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그레이마켓 (2) >
“그레이마켓이요?”
"그래. 혹시 내가 저번에 블랙 마켓에 대해 모른다고 했던 거 기억나나?”
포레스트가 술을 따른 뒤 하나를 올리버에게 하나 건네며 물었다.
"예..…. 하지만 비슷한 거는 안다고 하셨죠.”
"기억력이 좋군. 그레이마켓이 바로 그 비슷한 거야. 엄밀히 말하면 비슷하다기보다는 블랙마켓에서 나온 곁가지 같은 거지만."
"곁가지요?”
"그래, 모르는 것도 이해해. 비교적 최근 이야기니까. 일종의 영업 전략의 산물이지.”
포레스트는 계속해 설명을 이어갔다. 말하는 태도로 보아 제법 아는 게 많아 보였다.
“그레이마켓은 블랙마켓에 유통된 물건 중 자잘하거나, 등급이 낮은 물건을 대신 팔아주는 곳이거든. 누군가 임의로 그레이마켓이라 불렀고, 현재 그게 공식 명칭이 됐지.”
올리버는 잠시 생각할 경 포레스트가 준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물었다.
“..…등급이 낮은 물건이라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자잘한 장물, 비교적 등급이 낮은 정보,약, 밀주, 마법 아이템 그리고 인간의 감정과 생명력, 혹마법 서적도 일부 취급하지.”
올리버는 그 순간 흥미를 느꼈다.
"흑마법 서적이요?”
"그래, 하지만 그리 대단한 건 아니야. 그쪽에서 파는 거라고 해봐야 기본 서적일 뿐이지.”
김빠지는 소리였지만, 올리버는 전혀 그런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흥분됐다. 당장 만족할만한 결과는 못 얻었어도, 첫발자국은 내디딜 수 있다는 거였으니.
이 과정 역시 크나큰 기쁨이었다.
“…괜찮나?”
"예? 아, 예.…. 혹시 그럼 더 높은 등급의 물건을 취급하는 곳도 있나요?”
"물론. 편의상 블랙마켓, 그레이마켓으로 나눈 것뿐이지 그 외에도 보이지 않는 등급으로 더 세분되어 있거든. 더 높은 등급의 물건을 취급하는 곳도 분명 존재해. 다만, 문제는 그걸 찾기가 쉽지 않다는 거지. 보안이 생각보다 철저하거든.”
"더 높은 등급의 마켓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죠?”
"눈에 띌 정도로 돈을 많이 써 초대를 받거나, 블랙마켓과 인연이 있는 거물과 친해져야지. 가령, 크라임 펌의 관계자 같은. 그들이 가장 확실하지.”
"크라임 펌이 블랙마켓을 관리하고 있기 때문인가요?”
올리버의 질문에 포레스트가 잠시 멈칫했다.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린 말이야."
"...?"
"크라임 펌이 블랙마켓에 깊게 연관된 건 맞지만, 전부 관리하는 건 아니거든. 블랙마켓은 그보다 더 추상적이고 복잡하게 존재해. 하나의 개체가 아닌 군집으로. 그래서 그곳을 전부 파악하기란 쉽지 않아..…. 위험하기도 하고.”
올리버는 포레스트의 감정을 살펴봤다.
이야기 자체의 사실 여부를 떠나 말하는 포레스트의 감정은 진심이었다.
의외였다. 처음 만났을 때 아는 바가 없다 한 것 치고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냥 주워들은 것을 넘어서 말이다.
"그렇군요.”
"그래, 여하튼 다시 본론으로 넘어와. 내가 소개한 곳은 처음 가보는 곳 치고는 나쁘지 않을 거야. 물건의 질은 다소 떨어질지언정 그리 위험하진 않거든. 감정도 보충할 수 있고.”
그 말과 함께 포레스트는 약도가 그려진 쪽지 한 장과 기묘한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 위에는 포레스트의 F 사인이 그려져 있었다.
"여기 위치가 적힌 약도와 지나갈 수 있는 티켓일세. 약도는 한번 쓰고 태워버려. 만약에 유출되면 신용이 떨어지거든.”
올리버가 고개를 끄덕이며 쪽지와 명함을 품 안에 넣었다.
"선물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일을 잘 처리해준 덕분에 나도 소개해 줄 수 있는 거거든. 부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
"예, 벌써 마음에 듭니다.…. 그럼, 이번엔 제가 말해도 되겠습니까?”
“아, 질문이 있댔지. 뭔가?”
"임무를 맡기 전 제가 성공하고 돌아오면 포레스트 님께서 어떻게 정보를 모으는지 간단하게나마 알려주시기로 했는데, 지금 들을 수 있을까요?’’
“아.…. 맞다. 내가 그런 약속을 했지? 뭐, 좋아.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니.”
"감사합니다.”
포레스트는 말하기에 앞서 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올리버의 잔에도.
"음..…. 정보를 얻는 방법은 많고, 의외로 쉽다면 쉬워.”
"오, 그렇습니까?"
"일종의 눈 뭉치라고 생각하면 돼. 어느 정도 정보를 모을 조건이 형성되면 굴리는 거지. 그럼 알아서 정보가 모여….. 나 같은 경우에는 그 조건이 중개인 조합에서 시작됐지.”
"중개인 조합요?”
"그래, 이 일의 특성상 모두 정보에 관심이 많거든. 급변하는 정세, 사건 사고, 새로운 인물 등등 그래서 같은 조합 중개인들끼리는 어느 수준의 정보는 그냥 공유하거든.”
"그냥 공유한다고요?”
"일정 수준의 정보만. 좀 더 은밀하고, 세밀한 정보는 개인끼리 거래하지. 돈이나 정보로. 아니면 자기네들끼리의 커넥션을 이루기도 하고.”
“음.…. 그렇군요. 그럼 모든 정보를 중개인 조합을 통해 얻는 겁니까?”
"그건 아니지. 그들은 동업자이긴 하지만 동시에 경쟁자. 그것에만 의존하면 뒤처질 뿐이야. 다들 각자의 정보 라인을 더 가지고 있어. 나 같은 경우에는 해결사와 정보상을 이용하지.”
"정보상?.… 혹시, 코코 양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 그러고 보니 둘이 만났다고 했지.”
"예, 어제 오는 길에.”
"나와 거래하는 정보상 중 하나야. 팔만한 이야기가 있으면 찾아오지, 혹은 내가 가서 의뢰하고."
올리버는 마치 옛날이야기를 듣는 아이처럼 흥미를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중개인 조합, 해결사, 정보상들에게만 정보를 얻으시는 겁니까?”
올리버는 포레스트를 바라보며 물었다. 정확히는 그의 감정을 살펴봤다.
“..…아니. 잘 이용하지 않지만, 다른 라인이 하나 더 있어.”
"오, 어디죠?”
“헤임달이라는 조직이지.”
“헤임달요?”
"그래, 세계수를 다루는 마법 해커 집단이지.”
"세계수.…? 마법 해커.…?”
올리버가 새로운 의문에 읊조리자 포레스트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이런 모르나 보군. 하긴,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지. 지하에서 수련만 한 흑마법사는 더더욱 모를 테고.”
“..…알려주실 수 있나요?”
포레스트는 자신의 시계를 확인했다.
“음.…. 미안하지만, 나중에 해도 되겠나? 곧 손님이 오기로 해서.”
“아…..”
올리버가 아쉬움에 탄성을 냈다.
자신도 시계를 확인했는데, 확실히 적잖은 시간이 흘러있었다.
아쉽긴 했지만, 올리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충분히 재밌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으니, 이 이상 귀찮게 하는 건 부적절했다.
"알겠습니다.”
"미안하군. 나중에 여유가 되면 마저 대답해주겠네.”
"아닙니다. 충분히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아!”
올리버는 떠날 채비를 하다 말고, 품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하는 건지?”
"잠시만요. 저도 드릴 것이 있어서요. 포레스트 님에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그 말과 함께 올리버는 마법주 작업장에서 얻은 포션 한 병과 장부 및 서류를 꺼냈다.
포레스트는 흥미를 보였다.
"이건.....?"
"마법주 작업장에서 찾은 겁니다. 잘은 모르지만, 쓸모 있을 거 같아서요.”
그 말에 포레스트는 좀 더 적극적으로 장부와 서류를 살폈다. 기쁨, 반가움이란 감정이 빛났는데, 그중 포션을 봤을 때는 약간의 충격과 놀라움도 빛났다.
“..…정말 마법주 작업장에서 얻은 건가?”
"예, 그냥 거기 있어서 주운 겁니다. 제대로 된 건지 저도 모르고요.”
“그렇군.…. 선물을 주는 날인 줄 알았는데, 선물을 받는 날이었군.”
"기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정말 고맙네. 내일도 바로 올 건가?”
잠시 생각하다 올리버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포레스트 님께서 좋은 곳을 알려주셨으니 내일은 그쪽에 가볼까 합니다.”
"잘 됐군. 그럼, 나중에 보지.”
그렇게 포레스트와 악수를 나누고 올리버는 밖으로 나왔다.
거리로 나왔을 때 포레스트가 준 약도를 다시 살펴봤다.
약도에는 T구역에 있는 한 재래시장이 그려져 있었다.
그레이마켓이 재래시장에 있다니, 조금 신기했다.
뭐, 그게 그리 중요한 건 아니지. 중요한 것은 임무에 성공했다는 사실과 또, 블랙마켓은 아니지만, 그 곁가지인 그레이마켓에 갈 수 있게 됐다는 거였으니.
마음 같아서는 당장 가고 싶지만, 밤새 일을 한 탓인지 피곤해 하룻밤 자고 가기로 했다.
벌써 이런 행운이 찾아오다니….. 참으로 내일이 기대됐다.
***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과거 조셉의 일지에서 본 문구였다.
약사의 개입으로 와인햄을 다 정복하지 못하고, 도미니크, 앤서니 패밀리와 나눠야 했을 때 쓴 문구였다.
당시 올리버는 이 문구의 뜻을 이해만 할 뿐 공감하지 못했는데,
패밀리를 떠난 지 한참이 된 지금에서야 그 말에 공감할 수 있었다.
기껏 챙겨준 포레스트에겐 미안했지만, 그가 소개해준 그레이마켓은 올리버의 크나큰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아니면 올리버가 너무 과하게 기대한 거거나.
T구역에 있는 복잡한 재래시장을 돌고 돌아 과일 장수로 위장한 문지기에게 명함을 주는 동안에는 기대감에 심장이 뛰었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오자 기대감은 이내 실망감으로 변하고 말았다.
뭐라고 할까….. 너무 평범하다고 해야 하나?
재래시장 안쪽에 비밀리에 설치된 그레이마켓은 바깥쪽 재래시장과 너무나도 비슷했다.
말이 좋아 비슷한 거지 그냥 똑같았다.
과일을 쌓아둔 가판대와 고기를 매달아 놓은 정육점, 이상한 약초를 실은 채 정차한 수레 등.
아니 그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솔직히 재래시장이라는 곳도 재밌었으니. 흥정이라던가, 호객행위라던가.
다만, 판매하는 물건이 올리버의 기대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포레스트의 말대로 그레이마켓에는 흑마법사로 보이는 청년이나 노인이 작은 노점에서 추출한 감정이나 생명력을 판매하고 있었는데, 그 질이 심히 좋지 못했다.
마치 억지로 쥐어짠 것처럼.
그리고 질이 안 좋기로는 먹보 주머니나, 가죽 가면, 감시자의 눈, 정력제 등 흑마법 아이템도 마찬가지였다.
조셉 패밀리나 인형사 글립의 작업장에서 본 것에 비하면 심히 조악했는데,
이 중 몇 개는 만들어 본 적도 없지만, 당장 올리버더러 만들어 보라 하면 이보다는 더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하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쪽 시장에 있는 거라고는 기껏해야 삼류 좀도둑에게나 팔 물건이었으니.
블랙마켓과 연결되어 있다고 해서 올리버가 너무 기대한 거였다.
곁가지는 곁가지일 뿐인데.
그래도 올리버는 경험차 몇몇 물품을 구매하기로 했다.
이대로 돌아가기 너무 아까웠기에.
추출한 감정과 생명력을 각각 하나씩 구매하고, 살펴볼 겸 흑마법 아이템도 하나씩 샀다.
가죽 가면이랑, 먹보 주머니, 감시자의 눈 따위를.
지금 똑같은 걸 올리버도 가지고 있었지만, 그건 잘 만든 물건이라 실험용으로 소모하기 아까웠는데, 차라리 여기서 연구용으로 하나씩 구매했다.
그리 생각하니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런 물건이라면 살펴보다 망가뜨려도 그리 아까울 것 같지 않았으니.
그렇게 감정과 흑마법 아이템을 가져온 가방에 넣은 후 올리버는 남은 시간 동안 그레이마켓을 둘러보기로 했다.
흥미를 끄는 것은 없지만, 그래도 다음에 다른 그레이마켓이나 블랙마켓을 이용할 때를 대비해 말이다.
안쪽 깊숙이 가니 좀 색다른 게 보이기는 했다.
낡아 빠진 시계부터 이상하게 생긴 동물의 박제, 짐승의 생명력으로 만든 영약, 싸구려 필거렛 심지어 책을 파는 곳도 있었다.
그저 흑마법이나 악마에 관한 서적이 아닌 벌거벗은 여자들의 사진만 있는 이상한 책이었지만.
여하튼 올리버는 그레이마켓을 둘러보며 시험관을 보관할 수 있는 가죽띠와 케이스를 추가로 더 사고 그레이마켓을 나왔다.
패밀리를 떠난 이후 고단하긴 했어도 지루하거나, 뭔가 실망한 적은 없는데, 올리버는 처음으로 그러한 감정을 느끼며 숙소로 향했다.
맥이 탁 풀려 기운이 다 빠졌다. 바로 그 찰나 올리버는 뭔가를 느꼈다.
1초를 수백 개로 쪼갠 듯한 찰나의 순간이지만, 분명 뭔가를 느껴졌다.
과거 만났던 전격 마법사와 비슷 아니..….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순수하고 강대한 마력을.
결코 착각한 것이 아니었는데, 시선을 돌리자 그 끝에 웬 노인이 앉아 있었다.
"안녕하시오. 젊은 친구..…. 책을 보러 왔소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