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두더지 (1) >
"그러니까 어쩔 수 없었다고…?”
“예…. 예! 두, 두더지한테 쫓겨나 갈 데가 없어서..... 그쪽도 아실 거 아닙니까! 구역 뺏긴 거지가 어떻게 되는지. 우리도 두더지 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캔트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올리버가 빨간코에게 물었다.
"구역을 뺏기면 어떻게 되지요?”
“예, 으응? 그, 그러니까…. 요.”
"편하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살기 힘들어지지…. 누울 공간도 사라지니까. 다른 거지패 밑으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정말 위험하고 열악한 데서 지내야 해. 그러다 잘못 눈에 띄면 교화소 같은 데 끌려가기도 하고.”
"교화소요?”
"거지나 빈민들을 보내는 곳 있어…. 가면 끝이라고 생각해야지.”
캔트는 계속해 심문했다.
"그래서 두더지 패거리에 들어가고, 내 사람들까지 건드렸다는 거야?”
“예…. 이해해 주십쇼. 늘 일할 때 동료 중 일부가 인질로 잡혀서 명령에 복종 안 할 수가 없습니다.”
"하아….. 이 사람들 데려가서 뭘 하려고 한 거지?”
"저, 저희도 잘.… 켁!”
캔트가 말꼬리를 흐리는 침입자의 울대를 손으로 쥐었다.
기세가 엄청나 다른 침입자들도 겁을 집어먹었는데, 캔트는 목소리를 낮게 깔며 물었다.
“내 질문에 모른다는 대답하지 마. 대가리 굴리지도 말고. 내 소문이 어떤지 대충 알지만, 꼭 들은 것과 똑같지는 않을 거야.”
설득이 통했는지, 한 놈이 입을 열었다.
"확실한 건 모르지만, 요즘은 어디에 팔고 있습니다…. 근데, 그게 어딘지는 진짜 모릅니다. 믿어주십시오.”
날카로운 안광을 뿜으며 캔트가 뚫어져라 봤다.
모두 주눅이 들었는데, 캔트가 대뜸 입을 열었다.
".... 모두 풀어줘.”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침입자는 물론 동료 거지들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유일하게 올리버만 캔트의 지시대로 침입자들의 구속을 풀어줬다.
칼로 하나하나 묶은 밧줄을 끊어서 말이다.
"......."
침입자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안도하면서도 어안이 벙벙했다.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푸, 풀어주는 겁니까….?”
"그래, 대신 두더지에게 한마디 부탁하지.”
"예?”
"뭘 믿고 이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이따위로 굴면 나도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할 건지 일주일 안에 답을 가져오라고 말을 전해줘. 알겠나?”
“…예, 예! 알겠습니다!’’
"전부 꺼져.”
캔트의 말에 침입자들은 꽁지가 빠지게 도망쳤다.
캔트패의 거지들은 모두 그 모습을 불안하게 바라봤다.
캔트와 올리버만 빼고.
“….이걸로 된 건가?”
"예, 풀어줄 때 ‘스토커’와 ‘엿듣는 귀’를 붙였으니…. 괜찮을 겁니다.”
"이런 말은 하는 건 실례인 줄은 알지만, 들킬 가능성은?”
“음…아마 없을 겁니다.”
“아마?”
"예, 저도 이런 식으로 써본 적은 잘 없어서…. 책에서는 저보다 뛰어난 흑마법사가 아니면 눈치 못 챌 거라고 적혀있긴 했습니다."
“하아.…. 그럼, 제발 그러길 빌어야겠군. 응? 왜? 자넨 아닌가?”
"예? 아, 물론 그게 좋겠지만…. 뛰어난 흑마법사면 저도 배울 수 있는 게 있을 테니까요.”
"......"
"...? 왜 그러십니까?”
아니, 신기해서. 옛날에 흑마법사라는 작자를 몇 명 만나봤지만, 자네 같지는 않았거든.”
"그런가요?”
"그래, 흑마법사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내가 만나본 이들은 좀 뭐랄까…. 속물이었거든. 좋게 말하면 현실적이었던 거고."
"현실적이라 하면?”
"돈과 안전 등에 집착하는 거지…. 대다수 인간들이 그렇듯.”
올리버는 조셉, 앤드루, 마리, 피터 등등 흑마법사들을 떠올렸다.
그들도 그런 감이 없잖아 있었다.
"대다수 그런 편인가요?”
"글쎄? 그런 것에 관심 없는 흑마법사들도 있다 하는데, 만나보고 싶지는 않군…. 그런 종류의 흑마법사는 위험할 확률이 높아서.“
"음.....”
"자네가 그렇다는 건 아니고…. 여하튼. 뭐, 좋아, 그럼 잠시 나 좀 도와줄 수 있겠나?”
"예, 뭐죠?”
“두더지 패와의 싸움은 피할 수 없을 테니. 병력을 모아야지.”
"병력요?”
"그래, 아무리 그래도 자네만 믿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나? 이 거리에서 살아남으려면 스스로 쟁취해야지.”
"아…. 그런데, 모을 병력이 있습니까?”
"빌려야지. 다행히 나한테도 이 정도 했으면 주변 다른 거지들도 적잖게 불만이 쌓였을 거야. 그들을 설득해서 같이 싸우게 해야지.”
"음….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도움을 청한다고 도와줄까요?”
“해결사들만의 격언이 있지.”
"충분한 돈이면 사람을 설득할 수 있다고. 하지만 충분한 돈에 총이 더해지면 더 잘 설득할 수 있다고….. 혹시, 자네 얼굴 알려지는 거 별로인가?”
“어.…. 아마도요?”
"그럼 이 두건 쓰게.”
캔트가 품 안에서 눈구멍이 뚫린 조악한 두건을 꺼냈다.
"이건…?”
"별거 아니야. 이거 좀 쓰고 나랑 같이 좀 어디 가지. 자네가 필요하네."
"예, 뭐. 알겠습니다.”
"좋군…. 이봐! 공동금고에서 돈 좀 가져와. 전부 다.”
***
[그래서 요점이..…?]
란다의 W구역의 한 버려진 하수도.
그곳에 한 사내가 있었다.
그는 어머니가 지어주신 이름 대신 두더지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자였다.
“그러니까 요점은…. 일이 꼬여 물건 납품이 좀 늦어진다는 겁니다.”
[........]
"흑마법사님?”
[물건 납품이 늦는다고?]
하아..….
두더지는 짜증 난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흑마법사가 쓸모는 많았지만, 저 작위적인 위엄과 말투는 도저히 견디기 힘들었다.
“아…. 예. 죄송합니다.”
[내가 납품일을 제대로 맞추라고 한 거 같은데?]
무전기를 통해 들려오는 고압적인 목소리와 말투에 두더지는 한층 더 인상을 썼다.
“예.…. 압니다. 다시 말씀드리는 거지만 죄송합니다. 사소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관심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성과다. 변명이 아니라.]
"들으시면 생각이 조금 바뀔 겁니다.”
[.... 말해봐라.]
"간략하게 보고하자면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에 침입자가 들어와 물건을 빼돌렸습니다. 그런데 침입자 중 흑마법사도 있는 거 같습니다."
[........]
통신장치에서 들려오는 침묵.
두더지는 입꼬리를 올렸다. 심란하겠지.
잠시 후,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확실한 건가?]
“직접 본 건 아니지만, 제 부하들이 봤습니다…. 잠시 다른 일을 하러 간 놈들이 일하는 중에 흑마법사에게 공격받았다고.”
[구체적으로 말해.]
"갑자기 총알 같은 게 날아와 머리를 터트리고, 끔찍한 비명을 지르는 얼굴을 소환했답니다…. 아, 이상한 고기 경단 같은 걸 만들기도 했고요.”
[해잇 불릿, 크리피 스크림…. 마지막은 모르겠군.]
"예? 흑마법사님께서 모르시는 거라고요?”
[.... 나라고 전부 아는 건 아니다. 아마 자체적으로 개발한 고유 흑마법이겠지. 어쩌면 창조계열.]
"하여간 괴짜 놈들…..”
두더지는 낮게 중얼거리고는 다시 통신 기계에 대고 말했다.
"위험한 놈인가요?”
[얼마나 위험한 놈이건 상관없어. 나한테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
"예, 물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암요…. 다만, 제 밑에 있는 거지 놈들은 무기만 들었다 뿐, 딱 그 정도죠. 같은 거지야 머릿수로 밀수 있지만, 흑마법사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도움?]
"예, 죄송합니다. 다만, 오해하지 마십시오. 귀찮게 해드리려는 건 아니니. 하지만, 저희가 필요한 물건을 제공하면, 이럴 때 도와주신다고 하셨잖습니까?”
[입조심 해라. 거지….. 네놈의 그 지저분한 왕국이 누구 덕분에 이뤄졌다고 생각하나?]
".... 흑마법사님 덕분이죠. 늘 기억하고 있습니다. 절 지원해주신 덕분에 제가 힘을 키웠죠. 하지만, 흑마법사는 저희끼리 할 수 있는 게 도저히 아니라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
“거기다. 그 흑마법사는 다름 아닌 캔트 패거리에서 데리고 있는 거 같습니다…. 어떻게 놈이 흑마법사를 데려온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러면 흑마법사님께서 명하신 W구역 통합도 늦춰질 수 있습니다.”
[날 협박하는 건가?]
"아뇨, 아뇨…. 어찌 제가 감히. 그저 이 두더지가 흑마법사님을 잘 보필하기 위해서는 공교롭게도 흑마법사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
"제가 W구역의 거지들을 장악해야 정기적으로 물건을 납품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
"제가 정기적으로 물건을 납품해야, 흑마법사님도 ‘검은손’에 가입할 수 있지-”
[-그만.]
통신기기 너머로 노기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다소 건방진 태도를 보이던 두더지도 그 소리에 눈에 띄게 긴장했다.
흑마법사가 재수 없는 존재이긴 했지만, 마음만 먹으면 홀로 자신들을 휩쓸 수 있는 자이니 당연했다.
아직도 그때 보았던 좀비가 잊히지 않았다.
[주제도 모르고 너무 말이 많군.]
"......."
[내 원대한 계획을 이야기해준 건 다름 아닌 일의 진행을 위해서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니 감히 함부로 그 말을 입에 담지 마라. 그 쓰레기 왕국의 왕으로 살고 싶으면.]
"..... 죄송합니다. 흑마법사님.”
[좋아…. 어쨌건 웬 흑마법사가 끼어들었다…. 감히 누가 끼어든 건지 궁금하긴 하군. 이곳은 퍼펫의 제자인 내가 있는데 말이야. 관심이 가.]
"그럼.…”
[내 제자를 보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혹시 그 전에 당하는 일은 없겠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캔트 놈은 많이 유약해졌습니다. 잡은 포로를 그냥 보내준 게 그 증거죠. 싸움을 피하려는 겁니다. 자기 부하들 때문에. 지금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으니 그때까지는 아무 문제 없습니다. 설사 무슨 꿍꿍이가 있다 해도 흑마법사님께서 주신 선물도 있으니 문제없습니다.”
[.... 그건 그렇지. 그럼, 필요할 때 내 다시 연락하지.]
"예, 들어가십시오. 흑마법사님.”
그와 함께 통신기기에서 뚝- 하고 끊기는 소리가 났다.
두더지는 피로를 느끼며 통신기기를 옆으로 치워버렸다.
"고생하셨습니다.
옆에 가구처럼 서 있던 부하가 말했다.
"헨리(중절모 거지) 이 머저리 같은 새끼..... 제대로 할 자신 없으면 하지 말라니까. 결국, 이 사달을 내고 마는군. 살아 있었으면 내 손으로 죽였을 거야…. 정말 죽은 거야?”
“예.…. 지하 창고에 갔던 놈들이 모두 죽었다고 했습니다. 뭔가에 단숨에 찔린 듯."
"망할.…! 잘 좀 풀리나 싶더니만. 캔트 놈 어떻게 흑마법사를 섭외한 거지?”
"전직 해결사 출신이라니 당시 인맥을 이용한 게 아닐까요?”
“끙….. 그렇다 해도 흑마법사 놈들이 그냥 도와주지는 않을 텐데. 쓸데없는 입들을 먹여 살린다고 돈이 없다더니만, 뒤로 꿍쳐놓은 건가? 아니면 날 흉내 낸 건가?”
두더지가 고민에 빠졌다.
당연한 거였다.
흑마법사의 유용함을 누구보다 실감한 게 그였으니, 거기다 대가도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길거리에 널린 거지들을 가져다 바치면 됐으니.
같은 거지에게 있어 너무 쉬운 방법이었다.
물론, 가끔씩 까다로운 조건의 인간을 원하기도 했지만, 그건 약간의 비용으로 해결될 문제였다.
흑마법사라는 뒷배, 거래를 통한 금전적 이익, 빌릴 수 있는 무력에 비하면 그 값어치는 실로 싸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괜찮겠습니까? 분명 도와준 후 뭔가를 더 요구할 텐데.”
"물론 더 요구하겠지…. 하지만 상관없어. 기껏해야 애새끼나 계집 더 내놓으라는 거니까. 차라리 그 정도 비용 지불하고 한 번에 W구역을 정리하는 게 나아. 그럼, 그만한 물건은 금방 생겨. 그보다….”
"예."
“캔트 그 녀석이 얼간인 건 알고 있지만, 왜 그놈들 그냥 풀어줬지? 진짜로 말이야.”
"중절모 부하들 말입니까?”
"그래, 나 같았으면 죽였을 텐데.”
"글쎄요…. 혹시나 해 몸을 뒤져봤지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풀어준 거 아닐까요? 둥글둥글한 인간이니?”
"그럼 더할 나위 없긴 한데....."
그때, 다급히 뛰어오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누군가 문을 열었다.
지하라는 특성 탓에 소리는 더욱 컸다.
“뭐야?”
"두더지! 큰일 났습니다. 캔트…. 캔트 그놈이 다른 거리 거지들을 이끌고 쳐들어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