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나락곡 (7)
회귀 전, 추이는 홍공의 행적을 낱낱이 조사했었다.
혹시나 그가 죽기 전에 남긴 불씨들이 있다면 그것을 진화하는 것으로나마 복수를 대신하기 위해서였다.
‘홍공이 나락곡을 접수하려 든 것에는 이유가 있지.’
정확히 말하자면, 홍공은 나락곡이 아니라 나락곡에 몸담고 있던 북궁설을 노린 것에 가까웠다.
그 당시 북궁설은 나락곡의 흑야차 계급에 군림하는 동시에 강시 연구술에 푹 빠져 있었다.
강시를 제작할 때 가장 우선시되는 재료는 인간의 몸.
그것도 육체와 정신이 극한까지 단련되어 있는 몸이어야만 강시 제작에 사용할 수 있다.
일반적인 범인의 육신은 강시로 제련되기도 전에 썩어 문드러진다.
무공을 어느 정도 익힌 자만이 강시로 다시 태어날 확률이 높다.
맨 처음, 북궁설은 살수들이 죽인 대상의 시체를 이용하여 강시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표본이 충분하지 않자, 그녀는 나락곡에서 키워 낸 살수들까지도 재료로 쓰기 시작했다.
정신력과 육체를 극한까지 단련한 살수들은 강시로 만들기에 딱 적합한 재료였다.
홍공은 그런 북궁설에게 접근하여 강시를 만들 때 산의 정기 대신 창귀들을 사용하는 법을 알려 주었고, 북궁설은 인간의 혼백과 산의 정기를 접목시키는 과정을 홍공에게 알려 주어 불완전하던 창귀칭을 보다 완전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둘은 서로의 부족했던 부분들을 채워주며 전략적 동맹을 맺게 되는 것이다.
‘홍공은 인백정이 폭주하던 것을 보며 자신의 창귀칭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무림비사에 밝은 자이니 아마 강시술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것의 구결에서 창귀칭을 보완할 방법을 찾았겠지. 그래서 북궁설을 찾아와 동맹을 제안했을 테고……’
그 뒤는 추이가 알던 원래의 운명과 같다.
홍공은 이름도 없는 변방의 전장에서 죽었고, 그에 분노한 북궁설은 복수를 위해 무림 전체를 피로 물들인다.
그녀는 연인이 당한 수모를 되갚겠다며 무림맹, 사도련, 마교의 고위 인사들을 추렸고, 그들의 선산을 뒤져 조상과 스승의 시체를 도굴했다.
그리고 그 시체로 만든 강시들을 이용하여 전대미문의 혈사를 일으켰다.
조상들의 묘를 도굴당한 것도 모자라 조상들의 유해를 스스로 파괴해야 했던 이들의 충격은 엄청났다.
그 때문에 북궁설은 정파, 사파, 마교를 통틀어 전 무림의 공적으로 낙인찍혔고 오랜 시간을 도주하던 끝에 결국 사도련에 붙잡혀 능지처참당했다.
산산조각 난 그녀의 시신은 이후 먼 오지의 산에 묻혔는데, 굴묘편시(掘墓鞭屍)의 복수를 위해 묘를 파헤치러 온 이들의 행렬만 해도 그 산을 한 바퀴 빙 둘러 감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추이가 강호에 출두했을 때는 그녀가 죽은 지 오랜 세월이 흘러간 뒤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 초상이 그려진 수배 전단은 강호무림 곳곳에 여전히 붙어 나부끼고 있었다.
벌인 짓이 워낙에 천인공노할 짓이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분명 혈교의 좌의정, 홍공의 연인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지금은 아직 그 단계까지 가지는 않은 모양이군.’
추이는 청야차들로 만든 창귀들에게 정보를 뽑아냈다.
그 결과, 홍공과 북궁설은 아직 접선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홍공 역시도 북궁설에게 창귀칭을 안정시키는 방법을 아직 전해 듣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추이가 바라던 바였다.
만약 지금 여기서 북궁설을 죽일 수 있다면 홍공의 성취는 그만큼 늦어지게 될 것이다.
……문제는.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는 상관없다. 죽어라.”
시귀(尸鬼) 북궁설이 상당히 강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절정의 무위를 보유하고 있고, 그와 별개로 암기를 이용하여 사람을 죽이는 기술은 능히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더군다나 북궁설의 곁에는 적야차 한 명과 청야차 한 명이 수행원처럼 서 있었다.
평균적으로 적야차는 절정의 무위에, 청야차는 일류의 무위에 이르러 있기 마련이니 저 둘 역시도 복병이 될 것이다.
이윽고, 북궁설이 두 손을 휘저었다.
콰콰콰콰콰쾅!
주변의 눈이 뒤집히며 요란한 폭음이 들려왔다.
추이는 그 굉음들의 사이로 미세하게 불어오는 바람소리를 들었다.
…퍼퍼퍼퍼퍼퍽!
눈 깜짝할 사이에 여덟 개나 되는 비수가 추이의 전신을 파고들었다.
만약 바람소리를 듣지 못하고 몸을 웅크리지 않았다면 피부를 살짝 베이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쉬익-
추이의 창 역시도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
북궁설은 고개를 외로 꼬았다.
매화귀창은 그녀의 흰 머리카락 몇 가닥만을 잘라 놨을 뿐이었다.
“네놈이구나. 홍공, 그자가 말했던 적색의 천살성이.”
“…….”
추이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홍공이 자신의 존재를 어렴풋하게 눈치채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했다.
그는 밤하늘의 별을 보고 미래를 점치는 기묘한 재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북궁설은 진노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네놈 덕분에 땅속에 묻어 두었던 혈강시들을 못 쓰게 되었다.”
혈강시(血僵尸). 다른 말로 하자면 생강시(生僵尸).
얼굴에 혈색이 돌 정도로 생기가 넘치는 강시를 일컫는다.
이것은 살아생전의 무공을 일부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며 한 구 한 구를 제작하는 데 천문학적인 비용과 시간이 든다.
추이가 말했다.
“산의 정기를 끌어모으던 것이 혈강시를 만들기 위함이었나 보군. 쇠말뚝 때문에 기혈(氣穴)이 끊겼으니 처음부터 다시 해야겠어.”
“땅속에 묻어 숙성시켜 놓았던 혈강시들을 다시 파내는 세월만 오 년이다. 감히 내 시간을 낭비시킨 대가는 무거울 것이야.”
북궁설은 또다시 비수를 들었다.
한 손에 네 개, 총 여덟 개의 비수가 그녀의 흰 손에서 예기를 번뜩인다.
동시에, 북궁설을 호위하고 있던 적야차와 청야차가 앞으로 내달렸다.
“어딜!”
“못 간다!”
견술과 남궁율의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깡! 따-앙!
견술의 개작두와 적야차의 기형검이 맞붙었고, 남궁율의 어장검과 청야차의 곡도가 부딪쳤다.
적야차는 붉은 가면 밑으로 늘어진 흰 수염을 휘날리며 매섭게 밀고 들어왔다.
옆에 있던 젊은 청야차는 적야차와 사용하는 검법이 비슷했는데, 아마도 둘은 사제지간인 것으로 보였다.
“우와, 이 늙은이 한가락 하네?”
“검법이 상당히 매서워요. 살수는 동급의 무인에 비해 반 수 이상 쳐진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큰 오산이었어요.”
견술과 남궁율은 각각 적야차와 청야차를 상대하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한편, 추이와 북궁설의 전투는 한층 더 가열차진다.
북궁설의 비수가 날아들 때마다 추이는 창을 휘둘러 그것을 막아 냈다.
…까앙!
비수가 때리고 간 창대에서 불똥이 튄다.
북궁설의 비수는 피하거나 쳐내기 어려운 사각에서 급소만을 노리고 날아든다.
또한 비수의 손잡이 부근에 극도로 얇은 잠사가 묶여 있어서 북궁설의 손가락 움직임에 따라 궤도를 바꾸기도 했다.
부웅-
북궁설이 한번 손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을 때마다.
…따따따따따따따땅!
여덞 개의 비수가 유성처럼 떨어져 내리며 추이의 창대를 때렸다.
“…….”
비수들이 창대를 긁으며 스쳐 지나가고 난 뒤에는 어김없이 무수한 불똥들이 튀어 시야를 가린다.
추이는 계속해서 뒤로 물러났다.
북궁설의 비수는 마치 여덟 개의 긴 채찍과도 같았다.
그녀는 비수에 묶인 잠사를 휘두르며 추이를 밀어붙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는 잠사를 끊어서 비수를 날려 보냈다.
그것의 움직임에는 딱히 규칙이 없어서 방어하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하지만.
…스팍!
추이는 이마를 긁고 지나가는 비수를 피해 몸을 낮게 숙였다.
그리고 아래에서 위로, 북궁설의 비수가 지나가는 궤적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창을 찔러 넣었다.
“……!”
북궁설의 눈이 커졌다.
사타구니 앞부분부터 시작해서 정수리까지를 관통하는 곡선 궤도의 찌르기.
이것은 일반적인 강호인의 초식이 아니다.
살수의 초식.
오로지 인간을 죽이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극도로 건조하고도 차가운 손속인 것이다.
“너. 살수로구나.”
“…….”
북궁설의 말에 추이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차라락-
북궁설 역시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비수를 회수한 뒤 그것이 채 손에 들어오기도 전에 방향을 뒤집었다.
그때쯤 해서, 추이는 온 힘을 다해 창을 횡으로 휘두르고 있었다.
부우웅!
추이의 창이 몽둥이처럼 휘둘러졌다.
그것은 북궁설의 비수 여덟 자루와 부딪쳤고 마치 날벼락이 떨어지는 듯한 굉음을 내뿜는다.
쩌-억!
주변의 대기가 갈라진다.
내공과 내공이 맞부딪치며 맹렬하게 터져 나가고 있었다.
…퍼펑!
추이의 창이 손에서 튕겨 나갔다.
북궁설의 손가락에 연결되어 있던 잠사들도 죄다 터져 나갔다.
창과 비수들이 모두 주인의 손을 벗어나 눈밭에 떨어졌다.
하지만 추이와 북궁설의 맞대결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이 부를 맞이했다.
스릉-
추이는 곧바로 품에서 두 자루의 송곳을 빼 들었다.
아무런 무늬도 없는 투박한 묵빛의 쇠붙이.
끝은 뾰족하고 길이는 여덟 촌 반, 자루는 한지홀률(旱地㺀律)의 가죽, 허릿심 부근으로.
차악!
북궁설 역시도 품에서 두 자루의 송곳을 빼 들었다.
끝은 뾰족하고 날이 굽어져 있는 일곱 촌 반 짜리, 커다란 독사의 어금니 두 짝.
이윽고, 총 네 자루의 송곳들이 바싹 맞붙어서 남녀의 혀처럼 뒤엉키기 시작했다.
핏-
북궁설의 뺨에 새빨간 혈선이 그어졌고.
퍽!
추이의 목덜미 살 한꼬집이 떨어져 나갔다.
몇 수의 살초가 오고 간 뒤, 북궁설이 말했다.
“살초에 군더더기가 없어. 많이 해 본 솜씨야.”
“…….”
“나락 출신인 것은 확실하고, 어느 골짜기에서 배웠지? 설마 나락노야(奈落老爺)의 직계 제자인가?”
“…….”
추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흘끗 눈을 돌려 옆쪽의 전투를 바라봤을 뿐이다.
챙! 채앵! 깡! 까가가각!
견술과 남궁율 역시 적야차와 청야차를 상대로 잘 버티고 있었다.
견술은 조금씩 조금씩 적야차를 밀어내고 있는 중이었고, 남궁율은 청야차 하나를 상대로 꽤 고전하는 눈치다.
그때.
“……. ……. …….”
북궁설의 눈이 희번뜩 뒤집어졌다.
곧이어,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제제자 제제자 천혼도우 제여자 제여자 지후도우도 신인천주 임조화상고령천영주전장생노도학삼층삼계사신고우 삼층삼계현신도우(諸弟子 諸弟子 天混禱于 諸女子諸女子 地后禱又禱 新人天主 荏造化尙告靈天靈主前長生勞禱學三層三階司神告于 三層三階玄神禱于)…….”
그러자 곧바로 이변이 벌어졌다.
…우지직!
쑥대밭이 된 설원 아래의 지면에서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목내이(木乃伊)처럼 바싹 말라 있는 손.
뼈에 가죽만 앙상한 그 손은 이내 미친 듯이 펄떡거리더니 점차 지면 위로 올라왔다.
이윽고, 뼈와 가죽만 남아 버린 인간들이 설원 밑의 지저에서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강시. 반쯤 만들어지다 만.
불쾌한 외형을 한 목내이들 수십 구가 검붉은 몸뚱이를 끄집어 낸다.
그리고 그것을 본 견술과 남궁율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어!? 저 녀석들! 옛날에 내 산채에 있었던 백두 놈들인데!?”
“저것은 전 세대 자월특작조들의 의복! 어째서 여기에!?”
강시가 되다 만 목내이들은 가지각색의 옷을 입고 마찬가지로 가지각색의 병장기를 들고 있었다.
하나같이들 오래 전에 죽었거나, 아니면 행방불명되었던 무림의 유명인사들이었다.
“…….”
추이는 목내이들에게 들러붙어 움직이는 검붉은 기운을 주시했다.
미약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분명 창귀들이었다.
“저것들까지 마저 싹 폐기해야겠군.”
홍공의 실험용 쥐는 한 마리면 족하다.
바로 자신 말이다.
이윽고, 창을 든 추이의 양옆으로 견술과 남궁율이 섰다.
그들은 분노로 인해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야, 저년은 삼분의 일 짜리가 아니라 아주 진짜배기 십 할 무림공적인데?”
“그러게요. 이걸 알면 정, 사, 마가 바로 대통합될 텐데요.”
추이, 견술, 남궁율.
그리고 쇠말뚝에 의해 말라죽기 직전에 땅 밖으로 기어 나온 미완성 강시들.
그 검붉은 주검들의 앞에 선 북궁설이 추이를 향해 선언했다.
“네놈들도 강시로 만들어 주마.”
“네가 창귀가 되는 쪽이 더 빠를 것이다.”
몸을 원하는 자와 혼백을 원하는 자.
시귀(尸鬼)와 창귀(槍鬼).
바야흐로 쌍귀의 격돌이었다.
창귀무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