나 동굴에서 수련만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까요.”
"반대로 아가씨는 많은 걸 아시는 것 같네요?”
"예? 아..…. 저는 어릴 적부터 나름대로 교육받고 또 이것저것 주워들을 수 있었거든요. 아버지와 만난 후에는 전문 교육도 받았고요. 아.…! 혹시 제가 도와드릴까요?”
"예?”
"신문 읽고 어렵거나 이해 안 가는 게 있으면 제가 가르쳐드릴게요. 어떠세요?”
예상치 못한 제안. 올리버가 대답했다.
"감사한 제안이긴 하지만, 괜찮으십니까?”
"뭐, 저도 심심하기도 하고. 절 지켜주시는 고마운 분들이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뭣보다.”
"...?"
"얼굴이 제 취향이거든요.”
제인이 귓속말을 하듯 가까이 얼굴을 대며 속삭였다.
마력을 머금은 향수 냄새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