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나락곡 (3)
눈보라, 얼어붙은 땅, 단단하게 굳은 눈, 뾰족한 고드름만이 보이는 세계.
죄수들이 끄는 마차는 어느새 파촉설산을 오르고 있었다.
“…….”
“…….”
“…….”
서세치를 비롯한 모든 이들은 깨달았다.
횡령금을 모조리 토해 낸 이상 추이가 굳이 자신들을 더 살려 놓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더군다나 얼마 전에 반란이라는 불미스러운 일까지 있었지 않은가.
그래서 그들은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온 힘을 다해 마차를 끌었다.
그것이 자신들의 유일한 존재 가치였으니까.
“흐응…… 좌절과 절망만이 감도는 이 우울한 분위기, 나는 좋아. 살풍경한 설원의 정경과도 잘 어울려.”
견술은 채찍을 들고 죄수들을 부리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두꺼운 털옷을 입은 채 따듯한 차를 마시며 낄낄거리는 그를 보며 남궁율은 미간을 찡그렸다.
“죄수 분들에게 좀 잘 대해 주세요. 어차피 은닉 자산들도 다 환수했잖아요. 전에 서세치라는 분은 사비로 금창약을 사서 제게 주셨어요. 그분, 사정을 들어 보니 조금 딱하던데…….”
남궁율이 자신을 비호해 주자 서세치의 두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 맺혔다.
하지만 견술은 토할 것 같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착한 척 좀 하지 마 얘. 저것들이 마차를 끌어 주니까 우리가 편하게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거야. 그래야 나중에 전투가 벌어졌을 때 최대한 힘을 낼 수 있는 거고. 어휴, 난 이래서 정도 놈들이 싫어. 위에 있으면서 맨날 아래를 위하는 척 척 척, 그놈의 척. 지들보고 아래로 내려오라고 하면 질색팔색을 할 놈들이 맨날 아랫것들을 위하는 척하지.”
“그렇다면 저는 지금부터라도 마차에서 내려서 걸어가겠어요.”
“마음대로 해. 그런다고 해서 죄수 새끼들이 너한테 고마워할 것 같아? 저것들이 돈 토해 냈다고 해서 착해졌을 것 같애? 그거 착각이야~ 단순히 돈 토해 내서 착해졌을 놈들이면 애초에 사람 죽이고, 아이 유괴하고, 부녀자 겁간하는 짓을 안 했겠지. 아마 저놈들 중에는 저번 반란에 가담할까 말까 하다가 무서워서 못 했던 놈들이 태반일걸?”
견술은 남궁율을 향해 빈정거렸다.
그리고 앞에서 마차를 끄는 죄수들을 향해 말을 이었다.
“너희들 중에 아직 딴생각 품고 있는 놈들이 있다는 거 다 안다~ 충고하는데, 더 이상 허튼짓은 하지 말라고. 목숨은 패리가 주고도 못 사, 알지?”
“…….”
서세치의 옆에서 수레를 끌던 몇몇 죄수들이 움찔하며 고개를 숙인다.
바로 그때.
“이쪽이다.”
앞서서 말을 몰아 나갔던 추이가 되돌아왔다.
얼음벌판 위에서도 능숙하게 말을 다루는 추이를 보며 견술이 휘파람을 불었다.
“예쁜이. 빙판에서 말 모는 솜씨가 수준급인데?”
“군에 있었으니까.”
“군영에서는 얼음 위에서 말 모는 법도 가르쳐 줘?”
“변방의 최전선은 춥다.”
짧게 대답하는 추이.
그런 추이를 보고 있던 남궁율의 볼이 다시 한번 불그스름해졌다.
등천학관에 있을 때 그녀는 수많은 귀공자들의 구애를 받았었다.
그 귀공자들은 하나같이 크고 멋진 명마를 타고 와 자신의 부와 뒷배를 뽐냈다.
남궁율은 남자들의 그런 허세와 겉멋을 경멸했고 그에 따라 기마술에도 큰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방금 전, 추이가 말을 다루는 것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말을 잘 모는 게…… 생각보다 멋있는 거였구나.’
뭐, 아무튼.
추이는 죄수들을 이끌고 눈보라 몰아치는 벌판을 지나갔다.
야트막한 봉우리를 넘어, 얼어붙은 호수를 지나, 고사목들의 숲을 통과하자 이내 커다란 동굴 하나가 보였다.
입구에는 오래된 팻말 하나가 부러져 있었다.
폐광(廢鑛).
잿가루로 삐뚤빼뚤하게 적어 놓은 글씨.
추이와 죄수들은 팻말을 지나 동굴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화르륵-
선두에 있던 서세치가 횃불을 밝혔다.
이윽고, 폐광의 풍경이 훤히 드러난다.
석탄과 철광석이 훤히 드러나 있는 벽, 썩어서 무너진 축대, 버려져 있는 각종 채굴 도구들.
그 외, 오래된 밥그릇이나 이불, 책, 신발, 옷가지 등의 쓰레기들이 먼지 쌓인 채 방치되어 있었다.
“히익! 여기 웬 해, 해골이!?”
서세치는 갱도 한쪽에 쓰러진 채 백골이 되어 있는 시체를 보며 기겁했다.
전체적으로, 이곳은 아주 오래 전에 채굴이 중단된 폐광처럼 보였다.
‘……기억 속 그대로군.’
수십 년 동안 버려져 있었던 이곳을 추이는 추억에 잠겨 돌아보았다.
한때 고된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던 시절, 우연히 발견한 이곳에서 상처를 치료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견술과 남궁율은 의아해하는 기색이었다.
“예쁜아. 이런 데는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아니, 애초에 왜 온 거고?”
“신기한 폐광이네요. 안쪽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더워져요. 미묘하게 내부가 환한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추이는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의문점들은 곧 풀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곳에다가 짐을 풀어라.”
그 말을 들은 죄수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서세치가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
“으아아! 만세! 드디어 고된 여정이 끝난 것입니까!?”
죄수들의 눈에는 감격의 눈물이 맺힌다.
그 머나먼 혹한의 땅까지 엄청난 무게의 마차들을 끌고 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
그런 죄수들을 향해 추이는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무슨 소리냐. 지금까지는 그냥 목적지를 향해 왔을 뿐이고.”
멍한 표정을 짓는 죄수들의 귓가에 추이의 말이 뒤이어졌다.
“너희들의 진짜 임무는 아직 시작도 안 됐다.”
* * *
동굴 내부의 구조는 특이했다.
개미굴처럼 구불구불 뚫린 갱도들을 거침없이 걸어가던 추이.
그 뒤를 따르던 죄수들은 이내 놀라운 광경 앞에 멈춰 섰다.
부글부글부글부글……
까마득한 지하 속에는 찬란한 빛과 함께 고열이 끓는다.
지표면에 갈라진 거대한 틈 사이로 시뻘건 용암이 흐르고 있었다.
눈이 멀 듯한 빛의 아지랑이가 일렁거렸고 매캐한 연기들이 구름처럼 피어올라 천장의 구멍을 통해 빨려 들어간다.
…퐁당!
천장에 있던 종유석에서 떨어진 액체가 용암 속으로 떨어지며 파문을 만들었다.
이슬이나 지하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종유석 그 자체가 흐물흐물 녹아서 떨어져 내리는 현상이었다.
“세상에…….”
견술과 남궁율, 죄수들의 반응은 똑같았다.
설마 차디찬 동토 아래에 이토록 엄청난 비경(祕境)이 파묻혀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곳은 지층 아래에 갇혀 있던 지열이 올라오는 곳이다. 바위조차 녹아내릴 정도지.”
추이의 목소리에 압도된 죄수들은 입을 다문 채 말이 없다.
이윽고, 추이는 죄수들을 이곳까지 끌고 온 진짜 목적을 밝혔다.
“너희들은 지금부터 이곳의 철광석을 캐서 제련해라. 만들 것이 있다.”
추이는 석탄을 들어 벽에다가 무언가를 그렸다.
끝이 뾰족하고 반대편은 뭉툭한 모양의 긴 작대기.
일견 보기에는 평범한 못이나 말뚝처럼 보였다.
“이런 쇠말뚝을 만들어야 한다.”
그 뒤는 죄수들이 해야 할 작업들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철광석을 채굴해라. 그리고 그것을 용암의 불길에 녹여라. 그 뒤에는 거푸집에 붓고 설산의 눈을 이용해서 굳히면 된다.”
추이의 명령에 죄수들은 아연실색했다.
서세치가 슬그머니 손을 들고 질문을 했다.
“저…… 천두님. 외람되지만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저희는 철을 제련하고 뭐 그런 것은 잘 모르는데요……. 정제조차 제대로 못한 똥철을 캐다가 쇠말뚝을 만들었다가는 조잡해서 영 못 써먹으실 겁니다. 시간이 지나면 금방 부식되어 버릴 게 분명하니…….”
“대충 캐서, 대충 녹이고, 대충 굳혀라. 딱히 쇠말뚝의 질이 좋을 필요는 없다.”
오래 쓸 수 있는 튼튼한 쇠말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비전문가가 어설픈 솜씨로 만든 것도 딱히 상관없는 모양.
추이가 명령을 내렸다.
“이제부터 조를 다섯 개로 나누겠다. 일 조는 철광석을 캔다.이 조는 장작을 구해온다. 삼 조는 풀무질을 해서 불이 꺼지지 않게끔 한다. 사 조는 녹인 쇠를 거푸집에 붓는다. 오 조는 식은 쇠말뚝을 꺼내서 나른다. 실시.”
“저, 잠시만요! 하나만 더 질문드리겠습니다!”
서세치가 안절부절 못하는 눈치로 물었다.
“저런 쇠말뚝을 몇 개나 만드시려는 것입니까?”
“천 개 정도.”
쇠말뚝 천 개.
말문이 막히는 수량이다.
하지만 죄수들은 그렇게까지 절망하지 않았다.
질을 따지지 않겠다고 하니 정말 어설프게 만들어도 될 것이다.
비록 어딘가에 박아 넣으면 채 몇 년도 되지 않아서 녹슬어 바스라지겠지만, 그것은 죄수들이 알 바가 아니었다.
‘그래. 까짓거, 쇠말뚝 그 쬐깐한 것 하나 만드는 데 천 년이 걸려? 만 년이 걸려? 밤 새워 가면서 후딱 후딱 만들면 천 개쯤이야…….’
서세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제 전 처가가 대장간이었어서 다행이군요. 장인어른의 기술은 대충 어깨너머로 배워서 흉내는 낼 수 있습니다.”
그 말에 다른 죄수들의 표정도 밝아졌다.
대충이나마 아는 사람이 있으면 작업이 훨씬 편해지기 때문이다.
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네가 총괄 조장을 맡아라.”
“헉? 제, 제가요? 알겠습니다!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세치의 표정이 밝아졌다.
처음 여정을 떠날 때 꾸었던 꿈.
추이의 심복이 되어 노역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겠다는 바람이 막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일주일 안에 쇠말뚝 천 개. 제 시간 안에 못 만들면 네 목부터 자른다.”
“…….”
추이에게 있어 심복이라는 개념은 조금 다른 모양이다.
권리 따위는 전혀 없고 의무와 책임만이 존재한달까.
결국 서세치는 반쯤 체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쇠말뚝 천 개라…… 일주일이면 어찌어찌 가능할 것도 같군요. 참, 쇠말뚝의 크기는 어느 정도로 하면 되겠습니까? 일단 거푸집부터 만들어야 하니.”
“그리 클 필요는 없다.”
“그렇군요. 그래도 얼추 어림은 잡아 주셔야…….”
서세치의 말을 들은 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벅- 저벅- 저벅-
옆으로 몇 걸음을 걸어가더니 한쪽 벽면의 끝에 가 섰다.
“?”
서세치를 비롯한 죄수들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이윽고, 벽 끝에 선 추이의 입이 열렸다.
“여기서부터.”
동시에, 추이가 걷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저벅-
계속 걷는다. 반대쪽 벽이 있는 곳까지 계속 계속 걸어간다.
저벅저벅저벅저벅저벅저벅저벅저벅저벅저벅저벅저벅저벅저벅……
모든 죄수들이 보는 앞에서 추이는 약 오십 보 가량을 나아갔다.
그러고는 반대쪽 벽에 딱 붙어서 섰다.
“여기까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죄수들 앞에서, 추이가 태연한 어조로 대답을 이었다.
“이것이 말뚝 하나의 크기다.”
대략 십오 장(丈)에 육박하는 어마어마한 길이의 쇠말뚝.
그런 것을 천 개.
“…….”
폐광 속의 죄수들은 하나같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살아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듯한 침묵.
그 속에서는 오직 추이의 목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뭐 해? 빨리 안 만들고.”
창귀무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