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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귀무쌍-97화 (97/110)

97화 견마지로(犬馬之勞) (1)

높은 울타리 안쪽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뛰어다닌다.

장강수로채는 꼭두새벽부터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수적들은 산기슭 아래에 수많은 마차와 수레들을 세워 놓고 그 위에 화물들을 적재하고 있었다.

새로운 채주 적향의 명령이었다.

“……괜찮겠어?”

적향은 옆에 있는 추이를 향해 물었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파촉설산은 멀어. 그리고 엄청나게 혹독해. 스승님께 들었던 것인데…… 아주 오래 전, 마교가 중원까지 쳐들어 왔을 때도 그 설산에 가로막혀 아주 난항을 겪었다더군.”

생각 없이 숨을 들이쉬었다가는 폐가 동상을 입을 정도의 극저온.

온갖 종류의 위험한 지형들이 득실거리는 험준한 산맥이 바로 파촉설산이다.

하지만 그런 위험한 곳으로 향하는 추이는 그저 흑색의 낡은 피풍의 한 겹만을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그쪽으로 가는 길이 가장 빠르다. 산을 넘으면 곧바로 호북을 거쳐 하남으로 빠지니까.”

“그야 지도상으로 보면 그렇지만…… 날씨와 지형이 문제지.”

“상관없다. 물자들이나 넉넉히 준비해라.”

“그것들이라면 이미 단단히 준비하라 일러 놨어. 걱정 마.”

적향은 들판에 놓인 수레들을 쭉 둘러보았다.

수적들은 아직도 짐을 싣고 있었다.

말이 끌고 있는 수레들 위에는 말린 과일과 육포, 장작, 기름, 두꺼운 옷과 신발, 병장기들이 이미 가득하다.

그것도 모자라, 적향은 추이에게 따로 준비한 것을 건넸다.

“파촉설산의 지도야. 그쪽 지형에 대해 잘 아는 전문가들을 모아서 만들었어.”

어느 쪽이 높고 어느 쪽이 낮은지, 살얼음으로 덮여서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절벽이나 유해한 물질이 가득한 온천, 맹수들의 서식지가 낱낱이 적혀 있다.

그 외에도 아직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그래서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미지의 구역들도 곳곳에 표기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청성파, 점창파, 아미파, 사천당가, 오두미교, 태평회 등 인접해 있는 다른 세력들이 봤다면 꽤나 군침을 흘릴 법한 지도였다.

적향이 씩 웃으며 말했다.

“창을 만들어 준 값치고는 너무 많이 받아 버린 것 같아서 말이야. 거스름돈이라고 생각하라구.”

“…….”

추이는 한동안 지도를 훑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큰 도움이 되겠군. 고맙다. 잘 쓰마.”

“……!”

예상치 못한 감사인사에 적향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크, 크흠. 뭘 고맙기까지야. 됐어. 친구끼리.”

적향은 헛기침을 하며 괜히 딴청을 피웠다.

옆에 있던 남궁율이 그런 적향을 부럽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어이, 죄수들 나온다.”

뒤에 있던 견술이 추이의 어깨를 툭 쳤다.

“…….”

추이는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수적들에 의해 끌려 나온 백팔 명의 죄수들이 자갈밭 위에 일렬로 섰다.

그들은 수갑과 족쇄를 차고 목에는 큰 칼을 쓴 채 추이를 바라본다.

하나같이 죽상을 한 표정들이었다.

추이는 그들의 앞으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너희들이 쓴 계약서다. 마지막으로 한번 다시 확인해라.”

바람에 나부끼는 종이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들이 적혀 있었다.

<계약서>

一. 상기명 본인은 파촉설산으로의 상행(商行)에 참가를 희망합니다.

二. 이 과정에서 강요나 협박 등의 위법행위는 일체 없었으며, 이 모든 것들은 전적으로 본인의 의사에 의한 자발적인 참여임을 미리 밝힙니다.

三. 이 상행은 파촉 지역에 식량, 식수, 방한도구, 병장기 등등을 판매하여 차익을 얻거나 그 일대의 특산물들을 구매해 오는 등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여정입니다.

四. 만약 상행 중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인하여 불이익을 겪게 될 경우,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간에 기꺼이 감수하겠습니다.

五. 저는 이번 상행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때까지 총책임자인 추이 천두님께 ‘견마(犬馬)’의 마음으로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그 밑에는 죄수들의 수결(手決)과 지장(指章)이 보인다.

명목상으로 이번 여정은 파촉설산에 식량과 식수, 방한도구, 병장기 들을 팔러 가는 상행이었다.

남궁율은 계약서를 보며 감탄했다.

“자필 계약서에 수결과 지장까지 있으니 이건 정말 빼도 박도 못하겠군요. 혹여 나중에 관아에서 문제를 삼는다고 해도 얼마든지 둘러댈 수 있겠어요.”

애초에 파촉설산에 사람들이 살 리가 없으니 상행이라는 것은 그냥 허울 좋은 구실일 뿐.

이것은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상행이 아니라 사실상 사지(死地)로 향하는 강제징용인 것이다.

“…….”

“…….”

“…….”

죄수들은 우울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모든 죄수들이 축 쳐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삶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남자가 하나 있었다.

“여보게들. 너무 그렇게 기죽지 말게.”

서세치. 그가 옆에 있는 다른 죄수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추이 천두님께서 말씀하셨지 않은가. 이번 상행을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오면 자유의 몸이 되게끔 해 준다고.”

물론 그 말을 믿을 정도로 서세치는 순수하지 않다.

다만, 어떻게든 살아만 있으면 언젠가 기회가 온다고 막연하게 믿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서세치는 짐짓 다른 죄수들을 설득하는 척, 저 앞에 있는 추이에게 알랑방귀를 뀌고 있었다.

“추이 천두님께서도 저번에 말씀하시지 않았나. 멸사봉공(滅私奉公). 크~ 이 얼마나 좋은 말인가? 사욕을 멸(滅)하고 공익을 위해 힘쓴다는 뜻이지. 이 말은 말일세. 원래 당나라 때의 ‘최릉수상서호부시랑제(崔稜授尙書戶部侍郞制)’라는 글에서 처음 나온 말일세. 원진(元稹)이라는 문인이 쓴 글인데, 원문은 다음과 같지. 큼큼- 내 한번 읊어 보겠네.”

서세치는 자신의 유식함을 드러내어 존재 가치를 입증하려는 듯 큰 소리로 외쳤다.

其職嚴而不殘.

-직책이라는 것은 엄격하여 결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

辟名用物者逃無所入.

-문서를 허위로 작성하거나 물건을 제멋대로 쓴 자는 도망칠 수 없으며.

滅私奉公者得以自明.

-사사로움을 버리고 공변됨을 받드는 자만이 스스로 명백함을 얻을 수 있다

주변의 죄수들은 뭔 개가 짖냐는 듯 눈살을 찌푸린다.

하지만 서세치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무식한 새끼들. 어차피 너희들 들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이렇게 반성하고 회개하는 척하면서 성실한 모습을 보임과 동시에, 풍월깨나 읊는다는 티를 내면 반드시 위에서 신호가 오게 되어 있다.

분명 추이는 자신을 옆에 두고 오른팔처럼 쓰게 될 것을 서세치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때, 추이가 큰 소리로 외쳤다.

“자. 이제 출발할 시간이다. 목적지는 파촉설산. 여기서 겨우 천 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지.”

천릿길.

일반적인 성인의 보폭을 두 척(尺) 반이라고 가정했을 때, 천 리는 약 오십삼만 삼천 걸음쯤 된다.

한 시진에 대략 이십 리를 갈 수 있다고 치면…… 대략 나흘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고 쉼 없이 걸어야 하는 거리.

물론 이 가정은 지형이 완전한 평지였을 때를 기준으로 한 것이고, 오르막길이나 험준한 지형이 앞을 가로막는다면 그 몇 배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

“…….”

“…….”

죄수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주변의 시선이 왜인지 서세치를 향해 집중되었다.

한때 백두 계급에 있었던 수적 하나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어이, 수염쟁이. 네가 좀 말해 봐라.”

“어어? 뭘?”

“지금 이 상태로 천릿길을 어떻게 가냐고 말이야. 아까 보니까 뭐라고 주절주절 말 잘하던데.”

서세치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우물거렸다.

하지만 계속 입을 다물고 있기에는 주변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결국 서세치는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저, 저기요 천두님.”

“뭐냐?”

추이의 시선이 다시금 이쪽을 향한다.

서세치는 찔끔 움츠러들었다가도 이내 할 말을 했다.

“혹시 질문을 해도 괜찮을까요?”

“짧게 해라.”

추이는 의외로 흔쾌히 질문을 받아 주었다.

이윽고, 서세치는 죄수들을 대표하여 의문을 제기했다.

“파촉설산까지는 길이 아주 멀 겁니다요.”

“그래서?”

“도보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상황이니 아마도 마차나 수레를 타야 할 텐데…… 여기 있는 수레들에 이 인원들이 다 타기에는 너무 비좁지 않을까 해서…….”

서세치의 말에 다른 죄수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거들었다.

“맞습니다. 수레가 너무 비좁습니다.”

“말들도 너무 적어요. 이 인원이 다 타기에는 어려울 겁니다.”

“꾹꾹 눌러 타면 어찌어찌 되기에 할 텐데…… 그래도 일부는 내려서 걸어와야 할 겁니다.”

“늙은이들은 타고, 젊은이들은 걷게 하면 어떨까요?”

하나가 입을 열자 열이 따라 했고 이내 모든 이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늘어놓는다.

주변이 순식간에 도떼기 시장마냥 소란스러워졌다.

그때.

“타? 누가?”

추이가 죄수들에게 반문했다.

죄수들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추이는 옆을 향해 손짓했다.

마차와 수레 앞에 있던 말들이 우르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수적들은 한 마리의 말까지 모두 끌고는 산채를 향해 올라가 버렸다.

“……?”

서세치를 비롯한 수적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멀뚱멀뚱 서 있을 뿐이었다.

아니. 마차가 여기에 있는데 왜 말을 없애 버린단 말인가?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추이는 혼자서 저벅저벅 걸어가더니 성큼 마차에 올라탔다.

“이것만 있으면 말 없이도 마차를 몰 수 있지.”

추이는 마차 안쪽으로 손을 뻗었고 잠깐 뒤적였다.

서세치를 비롯한 모든 죄수들은 추이가 어떤 조화를 부릴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목을 길게 뺐다.

이윽고, 추이는 말 없이도 마차를 움직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신비로운 보구를 꺼내 들었다.

“?”

그것은 성인 남성의 팔목과도 비슷한 굵기를 가진 채찍이었다.

“??”

의아한 표정의 죄수들 앞으로 추이가 채찍을 든 채 내려섰다.

그러고는 죄수들의 몸을 묶고 있는 밧줄들을 하나하나 마차에 연결한다.

“???”

이윽고, 모든 죄수들의 밧줄이 마차와 연결되었다.

그 시점에서 추이는 채찍을 들어 올렸다.

“뭣들 하나.”

“……?”

“끌어 얼른.”

“……!”

그제야 죄수들은 깨달았다.

자신들은 천릿길을 걸어 그 끝에 눈과 얼음으로 이루어진 드높은 설산을 등반해야 한다.

그것도 이 무거운 마차들을 직접 자신들의 손발로 끌면서!

죄수들 모두가 아연실색한 기색으로 입을 반쯤 벌렸다.

유일하게 정신을 차린 서세치가 더듬더듬 말했다.

“처, 천두님. 농담이시지요? 사람이 어떻게 저 무거운 짐수레를 끌겠습니까? 그것도 목적지가 파촉설산인데…….”

“어떻게 끄냐니? 이미 계약서에 고지했잖나.”

“예? 계약서에 그런 내용이 어디에…….”

추이가 서세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잘 봐라.”

창끝과도 같은 시선이 내리꽂힌다.

서세치는 자신의 눈알과 심장이 그것에 관통당하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팔락-

추이의 손에 들린 계약서가 다시 한번 죄수들의 눈에 아로새겨진다.

저는 이번 상행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때까지 총책임자인 추이 천두님께 ‘견마(犬馬)’의 마음으로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추이는 채찍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마차를 어떻게 끌어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내놓았다.

“견마의 마음으로 끌어라.”

까라면 까라는 말이다.

창귀무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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