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 약속 (2) >
딱- 딱- 딱-
올리버는 장시간 걸어 P구역에 방문했다.
P구역은 T구역과 같은 공장지대 및 노동자 거주 구역이긴 했지만, 중상층 거주지와 붙어 있어 그런지 다른 노동자 거주 구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전해 보였다.
허나, 그것도 구역 중앙부 이야기.
외곽에 자리 잡은 작은 성당으로 가자, 일대는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흡사 버려진 곳과 같았는데, 거지들만 간간이 보였다.
올리버는 거지들에게 소액지폐 한두 장을 건네주며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히 별달리 수상한 건 없었다.
기쁜 일이었다. 요안나가 자신과 정말 대화를 할 생각이라는 거였으니.
올리버가 그렇게 낡은 십자가가 세워진 성당 입구로 들어갔다.
직사각 형태인 성당 내부에는 불편해 보이는 길쭉한 의자가 숨 막힐 정도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는데. 올리버는 혹시 이것 때문에 성당 내부에 사람이 없는 건가 싶었다.
물론 올리버가 상관할 바가 아니긴 했지만,
올리버는 품 안에서 지폐를 몇 장 꺼내 헌금 접시에 넣은 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성당 내에서 홀로 앉아있는, 금발이 긴 여성 뒤편에 앉았다.
올리버는 그녀를 따라 양손을 깍지를 끼며 조용히 말했다.
“..…기사님?”
"쉿. 잠시만요.”
올리버는 시키는 대로 침묵했다.
그런 다음 귀를 기울였는데, 요안나의 기도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 나약한 저희에게 힘과 용기, 지혜를 주시옵고, 아버지께서 선물해주신 영광스러운 임무를 다하도록 부디 굽어 살펴주시옵소서. 그리해 부디 제가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자녀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자녀가 기도 올리나이다…. 마할라.”
기도가 끝나고 엄숙한 침묵이 주변을 뒤덮었다. 잠시 후, 요안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에 들었던 것보다 더 차분한 음성이었다.
“.…올리버 맞나요?”
"예."
"나와줘서 고마워요.”
"저야말로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기사님과 대화를 나누는 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 배웠거든요.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질문 하나 할 수 있겠습니까?”
"뭐죠?”
"어떻게 제가 저인 걸 아신 거죠? 다름이 아니라 보다시피 제 얼굴이 변했지 않습니까?”
가죽 가면을 뒤집어쓴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올리버가 물었다.
혹시 성기사만이 알아볼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걸까?
요안나는 특유의 침묵을 유지하다 입을 열었다.
“..…그냥 알게 됐어요.”
".…예?”
"태도나 말투가 딱 봐도 당신이잖아요?”
"........"
올리버가 충격을 받으며 침묵했다.
나름대로 평범하고, 상식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는데…. 노력이 부정당한 것 같아 씁쓸했다.
"이런..…. 좀 더 노력할 걸 그랬네요?”
"어떻게 된 거죠?”
"예? 아,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했는데, 아무래도 노력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아뇨. 제가 묻는 건 그게 아니에요….. 여기서 뭘 하고 계시는 거냐는 겁니다.”
"예? 당연히 기사님께서 절 여기로 불러….. 아, 왜 해결사 일을 하고 있냐고 물은 건가요?”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는지 정면을 응시하고 있던 요안나는 뒤로 몸을 틀어 대답했다.
"예, 그래요. 왜 해결사 일을 하고 있는 거죠? 당신은.… 흑마법사 조직의 수장이었잖아요?”
그녀의 표정에는 적대감이 없었다.
그보다는 혼란과 의구심, 혹시 모를 기대감이 있었다. 구체적인 감정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올리버가 피곤한 듯 눈 사이를 주무르며 대답했다.
"그저 기사님의 조언을 따른 겁니다.”
"조언요?”
"예, 세상 밖으로 나와 사람들과 어울리라고 말씀하셨잖습니까? 그래서 나온 겁니다….. 물론, 그게 다는 아니지만, 제법 큰 이유였죠. 감사합니다. 이 말 하고 싶었는데, 결국 하게 되네요.”
요안나는 믿기지 않는 듯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많이 본 표정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본 표정. 영문은 알 수 없었지만, 올리버와 대화를 나눈 사람들은 어째 한 번씩 저런 표정을 지었다.
"......."
"......."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는데, 그때, 올리버가 침묵을 깨뜨렸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었는데, 침묵 따위로 시간을 보내자니 너무 아깝지 않은가?
"그동안 잘지내셨습니까?”
"저요?”
"예…. 약사님께서 잘 보내셨다고 했는데, 약간 걱정됐거든요. 잘 지내셨나요?”
그러자 요안나의 새하얀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와 함께 떠오르는 수치심과 창피함, 죄책감 등이 엿보였는데, 어째 그녀는 그때 일을 수치스럽고, 죄스럽게 생각하는 듯했다.
“..…제가 실수한 겁니까?”
잠시 동안의 침묵. 요안나가 대답했다.
".…창피하게도 잘 지냈습니다.”
"아, 그래요?”
"예, 임무에 실패하고 사악한 약을 뿌리 뽑지도 못했는데,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친 성기사라는 칭호를 얻어 정식으로 이곳에 배치받았죠..…. 참으로 수치스럽고, 죄스러워요.”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럼, 왜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않은 거죠?”
올리버가 별생각 없이 물었다. 진짜 궁금해서. 다만, 그와 별개로 그녀는 움찔했다.
“……절 도와준 수많은 분들이 침묵하라고 해서요. 차라리 이 기회를 살려 정진하는 게 세상을 위해 모두를 위해 이롭다고 말씀하셨어요.”
오오..…. 올리버는 약사에게 감탄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파테르교 내부의 복잡한 이해관계 탓에 요안나가 실패한 사실이 알려지지 않을 테고, 그 덕분에 와인햄은 더욱 안전해질 거라는 그의 말이 사실이었다.
참으로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기사님은 아직도 그게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군요.”
요안나는 침묵으로 대답했다.
감정이 복잡하게 휘몰아쳤는데, 단순히 주변의 권고만은 아닌 듯했다. 그녀가 이런 선택을 한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아주 소중한 무언가가 관련된.
그것에 관해 물으려는 찰나 요안나가 반 박자 더 빠르게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제 차례예요.”
"예?”
"흑마법 조직을 떠나고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죠?”
예상치 못한 질문에 올리버가 턱을 괬다.
말해줘도 되려나?
뭐..…. 괜찮을 것 같았다. 애당초 조언해준 게 그녀였으니, 대답을 들을 자격이 있는 것 같았다.
뭣보다 감정에 속셈이나 악의가 없었고.
"음, 말하는 건 상관없지만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수 있는데요.”
"아직 시간이 많으니 걱정하지 마시죠.”
올리버가 고개를 끄덕인 후 입을 열었다.
내용 자체는 별거 없었다.
남들 몰래 조셉 패밀리를 떠나 X구역을 방문하고, 그 와중에 캔트를 만난 이야기를 했다.
캔트의 행동과 그를 따르는 거지패에 관해 과하진 않되 상세히 설명하였는데, 어쩌면 올리버는 기대한 것일지도 몰랐다.
캔트를 보고 자신이 느낀 뭐라 설명하기 힘든 감정을 요안나가 대신 이야기해줄지도 모른다는…..
그러나 기대와 달리 요안나는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후, 올리버는 캔트를 떠나 해결사가 된 이야기를 했다.
남들에게 피해가 갈 내용은 생략하되 흥미롭게 생각하는 퇴역군인 이야기와 글을 가르쳐달라고 한 용감한 소년 이야기를 해줬는데 올리버는 문득 말하고 나니 참으로 많은 사람을 만났다는 걸 깨달았다.
뭐라 형용하기 어렵지만, 꽤 만족스러웠다.
그 모습이 티가 났는지 요안나가 말했다.
“..…즐거우신가 보군요.”
“음….. 예, 즐겁습니다. 세상은… 꽤 재밌는 곳이더군요.”
"그렇다니, 다행이군요….. 그런데 해결사가 된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뭐, 제안받기도 했고, 이게 그나마 제가 할 수 있는 일 중 돈벌이가 괜찮은 편이라서요?”
올리버가 적당히 대답했다. 성기사에게 흑마법과 악마에 관한 서적을 사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건 좀 아니었으니.
“….그래서 주먹을 휘둘러 돈을 버는 건가요?”
"예, 식당 일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책 한 권 사기가 빠듯하다고 해서요….. 뭐, 일반인 피해가 없는 일로 골라 하고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오염구역 청소도 해결사들이 하고 있으니, 저희도 도움이 되는 존재인 거 같은데.”
마땅히 할 말이 없는지 요안나가 또 침묵했다.
그녀는 올리버를 아주 복잡한 표정으로 봤다.
"질문 하나 하죠.”
"예, 말씀하시죠.”
"정말 퍼펫과 아무 일도 없었나요?”
"예….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흑마법사는 자신보다 강한 자를 주인으로 모신다고 해서요.”
올리버가 과거 조셉 패밀리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예, 그런 거 같네요.”
"혹시, 퍼펫의 노예가 되는 대가로 목숨을 부지하지 않았나요?”
"음, 아뇨. 아닙니다….. 그런데 궁금해서 그러는데, 만약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죠?”
"당신을 더 이상 가만둘 수 없겠죠”
요안나가 강렬한 눈빛을 띠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는 진심이었다.
"아, 그런가요?”
"예, 퍼펫은.… 수백 년을 살며 수많은 범죄를 저지른 극악한 죄인이니까요. 그것도 모자라 수많은 흑마법사를 양성하고, 수많은 범죄 조직을 만들어 전 세계에 혼란을 주고 있어요. 뭣보다 인간계의 멸망을 꾀하는 검은손의 간부이기도 하고요. 절대 용인할 수 없는 존재예요.”
“……검은손이 인간계를 멸하려고 한다고요?”
"예…. 왜 그러시죠?”
“아….. 저는 그냥 검은손이 흑마법사들이 모인 범죄집단인 거로만 알고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좀 힘이 세고 덩치가 큰 그런 조직요. 그런데 인간계를 멸망시키려는 것인지는 몰랐네요.”
“……그들은 주기적으로 악마와 거래하려고 하거든요. 교단의 조사에 따르면 그렇죠.”
"그럼, 교단은 검은 손에 대해서 잘 아시나요?”
"어느 정도는요.”
"혹시, 어떤 조직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왜 아시려는 건가요?”
"그냥 궁금해서요. 저번에 말씀드렸지만, 한번 들어갈 기회가 있었거든요. 들어가는 조건이 좀 그래서 거절하긴 했지만 어떤 곳인지 궁금하긴 하네요.”
요안나는 다시 올리버를 빤히 바라봤다.
깊은 의심과 희미한 믿음. 상충 된 두 가지 감정이 섞였는데, 참으로 묘하다고 할 수 있었다.
어떤 의미로는 이게 감정의 좋은 점이 아닐까 싶었다.
변칙적이고, 상충하며, 모순된 것. 그렇기에 아름답고 즐거웠다.
"검은손은 강력한 흑마법사들이 모인 느슨한 연합체 형태의 조직이에요.”
올리버가 귀를 쫑긋 세웠다.
워낙 소문만 무성한 집단이라 캔트조차 검은손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려 주지 못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데서 귀한 정보를 듣게 된 거였다.
"교단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하나의 우두머리가 이끄는 조직이 아닌 손가락들이 제각기 이끄는, 사실 조직이라고도 말하기 힘든 조직이죠.”
"손가락요?”
"예, 검은손의 간부를 지칭하는 말이에요. 퍼펫 같은.”
올리버는 문득 기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왜? 검은손의 이름은 왜 검은손이죠?”
사실 대답을 들을 기대를 하고 한 질문은 아니지만 놀랍게도 요안나는 대답해줬다.
"검은손은 죽음을 뜻하거든요. 보통은요. 그리고 그림자처럼 어디에나 존재하죠.”
어디에나 존재하는 죽음의 손이라…..
"실제로 그런가요?”
".…슬프게도요. 퍼펫을 비롯한 수많은 손가락들은 거미줄처럼 전 세계에 광범위하게 뻗어있어요. 심지어 각 국가의 부패한 고위층과도 연결되어 있죠. 저희는 그것을 감시, 수사하고요.”
흥미로웠다. 캔트의 말대로 제법 위험하고 강력한 조직인 것은 예상했지만, 요안나의 설명으로 좀 더 구체화 된 것 같았다.
점점 더 아쉬웠다.
그냥 인형사 글립의 제안을 받아들일 걸 그랬나 싶었다.
어쩌면 적이 아닌 상태로 퍼펫을 만나 이것저것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역시 조건을 떠올리자 좀 그랬다.
어쩌면 캔트를 만나지 않았으면 기꺼이 따를 수 있을지도 몰랐는데.
뭐라고 할까. 속이 약간 복잡했다.
올리버가 그렇게 공상을 하며 내면의 세계로 빠지는 그때 삐- 삐- 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뭔가 싶어 앞을 봤는데, 요안나가 말하다 말고 무슨 기계를 보고 있었다. 통신장치의 일종 같았다.
그녀는 기계를 확인하더니 버튼을 눌러 끄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하지만 이만 일어날게요…. 갑자기 일이 생겼네요.”
“아….. 아쉽군요.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는데요.”
"걱정마시죠….. 가끔씩 당신을 감시하러 올 테니까요.”
경고가 섞인 말투였지만, 올리버는 오히려 기뻤다.
그럼 또 만나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거지 않은가?
"기쁜 말씀이군요.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기쁘다고요?”
"예, 전 기사님이 좋거든요. 아름다워서요.”
요안나는 그 말에 움찔하더니, 화가 난 듯 얼굴을 붉혔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마시죠.”
“…진심입니다만? 그때 그 아름다운 빛.…. 아름다웠거든요."
"......"
요안나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품 안에서 뭔가를 뒤졌다.
올리버는 딱히 경계하지 않으며 바라봤는데, 잠시 후, 그녀가 작은 책자를 하나 꺼냈다.
"이건..…?”
"파테르 경전이에요. 책 좋아하시는 거 같은데, 한번 읽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