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귀무쌍-106화 (106/110)

106화 나락곡 (5)

이것은 오래 전의 기억이다.

그는 가끔은 강호인이었고, 가끔은 군인이었고, 가끔은 살수였고, 언제나 고아였다.

‘숨을 죽여라.’

‘바람을 등지지 마라.’

‘그림자는 그림자에 묻어라.’

‘숨을 때는 잘 보이는 곳에 숨어라.’

추이는 살수 훈련을 받던 과거를 회상했다.

천산산맥의 입구에서 오자운과 헤어진 뒤, 달리 갈 곳이 없던 추이는 군영으로 되돌아갔으나 그곳에서도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결국 모종의 사건에 휘말려 퇴역한 추이는 뒤늦게나마 오자운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추이는 그 소문을 듣자마자 곧바로 화산파를 찾아갔다.

하지만 미숙한 창귀칭과 어설픈 창술로는 오자운의 원수를 갚을 수 없었다.

추이는 절강(浙江)을 찾았다.

오자운의 시체가 버려졌던 강물을 바라보며, 추이는 다짐했다.

화산파의 모든 도사들을 죽여 버리겠다고.

이후 추이는 살문(殺門)에 입적했다.

시작은 우연적이고 초라했다.

추이는 암행을 나서던 도중 한 살수와 맞닥트렸고, 그를 죽였다.

공교롭게도 추이가 죽인 이는 나락곡의 살수였다.

견습에서 황야차로의 승급을 앞두고 있었던 그는 그날 밤 이후부터 추이의 창귀가 되었고, 자신이 알고 있던 나락곡에 대한 모든 정보들을 추이에게 넘겼다.

추이는 그 정보들을 이용해 나락곡의 지부를 찾았다.

항시 가면을 쓰고 다니던 살수들은 추이의 정체를 의심하지 않았다.

추이는 이후 나락곡의 견습 살수들 몇을 더 죽였고, 그들에게서 입수한 정보를 토대로 나락곡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절강의 서산(胥山)에 피어난 붉은 매화들이 몇 번인가 피고 질 무렵.

나락곡의 견습살수로 시작했던 추이는 어느덧 나락곡의 적야차 계급까지 올라가 있었다.

추이는 평범한 창 말고 송곳이나 마름쇠, 망치, 독, 잠사, 기형창 등을 쓰는 방법을 완벽하게 체득했다.

그동안 섬서성의 수많은 부패 관료, 무인들을 죽이며 나름대로 정보를 모아 왔던 추이는 오자운의 죽음에 대한 전말 역시도 모두 알게 되었다.

이윽고, 때가 되었다.

추이는 붉은 야차 가면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창 한 자루를 쥔 채 나락곡을 떠나 화산파를 찾아갔다.

그때부터였다. 추이의 별호가 창귀(槍鬼)가 되었던 것이.

*       *       *

“…….”

추이는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청야차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락곡의 살수들은 가면의 색깔로 계급을 구분한다.

견습은 민무늬의 백색 가면, 이후 황야차, 청야차, 적야차, 흑야차의 순으로 계급이 높아진다.

추이가 나락곡에 몸담았을 당시, 나락곡의 위상은 크게 쪼그라든 상태였다.

한때 모든 강호무림을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던 나락곡이 그처럼 쇠퇴하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홍공 때문이었다.

홍공은 혈겁을 일으킬 당시 나락곡과 손을 잡고 있었는데, 이때 홍공이 남겨 놓고 간 분란의 씨앗이 계속해서 무림에 풍파를 일으킨 것이다.

즉. 홍공은 변방에서 죽어 사라진 이후에도 나락곡을 조종하여 무림에 크고 작은 여러 혈사들을 야기했던 셈.

……한편.

추이가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을 동안 남궁율과 견술은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방금 전에 동굴로 돌아간 청야차들도 강시일까요?”

“모르지. 살수인지 강시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아니, 나락곡의 살수들은 왜 다 저 모양인 거야?”

“추 소협의 말씀을 들어 보면 나락곡은 평범한 살수 조직인 것 같았어요. 우리가 만났던 살수들이 특이했던 거지.”

“돈만 주면 염라대왕 목도 따다 준다는 놈들을 평범하다고 할 수 있나?”

“어쨌든 사람이긴 하잖아요. 강시가 아니라.”

“하긴. 이제는 강시 아니면 다 평범해 보이기는 한다.”

“아마 나락곡 내부에서 뭔가를 꾸미고 있나 봐요. 살수들을 강시로 만들려고 하는 건…… 곡주의 생각일까요?”

“그것도 모르지. 간부들 중 하나가 미쳐서 독자적으로 꾸미고 있는 계획일지도?”

바로 그 순간.

…바스락!

뒤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오로지 추이의 귀에만 들려온 것이었다.

패액-

추이의 창이 독사처럼 뻗어 나가 후면을 노렸다.

어느새 다가온 청야차 세 명이 견술과 남궁율의 뒤로 송곳을 찔러 넣고 있었다.

퍼퍼퍽!

그들의 송곳보다 추이의 창이 반 보 빨랐다.

날카로운 창날이 허공에 핏빛 호를 그렸고, 목젖이 한 치 조금 안 되게 잘려 나간 세 구의 시체가 눈밭에 쓰러졌다.

그들은 강시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추이는 짤막하게 말했다.

“옷과 가면, 벗겨 입어라.”

그 말에 견술과 남궁율은 군말 없이 손을 뻗어 시체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추이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대강이나마 눈치챘기 때문이다.

*       *       *

동굴 속, 서세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린다.

“나는…….”

그는 겁을 잔뜩 집어먹은 어조로, 그러나 또렷한 발음으로 말했다.

“못 도와주겠다.”

공손호를 비롯한 죄수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뜻밖의 말이었는지라 화도 안 난다.

그저 궁금할 따름이었다.

“뭐야? 왜? 왜 못 도와주겠다는 거야? 어려워? 그냥 쇠말뚝 주조 과정에 아무 문제 없다고만 하면 되잖아. 실제로 아무 문제 없을 거고. 그게 아니면, 내 계획이 현실성이 없을 것 같아서 그래?”

공손호는 답답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진짜야! 진짜 확실해! 추이, 그놈의 무공이 얼마나 고강하든지 간에 그건 상관없어! 내가 똑똑히 봤다니까? 저 산봉우리 위에 지반이 극도로 불안정한 걸 말이야. 거기에 몇 명만 올라가서 발을 구르면 바로 눈사태야! 아마 산기슭까지 통째로 쓸어버릴걸? 거기에 휘말리면 제아무리 추이 놈이라고 해도 저세상행이라고!”

그러자 공손호를 따르는 다른 되수들도 말을 이었다.

“나도 보긴 봤어. 거기 진짜 위태롭긴 하더라.”

“어제도 눈사태 일어나던데?”

“나는 무조건 한다! 추이, 그 새끼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견술 그 얄미운 새끼가 더 열 받아.”

“남궁율이랬던가? 그년은 눈에 묻어 버리기 좀 아깝네. 살려서 갖고 놀 수 있으면 좋은데…… 크흐흐-”

하지만 서세치는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안 해.”

“그러니까. 왜냐고.”

공손호가 서세치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서세치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제 할 말은 다 했다.

“추, 추이 천두님은 나의 은인이시니까…….”

“뭐? 은인? 하, 이 새끼 또 이러네.”

공손호는 기가 막히다는 듯 웃어 댔다.

주변에 있는 죄수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어이- 염소수염. 너 아주 노예근성이 뼛속까지 사무쳤구나. 참게 구운 거나 돼지고기 뒷다리 같은 걸 은자 수십만 냥에 파는 게 뭐가 은혜냐? 너는 지금 세뇌당한 거라고!”

“세뇌된 것이 아니야.”

하지만 서세치의 표정은 진지했다.

“여기까지 수레를 끌고 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뭐?”

“수레를 끄는 나에게 양민들이 모여들어서 돌을 던지고, 침을 뱉을 때마다 나 자신을 돌아보았어.”

“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내가 횡령했던 회계장부 속의 숫자 하나하나가 사실 무고한 이들의 피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서세치는 바들바들 떨면서도 끝까지 말을 이어 나갔다.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해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가족들이라는 것은 결국 찬바람 한번 불면 떠날 존재들이었어. 돈도 없고, 가족도 없는 지금, 여기 남은 것은 초라한 중년의 몸뚱이 하나뿐이다. 어쩌면 똥개나 비루먹은 말보다도 못한 존재겠지.”

공손호와 죄수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서로의 얼굴을 쳐다본다.

서세치는 쐐기를 박았다.

“그래서 수레를 끄는 동안 계속해서 반성했다. 이렇게 해서 그간 내가 남들에게 끼친 피해의 만분지일이라도 갚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감내하겠다고.”

그의 목소리에서는 비장한 결의 같은 것이 느껴지고 있었다.

“추이 천두님은 내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게끔, 바뀌고 속죄할 수 있게끔 도와준 은인이다. 그런 분을 배신할 수는 없어.”

서세치는 거정 공제환이 의적으로 이름을 날릴 때 산채에 합류했던 이였다.

새삼 젊었을 때의 의기가 나름대로 되살아난 것인지, 그의 눈은 때아닌 총기(聰氣)로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새끼가 아까부터 뭐라는 거야?”

공손호를 비롯한 나머지 죄수들은 서세치의 말에 조금도 공감하지 못했다.

…퍽!

서세치의 얼굴로 주먹이 날아들었다.

공손호의 주먹질이 시작되자마자 다른 죄수들 역시도 서세치를 짓밟았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추이 새끼 밑에 가 붙겠다는 거 아니냐고!”

“죽여 버려! 저 첩자 끄나풀 새끼! 처음부터 좆같았다고!”

“쇳물로 집어 던지자! 아예 쇠말뚝으로 만들어 주지!”

죄수들의 우악스러운 손길이 서세치를 붙잡았다.

몸 전체가 피투성이, 멍투성이가 된 서세치는 만신창이가 된 채로 죄수들의 손에 이끌려 갔다.

그가 막 부글부글 끓는 쇳물 위로 내던져지려는 순간.

“헉!? 오, 온다! 추이 놈이 와!”

저 앞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보초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서세치를 쇳물로 집어 던지려던 죄수들이 별안간 정신을 차렸다.

“이, 일단 내려놔라! 저놈을 죽였다간 바로 의심받는다!”

공손호는 서세치의 수염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리고 뾰족한 쇳조각을 든 채 그의 등허리를 쿡 찔렀다.

“말 잘해라. 불었다간, 알지?”

“…….”

서세치는 몸을 바들바들 떨 뿐 대답이 없다.

그 시점에서, 청야차 복장을 한 추이가 폐광 속으로 들어왔다.

“처, 천두님…….”

서세치가 추이를 부르며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죄수들의 시선이 죄다 서세치를 향한다.

그때. 추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작업 종료다.”

이윽고, 추이는 서세치를 향해 물었다.

“말뚝은 얼마나 만들었지?”

그러자 옆에 있던 공손호가 얼른 대답했다.

“천 개, 딱 맞췄습니다.”

“그렇군. 그것들을 가지고 밖으로 나와라. 그것만 하면 너희들의 임무는 모두 끝이다.”

추이의 말에 죄수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임무가 끝나면 죄도 더 이상 묻지 않겠다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손호의 눈에는 독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준비한 대로만 하면 된다. 마지막에 화려한 복수를 하고 가는 거야.”

죄수들이 공손호의 뒤를 따른다.

이윽고, 죄수들이 쇠말뚝을 나르기 시작했다.

한편, 서세치는 떨리는 목소리로 추이를 불렀다.

“추, 추이 천두님…….”

하지만 추이는 서세치의 말을 듣지 않았다.

다만.

“너.”

서세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짧게 한마디를 남겼을 뿐이다.

“오늘 작업에서 열외한다. 그리고 지금 당장 맞은편 봉우리 위로 올라가라.”

“……?”

다른 죄수들이 쇠말뚝을 밖으로 나르는 동안 서세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을 뿐이다.

그런 서세치를 스쳐 지나가며, 추이가 짧게 말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살 확률이 있을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추이는 죄수들이 나르고 있는 쇠말뚝들의 행렬을 따라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리고 홀로 남겨진 서세치는 직감했다.

……이것은 추이가 자신에게만 내려 준 동앗줄임을.

창귀무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