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새 의뢰 (1) >
"자, 타세요.”
코코가 레스토랑 입구에 주차된 차 앞에서 말했다.
보닛이 쭉 뻗은 멋들어진 차로, 척 봐도 비싸 보였는데,
거기다 제복 차림에 모자까지 쓴 여성 운전기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단발머리에 빈틈이라곤 전혀 없었는데, 눈빛을 보아하니 단순한 운전기사는 아닌 듯했다.
운전기사가 날카로운 눈으로 올리버를 보며 정중히 차 문을 열었다.
"고마워, 페니.”
페니라고 불린 여성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코코가 뒷좌석에 앉은 뒤 올리버에게 다시 말했다.
"뭐 하세요. 어서 타시라니까요.”
올리버가 시키는 대로 자리에 들어갔다.
차 내부는 양쪽에 좌석이 서로 마주 볼 수 있게 설계되었는데, 들어가기 전 운전기사인 페니에게 고맙다고 했지만, 페니는 차가운 눈으로 고개를 짧게 끄덕일 뿐이었다.
"혹시 제가 무슨 실수 했나요?”
"아뇨, 그냥 페니는 남자를 안 좋아할 뿐이라 그런 거니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리 회원 중 남자를 안 좋아하는 사람들이 꽤 있거든요.”
올리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스토랑을 나오기 전 코코는 자신이 ‘시스터후드’라는 여성단체의 일원이라고 소개했다.
시스터후드란 여성 생존 단체로, 삶이 거친 란다, 그것도 밑바닥에서 기댈 곳이 없는 여성들이 서로 의지하기 위해 뭉친 조직이라 하였는데,
현재는 그 규모가 커져 여성 사업가부터 가게 주인, 호텔 메이드, 술집 점원, 해결사, 성 노동자, 과부 등 각계각층이 가입되어 있다고 했다.
"다시 생각해도 대단하군요. 시스터후드라는 거요.”
부우우웅 움직이는 차 안에서 올리버가 말했다.
"생각보다 대단하긴 해요. 옛날에는 말만 단체였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란다에서 영향력을 가지기 시작했거든요.”
올리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코코의 말에 따르면 회원들이 돈을 모아 시(市) 의원이나 공무원에게 로비한다고 하였는데,
가게의 단속 완화나, 성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 완화. 여성 투표권 같은 걸 지속적으로 요구한다고 했다.
"뭐, 전 여성 투표권보다는 사업에 더 관심이 많지만요.”
이제 본론. 올리버가 물었다.
"의뢰인이 누구라고요?”
“R구역의 자산가예요. 거물이죠. 핵심은 아니더라도 거물 세계 외곽에 발을 걸치고 있죠."
***
"꽤 역동적인 분이에요. 밑바닥 노동자 출신이었는데, 갑자기 목돈을 들고 나타나 란다 투기판에 뛰어들어 몇 번 크게 돈을 만졌죠.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마석 회사인 ‘프로메테우스’에 투자해 일생일대의 대박을 터트렸고요.”
".…프로메테우스가 뭐죠?”
“하….. 정말 지하실에서 살다 나오셨나 보네요. 신문 같은 것 좀 읽으세요. 요즘은 해결사도 무식하면 못한다고요.”
"좋은 조언이군요.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올리버가 코코의 비꼼에 그리 대답했다. 악의가 없는 진심이었는데, 코코는 그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영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다.
“..…프로메테우스는 마법 산업의 핵심인 마석을 취급하는 회사에요. 무슨 선견지명이 있는 건지 신대륙의 무가치한 쓰레기 땅을 매입했는데, 몇 년이 지나 거기서 대량의 마석이 발견됐고, 그걸로 단기간 내 란다..… 아니, 이 연합 왕국 굴지의 기업이 됐죠. 당연히 투자자들 역시 계급이 바뀌었고요.”
올리버가 흥미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법과 해결사 일에만 신경 쓰느라 그런 것에는 무관심했는데, 아무래도 정말 신문을 읽어 세상 공부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이후, 의뢰인께선 R구역에 정착해 그곳에 대량의 부동산을 산 뒤, 무슨 중세 영주처럼 살고 있죠. R구역의 시의원을 후원하는 후원자 중 하나라 경찰도 함부로 못 하고요.”
"대단한 분이네요.”
그러자 코코가 말했다.
"하지만 대단한 만큼 성격도 괴팍하니까. 조심하세요.”
"예..…. 그런데 정말 서적을 얻을 수 있나요?”
올리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의뢰인이 누군지, 의뢰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 수 없었음에도 따라가는 건 보상으로 내 건 악마에 관한 서적 때문이었으니까.
"예, 의뢰인께서 말씀하셨어요.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믿으셔도 될 거예요.”
“상황요?”
"예, 직접 보시는 게 더 빠를 거예요. 곧 도착할 테니 걱정은 하지 마시고요.”
코코의 말은 사실이었다.
자동차 밖의 광경이 변하기 시작했는데, 일반 거리와 다르게 건물이 더 활기차고 밝게 변했다.
비슷한 거리를 전에 본 적 있었는데….. 아! 머피의 비밀 주점이 있는 거리와 분위기가 비슷했다.
"여기는 주택가처럼 보이지 않는데요?”
"당연히 그렇게 안 보이죠. 이곳은 0구역 66번 거리에요. 일명, 기쁨의 거리죠. 여러 의미에서요.”
실제로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거리에는 여러 웃는 남성들이 있었다.
뚜껑이 열린 차량에 탄 중절모 사내는 코코처럼 예쁘게 차려입은 젊은 아가씨들과 뜨겁게 키스를 나눴고,
길가의 화려한 복장을 한 여성은 도도하게 걸으며 거리의 남자들을 유혹했다.
2층 테라스에는 젊은 아가씨들이 몸을 내민 채 돈 많아 보이는 젊은 남성들에게 놀다 가라고 소리쳤는데, 그 자리에서 남자들과 농담을 주고받기까지 했다.
"사람들끼리 노는 곳인가 보군요."
"뭐…. 그렇긴 하죠?”
"의뢰인이 여기 계시나요? 전 집에서 볼 줄 알았는데요.”
"뭐, 여기가 집이나 다름없긴 해요. 집보다 여기에 더 오래 있으니까요.”
그때, 차가 부드럽게 멈췄다.
페니의 운전 솜씨가 제법 좋았는데, 그녀는 곧장 내려 코코의 차 문을 열어주기까지 했다.
"고마워. 페니.”
페니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페니 씨.”
페니가 짧게 고개 숙였다.
"자, 여기예요.”
코코가 한 건물 앞에서 이야기했다.
고풍스러운 직사각형 건물로 길쭉하게 옆으로 지어진 건물이었는데, 지붕은 진한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정문에는 아치 형태의 커다란 간판이 달려 있었는데, 테두리에 전구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천사의 집?”
"예, 천사의 집이에요. 손님들을 천국으로 보내주거든요.”
코코가 그리 말하며 정문 쪽으로 걸어갔고, 올리버는 뒤따라갔다.
커다란 붉은 문이 부드럽게 열리자 화려한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바닥에는 두꺼운 양탄자가 이음새도 없이 넓게 깔려있었으며, 한쪽에는 화려한 마법주로 가득 채운 바(Bar)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조용히 쉴 수 있는 휴식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아슬아슬한 복장의 종업원들이 시중을 들거나, 진열창 안에 앉아 지나가는 남성을 향해 웃음을 지으며 손 키스를 날렸는데, 도대체 어떻게 노는 곳인지 감이 안 왔다.
하긴, 올리버는 어린 시절 고아원에서 따돌림을 당했으니, 놀이에 대해 아는 게 없긴 했지.
"마마, 코코가 왔어요."
술을 나르던 한 점원이 코코와 올리버를 보자 어딘가로 향해 뛰어가며 말했다.
그녀는 등에 가짜 날개를 달고 있었다.
"코코가 왔다고?”
한 여성이 2층에서 내려왔다.
노년에 접어든 여성으로, 머리가 하얬는데, 포레스트처럼 잘 관리했는지 기품이 있었다.
옷은 품격에 맞게 정갈하게 입었으며, 머리는 번헤어 스타일로 깔끔하게 정리하였는데, 얼굴에 세월이 묻었지만, 그래도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는 사뿐사뿐 걸어와 코코에게 다가왔다.
"늦지 않게 왔구나.”
"당연하죠. 저잖아요, 마마.”
마마. 이름인가 싶었지만, 이름이라 하기에는 좀 이상했다.
"저기 저분이…?”
마마라 불린 노년 여성이 올리버를 가리켰다.
"예, 제가 말씀드린 T구역의 다크호스 데이브라고 해요. 데이브, 이 가게의 주인이세요."
"안녕하세요. 데이브 씨. 이곳 천사의 집의 주인인 마마 엘리자베스라고 해요.”
올리버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해결사인 데이브라고 합니다. 만나 뵈어서 반갑습니다.”
엘리자베스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코코가 말씀하신 대로 예의 바른 분이시군요.”
"그냥 어릴 적 교육받은 대로 할 뿐입니다….. 그런데 마마라는 건 이름이신지?”
코코의 표정이 약간 미묘하게 구겨졌다.
그러나 당사자인 엘리자베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설명할 뿐이었다.
"마마라는 건 일종의 관리자 호칭이에요. 여러 회원을 도와주는 사람을 부르는 일종의 직책이죠."
"아.…. 그렇군요.”
"들은 대로 엉뚱하시군요.”
"그런가요?”
“….의뢰에 대해 알고 오셨나요?”
"보상이 뭔지만 들었습니다. 의뢰 내용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습니다.”
"딱 좋군요. 의뢰인이 원하시는 대로예요.”
"이해가 잘 안 되는데요, 의뢰인은 어디 계시죠?”
“VIP룸에 계십니다. 안내해 드리죠.”
그 말과 함께 올리버는 코코에서 엘리자베스로 배턴 터치하듯 따라가게 됐다.
VIP룸은 4층 꼭대기였는데, 올라가는 입구에는 근육질 여성과 날카로운 인상의 남성이 서 있었다.
'여기는 특별취급이군.’
실제로 방음 처리되어 있는지 바깥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는데. 수많은 방을 지나 엘리자베스는 가장 비싸 보이는 방 앞에 멈춰섰다.
문 앞에는 작은 유선 통신 장치가 있었는데, 거기에다 대고 엘리자베스가 말을 했다.
“록 님. 데려왔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엘리자베스가 통신장치를 제자리에 두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올리버는 시키는 대로 기다렸는데, 얼마 있지 않아 문이 열리며 여성 여덟 명이 나왔다.
그녀들의 손에는 적잖은 지폐가 들려져 있었는데, 불쾌한 감정과 함께 큰돈을 벌었다는 기쁨이 뒤섞여 있었다.
도대체 뭘 한 건가 싶었다.
"들어오게.”
저 방안에서 다 죽어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올리버가 안쪽을 보자 매우 지쳐 보이는 흡사 창백한 돼지 같은 노인이 보였다.
“귓구멍이 막혔나. 들어오라고.”
***
올리버는 시키는 대로 방안에 엘리자베스와 함께 들어갔다.
방 안에는 어떤 램프 비슷하게 생긴 기계가 달큰한 향이 나는 연기를 계속 뿜고 있었는데, 기계는 물론 연기에도 미세하게 마력이 머금어져 있었다.
킁. 킁.
올리버가 연기 냄새를 맡으며 포션인 것을 직감했다.
포션을 마셔본 적은 없지만, 마법주 작업장에서 포션 냄새를 맡아봤는데, 그것과 유사했다.
'왜 연기로 마시는 거지? 포션의 효능은 치료와 회복, 허나 마시면 그로 인한 부작용도 있다고 했는데….. 연기로 간접 흡연하는 이유가 뭐지? 필요는 한데, 부담되는 건가? 어디 아픈 건가?’
올리버가 머리를 재빠르게 굴려 생각했다.
이와 같은 생각에 이른 이유는 눈앞의 남자가 아파 보였기 때문이었는데, 겉모습뿐 아니라 몸 안에서 뿜어지고 있는 생명력 역시 불규칙적이고 흐릿했다.
‘거의 죽어가는 중이군.’
"뭘 재수 없게 빤히 바라보고 그러나. 남자 취향이야?”
창백하고 뚱뚱한 노인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는 팬티와 런닝만 입은 상태였는데,
바지를 입으려고 낑낑댔지만, 피곤한지 후- 하고 한숨을 쉬고는 다시 바지를 입었다.
두, 세 번의 시도 끝에 그는 양다리를 바지에 넣었는데, 그 이상은 힘들었는지, 지퍼도 올리지 않고 팬티를 보인 채 앉았다.
참으로 피곤해 보였다.
“하아..... 씨부럴 귓구멍 막혔나?”
"예?”
"물었잖아? 뭘 빤히 바라보냐고? 내 질문하면 대답해야지.”
노인이 오만상을 쓰며 물었다.
짜증은 분노로 발전했는데, 단순히 그뿐 아니라 올리버의 기를 꺾으려는 악의도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올리버는 평소처럼 대답할 뿐이었지만.
"아.…. 죄송합니다. 바지 갈아입으시는 걸 봤습니다.”
"......."
"......."
노인과 엘리자베스는 어이없는 눈으로 올리버를 봤다.
마치 뭐 이런 미친놈이 있냐는 표정이었다.
"이런 씨부럴, 내 살다 살다 별 미친놈을 다 보는군…. 엘리, 이놈 제대로 된 놈 맞아?”
엘리자베스는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확실합니다. 코코가 데려왔으니까요.”
"아니면 그 요망한 꼬맹이도 끝물이거나. 여자는 과일처럼 향기롭고 맛도 좋지만, 유통기한은 좆만 하니. 하! 안 그런가?”
노인이 자신의 농담이 웃긴 듯 하! 하! 하! 웃었다
엘리자베스 역시 웃었는데, 유일하게 올리버만이 웃지 않았다.
"왜 안 웃지? 아주 재밌는 농담인데?”
노인이 갑자기 인상을 팍 찌푸리며 물었다. 꽤나 위압적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올리버에겐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 웃지를 못해서요.”
"잘 웃지 못한다고?”
"예, 연습도 해봤는데, 웃는 건 잘 안 되더군요.”
"웃으면 10억 주지. 어떻나?”
갑작스러운 제안. 10억. 올리버가 한동안 해결사 일을 쉬고 연구에만 매진할 수 있는 액수였다.
"음……. 잠시만요..…. 음..…. 죄송합니다. 역시 안 되네요.”
올리버가 진심으로 노력해본 후 대답했다. 웃는 게 너무나도 어려웠다.
"하……. 미친놈이군. 딱 좋아. 엘리, 나가봐. 단둘이 이야기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