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거지패 (1)
자기소개를 끝마치고 올리버는 캔트의 동료들과 함께 거처인 거지소굴로 갔다.
인적이 드문 버려진 건물 안이었는데, 아무래도 전부 다 올리버를 반겨주는 건 아닌 듯했다.
“아니, 도대체 저런 어정쩡한 놈을 왜 데려온 겁니까?!”
한 땅딸막하고 굵은 남자가 소리쳤다.
왕주먹이라 불리는 그는 비록 거지 차림이었지만, 주먹이 크고 매서워 보였는데, 캔트는 뻔뻔하게 웃으며 그를 달랬다.
“글쎄·····. 왤까? 오늘 수입이 제법 좋아 기분이 좋았고, 때마침 저 녀석을 만났거든. 둘 중 하나만 없었어도 안 데려왔을 텐데····. 이게 신의 뜻 아니겠는가?”
“신이라뇨····. 가뜩이나 쓸모없는 입은 많은데, 왜 구태여 입을 늘리십니까?.”
“이봐 너무 그리 열 내지 마. 난 선임의 뜻을 따르는 것뿐이니. 불만 있으면 나한테 유언을 남긴 그 양반에게 말하게. 나도 썩 내키지 않으니까.”
“아니, 그럼 안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아, 이 친구야. 싫다고 약속을 어찌 그리 쉽게 엎을 수 있나?”
“약속이라뇨····. 그저 부탁한 거지.”
캔트는 뺨을 문질렀다. 한참의 침묵 후 그가 품 안에서 돈다발을 꺼냈다.
“·····. 자자 잔소리는 이쯤에서 그만하지. 막 돌아와서 피곤한데. 그보다 오늘 얼마 벌었는지 안 궁금하나?”
돈에는 마력이 있다.
조셉이 알려준 그 말은 이곳에서도 통했는데, 왕주먹은 돈다발을 보자마자 화가 한풀 꺾였다.
그리고는 홀리듯 돈다발을 향해 손을 뻗었는데, 캔트가 돈다발을 도로 가져갔다.
“아·····.”
“참고로 돈을 받아온 건 내가 맞지만, 돈 될만한 쓰레기를 만든 건 저들일세. 자네가 쓸모없는 입이라 한 저들····.”
왕주먹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럼에도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 같았다.
탐욕, 욕구불만과 같은 시커먼 감정이 말이다. 올리버의 눈에는 다 보였다.
“자네 역시 내가 데려오지 않았나? 지금 내가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됐고····. 이 친구도 하기에 따라 제 밥값을 할 수 있을 거야.”
올리버의 머리를 톡톡 두들기며 캔트가 말했다.
결국, 왕주먹이 마지 못해 입을 열었다.
“·····. 예. 죄송합니다. 제가 말을 좀 함부로 했습니다.”
“이해해 줘서 고맙네. 고마워! 자, 여기 돈. 다 같이 확인한 후 도로 가져오게. 공동금고에 넣어 둘 테니.”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 애송이 이름이 뭐였다고요?”
“올리버네. 올리버. 부모는 없고, 와인햄에서 왔다더구만. 대충 사연이 이해 가지?”
“뭐, 예.”
“올리버?”
“예?”
“인사해라. 우리 거지패를 지켜주는 몽둥이들이니.”
“몽둥이요?”
“그래, 몽둥이. 소속된 거지패를 지켜주는 이들을 일컫는 은어지.”
“아···. 안녕하십니까?”
올리버는 허리 숙여 인사했다. 허나, 왕주먹을 비롯한 건장한 거지들은 썩 좋게 바라보지 않았다.
타인에 대한 경계심, 새로운 짐을 떠맡은 불쾌함 등이 빛났다.
뭐라고 할까···. 올리버가 처음 조셉 패밀리에 갔을 때와 비슷하면서도 또 달랐다.
“·····.”
“·····.”
“자, 그럼. 인사가 끝났으니, 다른 사람들을 안내해주마. 따라와라.”
올리버는 캔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그곳에는 오는 길 만났던, 빨간코와 금발 소년, 맹인 노인과 소녀 등이 있었다.
“이 둘은 오는 길에 만나서 알고 있지?”
“예····. 빨간코 씨와 하모니카 씨라고····.”
빨간코가 푸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씨’라니 내가 살면서 ‘씨’라고 불린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음침하지만 정말 예의가 바르구먼!”
“칭찬 감사합니다.”
빨간코와 대화가 얼추 끝나자 캔트가 다시 말을 걸었다.
“이 사람은 영감이고, 얘는 그 손자지····. 그냥 영감과 손자라고 부르면 된다.”
“·····. 손자라고요?”
“그래.”
“여자인데, 왜 손자죠?”
그러자 모두가 살짝 놀란 듯 올리버를 봤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빨간코였다.
“이 녀석···. 모자란 놈인 줄 알았는데, 제법 눈썰미가 제법 좋은데?”
“어떻게 안 거지?”
올리버는 어깨를 으쓱였다.
대충 감정을 살펴보면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됐지만,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어···. 그냥요?”
캔트는 올리버를 잠시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 그래, 손자는 여자아이다. 하지만, 앞으로 그런 이야기를 함부로 내뱉지 마라. 거리는 여자가 살기 힘든 곳이니. 만약, 함부로 입을 열면 주둥이를 때려줄 줄 알아라.”
올리버는 캔트의 말이 진심인 걸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한 분노뿐 아니라, 손자라는 아이에 대한 걱정도 있었다.
그는 여기 있는 이들을 정말 아끼는 듯했다.
“음····, 이들은 전문 동냥아치로, 하모니카는 하모니카를 연주하고, 빨간코는 특유의 입담으로 성냥을 팔지. 노인과 손자는 함께 거리를 돌며 구걸하고.”
올리버는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캔트는 올리버가 제대로 이해한 건지 궁금해하면서도 굳이 다시 설명하지 않았다.
“이들은 동냥을 통해 정기적으로 우리 거지패의 수입원을 벌어다 주지. 즉, 우리가 안 굶게 해주는 소중한 존재들이야. 그러니 여기 있을 때는 존경을 가지고 대해라.”
“예, 알겠습니다.”
올리버를 말없이 바라보는 캔트.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올리버를 한쪽 구석진 곳으로 데려갔다.
그것에는 폐건물 한쪽에 자리 잡은 거처가 보였는데, 거처라 해봤자, 대충 지어진 천막과 오래된 가재도구밖에 없었다.
열댓 명 정도 되어 보이는 거지들이 있었고, 개중에 노인, 여자, 아이도 몇몇 보였다.
그 외 특이한 점이라면 양쪽 벽에 싸인 쓰레기 더미였다.
“이들은 우리 거지패의 일반 거지들···. 고정적인 역할은 없지만, 앞에서 만났던 이들과 다를 거 없다. 우리 거지패 동료지.”
“그런가요?”
“그래, 저들도 필요할 때 동냥하고, 침입자가 나타나면 다 같이 싸우니.”
“침입자요?”
“그래····. 란다는 빈민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거든. 다른 곳도 매한가지지만, 여기 더 심해. 그래도 걱정하지 마라. 최근까지는 별일 없었으니.”
최근까지는 이라····. 무엇인가 불안한 단어 같았다.
“흠····. 뭐, 설명해 줄건 그게 다다. 넌 이제부터 저들이랑 같이 일해야 한다. 어찌 됐건 일단 우리 거지패에 들어오게 됐으니. 혹시 몰라 말하는 건데, 힘들다고 징징대지 마라. 넌 모르겠지만, 거지패에 들어오는 것도 쉬운 게 아니니. 그러니 최대한 열심히 밥 값해라.”
올리버는 그게 진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캔트의 감정에는 교활함도 거짓도 없었다.
“예·····. 뭐든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뭘 하면 될지요.”
“글쎄, 할 게 많다면 할 게 많지. 쓰레기 뒤지는 거나, 구호금 받거나, 헌 옷 지원받거나, 심부름하거나····. 넌 처음이니 쉬운 거부터 가르쳐 줄 거다.”
“예. 알겠습니다.”
“더 물어보고 싶은 거 있나? 다시 말하지만, 내가 기분이 좋아 우리 패거리에 받아줬지만, 너도 네 몫은 해야 할 거다.”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흥, 좋은 태도군. 그 좋은 태도가 언제까지 유지될지 지켜보마.”
캔트가 그리 떠나려고 할 때 올리버가 그를 불러세웠다.
“아, 잠시만요. 캔트 님.”
“응?”
“아까 질문 있으면 하라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응, 그래···. 그냥 한 말이긴 한데, 왜? 뭐가 궁금하냐?”
“·····. 절 왜 이렇게 도와주신 거죠? 진짜로요?”
“······.”
캔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올리버를 바라봤고, 올리버 역시 대답을 갈구하듯 그를 바라봤다.
그렇게 짧은 침묵이 지나간 후, 캔트가 입을 열었다.
“····. 네가 한 사람 몫을 하는 사람이 되면 내 알려주마.”
진심. 올리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
그날 이후 올리버의 의도치 않은 거지 생활이 시작됐다.
전혀 의도한 바가 아니긴 했지만, 썩 나쁘지도 않았다.
애당초 두루뭉실한 목적만 있을 뿐, 나침반도 지도도 없었으니.
차라리 이참에 이 도시 생활에 대해 배우자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거지 생활이긴 했지만, 뭐든 배울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것은 썩 틀린 생각이 아니었다.
“이봐 일어·····. 뭐야? 벌써 일어났어?”
올리버를 깨우러 온 동료 거지가 준비까지 마친 올리버를 보며 말했다.
그는 꽤 놀란 눈치였다.
“예, 일찍 일어나라고 하셔서····.”
“아, 그러긴 그랬지. 그래도 일찍 일어나는 놈은 드문데···. 대단하네?”
“평소에도 일찍 일어나서···. 이제, 뭘 하면 되겠습니까?”
“바로 교회 구빈원에 줄 서로 가야 해. 오늘 빵을 나눠주거든. 마저 옷 입고 바로 나와.”
“예, 알겠습니다.”
올리버는 대답하자마자 옆에 개어놓은 넝마를 뒤집어썼다.
캔트 패거리에 합류한 후 받은 건데, 딱히 쓸모는 없었지만, 거지티는 확실히 낼 수 있었다.
올리버는 얼굴도 씻지 못한 채 바로 선임 거지들을 따라 교회 구빈원이란 곳으로 향했다.
그중 올리버보다 두세 살 많은 거지가 웅얼댔다.
“으으····. 졸려. 아직 해도 안 떴는데. 야, 신입. 넌 안 피곤해?”
“예? 아····. 피곤합니다.”
올리버는 그리 대답했지만, 사실 거짓말이었다.
비록, 자는 것도 먹는 것도 씻는 것도 패밀리에 있을 때와 비교도 할 수 없게 열악했지만, 그렇다고 크게 불편하진 않았다.
이유는 올리버도 정확히 몰랐다.
애당초 척박한 환경에 익숙한 고아원 광산 출신 때문인지, 아니면 천성적으로 크게 개의치 않는 건지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뭐, 애당초 올리버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으니 깊게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굳이 아쉬운 게 있다면 씻지 못한다는 점인데, 이것도 좀 시간이 지나니 이내 익숙해졌다.
그렇기에 올리버는 거지 생활이 크게 불편하지도 불만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매일매일 소소하게 배우는 지식을 계산하면 약간 이득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여기가 구빈원인가요?”
갈색 벽돌, 먼지가 낀 창문, 녹이 슨 철 십자가가 세워진 건물을 보며 올리버가 물었다.
상자 세 개를 모은 듯한 외관이었는데, 건물 주변에는 검은색 철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허나, 삭막한 건물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울타리 근처에서 대기하는 수많은 거지였다.
“그래 여기가 구빈원이야. 더럽게 사람이 많구만.”
“아아····. 그러게요. 빌어먹을 다들 쓸데없이 부지런하네요.”
“뭐, 슬슬 배고픈 시기니····. 멍 때리지 말고 줄 서자고.”
재촉에 올리버는 동료 거지들과 함께 줄을 섰다. 사실 줄이라기보다는 그저 문 가까이 서 있는 것에 불과했지만.
다들 해진 옷을 입고, 굶주린 배를 움켜잡으며 구빈원이 문을 열 때까지 가만히 서서 기다리는데, 올리버는 문득 궁금증을 느끼며 물었다.
“그런데 구빈원에서는 왜 빵이나 돈을 나눠주는 거죠? 그것도 공짜로?”
나이 많은 거지가 손가락을 치켜들며 말했다.
“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가난한 자들에게 적선하는 걸 미덕으로 여기시거든.”
“오····.”
“대신 우린 그만큼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비굴하게 이야기해야 하지.”
젊은 거지가 냉소적으로 끼어들었다.
다시 나이 많은 거지가 말했다.
“근데, 그건 왜 궁금한 거야?”
“아···. 구빈원이라는 데를 처음 와 봐서요.”
“아, 맞다. 너 여태까지 쓰레기만 뒤지고 정리했지?····. 근데, 와인햄에는 구빈원이 없냐?”
“····. 글쎄요. 그때는 관심이 없어서.”
“쯧쯧···. 이래서 요즘 애들은. 그렇게 대충 사니까 우리처럼 거지 되는 거 아니야. 부모님이 평생 보살펴 줄 것도 아닌데, 빠릿빠릿 주변을 둘러보고 세상 사는 법을 배워야지.”
“예···. 저도 느끼고 있습니다.”
올리버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고아원, 광산 때 만해도 자신이 얼마나 아는 게 없었는지 몰랐지만,
흑마법사 조직을 거치고 현재 홀로 세상 밖으로 나오자 자신이 얼마나 세상에 무지한지 깨닫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거지보다도 무식하다고 할 수 있었다.
진심이 담긴 올리버의 대답에 거지들은 겸연쩍어졌는지 더 이상 구박하지 않았다.
원래 갑자기 들어온 놈이라 다들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여태까지 시키는 일은 군소리 없이 해냈기에 어느새 최소한의 정은 붙은 거였다.
물론, 아닌 자들도 있었지만.
올리버가 질문했다.
“그럼, 신께서 미덕이라고 생각해 이리 빵을 나눠주는 겁니까?”
“아····. 그건 공식적인 이유고, 좀 더 직접적이고 세속적인 이유도 있지.”
“직접적 세속적 이유요?”
“그래, 그게 뭐냐면·····.”
뎅- 뎅- 뎅-
그때, 교회 구빈원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자 멍하니 기다리고 있던 거지들은 밥때가 된 개처럼 고개를 획 들었다.
구빈원 밖으로 빵을 가지고 나오는 직원들.
오래된 빵인지 냄새는 옅었지만, 거지들은 모두 침을 흘렸는데, 그때, 빳빳한 사제복을 입은 사람이 나왔다.
“배급을 시행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