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나락곡 (9)
동토(凍土)에 파묻힌 시체는 시간이 지나도 썩지 않는다.
그것이 오랜 시간 동안 땅속 깊은 곳에 흐르는 극음의 정기에 노출된다면 건예자(乾麑子), 혹은 철강시(綴僵尸)라 불리는 존재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극음의 정기를 한계 이상으로 받아들여도 몸이 터져 나가지 않은 철강시가 있다면 그것은 혈강시(血僵尸), 혹은 생강시(生僵尸)라 고쳐 불린다.
북궁설이 홍공과 손을 잡은 것은 바로 이 혈강시를 만들 때쯤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산의 정기만을 사용해서 시체를 절여야 하지만, 북궁설은 홍공의 조언에 따라 나락곡의 살수들을 죽여서 추출한 창귀의 혈기(血氣)를 산의 정기에 섞어 사용했고, 그 결과 철강시가 만들어지는 속도가 기존보다 두 배, 아니 세 배는 더 빨라지게 되었다.
이 시점부터 북궁설은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양질의 시체에 양질의 창귀를 접목시킬 경우 철강시가 혈강시로 변하게 되는 시간 역시도 훨씬 더 단축된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후, 북궁설은 자신의 휘하에 있던 살수들을 하나하나 강시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나락곡 살수들의 강인한 육체와 혼백은 더더욱 양질의 강시를 제작할 수 있는 재료였다.
그 전까지 강시 제조 과정에서 버려져 왔던 살수의 혼백들은 이제 창귀의 형태로 변해 산의 정기와 융합되었고, 이 방법은 북궁설의 계획을 몇 배나 효율적으로 만들었다.
창귀가 깃들어 있는 혈강시.
이것은 기존에 제작되던 혈강시들보다도 훨씬 빠르게 양산이 가능했다.
북궁설은 곡주 나락노야의 시선을 피해 가며 점차 살수들을 강시화해 나갔다.
곡주에게만 충성하던 살수들은 점차 북궁설만을 위해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되어 갔다.
나락곡 안에 북궁설의 독자적인 세력이 자라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후로도 북궁설은 계속해서 자신의 세력을 은밀히 불려 나갔다.
강인한 살수가 있다면 반드시 죽여서 혼백을 창귀로 만들었고, 그것을 얼어 죽은 육신에 반쯤 붙여 놓아 성불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
그리하여 나락곡의 살수들은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얼어붙은 땅속에 갇혀 고통받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리고 추이가 노렸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몽땅 훔쳐 가 주마.’
북궁설이 지금껏 차곡차곡 모아 놓은 나락곡 살수들의 창귀 말이다.
퍼억!
추이의 창에 맞은 강시 하나의 허리가 잘려 나갔다.
츠츠츠츠츠츠……
강시의 육신이 바스라지며, 창귀가 된 혼백 하나가 불안정하게 뽑혀 나온다.
추이는 그 창귀를 흡수하는 동시에 곧바로 창을 휘둘렀다.
부웅-
북궁설은 추이의 창을 피해 뒤로 멀찍이 물러났다.
불길한 기운이 시뻘겋게 일렁거리는 추이의 창을 보며, 북궁설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뭐냐? 대체 무슨 사술이냐?”
“강시를 만드는 자에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추이는 별다른 감흥도 없다는 듯 창귀를 마저 흡수했다.
강시에 깃들어 있던 창귀들은 너무나도 수월하게 추이에게 흡수되었다.
추이는 상황을 빠르게 진단했다.
‘죽은 지 오래된 창귀들이었던 점, 창귀들이 육신 속에 갇혀 있던 시간이 길었던 점, 그동안 자신이 살아 있는 상태인지 죽은 상태인지 자각하기가 어려워졌던 점, 그 육신을 파괴한 자가 자신을 죽였다고 인식했던 점들이 모인 결과인가. 상황이 잘 맞아 떨어지겠다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비록 추이가 직접 죽인 것이 아니기는 하지만 상황의 특수성이 이를 가능케 만들었다.
즉, 창귀들은 추이의 손에 두 번 죽은 셈이다.
추이는 북궁설을 도발했다.
“네가 모아 왔던 창귀들이라면 아까부터 내가 빼다 쓰고 있었다. 그것을 이제야 눈치챘다면…… 감이 둔한 편이로군.”
사실 추이는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계속해서 지하의 창귀를 곶감 빼먹듯 쏙쏙 빨아들이고 있었다.
북궁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말이다.
이윽고, 폭증한 내공이 추이의 전신으로 뿜어져 나왔다.
쉬이이이이익-
눈밭에 파묻혀 있던 창귀들이 아지랑이의 형태로 변해 일렁거린다.
몸속은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피부는 꽝꽝 얼어 점점 더 단단해졌다.
고체가 액체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기체로 변한다.
추이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들이 아삭아삭한 살얼음처럼 변하는가 싶더니 이내 붉은 아지랑이로 화해 흩어지고 있었다.
추이는 급격히 폭증한 내공을 단전 속에 가뒀고 조용히 갈무리했다.
강시들에게 붙어 있던 창귀들을 내공으로 치환하자 그 양이 어마어마하다.
비록 순도가 낮기는 했지만 한 번에 흡수한 양 하나만큼은 회귀 전후를 통틀어 전무후무할 정도였다.
“다시 붙어 보자고.”
추이는 곧바로 북궁설과의 거리를 좁혔다.
방금 전, 내력과 내력이 부딪치는 싸움에서 추이는 참패를 겪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수많은 강시들에게서 추출한 창귀들이 고스란히 추이의 내력이 되었다.
말하자면 엄청난 양의 영약을 한 번에 복용하고 온 꼴이었다.
콰-쾅!
추이의 창과 북궁설의 비수가 맞부딪치자 요란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 ……! ……!”
자신의 비수가 밀려나는 것을 본 북궁설은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팔을 거뒀다.
하지만 추이는 창을 뒤로 물리지 않고 곧장 그 뒤를 쫓았다.
다시 한번, 추이의 창이 북궁설의 복부를 노렸다.
퍼-억!
추이의 창이 처음으로 북궁설의 어깨에 맞았다.
비록 스치기는 했으나 그녀의 어깨와 가슴팍에는 긴 혈선이 그어졌다.
“큭!?”
북궁설은 세 자루의 비수를 뿌리며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추이는 창을 세 번 놀리는 것으로 비수들을 모두 튕겨 냈고 네 번째 일격을 북궁설의 발에 꽂아 넣었다.
뿌직-
그녀의 오른쪽 발등이 설상화와 함께 절반가량 잘려 나가며 위로 핏물이 튀어 올랐다.
발을 빼는 게 약간 늦은 것이다.
“도망은 못 간다.”
“…….”
“여기가 네 묫자리야.”
추이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휘둘러지는 매화귀창 역시도 극도로 건조한 울음소리를 토해 낸다.
쉐엑-
북궁설은 그것을 피해 뒤로 물러났으나.
…철커덕! 차라라라라락! 패액!
매화귀창은 북궁설을 쫓아 기형적으로 늘어난다.
더군다나 폭증한 내력까지 담겨 있는지라 쏘아져 나가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쩍-
추이의 창은 북궁설의 왼쪽 팔을 잘라 버리고는 그 너머에 있던 거대한 바위까지 대각선으로 베어 버렸다.
콰콰콰콰쾅!
바위가 무너져 내려 북궁설의 왼팔을 삼킨다.
하지만 북궁설은 붕괴하는 낙석 사이로도 오른팔을 뻗어 비수들을 날려 보냈다.
퍼퍼퍽!
세 개의 비수가 바위를 뚫고 날아가 추이의 어깨, 배, 허벅지에 꽂혔다.
하지만 추이는 몸에 비수를 박은 채로 밀고 들어와 다시 한번 북궁설의 복부에 창을 쑤셔 박았다.
…뿌드드득!
내공의 벽을 뚫고 들어가 기어이 뱃가죽을 찢어 놓고 마는 창날.
퍼-엉! 후드득- 후드득- 후드득-
북궁설은 황급히 몸을 옆으로 틀어서 창날을 빼냈지만 그 대가로 창자의 상당수를 유실하고 말았다.
“크학!?”
그녀는 피를 한 움큼 토했다.
그러고는 붉게 돌아간 눈을 부릅뜬 채 오른팔을 두 번 휘저었다.
퍼퍼퍼퍼퍼펑!
저 작은 몸 어디에 저토록 많은 비수가 숨겨져 있었을까 싶은 반격.
언뜻 보기에도 수십 개가 넘을 것 같은 비수들이 추이를 향했다.
추이는 매화귀창을 회전시켜 비수들을 튕겨 냈다.
문제는.
“……!”
추이의 뒤편에 있던 견술과 남궁율이었다.
* * *
…퍽!
견술의 개작두가 적야차의 가슴팍에 꽂혔다.
적야차는 피를 쏟아 내며 비틀거리던 끝에 설원 한복판에 쓰러졌고 두 번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휴우- 진짜 뒈지는 줄 알았네. 살수 주제에 왜 이렇게 세?”
견술은 땀과 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돌렸다.
그 순간.
“……어!?”
견술의 시야를 꽉 채워 오는 비수들이 보인다.
“야! 튀어!”
그는 옆쪽에 있던 남궁율을 향해 황급히 외쳤다.
“……!”
청야차 한 명과 대치하고 있던 남궁율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비명을 지를 틈조차도 없었다.
남궁율의 앞에 있던 청야차가 비수의 소나기에 폭격당해 걸레짝으로 변해 버렸다.
퍼퍼퍼퍼퍼퍽!
그나마 청야차가 고기 방패가 되어 준 덕분에 남궁율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콰-악!
비수의 소나기가 그친 곳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북궁설의 우악스러운 손아귀였다.
“커헉!?”
남궁율은 북궁설에게 목을 잡힌 채 허공으로 들어 올려졌다.
북궁설은 이를 뿌득뿌득 갈며 추이를 돌아보았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 봐라. 바로 이년의 모가지를 꺾어 놓겠다.”
최후의 순간에 벌이는 인질극.
사실 그것이 통할지는 북궁설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추이의 얼굴에는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다.
남궁율 본인 또한 외치고 있었다.
“추 소협! 저는 신경쓰지 마시고 이 악적을……! 컥!”
북궁설은 손을 한번 세차게 흔들어 남궁율의 목소리를 막았다.
추이와 북궁설 사이에 약간의 대치가 이어졌다.
이윽고, 추이가 뒤로 한 발 물러났다.
“놔줄 테니 그 여자를 내려놔라.”
“……!”
견술과 남궁율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추이가 협상에 응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인질극을 시도한 북궁설마저도 추이의 말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거짓을 내뱉는 놈 같지는 않은데. 진심이냐?”
“두 번은 말하지 않는다. 놔줄 테니 그 여자를 내려놔라.”
추이는 무미건조한 어조로 같은 말을 반복한다.
“…….”
북궁설은 한동안 무언가를 고민했다.
그러고는 그 끝에 덧붙였다.
“두 놈 다 뒤로 백 보를 물러나라. 그렇다면 이 여자를 이곳에 놓고 가겠다.”
“…….”
추이는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견술 역시도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 뒤를 따른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추이의 모습이 멀어질수록 남궁율은 한탄했다.
“아아…… 나 때문에…… 내가 약해서…… 추 소협이…… 강호의 악적을…….”
어찌나 분한지, 이를 꽉 악물고 있는 그녀의 눈에는 눈물마저 고여 있었다.
이윽고, 북궁설의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가 번져간다.
“좋다. 나도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다. 옛다!”
그녀는 남궁율을 눈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러고는 곧장 그녀의 배에 일장을 내질렀다.
퍼-엉!
소수마공 특유의 창백한 기운이 터져 나왔다.
“꺼헉!”
남궁율은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북궁설은 온 힘을 다해 내달렸다
“바로 의원에게 데려간다면 목숨은 건질 게다!”
그녀는 북풍보다도 빠른 속도로 비탈을 타 내려갔다.
그러고는 커다란 바위를 넘어, 절벽 위를 날아, 고사목들의 숲이 있는 쪽으로 쏜살같이 질주했다.
반쯤 잘려 나가 덜렁거리던 오른쪽 발이 완전히 떨어져 나갔지만 지금 그런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추워서 그런가, 통증은 덜하군.’
북궁설은 피를 뿌리면서도 계속 발을 놀려 설원 위를 내달렸다.
그 순간. 그녀는 느꼈다.
“……!?”
어느새부터인가 뒤따라오고 있는 시선을.
자신의 등을 향해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는 창끝을.
“뭣……!?”
뒤를 돌아본 북궁설의 눈에는 추이의 얼굴이 보였다.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 흔들림 없는 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고정되어 있는 것을 본 그녀의 등골에 오싹- 소름이 끼쳐 오른다.
동시에.
휘청-
그녀는 몸의 무게중심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독!?’
왜 지금껏 눈치채지 못했을까.
최소한 아까 오른쪽 발이 절반쯤 떨어져 나갔을 때 눈치챘어야 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전에 어깨에 창을 맞은 뒤로부터 미묘하게 몸의 감각이 둔해지는 느낌이었다.
“묘족의 독이다. 창끝에 발라 뒀지.”
추이는 매화귀창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장강수로채에서 사백정을 죽이고 얻은 묘족의 독이 제 역할을 쏠쏠히 다했다.
“으으으으! 이놈! 무슨 놈의 경공이……!?”
북궁설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가까워지는 추이를 보며 소리쳤다.
다른 것은 몰라도 경공만큼은 초절정의 경지에 닿아 있는 추이다.
그것은 일전에 겨루었던 검왕 남궁천에게도 인정받은 바 있었다.
이윽고, 추이가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다.
한계까지 꼬여 든 근육 섬유가 창날에 힘을 싣는다.
추이가 팔을 앞으로 내뻗는 순간, 전신의 근육들이 폭발하듯 힘을 쥐어짜 냈다.
콰-앙!
모든 내공이 실린 창끝이 앞으로 쏘아져 나간다.
목표는 허공에 떠 있는 북궁설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
북궁설 역시도 하나 남은 팔을 내질렀다.
백색의 음기가 실린 송곳과 비수들이 추이를 향해 날아간다.
허공에서 이루어진 날붙이 교환의 결과는 곧 나왔다.
…퍼퍼퍼퍼퍼퍼퍼퍼퍽!
추이는 전신을 수십 번이나 난자당하긴 했으나 미간, 관자놀이, 눈, 목, 심장, 폐, 간, 사타구니 등의 급소들은 모두 피했다.
반면 북궁설은 딱 한 곳에, 창날을 반 뼘 정도 몸속으로 허용했을 뿐이었다.
쿡-
……바로 미간 사이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