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청소 시즌 (1) >
란다의 금융 기관과 기업 본사, 마탑 연구소가 밀집한 D, E, F구역.
란다 내에서도 이곳은 유독 화려한 건물이 많았는데, 포레스트는 그중 E구역의 한 호텔에서 머물고 있었다.
값비싼 호텔로 부유한 재계 인사들이 주 고객이었는데, 그뿐 아니라 기업의 간담회나 정치인의 협상 장소 혹은 거대한 이익 집단의 정기 회담 장소로 쓰였다. ……가령, 중개인 조합과 같은.
포레스트는 호텔에 마련된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었는데, 수행원으로 따라온 알이 조용히 다가와 귓속에 속삭였다.
"사장님. 한 시간 후 6층 홀에서 회의를 시작된다고 합니다.”
포레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로 차분했지만,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분명 정기적으로 이뤄지는 조합원 모임이긴 했지만, 그 느낌이 약간 달랐기 때문이다.
대개 특별한 이슈가 없으면 조합 운영비로 쉬러 온 분위기였는데, 이번 모임은 약간 어색한 감이 있었다.
대다수 중개인은 평소처럼 쉬는 분위기였지만, 일부 중개인이 은근히 부산했기에.
마치,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알….. 혹시 뭐 들은 이야긴 없나?”
"죄송하지만, 구체적으로는 없습니다. A, B, C, D 구역 사람들은 뭔가를 아는 눈치이지만, 절 상대해주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알이 사과했지만, 포레스트는 고개를 저었다.
알은 충분히 유능했다. 신대륙 식민지에서 끌려온 노예 출신임을 고려하면 더욱 말이다.
어쩌면 인간의 우월한 유전자가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는 마법사의 말은 거짓일지도 몰랐다.
..…어쨌건, 알이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내지 못한 건 그의 탓이 아니었다. 오히려 포레스트의 위치 탓이었다.
절대적인 법칙은 아니었지만, 중개인들도 은근히 서열이 있었으니.
물론 대개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사람 셋이 모여도 리더가 생기는 것처럼 미묘한 힘의 우위는 분명 존재했다.
보통 권력가와 자본가들에 가까운 앞자리 구역에 있는 중개인이 강세고 그 뒤로 갈수록 약세였는데, 그것은 주로 상대하는 고객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A구역에 가까울수록 권세 있는 정치가나 부유한 자본가를 상대했고, 뒤로 갈수록 영세한 사업가와 갱단을 상대했으니.
당연히 중개인이 사용할 수 있는 영향력과 자본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 차이로 중개인들의 서열도 나뉘었고.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포레스트는 약세에 속했다. 노동자 거주지인 T구역에 자리 잡은 중개인이었으니.
뭐, 앞의 구역에 자리 잡을 기회가 있긴 했지만 그건 이미 지나간 과거-
"-포레스트!”
생각에 빠진 포레스트 앞으로 한 남자가 나타났다.
비구역을 주무르고 있는 중개인 엔(N)이었다.
참고로 이름인 엔은 비구역의 대표 중개인이 된 후, 스스로 개명한 거였다.
"오래간만이군. 엔.”
"그래, 더럽게 오랜만이군. 포레스트.”
거구의 덩치와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엔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같은 중개인 일을 시작한 동기였는데, 그는 포레스트와 달리 곧장 중개인이 되지 않고, 해결사 일을 하다가 중개인으로 넘어온 케이스였다.
그런 탓인지, 포레스트와 달리 그의 중개업소는 하나의 용병단 느낌이 더 강했다.
엔은 생긴 것만큼이나 우악스럽게 다가와 앉아 다짜고짜 말을 꺼냈다.
"그건 그렇고, 말해봐. 요즘 재밌는 소문이 들리던데.”
"재밌는 소문?”
“아이….. 왜 이래? 요즘 시끌시끌한데, 꽤 괜찮은 흑마법사 구했다고….. 소문으로는 마법사도 이겼다던데, 그것도 마탑의?”
우악한 생김새와 말투와 달리 그의 행동은 은근히 능글맞았다.
마치 곰 같은 너구리였는데, 포레스트는 딱히 내색하지는 않았다.
워낙 이쪽 바닥이 소문이 빨라 포레스트도 알고 있었지만, 정식으로 보고 받은 것은 아니었으니.
허나, 마법주 공장이 만들어지고 있는 창고 근처의 전투를 들어봤을 때 마법사일 확률이 아주 높았다.
"아직 확실한 건 없네.”
"이 바닥에 확실한 게 있나? 도대체 어떻게 얻은 거야?”
어떻게 얻은 걸까. 포레스트는 스스로에게 자문했다. 그와 함께 캔트가 준 소개장이 떠올렸다. 그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와..…. 이 친구 이거 꽁으로는 입을 안 열겠다는 건가? 뭐, 좋아. 그럼 내가 재밌는 정보 하나 주지. 딱히 지금에서는 쓸모없겠지만 그래도 매도 알고 맞는 게 낫잖아?”
"매라니. 무슨 이야긴가?”
"이런 얌체 같은 친구를 봤나?! 자기 유리한 이야기가 나오니 대꾸하는군….. 뭐 좋아. 아무래도 ‘청소 시즌’이 다가온 거 같아.”
"청소 시즌이라 하면…..”
“....맞아오염구역 청소지.”
"이해가 안 되는군. 청소 시즌이라면 아직 몇 개월 더 남았잖아?”
"갑자기 좀비랑 오염생물이 대폭 늘어나 날뛰고 있다더군. 그래서 일정을 앞당겼데, 근데, 문제는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면?”
"평소와 달리 주는 인력을 받는 게 아닌 시(市)에서 동원 인력을 직접 뽑아 쓰겠다더군. 이번 시즌이 우리 조 차례지?"
***
"에, 에이…."
"예, 맞아요."
"비...."
"예, 또 맞아요.”
“시, 씨…..”
"예, 훌륭해요. 그다음은요?”
올리버는 식당 구석에 로스번과 알파벳 공부를 하고 있었다.
생각과 달리 로스번은 그리 빠르게 배우지 못했다.
원래는 단어 공부를 하고 문법으로 넘어갈 예정이었는데….
뭐,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비록 로스번의 공부 속도가 빠르진 못했어도, 소년의 배우려는 의지는 약해지긴커녕 더욱 굳세 졌으니.
마치,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그때, 계산대에서 장부를 작성하던 여관 여주인이 소리쳤다.
“로스번! 5분 남았다.”
재깍재깍 움직이는 시계 소리와 함께 로스번은 화들짝 놀랐다.
올리버의 설득으로 업무 시간 중 쉬는 시간 동안 공부를 할 수 있었지만, 만약 약속 시각을 어기면 휴식 시간까지 뺏겠다고 여관주인이 경고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럼에도 원망할 수 없었는데, 그녀 입장에서 많이 양보한 거기 때문이었다.
다급해진 로스번은 다음 알파벳을 줄줄 읊기 시작했다.
“D, E, F, G..…
마음이 다급해지자 겁이 줄어들었고, 로스번의 목소리에는 머뭇거림이 사라졌다. 그 덕분에 알파벳을 줄줄이 읊기 시작했다.
속도만 빨라졌을 뿐 아니라 발음도 더 깔끔했다.
그렇게 알파벳을 다 익힌 것을 5분도 안 돼 증명했다.
"......"
".....자, 잘했나요? 선생님?”
"예, 훌륭하셨어요. 조그만 자신감을 가지면 더 빨리 배울 거에요.”
그 말에 로스번의 침울한 얼굴이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그냥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한 건데 왜 저리 기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다시 여관 여주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스번! 시간 다 됐다!”
그 말에 로스번은 올리버가 선물해준 책과 필기도구를 챙겨 나갔다.
올리버도 오늘치 일은 다 했기에 개운하게 일어나 방으로 향했는데, 그때, 여관 여주인이 올리버를 불러세웠다.
"잠시만요. 데이브 씨.”
"저 부르셨습니까?”
“예….. 우선, 초콜릿이랑 꽃 고마워요.”
통통한 중년 여성이 말했다.
책방 노인이 아이가 일하기 위해서는 여관 여주인에게 허락을 구해야 한다고 했고, 위와 같은 선물을 가져가 설득하라고 조언했다.
여성을 설득하는데, 그게 가장 효과적이라고.
"아뇨, 저야말로 로스번에게 공부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여관 여주인은 수상쩍은 시선과 함께 의심, 몰이해와 같은 감정으로 올리버를 바라봤다.
"전 손님에게 뭘 캐묻는 성격이 아니에요.”
"예, 압니다.”
"하지만 지금은 물어야겠어요. 왜 시간뿐 아니라 돈까지 써가며 애한테 글자를 가르쳐주는 거죠?”
책방 노인이 했던 질문. 올리버는 그때보다 능숙하게 대답했다.
"전 가르쳐줄 수 있고, 로스번은 배우고 싶어 하니까요.”
"단지 그거뿐인가요?”
“….아마도요?”
여관 여주인은 이해할 수 없는 괴짜라도 본 표정을 지었다.
그럼에도 딱히 적대나 혐오와 같은 감정은 내보이지 않았다. 그저 놀랄 뿐.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자 올리버가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이만 저 가봐도 될까요?”
"아, 예…. 시간 뺏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그럼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올리버는 방으로 올라가 곧장 외출 준비를 했다. 외출 준비라 해봐야 웃옷을 입는 정도였지만.
오늘은 포레스트가 돌아오는 날.
직원들 말에 의하면 점심시간에는 돌아올 거라 했는데, 이미 점심시간이 지나 있었다.
올리버는 여관에서 나와 곧바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슬슬 이 거리도 익숙해졌는데, 사과나 핫도그를 파는 가판대 사람들이 올리버를 보고 아는 체했다.
그중 거지도 있었는데, 챙이 엉망으로 뜯긴 걸인은 언제나처럼 모자를 내밀며 인사했다.
"안녕하시오. 선생님. 오늘도 멋지십니다. 이 불쌍한 친구를 위해 한 푼만 적선해 줄 수 있겠습니까?"
"예, 반갑습니다.”
올리버는 여느 때처럼 품 안에서 소액 지폐 한 장을 꺼내 모자에 넣어줬다.
"오오, 감사합니다! 복 받으실 겁니다. 선생님.”
거지는 올리버를 향해 인사했고, 올리버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렇게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응?"
올리버가 라는 팻말이 걸린 레스토랑을 봤다. 창문 역시 커튼이 쳐져 있었다.
처음 보는 경우였다. 포레스트 레스토랑은 아침 일찍 문을 열고, 밤늦게까지 문을 닫지 않았는데.
당연히 문을 닫는 경우도 보지 못했다.
올리버는 뭔 일인가 궁금하면서도 무슨 일이 있겠지 생각하며 돌아가려고 했다.
그때였다.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레스토랑 문이 열렸다.
"데이브 씨.”
차분한 어조였지만, 알은 급히 나온 듯 숨을 몰아쉬었다. 감정 역시 놀란 상태였고.
"안녕하세요, 알 씨. 안에 계셨군요. 어떻게 제가 온 줄 아신 거죠?”
"발소리를 듣고….. 혹시 방문하시려던 겁니까?"
"예.…. 그런데 문을 닫은 것 같아서요. 들어가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사실 저희 쪽에서는 언제 오시는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요?”
"예.…. 괜찮으시다면 들어와 주시겠습니까?”
"예, 그럼 실례 좀 하겠습니다.”
올리버는 알의 말에 예의 바르게 대답하며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아서 그런지 늘 보이던 손님들은 없었는데, 대신 해결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그 자리를 대신 메꾸고 있었다.
대략 열댓 명. 그중 아는 얼굴도 있었다. 코코 양.
“이런 데이브 씨. 오랜만이네요?”
코코 양도 올리버를 보고 말을 걸었다.
올리버도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했는데, 그녀는 그런 올리버를 보며 농담하듯 말했다.
"예의 바르지만, 여성을 상대하는 것 치고는 너무 딱딱하네요. 인기가 별로 없겠어요.”
"그런가요?”
"예, 저희 가게에 찾아오시면 알려드리도록 할게요.”
반은 거짓 반은 진심. 그녀는 복잡한 감정의 빛을 띠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호출받아서 오신 건가요?”
"호출요? 아니요. 그냥 왔습니다.”
"어머, 그래요….. 알? 이 흑마법사님에게 호출기도 안 준 거야?”
"규정상 아직 드릴 때가 아니어서. 곧 드릴 예정이었습니다.”
"포레스트.… 그 어르신도 참 유연성이 없으셔. 하긴, 그 덕분에 지금 평판을 유지하시는 거지만. 그래도 그렇지. 다크호스를 다른 중개인에게 빼앗기면 어쩌려고.”
"사장님 일이라 일개 직원인 제가 드릴 말씀은 아니군요.”
올리버는 아주 작지만 알에게서 약간의 짜증과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포레스트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는데, 코코 역시 이를 눈치챈 듯 사과했다.
"어머…. 미안, 내가 좀 말이 과했네. 하지만 이해해줘, 알. 사람이 사람이잖아?”
코코 양은 그리 말하며 올리버를 봤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코코 양에게 되물으려는 찰나 한 직원이 코코 양을 불렀다.
그녀는 깃털 모자를 쓴 채 단아한 미소를 지으며 사장실로 들어갔다.
보아하니 그냥 놀러 온 게 아니라 일 때문에 온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정보상인이라고 했던가?
알이 올리버에게 부탁했다.
"괜찮으시다면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아, 예…..”
올리버가 주변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상당한 수의 해결사들이 불안한 감정을 가진 채 이곳에 앉아 있었다. 다들 무슨 고민거리가 있는 것 같았다.
"알, 혹시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되나요? .…아, 혹시 말하기 힘든 거면 괜찮아요."
"아뇨. 말씀해드리겠습니다.”
"어? 진짜요?”
"에…. 제가 미리 설명해 드리는 게 더 나을 테니까요.”
“...? 무슨 일이죠?”
"청소 시즌이 다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