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염탐 (1)
“여기까지 왔으니 안전한 듯싶습니다.”
한 상급제자가 말했다.
조셉 때부터 상급제자를 맡은 자였는데, 그래서 갑작스러운 상황 때 남들보다 더욱 연륜 있는 모습을 보여 줬다.
가령, 지금 같은 상황에 말이다.
“여기가····. 비밀 안전 가옥이라고요?”
“예, 주이ㄴ····. 조셉이 만들어 놓은 곳인데, 여기 있으면 안전할 겁니다.”
올리버는 주변을 둘러봤다.
일반 가정집 한가운데 있는 이 건물은 정기적으로 관리를 받았는지 그럭저럭 지낼 만해 보였다.
“주인님께서 혹시 모를 습격이나, 성기사를 대비해 장만한 곳입니다. 저희를 제외하고는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한 뒤 마리와 피터에게 다들 잘 따라 왔냐고 물었다.
마리가 대답했다.
“하나, 둘, 셋····. 예! 여기 전부 다 따라왔습니다.”
“이쪽도 전부 다 따라 왔습니다.”
마리와 피터의 보고를 들은 후 각자 방을 잡고, 짐을 풀고 쉴 것을 명했다.
솔직히 이런 긴급 상황은 처음이었기에 딱히 뭘 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기껏해야 약사의 말대로 최대한 빨리 짐을 꾸리고, 상급제자의 조언에 따라 대비하는 것 외에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도대체 반딧불이 뭐냔 말이다?
“성기사 입니다.”
“예?”
“성기사입니다. 파테르교에서 만든 신의 기사요.”
올리버는 고개를 갸웃댔다.
파테르교, 신····. 들어본 적이 있었다.
감독관들이 가끔씩 이야기하는 거였는데, 올리버 같은 아이들을 볼 때마다 너희는 신의 축복을 받지 못해 지옥에 갈 거라 말했다.
꽤나 다급한 상황인 걸 알았지만, 그럼에도 올리버는 호기심이 동했다.
“파테르교는 뭐고, 성기사는 뭐고, 신은 또 뭐죠? 구체적으로?”
상급제자의 얼굴에 당혹감이 꽃피웠다. 마치, 태양이 뭐고, 물이 뭔지 묻는 아이를 보는 난해함이었다.
“어····. 그게····. 그러니까····.”
그 역시 제대로 설명할 줄은 모르는 눈치.
상황을 파악한 올리버는 괜찮다고 이야기한 후, 쉴 것을 명했다.
“주인님?”
상급제자가 끝나고 올리버도 좀 쉴까 할 때, 마리가 조용히 다가왔다.
“예? 마리. 무슨 일인지?”
“이대로 괜찮을까요?”
“뭐가요?”
“그, 그게···. 약사의 말대로 급하기 도망치느라 돈도 서적도 얼마 못 챙기지 않았습니까?”
그건 사실이었다. [반딧불이 왔다. 모두 빨리 피해라]는 쪽지가 도착하자마자 올리버는 최소한의 짐을 싸 도망칠 것을 명했다.
자세한 내막이 뭔지도 몰랐지만, 약사가 그냥 보내지 않았을 거라 판단과 감에 의존해 말이다.
가장 먼저 챙긴 것은 감정. 그 덕분에 근래 벌어들인 돈은 물론이요. 서적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뭐, 책은 거의 다 봤고, 돈도 이 정도면 충분해 챙겼지만, 마리는 아닌 듯했다.
“이대로 방치하면 분명 돈도 서적도 빼앗기게 될 텐데, 지금이라도 가서 챙겨오는 게 어떨까요····? 제조실도 파괴되어 한동안 어려움을 겪을 텐데····.”
마리의 제안에 올리버는 고개를 저었다.
“음···. 아뇨. 돈이 중요하긴 하지만, 목숨은 하나잖아요?”
“제, 제가 갔다 오겠습니다.”
올리버가 고개를 갸웃했다.
“마리가요? 굳이 왜?”
“····. 주인님께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예?”
“주인님께···.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분명, 이대로 가면 피해가 막심할 겁니다. 제조실을 세우는 데 적잖은 돈이 들어요. 이대로면 주인님의 행보에 방해되실 거예요?”
“·····?”
올리버는 말뜻을 이해할 수 없어 마리를 빤히 바라봤다.
행보라니? 무슨?
올리버는 자신이 그동안 했던 일을 떠올렸다.
조셉을 살해한 후 돌아와 어쩌다 보니 잠시 주인 자리를 맡게 됐고, 책을 읽으며, 필거렛을 만들고, 흑마법을 가르쳐줬다.
운이 따라줘 일은 수월.
올리버는 그저 책을 읽기 위해 자기 일을 한 것밖에 없었다. 여기에는 그 어떠한 행보도 뜻도 없었다.
마리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올리버는 마리와 자기 생각에 적잖은 괴리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마, 지금 그녀가 내뿜는 집착과 숭배의 감정과 상관있을지도?
“음·····. 괜찮아요.”
“하, 하지만.”
“정말 괜찮아요. 어떻게든 되겠죠. 그보다 비밀 통로가 어디 있는지 다른 사람이랑 같이 가서 확인해 주시겠어요?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해서.”
올리버의 말에 마리는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아, 알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마리가 떠난 후 올리버는 홀로 생각했다. 솔직히 마리의 말이 그리 틀리진 않았다.
돈은 충분히 챙겼지만, 그건 올리버 기준.
전체에 비하면 소량인 걸 올리버조차 알았다.
거기에 서적을 잃는 것 역시 뼈아팠다. 거의 다 읽었다곤 했지만, 그렇다고 책이 사라지는 게 상관없는 건 아니었다.
책은 영원히 보관할 수 있는 지식이지 않은가?
모독적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올리버는 개의치 않기로 했다.
반딧불(성기사 이 어떠한 존재인지 모르겠지만, 주변 사람들의 말과 약사의 쪽지, 조셉의 기록에서는 흑마법사와 아주 상극을 이루는 일종의 천적 같았으니.
올리버는 그저 포식자가 사라지기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 허나, 한편으로 궁금하기도 했다. 도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흑마법사가 천적이라는 건지.
혹시 모르지 않는가? 올리버가 봤던 그 아름다운 빛에 대해 알려줄 단초가 될지.
그러자 올리버의 안에서 상충한 두 가지가 부딪혔다.
하나는 살아남기 위해 죽은 듯이 있으라는 생존 욕구였고,
다른 하나는 원하는 지식욕을 만족시키라는 호기심이었다.
둘 모두 올리버를 크게 좌우하는 것.
두 가지 충동이 부딪히자 올리버의 내면은 조용한 전쟁이 일어났는데, 그때, 누군가 올리버에게 다가왔다.
“주인님···?”
“·······. 뭡니까?”
머릿속에서 작은 전쟁이 일어난 올리버는 평소보다 늦게 대답했다.
기분이 언짢은 거라 오해했는지, 말을 건 제자는 더욱 겁을 집어먹으며 말했다.
“아, 죄, 죄송합니다. 다만, 정말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아닙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뭐죠?”
“···. 도미니크 패밀리의 주인 도미니크 님이 왔습니다.”
***
웬 뜬금없는 말인가 싶었지만, 그 말은 사실이었다.
조셉과 앤서니와 더불어 와인햄의 한 축을 담당하는 도미니크 패밀리의 주인 도미니크는 놀랍게도 조셉이 마련한 안전 가옥 지하실에 있었다.
그는 네 명의 제자들만 대동한 채 지하실에서 마리와 다른 제자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분위기나 감정 상태를 보아 싸우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실제로 올리버가 내려가자 반갑게 맞이해 줬다.
“어이, 안 죽고 살아 있군. 그래.”
“예, 안녕하십니까?”
올리버는 마치 이웃을 만난 듯 말했다.
긴장하고 있던 마리와 다른 이들은 올리버의 등장에 빠르게 안정을 찾았고, 올리버는 그들에게 손짓해 경계를 풀라 명했다.
“무슨 할 말이 있어 찾아오신 것 같은데····. 맞습니까?”
“어, 용케 알았군.”
“그전에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응?”
“이곳을 어떻게 찾은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올리버의 질문에 도미니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상황에 그런 게 궁금해?”
“음····. 예.”
“····. 하아, 뭐 좋아.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니. 원래 안전 가옥은 지하실이나 땅굴 같은 게 하나씩 있어. 여차하면 도망칠 수 있게. 그러다 보니 서로 연결된 경우도 왕왕 있지. 그래서 우린 역으로 하수도와 땅굴을 쫓아왔을 뿐이야.”
“아, 그렇군요. 흑마법을 사용하신 건가요?”
“····. 그래. ‘센시브 노스’. 우리 특기인 질병 계열 흑마법. 비약적으로 후각을 높여주지. 냄새나는 하수도에서도 사람 냄새를 쫓을 수 있게.”
올리버는 머릿속으로 그러한 정보를 넣었다.
근래 상대적으로 관심에 밀려 흑마법에 대한 탐구를 소홀하게 하긴 했지만, 역시, 흑마법도 재밌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대단하시군요.”
올리버의 순수한 감탄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도미니크는 인상을 썼다.
험상궂은 인상이 한층 더 험상궂어졌는데, 그럼에도 전처럼 화를 버럭 내진 않았다.
대신 그의 감정은 전보다 더 교활하고 은밀하게 꿈틀거렸다.
“이제 내 용건을 이야기해줘도 되겠어?”
“아! 물론. 편히 말씀하시죠.”
도미니크가 올리버를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앤서니가 당했네.”
“앤서니라면 앤서니 패밀리의?”
“그래, 이 상황에서 그 앤서니 말고 더 있나? 성기사인가 뭐시긴가가 그쪽을 바로 찾아가는 통에 미처 피하지 못하고 당했다네. 도망친 제자 놈들에게 들었으니 확실해.”
“음·····. 그렇군요.”
딱히 감흥이 없는 올리버는 이리 반응했다.
그것이 마음에 안 드는지 도미니크의 감정은 분노가 번뜩였다.
“꼭 남의 일인 것처럼 반응하는군! 앤서니 다음에는 우린데 말이야.”
“잘 숨어있으면 괜찮은 거 아닙니까?”
“아니야. 성기사 놈들은 대부분 끈질기거든. 하긴, 신이란 양반의 사냥개이니 무슨 말이 필요할까?”
“아, 그렇군요····. 혹시 성기사에 대해 좀 아시나요?”
“뭐?”
“혹시 아는 것 좀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제가 거의 아는 게 없어서.”
쾅―――!
도미니크가 핏줄이 돋을 정도로 눈을 부라리며 벽을 후려쳤다.
어찌나 힘이 센지 벽에는 작은 실금이 생겼고, 건물은 살짝 흔들려 천장에 쌓인 먼지가 부스스 떨어졌다.
“지금 장난하나?”
“아····. 죄송합니다. 정말 궁금해서요.”
올리버의 대답에 도미니크는 인상을 더욱 쓰며 노려봤다.
“·····.”
“·····.”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도미니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건, 성기사란 놈들은 하나같이 독한 놈들이라 쉽사리 떠나지 않을 거야. 앤서니까지 잡았으니. 그러니 언제 이 지랄이 끝날지도 모르지.”
“그럼?”
“우리가 먼저 치자.”
“하지만 약사님께서는 자기가 해결할 테니 숨어있으라고-”
“-우리가 그 노인네 하수인이야?! 애당초 우리 아니면 약사라고도 불리지 못하는 인간인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약사가 흑마법사 덕분에 큰 수익을 올리는 건 맞았지만, 동시에 흑마법사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재료를 수급하고, 쉽게 상품을 현금화할 수 있었다.
그 외에 기타 자잘한 뒷정리도 도맡아 줬고.
하지만 굳이 따질 문제는 아니기에 올리버는 모른 채 질문했다.
“그럼···. 싸우실 생각입니까?”
“그래! 애당초 우리가 왜 그런 개새끼를 무서워해야 하는데?!”
“하지만 흑마법사와 상성이 최악이라고···.”
“그래도 힘을 합치면 이길 수 있어. 앤서니 쪽 제자들이 모두 내 쪽으로 왔으니 실상 전력은 그대로야. 너희 올리버 패밀리까지 합세하면·····. 뭐야?”
도미니크가 조용히 손을 드는 올리버를 보며 물었다.
올리버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 몇 가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일단, 저희 조직은 올리버 패밀리가 아니라 조셉 패밀리입니다.”
“····. 뭐?”
“이름을 안 바꿨거든요. 일단, 주인님이 세운 조직이고, 저도 그냥 잠시 맡은 거뿐이라.”
“이 무슨 개 같은···.”
“그리고 두 번째는 전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그건 또 무슨···!”
“위험한 적이라는데 굳이 싸울 필요가 있나요?”
“귓구멍 막혔어?! 우릴 끝까지 추격할 거라고 했잖아?!”
“그럼, 또 도망치면 되지 않나요? 굳이 위험을-”
“-겁쟁이 새끼!”
도미니크가 그렇게 말하며 올리버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올리버는 얼굴에 침을 맞았음에도 조금의 요동도 보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침을 닦는 정도?
“뭐····. 이게 겁쟁이라면 전 겁쟁이가 맞는 거 같네요. 어쨌건 굳이 위험에 끼어들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도미니크가 자세를 고쳤다. 당장이라도 덤벼들 기세였다.
“그럼 뭐? 우리가 피똥 싸가며 성기사 쓰러뜨리는 동안 너희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겠다는 거야?”
“아뇨, 그럴 생각은 아니지만, 고마운 건 맞죠····. 혹시 그럼 다른 식으로 제가 보답을-”
“-이런 개자식이 당장 죽여···!”
화를 참다 못하고 다가오던 도미니크가 멈칫했다. 그림자 촉수가 그의 발목을 잡은 거였다.
“아···. 잘 몰라서 그러는데, 지금 저랑 싸우실 생각입니까?”
올리버가 상대방을 진정시키듯 양 손바닥을 보이며 정중히 말했다.
태도는 몹시도 정중했지만, 도미니크의 발목을 휘감은 그림자 촉수는 천년 묵은 고목처럼 억세기 그지없었다.
어느새 주인들의 태도에 맞춰 각 제자가 서로 싸울 자세를 잡았는데, 긴장이 점점 고조되어 갔다.
올리버가 다시 부탁했다.
“부디 이해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 전부 돌아간다.”
“예?”
“전부 돌아간다고! 곧 성기사 놈이랑 싸워야 하는데, 이런 겁쟁이들과 놀 시간 없어.”
그 말에 도미니크 패밀리원들이 마지못해 경계를 풀었고, 조셉 패밀리원들도 자세를 풀었다.
올리버는 도미니크의 발목을 붙든 그림자 촉수를 풀어줬다.
“·····. 성기사 쪽 일만 해결되면 그다음은 너희 차례야. 기대하고 있으라고.”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꼭 다른 식으로 인사를 하겠습니다.”
도미니크는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인사하는 올리버를 바라보더니 그대로 왔던 비밀 통로를 통해 돌아갔다.
그렇게 때아닌 방문이 끝났는데, 지하실에 있던 제자들이 모두 숨을 몰아쉬었다.
“다, 다행이다. 난 또 무슨 일 일어나는 줄 알았네”
“그러게····.”
“별 탈 없어서 다행이다.”
“다시 움직일 준비 하세요.”
나지막하게 끼어든 목소리. 올리버의 목소리였다.
“예?”
“느낌이 안 좋아요. 여기 있으면 위험할 거 같으니, 다시 짐 싸서 도망칠 준비들 하세요.”
“·····.”
아무도 뭐라 말하지 못했다. 그저 멍한 표정으로 올리버를 볼 뿐. 그러다 마리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다들 뭐 하고 있어?! 주인님께서 움직이라는데! 다들 엉덩이 안 떼?!”
그제야 다들 움직였다.
피터가 다가와 물었다.
“그럼, 어디로···?”
“글쎄요? 다른 안전 가옥 있나요?”
올리버의 질문에 상급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두세 군데 더 있습니다. 여기보다 관리가 안 되고, 멀지만.”
“좋네요. 거기로 사람들 좀 데려다주세요.”
“예?”
“아, 저는 다른 데 가볼 데가 있거든요.”
“어디로요?”
마리가 놀란 눈으로 끼어들며 물었다.
“도미니크 패밀리 따라가려고요.”
“예?”
“성기사랑 싸울 거라고 하는데 어떤 이들인지 보려고요.”
마리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올리버에게 있어 이것은 혁신적인 생각이었다.
몰래 숨어 도미니크 패밀리와 싸우는 성기사를 관찰한다.
혹시 모를 위험을 최소화하며,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최고의 절충안이었다.
허나, 마리는 어째서인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 하지만 너무 위험하세요.”
“괜찮아요. 잘 숨을 자신 있으니까. 여러분들은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세요.”
마리의 감정은 급격하게 요동쳤다. 혼란, 두려움, 걱정 기타 등등 부정적 감정이.
전투를 치르는 사람이나 죽음을 앞둔 사람과 같은 수준이었다. 왜?
“전 시험관 몇 개만 챙겨갈 테니, 나머지는 전부 여러분이 들고 가세요. 시험관이 어디···.”
-콱.
무엇인가 올리버의 옷자락을 잡았다. 마리였다.
“마····. 리?”
“그럼, 저희도 따라갈게요. 최소한 저라도. 혼자서는 너무 위험하세요.”
올리버는 마리가 잡은 옷자락을 보았다.
놀랍게도 그녀의 감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하게 빛이 났는데, 손끝을 따라 올리버의 몸에 전해질 정도였다.
흥미로운 반응.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유만 된다면 한번 알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더 중요한 사안이 있었다.
“괜찮아요. 마리.”
“그, 그렇지만···.”
“혼자가 더 편해서 그래요. 서둘러 움직여야 하고, 은밀할 필요도 있어서.”
그 말에 마리가 손을 놓았다.
“····. 그, 그럼, 저, 저희가 방해된다는 말씀이신지.”
진흙탕처럼 혼탁하게 요동치는 마리의 감정. 아까 전보다 더욱 부정적인 감정이 빛났다.
경악, 실망, 절망, 두려움, 자기혐오.
그 뿌리를 알 수 없는 질척질척한 감정이 용솟았다.
올리버는 그런 마리의 눈을 보며 말했다.
“뭐·····. 그렇다고도 볼 수 있네요···. 다들 조심히 대피하세요.”
그렇게 올리버는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