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휴식 (2) >
딱- 딱- 딱-
일을 마친 후 올리버는 T구역 27번 거리에 위치한 레스토랑 포레스트를 방문한 뒤 곧장 머무는 숙소로 향했다.
어차피 피곤하던 차라 임무만 보고하고 바로 돌아가 쉴 생각이었지만, 그럼에도 생각 이상으로 빨리 돌아가게 됐다.
이유는 다름 아닌 포레스트와 알이 없었기 때문.
레스토랑에 방문하니 평소와 달리 다른 직원이 나와 올리버를 반겨주었는데, 그가 말하길 오늘 포레스트가 일이 있어 레스토랑에 나오지 못했다고 양해를 구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았지만, 직원은 란다의 중개인 조합 정기 모임에 갔다고만 말할 뿐 그 이상은 자신도 모른다고 답했다.
올리버 역시 그냥 반사적으로 물은 것이기에 그 이상은 캐묻지 않고, 임무를 완수했다는 것만 대신 전해달라고 부탁하였는데, 그러자 직원은 서류 한 장을 가져와 사인을 부탁했다.
임무를 끝낸 것을 공식적인 서류로 남기는 것으로 올리버는 직원의 요청대로 서류에 사인하곤 그곳을 떠났다.
정식으로 서류를 작성하자 진짜 일이 끝났다는 느낌과 함께 한 달 동안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뭐, 심각한 건 아니었다.
머피 쪽에서 잠자리라던가, 식사 등은 상당히 챙겨줬으니.
이보다 더한 생활도 해봤기에 그다지 심각한 건 아니었다.
몸이 약간 무겁고 잠이 오는 정도?
아마, 하루 푹 쉬면 씻은 듯이 회복할 터였다.
숙소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누구..…. 아! 당신이군요.”
여느 때처럼 식당에서 음식을 준비 중이던 여관 여주인이 올리버를 보자마자 말했다.
"예,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입니다.”
"예, 정말 오랜만이네요. 일은 끝났어요?”
"예, 대충….. 별일 없었는지요?”
"별일요? 달걀 가격이 오른 것만 빼고요. 세상에 어떻게 달걀 가격이 오를 수 있죠?….. 그보다 식사는 하셨어요? 식사 내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아!”
그때, 누군가가 소리 냈다.
다름 아닌 감자 바구니를 가져오던 여관 일꾼 꼬마였는데, 감자를 옮기느라 몸에 흙이 묻은 소년은 올리버를 보자마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인지 아이는 몹시도 반가운 감정을 빛냈다.
누가 떠올랐는데, 음….. 아! 마리였다.
“로스번! 감자 가져오라고 했잖니?! 바구니가 스스로 걷지 않는다고!”
여느 때처럼 여주인의 호통에 로스번이 화들짝 놀라며 감자를 가득 담은 바구니를 옮기기 시작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올리버는 굳이 따라가 묻지 않았다.
딱히 궁금하지 않은 게 첫 번째 이유요. 애도 바빴고, 자신 역시 졸린 게 두 번째 이유였다.
그렇게 올리버는 계단을 타고 올라가 자기 방에 들어갔다.
한 달 만에 돌아온 방이지만, 바뀐 것은 없었다.
개인용품은 얼마 없을뿐더러, 있다 해도 개인 보관 상자에 넣어놨으니.
이미 겪어 봐서 알지만, 이곳 여관 주인은 좀 까다로운 구석은 있어도 청소할 때 손님 방을 뒤지는 성격은 아니었다.
‘음..…. 그렇다해도 계속 여기 머무는 것도 좀 그렇네.’
올리버가 문득 생각했다.
이곳 생활에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 해도 최근에 얻은 몇 가지 정보를 미뤄봤을 때 이곳을 떠나 새로운 숙소를 잡는 게 여러모로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격을 낮춘다고 해도 숙소에서 머무는 건 장기적으로 볼 때 돈 낭비였는데, 목돈을 쓰더라도 집을 장기 임대하거나, 사는 게 이익이라는 걸 깨달았다.
퇴역 군인 출신 노동자 중 상당수가 집세 때문에 앓는 소리를 낸 게 그 근거.
실제로 그들의 말을 토대로 숫자를 계산해 보자 여관에서 사는 것은 올리버에겐 불필요한 지출에 해당했다.
‘사지 말고 장기 임대 쪽이 낫겠어. 돈도 덜 들고, 그쪽에 덜 귀찮아. 뭣보다 집은 내게 불필요하고.’
올리버가 그리 결론 내렸다. 올리버에게 필요한 건 적당히 지낼 곳이지, 자산으로서의 집이 아니었으니.
무엇보다 올리버는 완벽한 개인 공간을 가지고 싶었다.
흑마법 실험을 할 수 있는 개인 공간.
창고나 지하실이 달린 집도 좋았고, 정 안되면 인형사 글립처럼 어디 으슥한 곳에 창고를 얻는 것도 나을 것 같지 않았다.
‘사람 시체는 안 돼도, 개나 고양이 사체는 괜찮지 않을까?’
슬슬 이에 관해 포레스트에게 물어볼까 고민하는 그때 똑- 똑- 방문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올리버는 고개를 돌렸다. 문 너머로 비치는 감정이 보였다. 아는 감정이었다.
“….로스번? 무슨 일이시죠?”
올리버의 말에 로스번이 화들짝 놀랐다.
문 너머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무, 문 열어도 될까요?”
"아, 잠시만요.”
올리버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초조한 듯 움츠린 지푸라기 머리 색의 소년이 보였다.
"아,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세요?”
"주, 주인님께서 저녁 식사를 하실 건지 여쭤보라고 해서요."
"저녁 식사요? 음..... 예, 먹겠습니다.”
"아, 예…..”
로스번은 물러나지 않고 우물쭈물했다. 초조함과 두려움으로 감정이 물들고, 두 손을 꼼지락거려 그 감정을 밖으로 드러냈다.
그럼에도 가느다랗지만 질긴 한줄기 의지가 소년을 계속 서 있게 했다.
“……무슨 할 말 있으신가요?”
"아..…"
소년의 감정은 더욱 요동쳤다.
수없이 쌓인 패배감과 좌절감이 소년을 내리찍었지만, 새싹처럼 작고 끈질긴 의지가 일어나려고 애썼다.
이윽고 소년이 요동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 글 좀 알려주실 수 있나요?”
***
저녁 시간 때 올리버는 식사하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그레이마켓이 있는 재래시장으로 향했다.
T구역 구석진 곳에 있는 재래시장 말이다.
해가 저물 때라 그런지 재래시장은 오렌지색으로 물들었는데, 사람도 한산했으며, 가게도 하나둘 문을 닫고 있었다.
시장마저 밤이 찾아오니 잠드는 거였는데, 다행히 올리버의 목적지는 밤잠이 늦은 모양이었다.
그 목적지가 어디냐면..….
“..…이런, 오랜만이오. 젊은 친구.”
가게와 가게 사이 껴 있는 작은 중고 책방 노인이 말했다.
그는 처음 봤을 때처럼 가게 앞에 앉아 오늘 자 신문을 보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오랜만에 뵙습니다.”
올리버는 예의를 갖춰 노인에게 인사했다. 노인이 권해준 책으로 세계수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됐으니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인도 그런 올리버의 태도가 싫지 않은지 미소 지었다.
"안 본 사이 더 예의가 발라진 거 같소. 고맙긴 하지만, 별 볼 일 없는 책방 노인에게 너무 과하오.”
“…? 어르신 덕분에 재밌는 책을 읽었는데, 그것과 책방 노인이란 점이 무슨 상관인지요?”
올리버의 순수한 물음에 노인은 피식 웃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 주제로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자는 제스처였다.
"그보다 무슨 일 때문에 왔소? 저 멀리서 오는 걸 보니 겸사겸사 찾아온 거 같지는 않은데?”
올리버가 왔던 길을 되돌아봤다.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눈이 매우 좋은 것 같았다.
"예, 맞습니다.”
"역시나..…. 내가 한번 맞춰봐도 되겠소? 여기 본 이유. 아마 책 내용 중 궁금한 게 있어 날 찾아온 것 같은데 맞소? 그런데, 그런 것 치고 맨손으로 온 것 조금 아쉽구려. 젊은 친구.”
노인의 자신만만한 목소리.
올리버는 아무런 악의 없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뇨. 혹시 아이한테 글을 가르쳐주기 좋은 책이 없을까 해서 왔습니다.”
"........"
노인은 아무 말 없이 올리버를 바라봤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속은 민망함과 창피함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어, 흡사, 천천히 끊는 주전자와 같았다.
뭔가 실수한 거 같아 가만히 바라봤는데,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
"........"
".....혹시 제가 실수한 건가요?”
"아니오… 아니오. 그냥 잠시만 가만히 있어 주시오. 용기의 약을 좀 마셔야겠소.”
그 말과 함께 노인은 갈색 봉투에 담긴 술병을 마셨다. 그럼에도 민망함이 가라앉지 않는지 두 모금 더 들이켰다.
"좀 낫구려….. 무슨 책을 찾는다고?”
"아이가 글자 공부하기 좋은 책이요. 한.… 열네 살? 열다섯 살? 아이가 공부하기에요. 아! 산수책도 있으면 좋겠는데, 있나요?”
"열넷, 열다섯 살이라….. 글자랑 산수….. 묘하게 구체적이구려.”
노인이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말했다.
오래 앉아 있었는지 노인의 굳은 무릎은 나무가 부러지듯 우드득 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마, 있을 거요. 그런데 젊은 친구…. 괜찮다면 그 책을 왜 사려는 건지 물어봐도 되겠소?”
올리버는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딱히 숨길만 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지금 머무는 여관에서 일하는 아이가 가르쳐달라고 해서요.”
"여관집 아이….. 혹시 여관집 주인 부부 아이요? 집세를 좀 깎아 줄 테니 가르치라고?”
노인이 책방 깊숙이 들어가 거대한 책을 펼쳐보며 물었다. 책 위치를 기록한 목록인 듯했다.
"아.… 그런 식으로도 집세를 아낄 수 있겠네요?”
"아니라는 것이오?”
"예? 아, 예. 그냥 거기서 일하는 아이입니다.”
노인이 허허 웃었다.
"받는 것도 없이 가르쳐준다는 거요? 어째서요?”
"글쎄요? 그냥 애가 가르쳐 달라고 부탁해서요?”
노인이 책을 찾다 말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 책방의 어둠 탓인지 뭔가 묵직해 보였다.
"가르쳐 달라고 해서 그냥 가르쳐준다는 거요?”
“에….. 안 되는 겁니까?”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좀 신기해서 그렇소. 대부분은 그렇게 안 하거든.”
확실히…. 생각해 보니 사람들은 뭔가 가르쳐주는 것에 약간 박한 것 같았다. 물론, 그게 자연스러운 것임을 알지만 그래도 박한 것 같았다.
올리버는 잠시 고민했다. 왜 소년의 부탁을 수락했는지. 자신의 선택에 스스로 의문을 가져봤다.
제법 시간이 걸렸는데, 그 사이 책방 노인이 올리버가 주문한 책을 구석에서 꺼냈다.
아주 오래된 책인지, 후하고 바람을 부니 갈색 먼지가 흩날렸다.
"다행히 여기 책이 있구려. 이게 왜 있는 건지 모르지만. 오래되고 지저분한 책이니 다 합쳐 1만 란다만 주시오.”
올리버가 계속 고민하며 지갑에서 돈을 꺼냈다.
그리고 돈을 건네는 순간 입을 열었다.
"대단해서요.”
미안하오. 뭐라 하였소?”
"애가 대단해서요.”
“……뭐가 대단하오?”
"매일 여관에서 일하기 때문인지 겁도 많은데, 글자 배우기 위해 저한테 먼저 말을 걸었거든요. 엄청 무서워했는데도 불구하고 용기 내서….. 그러니까. 그게 대단해서 가르쳐주려는 거 같아요. 배우려는 거, 대단한 거잖아요?”
올리버는 마치 세 살 아이처럼 형편없는 어휘력으로 말했다.
허나, 가장 진솔한 대답이기도 했다. 자신도 납득할 만큼.
노인은 그런 올리버를 보곤 다시 허허 웃더니 계산대 아래에 있는 필기도구를 꺼냈다.
"이건…?”
"서비스요. 젊은 친구가 기특한 소리를 해서. 배우려는 의지 대단한 거지. 맞는 말이야.”
"아…. 감사합니다.”
올리버는 노인의 친절에 인사하고는 필기도구를 책 두 권과 함께 챙겼다.
목표를 달성하자 그제야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아, 이왕 온 거 책에 관해 질문 좀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결국, 물어볼 게 있잖소? 그럼 그때 있다고 이야기하지 왜 뒤늦게 그런 말을 하시오. 괜히 민망하기만 했잖소."
"죄송합니다.”
"좋소. 질문이 뭐요.”
"저번에 권해주신 세계수 책을 다 읽어 봤습니다. 그런데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오, 다 읽었다라….. 뭐가 이해가 안 가오?”
"세계수는 전 세계의 정보를 저장하고, 관리하며, 출력한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그렇소. 그게 무슨 문제요?”
올리버는 미리 생각해둔 대로 잘 둘러대며 말했다.
"전 세계는 언어도 문자도 다른데, 세계수가 이걸 어떻게 관리하는 거죠? 그냥 넣어둔 대로만 두면 제대로 된 관리 같지는 않은데.”
노인의 눈이 살짝 커진 채 올리버를 봤다. 미세하지만 작은 감탄도 머금고 있었다.
“..…꽤 재밌는 질문이구려.”
"그런가요?”
"그렇소. 대개 이쪽 공부를 하는 애들도 그런 의문을 잘 안 가지오. 그나마 한두 명 있었나? .…어쨌건 맞소. 문자도 언어도 다른데 그걸 그냥 그대로 보관하면 그건 관리하는 게 아니지. 그래서 세계수에 저장된 정보는 한 번의 가공을 거치오.”
“가공요?”
"그렇소. ‘코드어’라고. 세계수는 주입받은 정보를 자기식으로 가공하오. 원리가 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어떤 언어든 코드어로 저장하고, 코드어로 출력하오.”
올리버는 과거 세계수에 들어가 포레스트를 찾아봤을 때 본 알 수 없는 글자들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그게 코드어 인 것 같았다.
"그럼 어떻게 알 수 있죠?”
"당연한 것 뭘 묻소. 당연히 코드어를 배워야지.”
노인이 그 말과 함께 오래되고 몹시도 두꺼운 책을 내밀었다.
책 겉면에는 [코드어 기초 학습 (상)]이라는 글자가 몹시도 딱딱한 형태로 박혀있었다.
"특별히 30만 란다에 팔겠소. 이래 봬도 귀한 책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