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흑마법사-14화 (14/633)

14. 역할 분담 (2)

며칠 후, 재료 수급을 다시 시작했다.

다만, 달라진 것이 하나 있었는데, 다름 아닌 이례적으로 중급제자가 아닌 하급제자가 일을 도맡았다는 거였다.

이유는 얼마 남지 않는 납품일에 따른 생산의 효율성과 하급제자의 직무 확대를 통한 책임감 향상, 능력 단련이었지만,

나름대로 이 바닥에서 지낸 하급제자들은 그것이 허울뿐임을 알고 있었다.

필시 상대적으로 귀중한 중급제자를 아끼기 위해 하급제자들에게 짐을 떠넘긴 거였다. 대체할 거라면 이미 널렸으니.

하지만 속내를 알았다고 하급제자 따위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흑마법사 가라사대 상급자가 까라면 까라.

그들은 고개를 숙이며 늘려주신 임무에 감사를 표하고, 때아닌 인수인계와 감정을 추출하는 법을 단기 속성으로 연습해야 했다.

아, 한 명 빼고. 올리버.

슈화하학――!

”끝났습니다.“

올리버가 그리 말하며 생명력을 담은 시험관을 닫았다.

피터는 시험관을 건네받은 다음 가방에 넣고, 슬링백에서 둥그런 돈다발을 몇 묶음 꺼내 금니에 선글라스를 쓴 남자에게 줬다.

그 뭐였더라? 사채꾼이라고 했나? 여하튼 그는 기분 나쁜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수수료란 명목으로 돈다발을 몇 개 챙긴 다음 생명력이 빨린 사람에게 지폐 서너 장을 쥐여주었다.

”이만 가보도록 하죠.“

”어잉. 잘 들어가라고. 다음에 또 봤으면 해.“

사채꾼이 손을 흔들어 배웅했다. 피터는 그런 사채꾼이 거북한지 올리버를 데리고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허름한 건물을 나와 어느 정도 걸었을 때, 피터가 한숨을 쉬며 명단이 적혀진 내용을 훑어봤다.

”하·····. 이런.“

”왜 그러세요?“

”밥 먹고 아침부터 나와서 온종일 돌아다니는데, 일이 도통 줄어들 기미가 안 보여서.“

그랬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하급제자들과 달리 올리버와 피터는 남들의 거의 몇 배에 해당하는 일을 했으니 아주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올리버만이 하급제자 중 유일하게 생명력을 뽑을 수 있었기 때문인데, 덕분에 감정 추출하는 일에선 제외됐지만, 혼자 생명력을 뽑는 일을 덤터기 썼다.

올리버는 일 자체가 재밌어 괜찮았지만, 곁에서 보조하는 피터는 결코 아니었다.

언제 끝날지 가늠도 안 되는 양에, 위에서는 서두르라 재촉하고 무엇보다 습격자로 인해 피를 본 게 불과 며칠 전인데. 참으로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이동범위도 넓어 습격받을 가능성도 컸는데 말이다. 무엇보다···.

꼬르륵····.

피터는 울리는 배를 보고는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1시 20분. 일하느라 점심시간도 놓쳤다.

피터는 올리버를 데리고 뒷골목을 벗어나 큰길로 나갔다.

한때 번잡하던 거리는 눈에 띄게 사람이 줄었는데, 건물 역시 반 이상이 비어 창문에 널빤지는 덧댄 집이 부지기수였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게 있는지, 광장에 있는 핫도그 부스는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잠깐 기다려.“

피터가 올리버에게 말한 다음 핫도그 부스로 갔다.

잠시 후, 머스타드와 피클 다짐을 얹은 핫도그를 들고 돌아왔다.

”이거 하나 먹어.“

올리버는 피터의 말대로 핫도그를 먹었으며, 피터 역시 핫도그로 배를 채웠다.

먹는 동안 이 둘 사이에는 대화가 하나도 오가지 않았는데, 피터는 말 없는 올리버를 보며 천재는 원래 이런 건가 생각했다.

임시 제자로 들어와 열흘도 안 돼 정식 제자가 되고, 몇 년간 이곳에 몸담은 우리를 가뿐히 뛰어넘는.

하지만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행보보다 속마음을 전혀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음침하고 때때로 멍청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는 평소에는 임시 제자들처럼 얌전해 보이는가 싶었지만, 정작, 이상한 타이밍에는 적극적이어서 주변의 긴장을 유발했다.

중급제자 중에서도 발군이며, 앤드루 라인의 랏소마저 긴장하게 할 만큼 말이다.

아직도 떠올랐다. 올리버가 생명력을 뽑자마자 경악한 그의 얼굴을.

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그였기에 인상에 더욱 남았다.

어쩌면 올리버가 이 일을 맡은 것은 어쩌면 음모일지도····. 습격자를 만나 예상치 못한 불행을 겪으라는.

하긴 이상할 것도 없었다.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큰 싹은 자라기 전에 잘라내는 것이 흑마법사의 법도이니.

피터가 만년 방장 노릇을 하는 것도 그 때문인데.

그런데,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올리버와 엮이게 되면서 위험하게 됐다.

만약, 정말 올리버를 죽일 속셈으로 이 작업에 밀어 넣은 거면 피터는 덤으로 같이 죽을 터였다····. 그래, 덤으로 말이다.

인생이란 참 좆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파도에 휩쓸리기만 하는 조각배처럼 말이다.

”저거 뭐죠?“

갑자기 올리버가 질문했다.

아이처럼 순진하고, 멍청한 얼굴로 올리버가 한 방향을 가리켰는데, 그곳에는 허름한 옷을 입은 노동자들이 다 떨어진 신발을 질질 끌며 시위하고 있었다.

”공장 이전은 죽음이다!“

”죽음이다!“

”죽음이다!“

”우리에게 일자리를!!“

”일자리를!“

”일자리를!“

사십, 오십 살 먹은 노동자들의 시위는 어딘가 안타깝고 힘들어 보였는데, 피터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며칠 전 랏소 님이 말씀하신 말 기억해?“

”어떤 거요?“

”····. 이 도시 공장이 란다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거.“

”어, 예.“

”그러지 말라고 시위하는 거야. 그럼 일자리를 잃을 테니.“

올리버는 정말 알아들은 건지 무감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은 묘하게 정이 안 가면서도 속을 알 수 없게 해 사람을 불편하게 했다.

”잘은 모르지만····. 그럼, 란다로 가면 안 되나요? 일자리 찾아서?“

피터는 심상치 않은 침묵 후 입을 열었다.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야.“

”그런가요?“

”어, 그래. 일단, 살던 곳을 떠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 그런,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아닌 사람도 있지. 뭣보다 란다로 가봤자 딱히 상황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피터는 잠시 고민했다.

이야기 해줘도 그만이고 안 해줘도 그만이었지만, 호기심이 가득한 녀석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니 거절이 쉽지가 않았다.

결국, 스스로 미쳤다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란다는 예전부터 커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더욱 빠르게 커지고 있어. 하루에도 지도가 바뀔 정도로. 마치 괴물 같아. 주변의 도시와 마을, 어촌을 잡아먹는 괴물. 그런 괴물에게 잡아먹히는 사람들이 행복할 거 같아?“

”음···. 아니요?“

”맞아. 하루에 12시간은 기본이고 18시간 일할 때도 있지. 애들이라고 다르지 않고. 그런 데 비해 돈은 쥐꼬리만도 못하고, 월세 놓는 놈들은 전부 도둑놈이나 다름없어 하루하루 여기저기 쥐어짜이며 살게 돼.“

”잘 아시네요?“

”거기서 살아봤거든.“

피터가 말했다. 굳이 말할 필요 없음에도.

”원래는 란다 위쪽에 있는 작은 어촌에 살았는데, 어업 공장이 들어오며 결국 쫓겨났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온 가족이 란다로 갔고, 그때부터 지옥이 시작됐지.“

피터는 그때를 떠올리자 눈동자가 급격히 어두워졌다. 가난이란 그런 거였으니. 특히 란다에서의 가난은 그 정도가 남달랐다.

”그러다 주인님을 따라온 거세요?“

피터의 눈썹이 꿈틀댔다. 끼어들어 기분이 나쁜 것이 아닌, 신기해서였다. 이렇게 대화할 줄도 아는구나 싶어서 말이다.

”어···? 어, 그래. 주인님은 재능 있는 아이를 찾는다고 해서····. 아버지한테 거절할 수 없는 돈을 제시했지, 결국 아버지는 날 주인님에게 넘겼고. 하지만 오해는 하지 마. 나도 여기 와서 좋으니까. 생활도 훨씬 낫고, 희망도 있으니. 여기서 흑마법을 배우면 언젠가 나도 내 사업을 운영하며 떵떵거릴 수 있을 테니.“

사실, 마지막 말은 거짓이었다. 한때, 흑마법사로 독립하는 꿈을 꾼 적은 있지만 이젠 다 옛날이야기였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내부 경쟁 탓.

흑마법사 조직의 경쟁은 상상 이상으로 치열하고 음습했는데, 특히, 조직의 2인자인 앤드루를 중심으로 한 파벌 때문에 사실상 진급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 사실을 깨닫고 피터는 사실상 꿈을 포기했다.

지금은 그저 하루하루 평온하게 보내는 것을 바랄 뿐. 누군가의 눈 밖에 나 식중독으로 죽지 않게 말이다.

피터는 문득 혐오감이 들었다. 이 상황에 대한 혐오감이, 아니, 어쩌면 자신에 대한 혐오감일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못 하고 이리저리 휘둘리며 사는 자신에 대한.

”이제 그만 다시 일하자.“

우울함을 떨치기 위해 피터가 말했다.

다시 업무가 시작됐다.

피터는 올리버와 함께한 다세대 주택에 들어가 집세가 밀린 이들 대신 집세를 해결해주고, 대신 생명력을 뽑아갔다.

그다음은 지하에 있는 작은 사채업자 사무실에 가서 빚쟁이들의 빚을 해결해주고, 그만큼 생명력을 뽑아갔다.

그렇게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일을 하던 중 올리버가 말을 걸었다.

”뭐, 하나 물어볼 수 있을까요?“

기분 같아서는 힘드니까 하지 말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아직 올리버가 무서워 피터는 뭐가 궁금한지 물어봤다. 허나, 생각보다 충격적인 질문이 나왔다.

”혹시 제가 위험한가요?“

어두운 뒷골목에서 피터가 멈췄다.

”그게 무슨····.“

”누가 저한테 그랬거든요. 너무 눈에 띄게 행동하지 말고 자중하라고, 위험하다고 말이죠···. 정말인가요?“

”······.“

피터는 입을 다물었다. 이유는 다름 아닌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모르쇠를 해야 하나? 아니면 안전하다고 거짓말을 해야 하나?

평소 멍청한 모습을 보면 적당히 얼버무려도 될 듯했지만, 가끔 튀어나오는 날카로운 모습이 떠오르자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만약, 어설프게 대응했다가, 만약 녀석이 덤비면 어떡하지? 도저히 이길 자신이 없는데?

그때였다. 인내심이 다 했는지 올리버가 갑자기 다가왔다.

피터는 당황하며 진정하라고 손을 들었는데, 올리버는 개의치 않고 피터의 어깨를 잡았다.

근력 자체는 별 볼 일 없었지만, 이미 기가 죽은 탓에 저항을 못 했는데, 그대로 끌려간 피터는 거대한 쓰레기통과 툭 튀어나온 시멘트 벽면 사이에 처박히고 말았다.

”자, 잠까ㄴ·····.“

올리버는 피터의 말을 듣지도 않고 시험관 뚜껑을 열었다.

머릿속에 한순간 죽음이란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아무  것도 못하고 허무하게 휩쓸리다 죽다니····.

그때, 올리버가 감정을 추출해 영창했다.

[블랙 쉴더×2]

앞뒤 양쪽으로 펼쳐진 블랙 쉴더. 그다음 총성이 울려 퍼졌다.

퇑――――――!

퇑――――――!

때려 부수듯 묵직한 소리.

시간이 지났지만, 익숙한 소리였다.

빈민가에서 자주 들렸던 소리. 산탄총이었다. 그것도 갱들 간의 항쟁에 주로 쓰이는 개조형 산탄총.

죽일 생각이 만만이었는지, 양쪽에서 압박이 들어왔는데, 올리버는 용케도 그것을 막았다.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습격인 건가요?“

”····. 어!“

피터가 당황하며 소리치듯 대답했다.

대답하기 무섭게 올리버는 뒤쪽에 전개한 블랙 쉴더를 순식간에 응축해 그대로 날려버렸다.

[해잇 블릿]

짧은 단말마와 함께 털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피터는 얼굴을 빼꼼 내밀자 웃기지도 않은 복면을 뒤집어쓴 습격자를 볼 수 있었다.

비록,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당황한 것은 알 수 있었다.

피터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저거 위력만 세지. 몇 발 못 쏴. 잡아야 해. 산 채로!“

그 말과 함께 습격자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바로 골목으로 빠지려고 했는데, 올리버가 해잇 블릿을 정확히 쏴 가는 길을 막았다.

쾅―! 콰광――!

”이런 씨······!“

당황하며 멈칫하는 습격자.

올리버가 물었다.

”산 채로 잡아야 한다고요?“

”응! 산채로!“

”산 채로라····.“

올리버가 그리 중얼거리더니 시험관에서 감정을 추출해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습격자도 가만히 기다리지는 않았는데, 도망칠 곳이 마땅치 않은 그는 품 안에서 스크롤을 꺼냈다. 그래, 스크롤 말이다.

피터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놈이 지금 텔레포트 스크롤을 써서 도망칠 것을!

”이런····!“

”늦었다. 잘 있어라 병ㅅㅣㄴ··· 응?“

습격자가 스크롤을 펴서 도망치려는 찰나. 올리버가 반 박자 더 빠르게 무엇인가를 쐈다.

그것은 피터도 생애 처음 보는 흑마법이었는데, 굳이 표현하자면 거미줄이었다.

그물처럼 날아가 사람을 꼼짝없이 붙잡는 거미줄 말이다.

”어, 이게 되네?“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는 올리버.

피터는 그런 그를 얼빵하게 올려다보며 물었다.

”저, 저건····?“

”음····. 클링 스파이더 웹이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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