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선택받은 아이 (2)
몽글몽글몽글.
올리버의 손끝을 따라 찰흙, 연기처럼 보이는 검은빛 덩이가 허공에서 움직였다.
처음에는 그저 동그란 빛 덩어리로밖에 만들 수 없었지만, 반나절이 채 되지 않아 세모, 네모, 별, 도넛, 사람 모양으로까지 만들 수 있었다.
그럼에도 올리버는 질리지 않는지 빛 덩어리를 더욱 복잡하고, 정교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원뿔, 뫼비우스 띠, 거미줄 같은 것으로 말이다. 마치, 처음 장난감을 가진 아이와 같은 모습이었다.
“재밌나?”
앞장서서 걷고 있던 조셉이 물었다.
“예, 이런 게 될 줄은····. 대단하네요.”
올리버가 순수하게 감탄하며 대답했다. 추레한 인상과 잠긴 목소리 탓에 음울해 보였지만, 기쁨만큼은 진심이었다. 이 검은빛을 이리 쓸 줄이야. 새삼 신기했다.
“이 빛을 다루는 게 흑마법이라는 건가요?”
“빛이 아니라 감정이다.”
“감·····. 정?”
“그래, 분노, 슬픔, 증오····. 그러한 감정을 다루는 것이 흑마법의 기본이지.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아주 강력한 힘이다. 감정이란 영혼에서 나온 일종의 에너지인 셈이니. 마석에서 나오는 마력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다. 참고로, 넌 다루는 솜씨는 좋지만, 감정 자체는 그리 강하지가 않구나.”
“예?”
“들은 대로다. 네 감정은 작고 초라해. 하지만 상관없다. 남의 것을 가져다 쓰면 되니까. 그게 정석이고.”
그 말에 동태 같던 올리버의 눈이 빛났다. 흡사, 시체가 다시 살아난 모습이었다.
“남의 것도 다룰 수 있다고요? 어떻게요?”
“그건 어렵지 않다. 네가 감정을 보는 것과 지금 감정을 다루는 것과 비슷해. 재능만 충분하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지. 오감을 뛰어넘는 육감, 센스, 보이지 않는 근육을 쓰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해라.”
어려운 말에 올리버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지만, 한가지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자신에겐 충분한 재능이 있음을.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순간, 올리버의 굳은 뇌가 삐걱삐걱 상상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런 작은 빛이 아닌 거대한 빛을 다루는 자신의 모습을. 그러자 차갑게 식었던 심장이 조금씩 데워지기 시작했다.
흡사, 맛있는 음식을 보면 침이 고이고,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빠져드는 것과 같이 원초적인 욕구가 고개를 들었다.
올리버가 조용히 물었다.
“혹시, 더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흑마법 말입니다.”
조용하지만, 탐욕스러운 올리버의 눈. 그 눈을 본 조셉은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그건····. 나중에 집으로 돌아간 뒤 좀 더 알려주마.”
올리버는 그러지 말고 지금 여기서 알려달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생에 처음으로 관심을 가진 것이니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허나, 조셉을 보고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말을 삼켰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조셉의 몸에서 뿜어지는 빛 때문이었다.
화가 날 때 벼락 치는 빛, 슬퍼할 때 울렁이는 빛, 두려워할 때 떨리는 빛 등.
태어날 때부터 이러한 빛을 봐온 올리버는 이를 바탕으로 사람들의 기분과 상태를 파악해 결정적인 순간 화를 피하곤 했는데, 지금 조셉의 말을 듣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다. 조셉은 복종을 원했다. 그 사실을 눈치챈 올리버는 여태까지 살아남은 요령을 발휘해 조셉이 원하는 순종적인 가축 흉내를 냈다.
그 태도가 마음에 드는지 조셉은 작게 미소지으며 도로를 따라 걸었고, 올리버는 착한 아이가 되어 그 뒤를 조용히 따라 걸어갔다. 허나, 그 순간에도 올리버는 흑마법에 대한 생각을 떨치지 않았다. 아니, 더 탐욕스럽게 갈구했다.
***
마지막 대화를 이후로 상당한 시간이 지났지만, 조셉과 올리버는 단 한마디도 말을 나누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걸을 뿐.
객관적으로 봤을 때, 차나 열차를 타지 않고 도로를 장시간 걷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었지만, 올리버는 딱히 개의치 않았다.
아직 아이긴 했지만 이미 중노동에 단련된 그였기에 그냥 걷기만 하는 것은 산책이나 다름없었다. 거기다 걷는 동안 감정을 이용해 이것저것 자신만의 놀이를 즐겼으니 심심하지도 않았다.
기껏해야 감정을 이용해 여러 모형을 더 빠르고 복잡하게 만들거나,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렇다고 이것의 의미 없는 짓이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횟수가 증가함에 따라 감정을 다루는 기본기가 빠르게 숙달됐으니. 거기다 단단하게 굳어 있던 올리버의 뇌 역시 점차 각성하기 시작했다.
문득, 올리버는 생각했다. 이 감정이라는 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단순히 도형으로 만드는 것을 떠나 특정한 용도에 맞게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광산의 곡괭이, 부엌의 식칼처럼?
아니, 어쩌면 단순한 빛에 그치지 않고 가공을 통해 좀 더 새로운 무언가로 재창조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배우진 못했지만, 본능적인 직감이 그리 말했다.
그렇게 올리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흑마법에 대한 이해력과 상상력이 개화해 나갔다. 그리고 그 첫 번째 꽃봉오리가 펼쳐지려는 그때 조셉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 됐군. 저기 여관이 있다니.”
상상 속 연구실에 매몰되어 있던 올리버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현실로 돌아왔다.
하늘을 살펴보니 이미 밤이 찾아와 하늘에는 장막이 드리우며, 거리와 주변의 숲은 어둠으로 검게 물들어 있었다. 유일한 빛이라곤 저 멀리 외롭게 세워진 여관뿐.
조셉이 올리버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런 우린 운도 좋구나. 이런 외진 거리에 여관을 만나다니.”
조셉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여관으로 다가갔다. 아늑한 노란 불빛은 다가가는 것만으로 마음을 편안케 했는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향긋한 음식 내음과 함께 따뜻한 온기가 반겨주었다.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여관 주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와 조셉을 반겼다.
덩치가 몹시도 큰 중년 사내는 장사꾼 특유의 아첨하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싹싹 비벼댔다.
“이리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몇 분이십니까?”
“나랑 이 꼬마 둘이오. 하룻밤 묵을 방 있소?”
“네네. 당연히 있고 말고요. 자자, 따라오십시오.”
주인장은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방으로 안내했다. 지나는 길에 식당을 볼 수 있었는데, 그곳에 조셉과 올리버 말고도 손님이 셋, 넷 정도 더 있었다.
“음식이 맛있어 보이는구려?”
손님들의 식탁 위에 놓인 음식을 보며 조셉이 말했다. 실제로 손님들이 먹고 있는 식사는 꽤나 맛있어 보였다. 갓 구운 빵에, 스튜, 치즈, 뼈가 붙은 고기찜 등 이런 외진 여관에서 보기 드문 식단이었다.
주인장이 헤헤 웃으며 답했다.
“칭찬 감사합니다. 일종의 영업 전략입죠. 보시다시피 외진 여관이다 보니 손님을 받기가 쪼오금 힘듭니다. 가끔씩 지나가는 여행객이나, 트럭 운전수 밖에 상대할 수 없으니···. 그래서 음식이라도 맛있게 해 손님을 늘리고 있죠.”
“그렇군. 확실히 맛있어 보이오. 주방장 솜씨가 좋나 보오?”
“예, 맞습니다. 전부 제 마누라 솜씨죠. 직원까지 합쳐 총 다섯이서 운영한답니다. 당연히 식사는 하실 테지요?”
“당연히 먹어야지···. 그런데 방에서 먹을 수 있겠소? 조용하게 먹고 싶어서. 돈은 더 드리리다.”
그 순간 주인장의 얼굴 근육이 미세하게 꿈틀댔다.
“아·····. 예예, 당연히 가능합죠. 여기 이 방입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식사를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더 필요하신 건 있는지?”
“없소.”
“예예, 그럼 잠시·····.”
주인장은 헐레벌떡 1층으로 내려갔고, 그 사이 조셉은 올리버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외투를 벗으며 조셉이 물었다.
“저 주인장이 어떤 것 같더냐? 친절하지?”
“어····. 잘은 모르겠지만, 이상하던데요.”
“클클클. 역시, 그렇지?”
조셉이 웃으며 말했다. 분명, 좋은 여관 주인 같았지만, 어째 본업은 그게 아닌 듯했다.
한 20분 정도 지났을 때, 문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종업원으로 보이는 건장한 사내가 쟁반에 음식을 담아 가져왔다.
“여기 음식 나왔습니다.”
“호오····.”
갓구운 빵에 스튜, 고기찜 등 푸짐한 음식을 보고 조셉이 감탄했다. 조셉은 종업원에게 두둑이 팁을 건네줬고, 종업원은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다 드신 후 빈 그릇은 그냥 문밖에 내놓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종업원이 밖으로 나가자 올리버와 조셉은 서로의 눈을 마주 봤다.
한 시간 후, 문밖에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과 접시가 내놓아졌으며, 그것을 확인한 주인장이 사악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
한밤중.
여관방에 퍽-! 퍽-!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흡사, 망치로 고기를 두들기는 소리였는데, 거의 절반 정도는 정답이었다.
사람도 고기는 고기니까.
“휴······.”
여관 주인장이 숨을 뱉으며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다. 아니, 피인가?
그의 발아래에는 여관 손님 하나가 누워 있었다. 어둠 탓에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몇 번이고 대가리를 망치로 후려쳤으니, 한동안 얌전할 터였다.
“끄으으응. 이 짓도 몇 년 지나면 더이상 못하겠군.”
“에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주인님. 이렇게 정정하신데. 20년은 더 하셔야죠.”
“아서라. 아서. 20년이면 내 나이가 몇 살인데, 나이 먹은 뒤에는 좀 더 품위 있게 살고 싶다. 그건 그렇고 이게 끝이냐?”
“어·····. 아뇨. 저기 복도 끝방에 마지막 물건이 있습니다. 남자랑 아이 하나요.”
“아, 맞다. 방 안에서 식사한 놈들. 휴·····. 오늘은 운이 좋구만. 좀만 더 고생해볼까?”
“설마 깨어있는 건 아니겠죠?”
“그건, 걱정마라. 음식을 깨끗하게 다 비웠으니까. 혀로 핥았는지 소스까지 깨끗하게 먹었더라.”
“아, 그거 다행이네요. 분위기가 묘하길래 괜히 신경이 쓰였는데····.”
“그래, 특히 애새끼가 기분 나쁘게 생겼더라. 무슨 시체도 아니고.”
“그 둘 뭘까요? 부자지간으로는 안 보이던데?”
“글쎄? 애 몸에 검댕이가 있는 걸 보니 아마 근처 탄광에서 산 아이일 거다. 일꾼이나, 아이를 좋아하는 변태, 실험용 쥐새끼가 필요한 이들이 가끔씩 방문하니.”
“거참, 악질이네요.”
여관 주인장과 그 부하 직원이 조셉과 올리버가 머무는 방 앞에 섰다. 그 둘은 늘 하던 대로 문 앞에서 잠시 대기했다. 서로 눈을 마주치며 작게 소리 죽여 대화했다.
“하나······.”
끄덕.
“두울·····.”
끄덕.
“세에-”
-쾅! 콰직! 퍽! 퍽!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갑자기 문이 부서지며 무엇인가가 쏟아져나왔다. 무슨 구슬과 같았는데, 너무나도 순식간이라 여관 직원은 깜짝 놀라며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지만, 보이는 것이라곤 부서진 문 파편과 그것을 뒤집어쓴 채 널브러진 주인장뿐.
그는 총에 맞은 것처럼 몸통이 꿰뚫린 채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분명 총소리도 안 났는데, 심장이 쾅쾅 뛰고, 숨이 막혔다.
그때, 발소리와 함께 방에서 누군가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바로, 손님이었다. 그가 직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