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나락곡 (6)
휘이이이이이잉……
드넓은 설원에 눈보라가 몰아친다.
죄수들이 최후의 작업을 시작했다.
“세워! 세워! 기울어졌다!”
“저쪽 밧줄 좀 더 당겨 봐!”
“어어!? 쓰러진다! 으아아아아!”
“줄 제대로 잡으라고 이 미친 새끼야!”
그들은 쇠말뚝을 설원 이곳저곳에 박아 넣고 있었다.
따-앙! 땅! 퍼억!
죄수들은 빙판을 쪼갠 뒤에 그 위에 말뚝을 밧줄로 묶어서 고정했고, 임시로 쌓은 축대 위에 올라가 망치를 내리쳤다.
쩍- 쩌적! 우지지지직!
커다란 망치가 번갈아 내리찍힐 때마다 쇠말뚝이 빙판을 쪼개고 깊숙이 박혀 든다.
그 수는 어느덧 기백여 개.
그동안 죄수들이 죽을 고생을 해 가며 제작한 수많은 쇠말뚝들이 설원 곳곳에 꽂혀 마치 미로와도 같은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남궁율이 물었다.
“추 소협. 이 작업들은 왜 하시는 건가요?”
“산의 정기를 끊기 위함이다.”
추이는 짧게 대답했다.
그 순간, 옆에 있던 견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것 봐.”
“?”
남궁율이 견술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
이내 그녀 역시도 토끼눈을 떴다.
설원 위에 나 있던 눈 녹은 길들이 다시 얼음으로 뒤덮여 가고 있었다.
쩌저저저저적……
두껍게 쌓인 눈 사이로 올라오고 있던 지열이 끊겼다.
녹아 있던 땅이 빠른 속도로 얼어붙었고 돋아나 있던 새싹과 꽃도 죄다 말라죽었다.
견술과 남궁율은 오싹한 소름에 몸을 떨었다.
“쇠말뚝을 박아서 산의 정기를 끊을 수가 있다고?”
“정확히는 정기가 흐르는 길목을 차단하는 것 같아요. 퉁소의 관(管)에 구멍을 뚫어서 소리가 새게 만드는 것처럼.”
그 말에 추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산의 정기가 지나가는 길을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지만…… 그것을 망치는 것은 손쉽지. 아무 데나 구멍을 뚫기만 하면 되니까.”
마치 좋은 소리가 나는 퉁소를 제작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것을 망치는 것은 쉬운 것처럼 말이다.
그 말을 들은 견술은 입가에 짓궂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동안 산의 정기를 끌어모으고 있던 놈은 아마 홧병 나 뒈지겠군. 그 개고생을 해 가면서 정기가 흐르는 길을 깔아 뒀는데 말이야.”
“근데 뭘 위해서 산의 정기를 모으고 있었을까요?”
남궁율이 고개를 갸웃했다.
견술 역시도 어깨를 으쓱한다.
“난들 알아? 그걸로 뭐 강시들이라도 만들고 있었겠지. 설산의 정기니까 차가울 것 아냐. 강시도 얼어붙은 시체로 만드는 거고.”
“만약 그렇다면…… 추 소협은 정말로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 내신 것인지도 몰라요. 강시 제작은 그 제작법이 적힌 비급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무림 공적이 될 만큼 위험한 것이니, 그것을 막아 냈다는 것은 전 무림을 구한 것과도 같지요.”
“켁- 또 예쁜이 칭찬이야? 짝사랑이 아주 중증이시구만.”
남궁율의 말에 견술에 혀를 빼물며 옆구리를 긁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추이를 바라보는 남궁율의 시선은 천천히, 경이로움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 * *
한편.
‘실컷 그렇게 물고 빨고 해라. 어차피 네놈들은 곧 뒈지니까.’
쇠말뚝을 박고 있던 공손호는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걸고 있었다.
그는 말뚝을 박기 위해 설치해 놓은 축대 위에 서서 저 먼 산봉우리를 바라보았다.
…우직! …우직! …우직!
말뚝을 깊게 박아 넣을수록 저 멀리, 산봉우리 위에 있는 바위들이 들썩이는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찍이 위에 있었던 바위가 말뚝을 다 박아 넣었을 때쯤 미세하게 기울어져 있는 것도 보였다.
공손호는 확신했다.
‘이 쇠말뚝을 다 박을 때쯤 해서 눈사태가 일어날 것이다.’
쇠말뚝 하나가 박힐 때마다 위쪽 산봉우리의 지반이 점점 불안해지고 있다.
이대로라면 분명 머지않아 눈사태가 일어나서 이쪽을 싹 쓸어버리게 될 것이다.
공손호는 자신의 패거리를 불렀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앞으로의 일을 지시했다.
“이 쇠말뚝들을 다 박을 필요도 없다. 보니까 위쪽의 지반이 극도로 불안정해졌어. 이대로라면 우리끼리 올라가서 발을 몇 번 구르는 것만으로도 바로 무너질 거다.”
이제 슬슬 빠질 때였다.
공손호는 다른 죄수들마저 배신한 뒤 산봉우리를 올라가 눈사태를 일으킬 생각이었다.
“아주 조금의 진동이면 돼. 산봉우리 위에서의 눈뭉치 하나가 아래에서는 거대한 눈덩어리가 되는 것처럼 말이야. 다른 쓰레기들이야 알 바냐? 같이 쓸려가 뒈지라지.”
이걸로 형과 동생의 원수를 갚는다.
공손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자, 출발하…… 응?”
하지만 그는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퍽!
왜냐하면 그가 말을 걸고 있던 동료의 얼굴이 가로로 쪼개져 날아갔기 때문이다.
툭-
죄수의 아래턱 위부터가 찢어져 날아가 눈밭 위에 떨어졌다.
“?”
“?”
“?”
공손호를 비롯한 죄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머리 윗부분이 날아간 시체 앞에 서 있는 것은 온몸을 붕대로 감은 장신의 남자였다.
얼굴에는 푸른색 야차 가면을 쓰고 있었다.
“……어?”
공손호가 막 비현실에서 깨어나려 할 때.
사사사사사사사삭-
죄수들의 앞으로 푸른 야차 가면의 살수들이 등장했다.
나락곡의 청야차들. 그들이 이곳에 당도한 것이다.
이윽고, 청색 가면의 야차들 너머로 붉은 가면의 야차들 몇몇이 내려섰다.
그 수는 총 셋이었다.
맨 앞에 있던 붉은 가면의 야차가 탁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산의 정기들이 별안간 다 끊어졌다 했더니…… 네놈들이었구나.”
적야차. 가면 속으로 보이는 그의 눈에 시뻘건 핏발이 섰다.
“다 죽여라.”
그 말을 들은 청야차들이 곧바로 손을 쓰기 시작했다.
퍼퍼퍼퍼퍼퍽!
죄수들은 그때까지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자욱한 피보라가 시야에 들어오고 나서야 그들은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아! 괴물이다!”
“살수들이 나타났다아아아아!”
“추, 추이님! 추이께서는 어디에!?”
공손호를 비롯한 죄수들은 청야차들을 피해 도망다니며 추이를 찾았다.
하지만.
“어!?”
공손호가 추이를 발견했을 때, 그는 이미 저 멀리 산봉우리의 중턱에 도착해 있었다.
이윽고. 추이는 아래쪽에 있는 죄수들을 내려다보며 한마디 했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
이것이 두 번째 반란에 대한 답례였다.
공손호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의 눈에는 추이가 막 발을 들어 올리는 장면이 천천히 아로새겨지고 있었다.
이윽고.
…쿵!
추이가 발을 굴렀다.
내공이 실린 발바닥이 주변에 이중, 삼중, 사중, 오중, 육중, 칠중, 팔중, 구중, 십중의 파문을 만들며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주변의 눈들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나 싶더니 이내 엄청난 양의 물로 변해 솟구쳐 오른다.
그 밑에 깔려 있던 흙과 바위, 통나무들이 모조리 뽑혀 나오며 거대한 탁류(濁流)를 만들어 냈다.
콰르르르르르르르릉!
가까이서 본 눈사태는 의외로 하얗지 않다.
혼탁한 갈색의 해일이 엄청난 기세로 산비탈을 쓸어 내려갔다.
“으-아아아아아!”
죄수들은 자신들을 덮쳐오는 눈의 홍수를 보며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나락곡의 살수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콱!
죄수도, 살수도, 모두 눈의 홍수에 파묻혀 사라져 간다.
부딪치고, 찢어지고, 얼어붙고, 이 일련의 과정들을 거치면 모두가 으깨진 냉동육이 되는 공평한 결과만이 도출될 뿐.
다만 차이가 있다면, 죄수들은 비명을 지르며 죽고 살수들은 침묵을 지킨 채 죽는다는 점 하나 뿐이다.
“……! ……! ……!”
방금 전까지 설원 전체를 지배하고 있던 적야차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세 명의 적야차들은 다른 청야차들의 몸을 밟고 한껏 위로 뛰어올랐으나 결국 쏟아지는 자갈과 나무토막, 눈과 흙의 해일을 피하지 못하고 휩쓸려 갔다.
마지막까지 도망치던 최후의 적야차 역시도 결국 탁류에 휘말려 들었다.
우득- 뚝! 뿌직!
적색 야차 가면이 부서지며 그 안에서 노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마저도 금방 바위에 맞아 납작하게 으깨져 버린다.
촤아아아아아아아아악-
적야차 정도 되는 인물도 삽시간에 피떡이 되어 절명하는데 청야차들이나 죄수들이 살아날 리 만무했다.
…퍽!
얼음덩어리에 맞은 공손호의 두개골이 터져 나간다.
그는 실 끊어진 연처럼 탁류에 휘말려 들었고 이내 사지가 찢어진 채 각기 다른 방향으로 쓸려 갔다.
모든 살수와 죄수들이 눈에 파묻혀 쓸려 갔고 이내 평원 아래의 절벽 아래로 사라졌다.
쿠구구구구구……
온통 더러워진 설원 위에는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 * *
다시금 눈이 내린다.
펑펑 쏟아져 내리는 눈이 더러워진 설원을 얇게 덮었다.
사박- 사박- 사박-
조용하고 깨끗하진 벌판 위로 추이가 내려섰다.
견술과 남궁율이 입을 반쯤 벌렸다.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 같네.”
“풍경이 아까랑 똑같아요. 거짓말처럼…….”
방금 전까지 이곳에서 있었던 일이 모두 거짓이라도 되는 듯하다.
어느 누가 이곳을 불과 반 시진 전에 백 수십 명이 몰살당한 곳이라고 생각할까.
한편. 추이는 설원을 가만히 살펴보고 있었다.
“…….”
산의 정기는 끊어졌고, 살수들은 몰살당했다.
설산의 정기를 뽑아다가 강시를 만드는 것은 이제 불가능할 것이다.
작업을 다시 원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적어도 수십 년은 필요하리라.
공든 탑은 무너지지 않는다지만, 사실 공든 탑만큼 쉽게 무너지는 것이 또 없다.
세상일이라는 것이 다 그런 법 아니겠나.
“공들여 쌓은 탑이 무너졌으니, 이제 화가 나는 놈이 있겠지.”
강시를 제조해서 무언가를 하려던 놈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필시 매우 화가 나 있을 테고.
“화가 났으니 뛰쳐나올 것이다.”
추이가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는 즉시, 정확히.
…콰쾅!
저 멀리 떨어져 있던 동굴 입구에서 커다란 폭음이 들려왔다.
콰콰콰콰콰콰콰!
동굴 입구에서부터 이곳까지, 쌓여있던 눈들이 위로 솟구쳐 올랐다.
마치 수면 밑으로 거대한 용이 돌진하는 듯한 광경이었다.
이윽고, 추이의 앞으로 누군가가 떨어져 내렸다.
…탁!
체구로 보아 여자로 짐작된다.
그녀는 품이 넓은 흰 소복을 입고 있었고 긴 백발을 눈보라에 아무렇게나 내맡기고 있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 야차 가면은 진한 흑색이었다.
나락곡의 흑야차.
곡주(谷主)인 나락노야(奈落老爺)를 제외하면 가장 높은 계급에 있는 살수가 등장했다.
그리고 추이는 그녀의 맨 얼굴과 본명을 이미 알고 있었다.
“간만이구나, 북궁설(北宮蔎).”
“……!”
추이의 호명을 들은 흑야차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윽고, 그녀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를 아느냐?”
“…….”
알다마다.
추이는 회귀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시귀(尸鬼) 북궁설.
나락곡의 살수들을 대거 강시로 만든 죄로 나락곡에게 쫓기게 되는 흑야차.
그리고 그때부터 혈교의 좌의정으로 통하게 되었던 여자.
하지만 추이가 가장 주목했던 점은 그것들이 아니었다.
‘……홍공의 연인(戀人).’
이것이 추이가 그녀를 찾아온 진짜 이유였다.
창귀무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