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캔트 (1)
캔트의 등장에 일순간 공기가 변했다.
애써 담담한 척하던 보티의 표정은 눈에 띄게 밝아졌고, 다른 동료 거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표정뿐 아니라 감정 역시 초조, 긴장, 두려움에서 안도, 기쁨으로 변했는데, 올리버에게 있어 이 광경은 매우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등장한 것만으로 이런 감정 변화를 일으키다니····.
조셉이나 약사 역시 이러한 영향력을 가지긴 했지만, 그 방향성은 달랐다.
그들은 그저 다른 이들에게 긴장감을 유발할 뿐이었지만, 캔트는 반대로 긴장을 풀고 진실한 안도를 줬다.
처음 봤을 때부터 남다르긴 했지만, 이 정도라니···. 실로, 흥미로웠다.
올리버는 궁금했다.
저자가 무엇이기에 그토록 모두의 지지를 받는 건지. 처음 보는 유형이라 더욱 궁금했다.
물론 불만을 품은 이가 하나도 없냐면 그건 아니지만.
어쨌건, 캔트는 상당수에게 안도와 믿음을 줬다.
혹시, 자신을 이유 없이 도와준 것과 상관이 있는 걸까?
올리버는 가려움과 같은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을 느꼈다.
“자, 뭘 어떻게 마음대로 할 거지? 젊은 친구. 궁금한데.”
캔트는 중절모 거지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절뚝이는 다리와 초라한 외관, 주름진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위압감이었는데,
중절모 거지와 개를 쓰다듬는 노인, 기타다른 거지들은 아까와 달리 움츠러들었다.
그들은 겉으로 내색지 않았지만, 속으로 서로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단 한 명. 중절모 거지만 빼고.
그의 마음속에는 분노와 호승심 같은 뜨거운 감정이 요동쳤다.
“당신이 쿼터스태프 캔트요? 한때, 유명한 해결사였던? 진짜요? 겉보기에는 아닌데?”
“믿든 안 믿든 상관없어. 젊은 친구. 어차피 지금은 그냥 거지일 뿐이니. 그런 의미에서 말하는 건데, 선배로서 조언하나 하지.”
“조언?”
“그래, 조언. 어디서 목에 힘깨나 주고 다닌 거 같은데, 이제는 잊어. 왜냐면 이제 거지일 뿐이거든. 주먹을 잘 써도 거지는 거지지.”
“날 당신처럼 한물간 인간으로 취급하지 마시지. 절뚝이는 거 보아하니, 어쩔 수 없이 거지가 된 모양이지만, 난 아니거든.”
“오, 멍청한 친구 같으니라고. 자의든 타의든 거지는 거지인데. 그보다 대답해봐. 뭘 하려고 그랬나?”
“뭘 하려고 했냐고? 음···. 어디 보자···. 아! 저기 저 좆만 한 거지새끼들을 내 주먹으로 두들겨 패준 뒤 팬티까지 벌거벗겨 매달아 버리려고 했다. 바로 이렇게!”
중절모 거지는 소리치며 냅다 주먹을 휘둘렀다.
손에는 언제 꼈는지 모를 너클을 쥐어져 있었는데, 아마 적중했다면 캔트의 얼굴이 썩은 수박처럼 깨지고 말았을 터였다.
적중했다면 말이다.
중절모 거지의 주먹이 닿기 전 캔트는 목을 살짝 뒤로 빼, 지팡이로 쓰던 쿼터스태프를 살짝 내밀어 공격해 오는 팔을 슬쩍 쳤다.
그러자 놀랍게도 중절모 거지의 기습은 허무하게 막히고 말았다.
공격이 막힌 중절모 거지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하더니 다시 달려들었고, 캔트는 아까 전처럼 쿼터스태프 살짝 내질러 중절모 거지의 목을 가격했다.
너무나도 빠르고 자연스러운 동작.
중절모 거지가 자기 목을 부여잡지 않았으면 때린 것인지도 모를 뻔했다.
“끅-! 크으으····. 이런 개 같-”
중절모 거지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캔트가 쿼터스태프를 휘둘러 그의 관자놀이를 가격했기에 말이다.
그는 실이 끊긴 인형처럼 쓰러졌고, 뒤이어 같은 패거리인 거지들이 달려들었다.
허나, 의미 없는 짓이었다.
가장 먼저 덤빈 두 명도 같은 방식으로 쓰러지자 어느새 아무도 다가가지 못했다.
“더 해볼 텐가?"
“큭····!”
팽팽한 긴장감. 그때 누군가 끼어들었다.
“이쯤 그만하지.”
말한 이는 개들에게 둘러싸인 노인. 그가 쭈그려 앉은 채 말했다.
“····. 개 늙은이. 언제 두더지 밑으로 들어간 거요?”
“알아서 뭐 하게?”
“좀 의외다 싶어서요. 이런 성격 아니었잖습니까?”
“의외? 성격? 허···. 먹고 살려면 의외인 짓도 하고 살아야지. 그보다 자네 솜씨는 여전하구만. 아주 귀신같아?”
“노인이 진짜 귀신들을 못 봐서 그런 겁니다. 나야 내 몸 하나 간신히 지키는 수준이지. 그보다 싸울 거요?”
그 말에 노인이 쓰다듬던 크고 못생긴 개들이 으르렁댔다. 아니····. 으르렁대면서도 낑낑댔다. 뭔가 아주 불안한 듯.
“음····. 아니, 두더지에게 명령받은 건 이 골목을 점거하라는 거지. 자네랑 싸우라는 게 아니거든. 사양하지. 이놈들 상태도 영 아니고.”
“그럼, 돌아가쇼.”
“거, 고맙군. 이봐 젊은 친구들. 부축해.”
그 말에 쫄따구 거지들은 불만과 두려움이 섞인 감정으로 기절한 중절모 거지와 쓰러진 동료 거지를 부축했다.
노인은 자리에서 쓰윽 일어났다.
“그럼, 이만 가보지····. 시비거려는 건 아니지만, 이 일은 대가리에게 보고해야 해.”
“대가리라면 분명 두더지겠군요.”
“뭐, 그렇지····. 혹시나 해서 묻는데, 그냥 나처럼 두더지패에 합류하는 게 어떻겠나? 그럼, 자네 식구 정도는 건사할 수 있을 텐데.”
캔트의 감정은 한순간 고민의 빛을 띠었다. 아주 한순간이지만.
“····. 솔직히 구미가 당기긴 하지만, 안 되겠습니다.”
“어리석군. 뭐, 그럴 줄 알았지만.”
“저도 압니다. 왜 그때 제가 그런 유언을 받아서는····. 에잉.”
올리버로서는 알 수 없는 대화. 허나, 캔트가 개 늙은이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야기의 맥락을 봤을 때, 캔트가 대가리가 되기 전의 사제라는 사람을 이야기하는 거 같았다.
올리버는 또 궁금해졌다.
이미 죽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저런 영향력을 가지는지.
죽은 자는 죽음과 함께 그 영향력이 사라지는데.
조셉, 앤서니, 도미니크처럼····. 점점 궁금한 게 많아졌다. 정말로 말이다.
개 늙은이가 부하들과 함께 떠난 후, 보티가 말했다.
“하····. 정말 타이밍 좋게 왔군. 어떻게 온 거야?”
“그냥 돌아다니던 중 여기서 빵 뜯는 놈들이 있다길래. 혹시나 해서 왔지. 역시나였고···. 그보다 다들 괜찮나?”
“괜찮냐고? 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이 바닥 생활을 했는데! 빵도 여기 무사하다고.”
보티가 빵이든 주머니를 들며 말했다.
캔트도 허리에 맨 보따리를 까며 말했다. 보따리 안에는 못생긴 양파와 감자, 당근 그리고 콘비프 통조림을 보였다.
“잘 됐군. 오늘 포식할 수 있겠어.”
***
돌아오자마자 일행들은 식사 준비에 들어갔다. 아니, 정확히는 캔트가 준비한 거지만.
그는 부서진 가구를 장작 삼아 불을 피우더니 바닥에 쭈그려 앉아 못난이 채소를 썰기 시작했다.
쉽게 익히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골고루 나눠 먹기 위해서인지 다지다시피 잘게 썰었는데, 그리고는 불에 달궈진 냄비에 콘비프를 살짝 넣어 기름을 둘렀다.
기름이 어느 정도 두른 뒤 캔트는 감자를 넣어 익히고, 뒤이어 당근과 양파 등 채소를 넣었다.
거지 소굴인 폐건물 안에는 온기와 함께 은은한 음식 냄새가 퍼졌다.
채소가 어느 정도 익자 캔트는 물을 비웠고, 그다음 딱딱한 비스킷은 칼로 부숴 쏟아부었다. 그리고 난 뒤 콘비프를 투하.
”캔트···.“
밖에서 경비를 서던 왕주먹이 요리하는 캔트에게 다가왔다.
”아, 잘 왔군. 이제 거의 다 됐으니 식사하게.“
”아, 예···. 그보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그····. 빨간코랑 하모니카, 영감과 손자가 돌아왔습니다.“
”····. 잘 됐군. 다 같이 밥 먹으면 되겠어.“
”이게 좋은 소식이 아니라는 거 알잖습니까?“
왕주먹이 불만스럽게 말했고, 캔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가 이 바닥에 대해 어느 정도 알기에 가능한 침묵.
그러나 침묵으로 해결될 것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왕주먹이 먼저 입을 열었다.
”또 거지 단속 기간인 거 같습니다. 수입이 점점 더 줄어든다는 거죠.“
”부업을 더 하면 돼. 때마침 일거리가 제법 들어왔어. 요 앞 삼거리에 있는 쓰레기를 좀 뒤져 달라더군.“
”낡아빠진 공장주나, 짠돌이 레스토랑 점주, 건달의 의뢰를 받아봤자 들이는 노력에 비하면 푼돈입니다. 정기적이지도 않아 더 푼돈이고요. 이대로면 근근이 먹고만 살 겁니다.“
”다행이군. 굶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니까.“
”캔트····!“
왕주먹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찌나 목소리가 큰지 소굴에 있는 모두가 들었는데, 다들 심각한 분위기에 못 들은 척 외면했다.
왕주먹이 이성을 되찾으며 다시 속삭였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안 된다고요···. 단속이 심해지면, 수입도 줄 겁니다. 허리띠를 졸라맨다고 끝이 아니라고요. 좀 더 적극적으로 해야 합니다.“
”적극적이라···. 그 이야기는 그만하기로 하지 않았나?“
”····. 밑으로 들어가는 거로 생각하지 말고 협조하는 거라고 생각하시죠. 두더지 놈은 캔트를 원하고, 협력만 해주면 돈도 안전도 보장해 줄 겁니다. 그토록 원하시는 우리 패의 안정적인 삶이 가능해진다 이겁니다.“
캔트는 요리를 하다 말고 왕주먹을 봤다. 그의 눈에는 부드럽지만, 힘이 있었다.
잘못된 선택을 하려는 이를 부끄럽게 하는 힘.
”그래, 자네 말이 맞아. 맞지····. 두더지 밑으로 가면 확실히 지금보다 생활이 편하고 안정적일 거야.“
”아니, 밑으로 들어가자는 게 아니라-“
”-밑이든 위든 아래든 두더지랑 협력하면 편해지겠지만, 알지 않나 두더지가 무슨 짓을 하는지? 미안하지만, 난 영웅이 아니라 그를 막을 생각이 없지만, 그렇다고 협력할 생각도 없어. 내····. 최소한의 양심이지.“
”그저 소문일 뿐이잖습니까?“
”보통 소문이라는 게 그냥 나지는 않지. 특히, 아이를 불구로 만들어 앵벌이로 쓰거나, 인신매매한다는.“
”····. 설사 소문이 사실이라 해도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소문이 사실이면 오히려 더더욱 협력해야죠. 계속 여기 있는데, 아무것도 안 하면 결국 저희도 놈에게 먹히고 말 겁니다.“
먹히고 만다라·····. 아무래도 이곳 거지패 세상도 흑마법사처럼 분쟁이 있는 거 같았다.
그래서 모두 두더지라는 자를 경계하는 거 같았고.
캔트는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두더지 밑으로 가면 우린 지붕이 있는 멀쩡한 여관에서 지낼 수 있고, 적잖은 돈을 매주 받을 수 있겠지···. 허나, 난 별로야. 별로.“
”캔트····.“
”그런 식으로 먹고사는 건 이제 좀 지겹군. 싫어 진심으로····. 만약 정말 답답하다면, 자네가 떠나는 거까지는 막지 않겠어. 하지만 거기까지야. 나까지 끌어들이지 마.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거야.“
”···. 예,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더 이상 설득이 소용없다고 생각한 건지 왕주먹은 순순히 대답했다.
겉으로는 납득한 거 같았지만, 속에는 몰이해 불만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는 캔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건 올리버도 비슷했다.
대다수 사람은 더 많은 돈, 편안함, 안전에 끌리는 법인데···. 최소한 올리버가 봐온 사람들은 그랬다.
허나, 캔트는 이내 이러한 유혹을 뿌리쳤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가 그런 것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거였다.
그는 분명 유혹에 흔들렸다. 돈, 편안함, 안전.
오히려 그 달콤함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자신의 의지만으로 그것을 뿌리쳤다..
올리버는 알고 싶었다.
왜 더 끌리는 걸 그냥 포기하는 건지.
혹여,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끌어낸 원동력인지.
정말 알고 싶었다.
올리버는 미니언을 통해 들은 대화를 곱씹으며 생각하다 이내 입을 열었다.
”·····. 일단, 두더지가 뭔지부터 알아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