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나락곡 (1)
보글보글보글보글……
솥 안에서 다양한 식재료들이 끓는다.
돼지고기, 꿩고기, 잉어, 메기, 미꾸라지, 참게, 보리새우, 우렁, 시래기, 콩, 감자, 좁쌀, 옥수수, 된장 등등이 죽이 되어 뽀얀 김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남궁율은 나뭇가지로 솥안을 저었다.
그러고는 그 끝에 묻은 죽을 살짝 맛보았다.
‘음. 이 정도면 먹을 만한 것 같다.’
비록 만들어진 것은 정체불명의 무근본 꿀꿀이죽이었지만 이런 혹한의 험지에서는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할 일이었다.
맨 처음에는 이런 음식을 입에도 못 대던 그녀였지만 추이를 쫓아 나온 이번 강호행을 통해 확실히 경험의 지평이 넓어지고 있었다.
“추 소협. 식사 다 됐어요.”
남궁율은 이 빠진 질그릇 안에다가 죽 한 그릇을 퍼서 추이에게 내밀었다.
내심 추이가 자신이 만든 죽을 맛있게 먹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은 채로.
하지만 그 죽은 추이에게 가지 못했다.
“으악! 뭐야 이 똥국은!? 이딴 걸 누가 먹어! 죄수들한테도 못 팔아먹겠네!”
견술이 기겁하며 그녀의 죽을 빼앗아 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거 먹으면 바로 배탈 나. 우리 예쁜이는 내가 만든 동파육 먹자. 자, 아앙~”
견술은 어디선가 만들어 온 돼지고기 조림을 떠서 추이의 입가로 가져갔다.
남궁율이 황당하다는 듯 빽 소리 질렀다.
“남자끼리 호칭이 왜 그래요!?”
“예쁘게 생겼으니까 예쁜이라고 부르는 건데 왜? 존중의 뜻을 담은 애칭이야.”
“그 와중에 동파육은 또 어떻게 만들었고요!?”
“흥흥흥- 내가 원래 좀 가정적이야. 누굴 꼬시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추이를 사이에 두고 남궁율과 견술의 시선이 팽팽하게 대치한다.
“…….”
하지만 정작 추이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저 어두운 밤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남궁율은 그런 추이를 보며 생각했다.
‘참 대단한 사람이야.’
그녀는 늘 추이를 대단하다고 여겨 왔지만 그런 생각은 근래 들어서 더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공손앙의 반란이 있었던 뒤로도 자객들의 습격이 몇몇 차례 더 이어졌고, 죄수들은 그것을 필사적으로 막아 내었다.
죄수들은 추위에 떨고, 고된 노역에 지친 상태로 습격까지 막아 내야 했고 그 결과 점점 더 피폐해졌다.
그리고 추이는 점차 약해져 가는 그들에게 병장기, 방한도구, 약, 식량과 식수를 팔면서 횡령 자금들을 모조리 거둬들였다.
결국 모든 것들이 추이가 의도한 대로 된 것이다.
‘아무리 무림에는 기인이사가 많다지만, 대체 어디서 이런 사람이 나타난 걸까?’
설마 자신이 비슷한 연배의 남자를 향해 이런 감정을 품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했나?’
남궁율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추이가 바라보고 있는 밤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어?”
밤하늘을 올려다본 남궁율의 표정이 순간 미묘하게 변했다.
적색 별.
어젯밤까지만 해도 홀로 외떨어져 빛나고 있었던 적성의 주변으로 여섯 개의 별들이 떠 있다.
하나같이 음산한 빛을 뿌리는 청색의 별무리였다.
이윽고.
스윽-
추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파촉설산의 자락이 시작된다.”
그러고는 정면에 도사리고 있는 고사목들의 숲을 똑바로 주시했다.
“이제부터는 ‘진짜’들이 나올 모양이군.”
그 말에 견술의 표정도 변했다.
남궁율은 그보다 조금 뒤에 사태를 파악했다.
스스스스스스스……
말라죽은 나뭇가지들이 찬바람에 흔들린다.
그 사이사이로 뿌옇고 탁한 청색의 안광들이 번져 가고 있었다.
푸른 야차의 탈을 뒤집어쓴 이들이 하나둘씩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머릿수는 여섯.
모두가 맨손, 맨발이었고 몸 전체에 흰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듯 보였다.
들고 있는 무기들도 가지각색이었다.
사슬낫, 쇠부채, 대낫, 채찍, 이상하게 생긴 각종 기형검들…….
한편, 그것을 본 죄수들 사이에서는 또다시 난리가 났다.
“으악! 또 습격이다.”
“다들 창 들어! 야습이야!”
“빌어먹을 살수 새끼들아! 밤에는 좀 쉬잔 말이야!”
서세치를 비롯한 죄수들이 창을 쥐고 일어났다.
하지만.
“됐다. 들어가 있어라.”
추이는 죄수들을 향해 손사래를 쳤다.
지금껏 추이가 이런 반응을 보였던 적은 처음이었기에 죄수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그때, 개작두를 든 견술이 그런 추이의 옆으로 걸어와 섰다.
“이놈들은 지금까지 왔던 놈들이랑은 뭔가 좀 다른데? 어중이떠중이들이 아니야.”
“나락곡의 청야차들이다.”
“……!”
견술의 눈이 조금 커졌다.
나락곡. 사도십오주의 한 기둥을 이루고 있는 살수 집단.
하지만 그 정체가 거의 신비에 가려져 있기에, 호사가들은 그저 사도련에서 공포감을 조성하기 위해 만든 가상의 단체라고 치부하는 실정이다.
견술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락곡이 진짜로 있는 거였구나. 그쪽이 움직일 정도면…… 사도련 놈들 중에 너에게 푹 빠진 놈이 있나 봐.”
“누군지는 대충 짐작이 가는군.”
아마 홍공, 그가 보낸 환영인파들이리라.
추이는 매화귀창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퍼펑!
나락곡의 살수들이 추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추이는 눈앞으로 쇄도하는 병장기들을 보며 생각했다.
‘기세를 감추지도 않는군. 청야차 계급씩이나 되는 놈들치고는 지나치게 부주의하다.’
나락곡의 살수들은 황(黃), 청(靑), 적(赤), 흑(黑) 순으로 강해진다.
눈앞의 살수들은 무려 청색 가면을 쓰고 있는 이들이었지만.
퍼펑! 까-앙!
추이는 그들의 합공을 큰 무리 없이 받아 내고 있었다.
…쿡!
추이의 창이 청야차 하나의 가슴팍을 사납게 파고들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가슴을 찔린 청야차가 어둠 너머의 숲속으로 나가떨어진다.
“으랏챠-”
견술 역시도 개작두를 휘둘렀다.
크고 투박한 작두날이 벼락처럼 떨어져 내려 청야차 하나의 어깨를 내리찍었다.
…퍽!
그 순간.
“……!”
견술은 대놓고 느껴지는 이질감에 두 눈을 부릅떴다.
“뭐야 이거?”
작두날이 청야차의 몸에 파고 들어간 뒤 빠지지 않는다.
애초에 사람의 육체쯤은 진작에 쪼개 버렸어야 할 터인데, 작두날은 고작 한 뼘 정도박에 박혀 들지 않았다.
…쾅!
견술은 발을 들어 올려 청야차의 가슴팍을 세차게 걷어찼고 그제야 작두날을 빼낼 수 있었다.
“……!”
견술은 회수한 작두날을 보며 깜짝 놀라야 했다.
작두날의 이가 살짝 빠져 있었고 그 주변에는 푸르스름한 서리가 붙어 있었다.
“뭔데 몸뚱이가 저렇게 차고 단단해? 작두날이 잘 안 박히잖아.”
견술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이건 사람의 몸을 써는 게 아니라 숫제 꽝꽝 얼린 냉동육을 써는 느낌이다.
견술이 추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얘얘- 예쁜아. 나락곡의 살수들은 원래 다 이래?”
“아니. 그놈들도 평범한 살수들이다. 단지 다른 살수들에 비해 사람을 조금 더 잘 죽일 뿐이야.”
“그럼 뭐야 이것들은?”
“…….”
추이는 눈앞의 청야차들을 바라보았다.
저벅- 저벅- 저벅-
방금 전, 추이의 창에 심장을 찔린 채 날아갔던 청야차 또한 숲속에서 걸어 나와 본대에 합류했다.
견술의 작두날에 맞은 청야차 역시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채로 전투준비를 한다.
그때,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남궁율이 소리쳤다.
“가, 강시(僵尸)!? 강시 아니에요, 저것들!?”
“……!”
그 말에 견술조차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강시. 죽은 자의 시체를 사악한 사술로 되살려 낸 존재.
오래된 괴담 속에서나 전승되어 내려왔던 그것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말인가?
“나락곡의 살수들로 만든 강시. 다소 귀찮을 수 있겠군.”
추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시의 존재를 인정하는 추이의 말에 견술과 남궁율은 다시 한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락곡에 이어 강시라니. 이게 다 무슨 일인가.
남궁율은 머릿속으로 나락곡에 대해 알고 있던 정보들을 떠올렸다.
‘……전설 속에 나오는 나락곡의 살수들은 사람 죽이는 기술을 기예의 수준까지 끌어올린 살인기계(殺人器械)들이랬는데.’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딱 하나, 목숨뿐.
제아무리 수많은 목숨을 거둬 왔던 살수라도 자신의 목숨은 하나인 법이며, 자신이 죽으면 더 이상 사람을 죽이지 못한다.
오직 그것만이 나락곡 살수들의 약점이라고 남궁율은 들었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나락곡의 살수들은 그런 약점마저도 해결한 듯 보인다.
끼긱- 끼긱- 끼기긱-
여섯 구의 강시. 얼어죽은 시체들이 또다시 움직인다.
‘청야차로 만든 강시 여섯이라. 열심히 살고 있구나, 홍공.’
추이는 나락곡 살수들의 시체로 제작한 강시들을 쭉 돌아보았다.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나락곡.
정사대전 당시 정도의 인물들이 밤을 두려워하게끔 만들었던 살수 집단.
홍공이 나락곡과 접선한 것은 그가 아직 마교의 우사로 있었던 시절이었다.
홍공은 창귀칭이라는 마공을 완벽하게 보완하기 위하여 살수들의 살인 경험과 뛰어난 인내력, 그리고 잘 단련된 육체들을 필요로 했다.
당시 나락곡의 고위직에 있었던 ‘한 인물’의 도움으로 홍공은 자신의 마공을 더욱 완성도 높게 다듬을 수 있었고, 그 결과 무림에는 몇 번의 거대한 혈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추이가 홍공과 만나게 되는 것은 원래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었다.
……하지만. 과거로 회귀한 추이는 그 시점을 훨씬 더 앞당기려 하고 있었다.
복수라는 명분이 다가 아니라, 수많은 혈겁을 거치는 동안 삶이 망가졌던 과거의 인연들을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당장 호예양과 오자운만 해도 그랬지 않은가.
‘홍공. 나의 옛 스승이자 만악의 근원.’
추이는 눈앞의 청야차들을 향해서 매화귀창을 들어 올렸다.
‘기다려라. 지금 만나러 간다.’
추이는 눈앞에 있는 여섯 불사자들을 향하여 내달렸다.
…쉬익!
창이 독사의 대가리처럼 뻗어 나갔다.
청야차 두 명이 각각 창과 칼을 뻗었다.
빙글-
추이는 창대를 휘둘러 청야차 하나를 후려쳤다.
떠-엉!
쇠붙이로 사람 몸을 때렸는데 마치 커다란 종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난다.
청야차 하나가 나가떨어지는 순간, 추이는 손을 확 뻗어서 반대편에 있던 청야차를 끌어당겼다.
추이의 손에 잡힌 청야차가 두 손에 들린 기형 쌍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뿌-작!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린 송곳이 청야차의 정수리에 내리꽂혔다.
…삐슉! …뿌슉! …파사삭!
두개골이 박살 나며 살얼음 형태의 피와 뇌수가 흩뿌려졌다.
바들바들바들바들바들바들바들바들……
송곳이 정수리에 수직으로 꽂히자 청야차는 바닥에 뒤집어졌다.
그러고는 불길에 그슬린 바퀴벌레처럼 팔다리를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추이는 다시 한번 송곳을 휘둘러 또 다른 청야차의 골통을 수직으로 뚫어 부쉈다.
빠-각!
두 명의 청야차가 바닥에 쓰러져 버둥거린다.
추이의 무표정한 얼굴에 튄 붉은 살얼음.
그것이 체온에 의해 녹아서 천천히, 끈적하게 흘러내린다.
“강시와 싸울 때는 이처럼 천령개(天靈蓋)를 찌르면 된다.”
태연한 표정, 느른한 목소리.
하지만 그것과는 전혀 상반되는 손속.
“죽일 수는 없어도 더 싸우지 못하게는 만들 수는 있거든.”
남궁율과 죄수들은 물론 강시들마저 주춤거리게 만드는 살벌함이었다.
창귀무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