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하급제자 (1)
바닥에 깔린 타일, 벽에 연결된 파이프, 공기 중의 수증기.
대결에서 승리한 올리버는 조셉에 의해 승자로 선언된 후 지하실에 마련된 샤워실에서 몸을 씻었다.
따뜻한 물로 씻는 건 이번이 생에 처음이었기에 꽤나 생소했는데, 그럼에도 썩 나쁘진 않았다.
차가운 물보다 씻기 훨씬 쉬워 물줄기에 얼굴을 가져다 대는 것만으로 굳어있던 핏방울이 쉽게 떨어져 나갔다.
얼추 다 씻은 후 올리버는 수건으로 몸을 닦고 밖으로 나갔다.
바구니에 담아뒀던 옷은 사라지고 없었고, 대신 처음 보는 새 옷이 있었다.
“·····.”
올리버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서 있었다. 자기 옷이 도대체 어디 간 건지.
이대로 밖으로 나가 찾아야 하나 싶었는데,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다 씻었어?”
“예?”
“다 씻었냐고?”
처음 듣는 목소리. 일단 대답했다.
“예.”
“그, 그럼. 옷 입고 나와. 내가 앞으로 생활할 곳을 알려줄 테니.”
올리버는 묘하게 떠는 목소리를 향해 말했다.
“그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
“예, 제 옷이 사라졌는데요?”
“그 걸ㄹㅔ·····. 아니 옷?”
“예.”
“그건 버렸어. 바구니에 새 옷을 입었으니까 그걸로 갈아입어. 하급이라도 정식 제자. 주인님의 얼굴을 생각해 품위를 갖춰야지. 왜? 혹시, 중요한 옷이야?”
“아뇨. 아닙니다.
”휴우····.“
문 너머로 안도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올리버는 목소리의 말대로 바구니에 담긴 새 옷을 꺼내 입었다. 새하얀 셔츠와 멜빵 달린 청바지, 검은 재킷을 말이다.
올리버의 몸보다 약간 크긴 했지만, 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감지덕지라 할 수 있었다.
여태껏 올리버가 살면서 입은 옷 중 가장 좋은 것이었으니. 정작 당사자는 상관하지 않았지만.
옷을 다 입은 후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밖에는 올리버보다 다섯 살 정도 많아 보이는 청년이 서 있었다.
“····. 다 갈아입었습니다.”
“그, 그래? 그럼···. 따라와.”
묘하게 경직된 남자는 어색하게 말하며 움직였다.
아랫사람 취급하는 거 같으면서도 조심스러웠는데, 감정을 살펴보니 겁을 먹은 게 보였다.
올리버는 왜 저러는 건지 이해가 안 됐는데, 이내 신경을 꺼버렸다.
개미굴 같은 복도를 지나 도착한 곳은 한 거대한 생활관.
그곳에는 열 명 정도 되는 이들이 있었다.
임시제자로 지낼 때와 비슷한 인원이었는데, 다만 방의 그 크기와 질은 엄연히 차이가 있었다.
조잡하긴 하지만 제대로 된 철제 침대가 인원수에 맞춰 하나씩 있었으며, 침대 옆에는 개인 물품을 보관할 수 있는 관물대와 작은 책상이 있었다.
눅진한 매트릭스만 덜렁 둔 축사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여기가 네가 지낼 생활관이다.”
“·····.”
올리버가 고개를 돌려 빤히 바라봤다. 청년은 그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뻘뻘 땀을 흘리며 말했다.
“개인실은 중급제자도 못써. 상급제자나 가야지 가능하지.”
올리버가 물었다.
“여기서 지내나요? 제가···?”
“어? 어어, 넌 이제 하급제자가 됐으니까. 여기서 지내야 하지 않을까?”
올리버는 몰랐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댔다. 왜냐면 진짜 몰랐으니까.
하급제자가 되고 싶었던 것은 그저 흑마법을 배우기 위해서였지, 생활, 처우 개선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리라.
혹시 몰라 올리버가 다시 물었다.
“정말 여기서 지내도 되나요?”
“그래, 저기가 네 자리야.”
청년이 구석진 가장 안 좋은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올리버가 다가가 살폈다.
눅눅하지도 곰팡이가 피지도 않은 침대에 따뜻해 보이는 모포, 튼튼한 관물대, 옷걸이 등등.
“호, 혹시 자리가 마음에 안 들면-”
“- 마음에 들어요.”
“마음에 든다고?”
“예, 감사합니다.”
올리버가 살아온 처세술대로 감사를 표하자 청년은 티 나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다시 용기 내 입을 열었다.
“그럼···. 몇 가지 규칙에 관해 이야기해줄게.”
규칙. 올리버가 귀를 쫑긋 세웠다.
고아원에도 규칙이 있었고, 광산에서도, 위층 공장에서도 규칙이 있었다.
어기면 흠씬 두들겨 맞았고, 잘못하면 쫓겨날 수도 있었기에 드물게 집중력을 발휘했다.
드디어 흑마법을 배울 수 있는데, 쫓겨나면 억울하지 않은가?
“규칙이 뭐죠?”
“어····. 별건 아니고, 하급제자로 지내며 해야 할 역할에 관한 거야. 일단, 이 방의 방장은 나야. 그러니 내 지시를 따라야 해.”
“예···. 방장님.”
“굳이 님은 안 붙여도 돼····. 어쨌건, 다시 설명할게. 하급제자는 정식 제자이지만, 그래도 패밀리 내에선 가장 낮은 계급이야. 임시제자와 하인들은 정식 패밀리원이 아니니까. 이해했어?”
하인이 뭔지, 패밀리가 뭔지 몰랐으나, 올리버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식사 준비나, 방 청소 등 잡다한 일은 하인들이 대신해주지만, 중요 장소는 우리가 청소해야 해. 가령, 교실이나, 실험실, 작업실, 서재 같은 곳 말이야. 주인님께선 깨끗한 걸 좋아하시니 매일매일 아침에 청소해야 해. 이해했어?”
올리버가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 선배님들의 자잘한 심부름이나, 실험 보조도 우리 역할이야.”
“실험요?”
“그래, 그냥 시키는 대로 얌전히 따르면 돼.”
“어····. 알겠습니다. 그런데 방장님. 뭐하나 여쭤볼 수 있을까요?”
“뭐, 뭔데?”
“주인님의 가르침은 언제쯤 받을 수 있죠?”
“어, 하급제자는 보통 2주에 한 번꼴로 교육을 받아. 적을 때는 한 달에 한 번. 대부분은 수업 내용을 기반으로 한 독학을 하지.”
“아·····.”
시체같이 멍한 올리버의 얼굴에 묘한 실망감이 스쳐 지나갔다. 정기적으로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건 분명 기뻤지만, 그래도 너무 적었다. 매일매일 새로운 수업을 들을 줄 알았건만.
그런 마음을 알았는지 방장은 위로하듯 말했다.
“스승님은 선배들을 가르치고, 사업을 관리하느라 바빠서 어쩔 수 없어. 그리고 너무 열심히 하려고 하지 마.”
“어째서죠?”
올리버가 진심으로 물었다. 기껏 제자가 됐는데, 왜 열심히 하지 말라니. 방장은 대답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더니, 이내 말을 흐지부지 얼버무렸다.
“그건····. 음, 아니 됐다. 그냥 신경 쓰지 마. 내가 알려줄 건 이게 끝이야. 더 물어볼 거 없어?”
“없습니다.”
“잘됐네. 그럼, 앞으로 잘 지내보자···. 아, 맞다. 서랍 확인해서 물건 확인해 봐. 공책이랑 연필 있는지. 나중에 없다고 해봤자 정기 배급 때 말고는 안 주니까.”
올리버가 서랍을 열어 확인했다. 방장의 말대로 오래돼 색이 누렇게 변질된 공책과 쓰다 남은 듯한 몽당연필, 지저분한 지우개가 있었다.
“이건 왜 있는 거죠?”
“글쎄···. 본격적으로 흑마법을 배우려면 뭔가 적어야 해서?”
***
올리버는 개인 시간 때 지하를 벗어나 지상으로 올라갔다.
임시제자일 때와 달리 공장 일 따위를 하지 않아 생각보다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이 넉넉하였는데, 그렇다고 아무 이유 없이 지상으로 올라온 것은 아니었다.
올리버는 소시지 상자와 잡동사니를 지나 작업장으로 나왔고, 뒷정리 중이던 공장 작업장을 방문했다.
오늘도 열심히 일했는지, 바닥에는 으깨진 고기 부스러기나 쓰레기가 즐비했는데, 그것들을 치우던 임시제자들이 올리버를 발견하자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였다.
이제 올리버는 정식 제자. 자신들의 위였으니까····. 물론,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었지만.
갑자기 변한 동료 일꾼들이 태도를 보고 올리버는 고개를 갸웃댔다.
그들은 올리버를 질투하며 동시에 부러워했고, 분노하는 동시에 두려워했다.
방장과 비슷한 빛을 하고 있었는데, 참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올리버는 한 임시제자에게 다가갔다.
“뭐, 하나 물어볼 수 있을까요?”
“응? 어, 예?”
“마리 감독관님 어디 있죠?”
일꾼은 마리가 공장 내 구석진 곳에 있다 했고, 실제로 가서 살펴보니 사용하지 않아 붉게 녹슨 거대한 분쇄기 뒤에 홀로 서 있었다.
올리버는 무의식중으로 그녀는 감정을 살펴봤다. 몹시도 슬프고, 허탈해 보였다.
“마리 감독관님?”
올리버가 예의 바르게 분쇄기를 탁탁 두들기며 그녀를 불렀다.
기척을 못 느꼈는지 상념에 빠져있던 그녀는 화들짝 놀랐는데, 올리버를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올리버···. 님.”
“예, 안녕하세요?”
올리버가 인사했다. 그러나 그녀의 미간은 더욱 좁혀질 따름이었다.
빛의 형태로 볼 땐 불쾌한 것 같았는데, 그 이유를 알 길이 없어 약간 난감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긴 어쩐 일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부탁? 하····. 지금 놀리는 건가요?”
“예? 아뇨.”
“그럼, 어떻게 들어온 지 열흘도 안 돼 정식 제자가 된 분이 6년째 임시제자인 저에게 부탁이라는 걸 하시는 건가요?”
그녀는 비꼬려고 말한 거겠지만, 안타깝게도 올리버에겐 통하지 않았다. 비꼬는 걸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솔직히 대답했다.
“정식으로 흑마법을 배우려면 글자랑 숫자도 배워야 한데서요. 그런데 전 그런 걸 배운 적이 없어요. 그래서 그러는데 혹시 가르쳐 줄 수 있나요? 마리는 할 줄 안다고 하던데?”
“·····.”
마리는 침묵했다. 어이가 없어 보였다.
그나마 눈치는 있는지 올리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제가 실수한 건가요?”
“실수···. 아뇨 실수 같은 거 안 하셨습니다. 단숨에 정식 제자가 되신 분이 저 같은 것에게 무슨 실수를 하겠어요?”
“아, 그럼 다행이네요.”
“으악! 다행은 무슨···!”
올리버의 답답한 태도에 결국 마리가 폭발했다.
그녀의 고함이 공장 전체에 울렸는데, 뒤늦게 정신을 차린 마리는 분통이 터지듯 얼굴을 감쌌다. 그럼에도 올리버는 한결같은 태도를 취했다.
“역시 제가 잘못한 게 있군요···. 뭔지 모르겠지만 미안해요?”
마리는 질린 건지, 지친 건지 힘없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 아뇨. 잘못은 내가 했죠. 쥐뿔도 없는 집구석에서 태어나 간신히 기회를 얻은 주제 재능이 없어 여기 썩고 있으니. 누구 잘못이겠어요. 다 내 잘못이지. 당신은 잘못한 거 없어요.”
체념한 듯한 목소리였지만, 올리버는 볼 수 있었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집착하는 그녀의 감정을. 그럼에도 동시에 초조하고 두려워하는 감정을. 흡사, 소용돌이와 같은 빛이었다. 약간 예뻤다.
올리버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마리 스스로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는데, 잠시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 글하고 숫자를 가르쳐 달라고요?”
“예. 할 줄 안다고 하던데요? 공부하셨다고?”
“예···. 공부했죠. 그거라도 해야 하니까. 그런데, 왜 저한테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죠? 이제 같이 지낼 하급제자 중 태반이 글을 쓸 줄 알 텐데.”
올리버는 대답하기 어려운지 허공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게···· 좀, 그래요?”
“좀 그렇다뇨?”
“설명하기 어려운데 절 보는 빛이 꼭 애 같아요. 감독관 앞에 선 애들요.”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마리는 다시 인상을 찌푸렸지만, 곧이어 올리버가 추가 설명을 했다.
“저는 광산에서 왔는데, 거기 감독관 무서웠어요. 애들 모두 감독관 보면 겁내고, 그래서 감독관이 뭘 물어봐도 혼나지 않기 위해 거짓말을 했었죠. 그런데, 하급제자들 그 아이들과 같은 빛으로 절 보고 있어요.”
중구난방 한 설명이었지만, 다행히 마리는 그 뜻을 이해했다.
하급제자들이 올리버를 겁내다니····.
아니, 오히려 정상인가? 사실상 하급제자 수준이던 톰을 일방적으로 농락해 폭사(爆死 시켰으니.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따로 있었다.
“·····. 설마. 감정을 읽을 수 있는 건가요?”
올리버는 고개를 갸웃댔다.
“아마도요? 왜 그러죠?”
“맙소사····. 그건 개안 두 번째 단계에요 첫 번째 개안은 그저 감정을 보는 거고요? 불공평해····. 언제부터 그걸 감정을 읽을 수 있었어요?”
“어···. 처음부터?”
올리버의 담담한 대답. 마리는 화내기도 지쳤는지 허탈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녀는 나름대로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걸 알고 이를 인정했다고 생각하였는데, 오늘 그것이 착각임을 깨달았다. 어찌 이리도 불공평할 수가?
너무 슬프고 절망적이라 눈물조차 안 났다. 그때, 올리버가 다시 눈치 없게 질문했다.
“그럼, 글이랑 숫자는?”
“아악! 진짜·····! 제가 왜 당신을 도와줘야 하죠? 저도 언제 하인으로 떨어질지 모르는데! 언제 또 기회가 올지 모르는데! 그런, 소중한 시간을 왜 당신을 위해 써야 하죠?! 어째서요!!”
마리는 머리가 아닌 감정으로 말했다. 잠시 후, 씩- 씩- 거리던 마리가 진정을 되찾았을 때 올리버가 입을 열었다.
“여기 올라오기 전에도 하인이라는 이야기 들었는데, 하인이 뭐죠?”
또 딴소리. 하지만 더 이상 화낼 기운이 없는 마리는 그냥 힘없는 목소리로 순순히 대답해줄 뿐이었다.
“·····. 잘나신 정식 제자님들 수발을 들어줄 노예를 뜻해요. 늙어 죽을 때까지 밥하고, 청소하는. 저처럼 오랫동안 진급 못 한 임시제자가 갈 수 있는 끝자락이죠.”
“지금 슬픈 건가요?”
“당연히 슬프죠. 빌어먹을····! 제가 평생 하녀 노릇이나 하려고 여기 있는 것 같아요? 당연히 흑마법사가 되려고 여기 왔어요. 이제 시간이 정말 없어요! 그런데 그 시간을 당신을 위해 쓰라고요? 제가 가지지 못한 재능을 가진 당신을 위해?! 그건 진짜 아니잖아요····.”
마리는 말을 마치자마자 괴로운 듯 얼굴을 손으로 덮었다. 보이지 않는 납덩어리가 그녀를 짓뭉개는 것 같았다.
아마, 이대로 방치한다면 정말 며칠 후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짜부라질지도.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 마리 감독관님이 말씀하셨죠? 다음번에 도움을 청할 때는 뭔가를 가지고 오라고?”
마리는 고개를 살짝 들었다.
“마리 감독관님이 글과 숫자를 가르쳐주면 저도 가르쳐줄게요.”
“····. 뭘요?”
“흑마법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