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호출 (2)
올리버는 편지의 내용에 따라 조셉의 방으로 들어갔다.
지하실에 있는 방준 가장 호화로운 곳이었지만, 올리버는 관심이 없다는 듯 딱 시키는 곳으로 갔다.
침대 바로 옆.
그곳에는 작은 서랍장과 마석으로 작동하는 등잔이 있었다.
올리버는 편지가 시키는 대로 등잔을 치우고, 서랍장을 낑낑대며 옆으로 밀었다.
그러자 편지에 적힌 내용대로 벽면 아래에 있는 작은 금고를 볼 수 있었다.
“음····.”
올리버가 편지를 다시 꺼내 비밀번호를 확인했다.
“4·····. 7·····. 8····. 19····. 24····. 2······. 41·····. 5·····.·”
거대한 쇳덩어리 가운데 있던 다이얼이 끼리릭 끼리릭 움직이다 이윽고 찰칵 소리를 냈다.
단단히 잠겨 있던 금고문에 틈새가 생기자 문을 당겨 열었는데, 그 안에 차곡차곡 쌓인 금속 보관함을 볼 수 있었다.
올리버는 그중 3번 보관함을 붙잡아 당겼다.
기름으로 칠 한 듯 부드럽게 딸려오는 보관함.
매우 길어 그 끝이 안 보였는데, 길쭉한 보관함 안에는 빈틈없이 고액 현금다발이 채워져 있었다.
보관함 하나에 채워진 액수만 해도 웬만한 사람들은 평생 모을 수도 없는 거금.
허나, 올리버는 그런 거금을 보고도 흥분하긴커녕 동요도 하지 않은 채, 기계적으로 준비한 가방에 돈을 담을 뿐이었다.
“10만란다권을 30개라····. 하나, 둘, 셋·····.”
차곡차곡 쌓이는 돈다발은 어느새 가방을 가득 채워 갔다.
“···. 이십구···. 삼십.”
돈을 다 담은 후 배낭을 삼중으로 잠갔다.
무게가 제법 묵직했는데, 고액 화폐가 아니었으면 꽤나 힘들 뻔했다.
올리버는 금속 보관함을 금고 안으로 밀어 넣은 후, 금고문을 닫고, 서랍장과 마석 등잔을 제자리에 옮겼다.
처음과 똑같았는데, 그런 다음 가방을 등에 메고, 잠근 끈을 몸통에 연결한 후 밖으로 나갔다.
공장 밖으로 올라가니 마리와 피터를 비롯한 제자들이 모여 있었다.
“···. 뭐죠? 다들 모여서?”
상급제자 중 하나가 대답했다.
“아, 주인님 명을 받아 나가시는데, 다 같이 배웅해드리는 것이 예의인 듯해서요···. 문제는 없으십니까?”
올리버는 자기 몸을 만져봤다.
“예, 별로·····.”
그때, 마리가 조심스럽게 다가오더니 올리버의 윗옷과 겉옷, 바지의 주름진 곳을 고쳐주었다.
그리고는 뉴스보이캡을 머리 위에 조심히 씌워줬다.
“이러면 눈에 안 띌 거에요.”
올리버는 모자를 한번 만지고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이제 출발할 때였다.
“따라오시죠. 요 앞에서 트럭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트럭이란 다름 아닌 약사의 트럭으로, 때마침 란다로 방문하기에 올리버도 겸사겸사 타기로 했다.
올리버가 그냥 따라가려고 했는데,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어 질문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물어볼 수 있을까요?”
“예? 무슨····.”
“원래 주인님께서 이렇게 돈 심부름을 시키나요? 그것도 이렇게 거금을?”
상급제자를 포함해 배웅 나와 있던 제자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다들 처음 있는 일인 듯 딱히 고개를 갸웃댔다.
“···. 없었습니다. 보통은 필요한 만큼 돈을 가져가십니다. 정말 필요한 경우에는 은행을 통해 송금하거나, 편지로 보내라 하십니다.”
음····. 이례적인 경우라.
그때, 다른 상급제자가 말했다.
“그런데 애당초 상황 자체가 특수한 상황이니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애당초 떠난 이유가 엄청난 부상을 입은 앤드루의 치료 목적이었으니.
돈이 부족한 것도 말이 되고, 저만한 금액을 송금이나 편지로 부치기도 무리였다.
잘못할 경우 괜한 시선을 끌 수 있으니.
얼추 납득한 올리버는 다시 움직였다.
“···. 그렇네요. 그럼 가보겠습니다. 다들 잘 지내세요.”
“예, 안녕히 가십시오.”
“““예, 안녕히 가십시오.”””
올리버는 정문에서 대기하고 있는 트럭 앞으로 갔다.
마법사와 싸우러 갈 때 탔던 6륜 트럭으로 짐칸 위에는 검은색 포터 천막이 처져 있었다.
“·····.”
올리버가 어떻게 올라가야 할지 몰라 잠시 짐칸을 멍하니 바라봤다.
상대적으로 키가 작았기에 다리를 올릴 곳이 마땅치 않았는데, 잠시 고민한 후 비장하게 말했다.
“혹시 사다리 있나요?”
“내 손 잡아.”
갑자기 끼어든 제3의 목소리.
고개를 들자 짐칸에서 한 남자가 보았다.
그가 손을 내밀며 다시 말했다.
“내 손 잡으라고.”
시키는 대로 손을 잡자, 남자는 우악스러운 힘으로 올리버를 끌어 올렸다.
“오랜만인데?”
남자가 말했다. 올리버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이내 기억을 떠올렸다.
바로, 약사의 부하인 직원A였다.
마법사와 싸우러 갈 때 올리버가 탄 트럭에 있었던 남자.
“아, 안녕하세요.”
기억을 떠올리자 인사했다. 남자의 각진 얼굴 위에 미소가 떠오르더니 자리를 권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일단 앉아. 비록, 짐 때문에 앉을 곳이 마땅치 않지만.”
그 말을 입증하듯 직원A는 바닥에 쌓인 짐 위에 대충 걸터앉았다.
올리버 역시 그를 따라 짐 위에 걸터앉았다.
“·····.”
“·····.”
“·····.”
“·····.”
“·····.”
“·····.”
“와우, 진짜 어색하네.”
직원A가 올리버를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대뜸 말했다.
올리버는 뭐가 어색한지 이해가 안 갔지만, 그는 계속해 말을 걸었다.
“원래 그렇게 말이 없나?”
“딱히요. 그냥 할 말이 없으면 안 합니다.”
“왜?”
“그럼, 감독관한테 안 맞았거든요.”
“아아····. 맞다. 너희 쪽 애들은 대부분 그런 쪽 애들이지? 그래도 이제 다 옛날이야기 아니겠어? 지금은 당당히 한 흑마법 조직의 2인자잖아?”
“아뇨. 아직 2인자는 앤드루 님이에요. 치료받는 중이거든요.”
“어차피 그 녀석은 밀려날 거잖아? 그놈은 마법사에게 된통 당했고, 넌 이겼으니까? 실력 위주 아니야?”
“····. 잘 아시네요?”
“뭐, 우리 조직에 있으면 너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지. 그게 아니더라도 나도 세상 경험이 풍부한 편이거든. 이래저래 여러 사람을 만나봤지.”
직원A의 감정을 살펴보니 어느 정도 사실인 듯했다. 약간 허세가 섞이긴 했지만 적정범위고.
“그래서 지식이 바다처럼 넓고 손가락 한 마디처럼 얄팍하지. 그러다가 이 동네에 정착했지만.”
“왜죠?”
“····. 그게 궁금해?”
“약간은요.”
“크크크 웃기는 놈이네···. 뭐, 이래저래 많은 일이 있었거든. 나이도 먹고, 죽을 뻔하기도 해서. 그래서 이제는 좀 안전한 어딘가에 정착하고 싶었거든. 그런 의미에선 네가 부러워.”
“제가요?”
“어, 진심. 무슨 속셈이 있어서 그러는 거 아니니 오해하지 마. 네 덕분에 살았거든. 우리가 죽을 뻔할 때 네가 바로 뒤치기를 해줬잖아. 안 그랬으면 마법사한테 꼼짝없이 당했을 거야. 일반 총기로는 화력 싸움이 되지 않더라고.”
직원A의 감정은 진심이었다. 약간의 부러움도 섞여 있었다.
“왜 부러우시죠?”
“크크, 시발 날 놀리는 거야?”
올리버가 반응이 없자, 직원A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정말 모르는 거야?”
“예.”
“아····. 진짠가 보네? 왜 부럽기는 넌 존내 천재잖아? 흑마법 말이야.”
“뭐, 그런가요?”
“이 새끼 골 때리네? 내가 너 어떻게 싸우는지 봤는데 말이야. 요즘도 가끔씩 꿈에서 봐. 수십 개의 검은 칼날이 비처럼 쏟아지고 그 일대가 폭발하는···. 너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고 하던데, 그럼 천재잖아? 인생 탄탄대로인 아니야?”
올리버는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는 못했다는 반응이 맞으리라.
인생 탄탄대로라···. 올리버에게 이런 단어는 딱히 의미가 없었다.
왜냐면 올리버의 최대 관심사는 예나 지금이나 생존이었고, 최근에 추가된 것은 흑마법과 아름다운 빛뿐이었다.
딱히 그 외에는 관심 없었다.
직원A가 말하는 돈이나 힘은 올리버의 감흥을 끌어내지 못했다.
이렇게 올리버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직원A가 허탈하게 말했다.
“하····. 천재의 여유 같은 거야? 아니면 천재는 원래 그런 거야?”
“죄송하지만, 솔직히 아직도 뭔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요컨대 제가 흑마법을 써서 부럽다는 건가요?”
“뭐····. 그런 셈이지. 귀찮게 총 안 들고 다녀도 되잖아?”
“그럼, 직원 씨도 하시면 되잖아요?”
“직원 씨? 아, 내 이름 안 가르쳐줬지····. 그런데, 흑마법을 배우라니 뭐 소리야? 왜, 혹시 내가 재능 있어?”
“글쎄요?”
“아니, 씨····. 배우라 해놓고 그런 거 모르면 어떻게 해?”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올리버가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지만, 그 말에 직원A는 살짝 눈이 커지더니,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왜 네가 가르쳐라도 주게?”
“주인님이 허락하면요.”
“·····. 진심이야?”
“예.”
“신기하네. 흑마법사나 마법사나 자기 지식 안 가르쳐주고 골수만 쪽쪽 빨기 좋아하는 놈들인데.”
“그런가요? 아····.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그럼 그렇지····. 뭔데?”
“처음 만났을 때 마법사에 대해 잘 아는 눈치던데, 아는 걸 제게 가르쳐 줄 수 있나요?”
“뭐?”
“마법사에 대해―”
“―아니, 아니, 아니. 못 들은 게 아니라 진심이야? 농담이 아니라?”
“예.”
직원A가 올리버를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나도 마법사에 대해 남들보다 약간 더 아는 것뿐이야.”
“그 정도면 충분해요. 아니면 다른 이야기라도.”
“····. 좋아.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고.”
올리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직원A도 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자, 도착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직원A가 천막을 살짝 들며 말했다.
살짝 벌려진 천막 사이로 란다의 배경이 들어왔는데, 올리버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그 모습을 자세히 살펴봤다.
우선 먼저 보인 것은 커다란 도로와 그 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
와인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그 수가 많았다.
허나, 차이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하늘에는 심심치 않게 비행선이 날아다녔으며,
길쭉하고 거대한 건물 아래에는 기괴하다 할 정도로 수많은 사람이 움직이고 있었다.
한산하다 못해 적만 한 와인햄에 비하면 흡사 바퀴벌레 소굴.
거기다 윗옷에 바지만 걸친 와인햄의 사람들에 비해 이곳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아주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실크햇을 쓴 망토 멋쟁이라던가,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고글이 있는 남자, 한쪽에 기계 팔을 단 덩치, 가슴이 돋보이는 꽉 끼는 옷을 입은 여성, 등에 십자가를 매단 남자까지.
완전 다른 세상이었다.
“놀란 표정이군.”
직원A가 대충 짐작한다는 듯이 말했다.
“예····. 사람이 정말 많군요.”
올리버는 빈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밀집한 빛들을 보며 말했다.
“당연하지. 이 도시는 주변에 있는 수많은 도시와 농촌을 잡아먹으면서 급성장한 도시거든. 나라 안의 나라라고 부를 수준이지.”
“여길 잘 아시나요?”
“그럼, 여기서 살기도 했는데.”
“그럼-”
더 물어보려고 할 때, 트럭이 갓길에 멈춰 서더니 운전석 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자, 도착했다. 내려.”
“에헤이,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인가 보구만.”
직원A가 말했다.
약간 아쉽긴 했지만 명이 우선이기에 올리버도 고개를 끄덕였다.
트럭에서 내리려고 할 때 직원A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오는 길 심심하지 않았어. 아까 전에 한 이야기 나중에 이어서 하면 좋겠어.”
“···. 예, 데려다주셔서 고맙습니다.”
올리버가 손을 맞잡으며 대답했다.
악수를 마친 후 손을 놓으려 할 때, 직원A가 올리버의 손을 다시 잡으며 말했다.
“아, 참고로 내 이름은 직원 씨가 아니라, 제임스다. 제임스. 앞으로 제임스라고 불러.”
“어, 예. 알겠습니다.”
“그럼 네 이름 이야기해줘.”
“예?”
“네 이름 알지만, 직접 듣고 싶거든···. 네 이름이 뭐지?”
올리버는 제임스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대답했다.
“올리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