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고기 방패 (2)
남궁율은 추이의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
지하의 어둠 속, 촛불이 비추고 있는 추이의 얼굴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것이었다.
‘어떻게 남자가 이렇게 예쁘게 생길 수 있지?’
등천학관에 재학 중일 때, 그녀는 수많은 남자들에게 구애를 받았었다.
그중에는 지역에서 이름난 미공자들도 많았고 별호에 대놓고 옥룡(玉龍), 옥면(玉面) 등등의 단어가 들어가 있던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단언컨대, 남궁율은 추이만큼이나 빼어난 외모를 가진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동안 흙투성이, 재투성이, 피투성이인 모습만 봐 왔던지라 지금의 이 수려한 얼굴은 새삼 낯설고도 충격적이다.
그냥 얼굴을 물로만 씻었는데도 이 정도면, 도회지의 화화공자(花花公子)들처럼 얼굴에 분을 바르고 입술을 칠했을 때 그 미모가 어떨지 감히 상상조차 안 된다.
‘나는 내가 남자의 얼굴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니라 눈이 높았던 것이었다.
몰랐던 자신의 내면을 알게 되는 것만큼 생경하고도 뿌듯한 경험은 없다.
남궁율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궁율이 놀란 점은 비단 추이의 외모만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외모는 논할 거리조차 못 되고 있었다.
추이는 여리여리한 미소년의 외모와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여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궁세가에서 남궁팽생을 살해하던 당시의 거칠고 야성적인 모습, 비무극을 죽인 사망매화 오자운을 떠나보내던 비장한 의협의 모습,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죄수들을 가차 없이 다루는 위압적인 모습.
이 모든 것들은 추이의 뛰어난 외모를 한낱 부가적인 매력 정도로 치부하게 만들어 버린다.
즉. 남궁율은 추이의 겉보다는 속 쪽에 훨씬 더 강한 호기심을 느끼고 있다는 말이다.
‘…….’
그녀는 촛불에 비친 추이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괜스레 목을 한번 쓸어 보았다.
처음 대면했을 때 자신의 목을 조르던 그 피 묻은 손아귀, 그때 느껴졌던 우악스러운 손길과 따듯한 체온, 그리고 비릿한 피 냄새.
이 모든 것들을 떠올린 남궁율의 귀끝이 또다시 새빨갛게 물든다.
그때. 추이의 목소리가 동혈 속에 울려 퍼졌다.
“방을 붙일 것이다.”
추이가 직접 쓴 방이 펼쳐졌다.
一. 장강의 수적패 일부가 힘없는 양민들에게 재물을 수탈하고 착복했다.
二. 그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을 대신해 벌을 내린다.
그것을 본 남궁율의 가슴이 또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흑도방, 조가장, 남궁세가, 패도회 때와는 다르다.
그녀는 장강수로채에 이 방이 붙기까지의 과정을 제 눈으로 직접 보았다.
이야기 속에서만 들었던 대협(大俠)의 행보.
그 과정을 직접 현장에서 직관하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가슴이 벅차다.
등천학관의 책상 앞에 앉아서 수업을 들을 때에는 절대로 느껴 볼 수 없었던 생경하면서도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 * *
…탁!
추이는 탁자 위에 한 장의 지도를 내려놓았다.
그것은 파촉(巴蜀)의 험준한 산세를 낱낱이 그려 놓은 지도였다.
옆에 있던 남궁율이 물었다.
“독도법(讀圖法)을 아시는군요. 등천학관의 교관님들보다도 잘하시는 것 같은데…….”
“군에 있었을 때 배웠다.”
정확히는 말단 병사 시절부터 살기 위해 익혔던 기술을 극한까지 갈고 닦은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남궁율은 깜짝 놀라야 했다.
‘이 사람은 대체 뭘 하던 사람일까?’
나이는 약관도 채 되어 보이지 않지만 익히고 있는 재주가 너무나도 많다.
‘……혹시 반로환동한 노고수 아니야?’
그러니 남궁율로서는 이런 실없는 생각도 한번 해 보는 것이다.
그때, 옆에서 딴죽이 들어왔다.
“홀딱 반했구만.”
견술이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남궁율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궁율이 미간을 찡그렸다.
“뭐라고요?”
“얼굴 시뻘겋게 달아오른 것이 아주 천박하기 그지없다고 했어. 아, 남자 무지하게 밝힐 것 같다고도 했고.”
“아까는 그렇게 안 말했잖아요!”
“잘 들었었네. 근데 뭘 또 물어봤어?”
남궁율의 힐난에 견술은 히죽이죽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포기해. 쟤는 이미 내가 찍었어.”
“찌, 찍어요? 뭘요?”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는 견술을 보고 남궁율은 황당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당신은 남자잖아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렇게 따지면 너는 여자라서 쟤를 남자로 보고 옆에 붙어 있는 거야?”
“그,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남궁율의 말문이 막힌다.
견술은 미간을 찡그린 채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허공에 대고 두 손을 휘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나의 호감은 고결한 거야. 너와 달리 말이야. 좀 더 뭐랄까…… 육체적인 것을 초월한…… 형이상학적이고 또 정신적인?”
“나도 육체적인 거 아니거든!?”
남궁율의 차분한 표정이 완전히 깨졌다.
만약 등천학관의 누군가가 지금 그녀의 이런 모습을 봤다면 크게 놀랄 것임에 틀림없었다.
남자를 늘 냉담하고 무덤덤하게 대한다는 뜻에서 ‘혹한화(酷寒花)’라는 별호로도 불리는 그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견술에게 있어서는 그냥 도도한 척 구는 풋내기 강호초출일 뿐이었다.
놀려 먹기 딱 좋은.
그때.
“시끄럽다.”
지도를 읽고 있던 추이가 한마디 했다.
남궁율은 입을 꾹 다문 채 견술을 노려봤고 견술은 빙글빙글 웃는 낯으로 딴청을 피웠다.
한편.
“…….”
추이는 회귀 전의 기억들을 뒤져서 앞으로의 계획을 보강하고 있었다.
‘사도련에 숨어 있는 홍공을 잡기 위해서는 역시 무림맹을 이용하는 편이 좋다.’
병법 삼십육계의 공전 십삼 계, 타초경사(打草驚蛇).
뱀을 놀라게 하기 위해서는 뱀이 아니라 풀을 치는 것이 효과적인 법이다.
사도련을 자극해서 그 안에 있는 홍공의 반응을 이끌어 내려면 사도련을 직접 치는 것보다는 무림맹을 움직이는 편이 훨씬 더 효율적이었다.
‘무림맹에 줄을 대는 법은 많지만, 가장 쉬운 길은 아무래도…….’
추이의 시선이 남궁율을 향했다.
회귀 전의 지식까지 이용할 필요 없이, 그냥 여기에 있는 남궁율을 이용한다면 곧바로 등천학관에 줄을 댈 수 있다.
무림맹의 직속 산하기관인 등천학관이라면 무림맹과 연줄을 만들기에도 충분한 일이다.
‘일단은 관망이다.’
자월특작조의 무인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면 진작에 내쫓았겠지만, 지금은 달랑 남궁율 한명뿐이니 손도 훨씬 덜 갈 것이 아닌가.
그래서 추이는 그녀를 굳이 쫓아내지 않기로 했다.
그때. 적향이 말했다.
“무림맹으로 간다고 그랬지?”
“그렇다.”
추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우려를 표했다.
“장강의 범위가 닿는 곳에서는 우리가 호위할 수 있지만 그 범위를 넘어가면 일이 어려워질 거야.”
“호위는 필요 없다. 이대로 바로 동진(東晉)할 거니까.”
“산맥을 넘어 최단 거리로 가겠다 이거군. 하지만 그곳까지 가려면 사도련의 영역을 지나가야 해.”
당연히 사도련에서 보낸 자객들이 올 것이다.
적향은 이 점을 걱정하고 있었다.
일전에 오자운이 그랬듯, 추이 역시도 목적지까지 가기 위해서 끊임없는 도전과 습격을 뚫고 나가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장강수로채의 적향과 추이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것이다.
견술이 추이에게 물었다.
“근데 예쁜아. 해 사매…… 아니 이제 채주지 참. 채주에게 넘겨받은 죄수들로 뭘 할 생각이야?”
“말했잖나. 고기방패로 삼을 것이라고.”
“우리로 변장시킨 뒤에 사방팔방으로 풀어놓으려는 건가? 나쁘지 않은 방법이기는 한데…….”
“그랬다가는 횡령 자금을 되찾을 수가 없겠지.”
“그러니까 내 말이. 죄수들을 갖다가 뭘 어쩌겠다고? 횡령 자금도 회수하면서 고기 방패로도 쓰는 게 어떻게 가능해? 애초에 그놈들을 다 데리고서 자객들을 피해 다닐 수 있겠어?”
견술의 의문은 합리적이었다.
적향과 남궁율 역시도 이 점이 못내 궁금한지 추이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추이의 입이 열렸다.
“전제가 잘못되었군.”
“……?”
“자객은 피하는 것이 아니라 때려잡아야 하는 것이다.”
“……!”
견술, 적향, 남궁율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추이는 말을 이었다.
“나는 죄수 부대를 이끌고 자객들의 본진을 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지금껏 지도를 들여다보지 않았던가.
나락곡의 지부가 위치해 있는 파촉설산(巴蜀雪山)의 지도를 말이다.
* * *
죄수들은 지하 감옥에 갇힌 채 사흘 동안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나락으로 보낸다니…… 우리들은 대체 어디로 가게 되는 걸까?”
“여기가 나락이지 달리 어디겠냐. 옘병, 물 한 모금만 마실 수 있으면 바로 극락이 될 텐데.”
“지금보다 상황이 더 나빠질 리가 있나. 내가 보기에는 여기가 바닥이다.”
그들은 무쇠로 된 수갑과 족쇄를 차고 목에는 커다란 칼을 쓰고 있었다.
단전이 부서져서 내공마저 잃어버렸기에 그들은 정말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참고 버티기만 하면 돼. 설마 우리를 죽이진 못하겠지.”
“당연하지. 내가 꼬불쳐 놓은 돈이 얼만데.”
“계속 버티다가 적당히 토해 내고, 그 대가로 면죄부 받으면 되는 거야.”
그때까지만 해도 죄수들은 꽤나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근데 왜 이렇게 안 와?”
“어이! 밖에 아무도 없어!?”
“사흘간 가둔다며! 사흘은 이미 지났잖아!”
죄수들을 가두기로 했던 사흘이라는 기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곳 지하 감옥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사흘은 나흘이 되었고, 나흘은 닷새가 되고, 닷새는 엿새가 되고, 엿새는 이레가 되었다.
처음에는 악기와 독기로 버티던 죄수들은 점차 비쩍 말라 갔다.
애초에 사흘을 생각하며 다잡고 있던 오기인지라 이레가 지났을 무렵부터는 꺾이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죄수들이 지하 감옥에 갇힌 지 아흐레가 되었을 때.
…끼기긱!
지하 감옥의 문이 열리며 간수가 들어왔다.
방금 전까지 죽어가던 죄수들이 마지막 힘을 쥐어짜 소리 질렀다.
“사흘만 가둔다며 이 개새끼야!”
“제발 풀어 줘! 꼬불친 돈 다 내놓을게!”
“나는 진짜 억울해! 돈이 없어! 없어서 못 주는 거라고!”
분노를 토해 놓는 이, 협상을 시도하는 이, 아직도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 다양한 종류의 반응들이 나온다.
하지만 간수의 반응은 하나뿐이었다.
“천두님께서 너희들을 보자고 하신다.”
천두(千頭)의 호출.
하지만 지금 죄수들이 알기로 장강수로채의 천두는 공석이다.
죄수들이 물었다.
“우릴 부른다는 천두가 누군데?”
“추이 님이시다.”
간수의 대답을 들은 죄수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장강수로채의 천두는 전시 상황에서 부하들에 대한 즉결 처분권을 가진다.
심지어.
“이제부터는 심층 면담이 시작될 시간이니까 한 줄로 서라. 지금부터 추이 님께 간다.”
“추이…… 님이 어디 계시는데?”
이어지는 간수의 대답에 죄수들의 얼굴색은 아예 검게 죽어 가기 시작했다.
“도살장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창귀무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