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캔트 (2)
두더지 패거리와의 작은 다툼이 있었지만, 일상은 딱히 변하지 않았다.
하루하루 먹고살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거리를 전전했는데, 날이 쌀쌀해져도 올리버를 비롯한 동료 거지들은 매일같이 다른 구역으로 가 쓰레기를 수거했다.
“전부 다 왔냐?”
“““예.”””
땀을 흘리고 악취를 풍기는 거지들이 대답했다.
“그럼, 쏟아!”
포댓자루에서 쏟아져나오는 수많은 쓰레기.
오래된 냄비나, 부서진 가구, 헌 옷, 구부러진 식기 따위가 있었는데, 모두 이곳에서 다시 쓰일 물건들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종이 쓰레기.
정확히는 잘리거나 찢어진 종이 쓰레기였다.
쓰레기를 수거한 거지들은 쭈그려 앉아 종이 쓰레기를 분류하기 시작했는데, 다른 곳에서 수거한 쓰레기와 섞이지 않게 조심히 분류했다.
그렇게 다 분류한 후에는 구석에 쭈그려 앉은 노인과 안경을 쓴 중년 거지에게 가져다줬다.
“요 앞 레스토랑에서 수거한 겁니다.”
“아아···.”
“이건 요 뒤편 갱 아지트에서 수거한 거고요.”
“거기 둬···.”
“이거는 공장 쓰레기통에서 수거한 겁니다.”
“····.”
하얗고, 누런 종이 쓰레기가 순식간에 산처럼 쌓였는데, 노인과 중년 거지는 그때마다 맥빠지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몹시도 피곤해 보였는데, 그럼에도 종이를 일일이 맞추는 작업은 멈추지 않았다.
올리버는 과거 왜 저런 일을 하는 건지 물어본 적이 있는데, 대답하길 돈이 되는 쓰레기를 만드는 거라 했다.
경쟁가게나 공장의 서류를 통해 무슨 짓을 하는지 어디 더 좋은 거래처가 생긴 건지 알아보기 위해서 말이다.
가격은 보통 수십만 란다에서 가끔은 수백만 란다까지 한다고 했는데, 부업에 가까웠지만 꽤 중요한 수입원이라 했다.
올리버가 뒤늦게 호기심이 생기며 물었다.
“왜 저 사람들만 저 일을 하고 있죠? 저희도 도와야 하지 않나요?”
“응? 돕긴 뭐 어떻게 도와? 너 글 읽을 줄 아냐?”
“····. 아아. 그렇네요.”
올리버는 그리 말했다.
생각해보니 당연한 거였다. 자신도 글을 배운지가 얼마 안 됐으니.
마리를 비롯해 주변 이들이 글을 아는 게 오히려 대단한 거였다.
그러자 새로운 궁금증이 일었다.
“그런데, 저분들은 어떻게 글을 아는 거죠?”
“참 쓸데없이 궁금한 것도 많다. 그래도 게으름 안 부리니까 대답해 줄게····. 전 대가리인 사제님이 가르쳐줬대.”
“사제님요?”
“어, 그래. 덕분에 이 일을 하는 건 우리뿐이고. 요즘은 경쟁업체가 생겨 가격이 좀 줄었지만 어찌 됐건 우리가 안 굶는 이유지.”
“····. 전 대가리인 사제님에게 배웠으면, 제법 여기 오래 있었다는 이야기겠네요?”
“뭐, 그렇지. 캔트 씨보다 이곳에 오래 있었으니, 다들 이 바닥에 빠삭한 분들이지.”
“음····.”
그때, 버럭 화내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뭘 그리 쑥덕대고 있어! 빨리 쓸모없는 쓰레기 안 모아?!”
그 말에 설렁설렁 게으름을 부리던 거지들이 다시 바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쓸 수 있는 쓰레기는 거처 구석에 놔두고, 나머지 못 쓰는 쓰레기는 도로 포대에 담아 밖으로 가지고 갔다.
그런 뒤에 가져왔던 쓰레기통에 도로 버렸는데, 이러면 일단 일이 하나 끝나는 셈이었다.
단순 노동이지만, 힘들고 비위도 많이 상해 일이 끝나면 어느 정도 휴식이 보장됐는데, 보통 올리버도 이때 한숨 돌려 체력을 회복했다.
단, 오늘은 그 보통이 아니었다.
“저기····.”
“응?”
올리버가 종이를 맞추는 거지 무리에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들은 피곤과 짜증이 섞인 눈매로 올리버를 바라봤다.
“····. 뭐야? 바쁜데.”
“좀 도와드릴 수 있을까요?”
그 말에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일제히 올리버를 올려다봤다.
다들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는데, 올리버가 먼저 눈치채고 입을 열었다.
“글을 읽을 줄 압니다. 배워서.”
모두가 침묵했다.
그들의 감정은 의아함, 불쾌함, 의심, 경계 등으로 빛났는데, 그중 안경을 쓴 거지가 말했다.
“글을 읽을 줄 안다고?”
“예, 옛날에 배웠습니다.”
“근데 왜 여태까지 이야기 안 했지?”
“아무도 안 물어봐서요?”
“····. 거참 그럴듯한 이유군. 그럼, 왜 갑자기 이야기한 건데?”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그냥 물어보기는 뭣해서····. 뭔가 부탁하려면 뭔가 줘야 한다고 배웠거든요.”
“잘 배웠군. 그런데 넌 도움이 안 될 거 같은데? 이 일은 글만 읽는다고 가능한 게 아니거든···. 봐봐.”
안경 거지가 작게 찢어진 종이를 들어 보였다.
손가락 한 마디 크기였는데, 그곳에는 작은 글씨가 두 개 박혀 있었다.
“글을 읽는 건 기본이고, 찢어진 종이의 형태를 분석해 퍼즐처럼 맞추고, 빈 글자를 보고 문장과 단어를 유추하기도 해야 해. 글만 읽는다고 도울 수 있는 게 아니야.”
“형태, 문맥, 형태, 문맥····. 이해했습니다.”
“·····?”
안경 거지는 어이없는···. 아니, 약간 짜증 섞인 눈으로 올리버를 바라봤다.
“좋아···. 그냥은 안 물러나는군. 그런 저기 있는 종이를 맞춰봐. 단, 제대로 못 하면 귀싸대기 맞을 줄 알아라. 가뜩이나 바쁜데 괜히 정신 사납게 굴었으니.”
“예, 알겠습니다.”
올리버는 시원하게 대답하고는 한쪽에 쌓인 종이 더미 앞으로 갔다.
수백, 수천 조각은 되어 보였는데, 아주 정성스럽게 찢어 놓았다.
모두 갑작스러운 행동을 한 올리버를 바라봤다. 확실히 눈에 띄는 행동이었으니.
그러거나 말거나 올리버는 당장 눈앞의 일에만 집중했지만.
“형태, 문맥, 형태, 문맥····.”
올리버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갑자기 찢어진 종이를 하나씩 바닥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아까 전에 들은 대로 형태와 문맥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
한참 동안의 침묵 후, 올리버는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늘어놓은 종이 쪼라기를 몇몇 개 골라 옆으로 빼더니 눈에 띌 정도로 빠르게 맞추기 시작했다.
단숨에 절반 이상이 맞춰졌는데, 올리버는 그 종이의 문맥을 살펴보고는 늘어놓은 종이를 꺼내 다시 맞췄다.
“오·····.”
“이게 무슨····.”
“····.”
“말도 안 돼····.”
주변에서 보고 있던 이들이 하나둘 감탄을 뱉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 만드는 데만, 몇 날 며칠이 걸리는 작업을 웬 신입이 뚝딱하고 있으니.
어느새 서류 한 장을 완성한 올리버. 그런 올리버를 보며 안경 거지가 말했다.
“·····. 빠르군.”
“요령 가르쳐주셨으니까요?”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
너무 이질적이라 모두 어찌 반응해야 할지도 몰랐다.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던 중 안경 거지가 입을 열었다.
“뭐···. 좋군. 어차피 일이 많았으니. 좀 더 도와줄 수 있나?”
“물론요····. 대신, 뭐 하나 여쭤볼 수 있을까요?”
“뭐지?”
안경 거지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마치, 속을 꿰뚫어 보려는 듯이.
“얼마 전에 어떤 거지들에게 두들겨 맞을 뻔했거든요.”
“들었어. 캔트가 도와줬다고···?”
“예. 그런데, 두더지가 도대체 누구죠?”
“그게 왜 궁금하지?”
“그냥 이 동네에서 계속 이름이 들리고 얻어 맞을 뻔하기도 해서요? 아무래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조용히 올리버를 바라봤다. 그들의 눈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왤까? 지극히 자연스러운 궁금증이었는데?
아마 그건 올리버에게서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더 강하게 느껴져서 일터였다.
포식자가 두려워 궁금해하는 게 아닌 개미를 궁금해하는 것 같은 호기심.
정작 올리버는 이를 알지 못했는데, 그렇게 올리버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적막이 계속 내려앉았다.
한참 후, 안경 거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재작년에 이 근방에 자리 잡은 놈이야. 두더지.”
“아····.”
“소문으로는 해결사, 전직 군인, 갱 출신이라 하더군.”
“그래서 다들 위험하다고 하는 건가요?”
“아니, 일 년 전까지만 해도 그렇지는 않았지. 좀 난폭한 녀석이긴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어. 근데, 요 몇 달 사이 갑자기 변했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씀이죠?”
“어디서 돈이 난 건지 갑자기 주먹 좀 쓰는 거지들을 포섭하더니, 근처에 있던 거지들은 하나둘 자기 패거리에 넣었더군···. 심지어 다른 거지패들 구역까지 넘보고.”
“지독한 놈···.”
누군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힘으로 억누른 곳에는 매달 세금이랑 명목으로 돈을 빼앗지. 또, 그 돈을 이용해 주먹을 고용하고····. 순전히 소문이긴 하지만, 요즘에는 위험한 소문도 돌더군.”
“위험한 소문?”
“그래, 같은 거지를 납치해 판다거나 하는 그런 소문. 어디 노예나 모르모트 같은 거로.”
“아, 나도 들었어. 흑마법사하고 거래한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누군가 끼어들어 말했다. 허나, 안경 거지는 헛소문이라고 일축했다.
“아냐, 그건 아냐. 너무 나갔어···. 흑마법사가 왜 이런 곳에 오겠어?”
“그런가?”
“그렇지···.”
“·····.”
필요하다면 흑마법사도 얼마든지 거지와 접촉할 수 있었지만, 올리버는 가만히 침묵하며 그 모습을 관찰했다.
안경 거지가 말했다.
“그리고 흑마법사면 안 돼. 그래선 안 되지.”
“왜죠?”
“왜긴 왜야? 엄청 위험한 존재들이니까.”
“그런가요?”
“그렇고말고. 사람을 재료로 사용하고, 필요하면 악마와도 교접하는 게 흑마법사라고 하는데, 왜 아니겠어? 아주 위험한 놈들이지····.”
올리버는 순간 요안나가 떠올랐다. 그녀 역시 비슷한 소리를 했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인 걸까?
어쩌면? 조셉과 앤드루, 도미니크를 떠올리니 썩 틀린 이야기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는 거야?”
“아··. 궁금해서요.”
다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때, 누군가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올리버, 안경 거지가 고개를 돌렸다.
“뭐가?”
“아시잖아요? 요즘 들어 두더지가 세력을 엄청 넓히고 있다는 거. 자잘한 거지패 뿐 아니라 커다란 거지패까지····. 솔직히 요즘은 두더지패가 그냥 거지패라고 불리기 힘들다고 하던데요.”
그 말과 함께 불안해하는 감정이 곳곳에 피어올랐다. 마치 잊었던 사실을 다시 떠올린 듯.
“그건 그렇지.”
“보티가 말하길 결국 개 늙은이도 그쪽으로 넘어갔다던데?”
“그래? 그 영감님이?”
“길목을 가로막고 통행세를 내라고 했다 하던데? 그게 싫으면 자기들 거지패로 들어오라 하고.”
“어. 어. 나도 들었어.”
“차라리 그쪽으로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을까?”
“그게 뭔 소리야?”
“아니, 그렇잖아? 지금 W구역을 다 먹느니 마느니 하고 있는데, 괜히 싸울 필요 있나? 캔트 씨는 이름값 있으니 들어간다고 하면, 좋게 대우해 줄 거 같은데?”
“그건 그렇지····. 어쩌면 우리 팔자도 좀 나아질지 모르고.”
웅성거림과 함께 곳곳에서 수많은 의견과 수많은 감정이 빛났다.
차라리 시류를 잘 타 편해지고 싶다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래도 찝찝하다는 이도 있었고, 그저 캔트가 결정하는 대로 따르겠다는 순종적인 감정도 엿보였다.
그런 소란 와중 묵묵히 자기 일을 하던 한 노인이 말했다.
“아서 게. 아서····. 캔트 그 친구가 좀 편해지겠다고 두더지랑 손을 잡겠나? 애당초 편해질 수 있으면 진즉 여길 떠났을 텐데.”
그러자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 침묵은 동의였고, 캔트에 성품에 대한 일종의 믿음이었다.
“····. 혹시 전임자인 사제님과 관련 있나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모두 올리버를 봤다.
“그걸 왜 묻나?”
“궁금해서요?”
“그게 왜 궁금하지?”
등 뒤에서 웬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캔트가 한 손에 쿼터스태프를 들고 서 있었다.
올리버가 그를 보며 말했다.
“아, 안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