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고기 방패 (1)
새도 날아 넘기 힘든 파촉 땅의 겨울은 유난히도 혹독하다.
눈보라 몰아치는 설산.
머나먼 외딴 산봉우리.
그곳의 한 동굴에는 기묘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온몸에 붕대를 감은 남자들이 돌을 깎아 만든 침상 위에 누워 있다.
그들은 각각 얼굴에 야차의 얼굴이 그려진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색깔은 적색, 청색, 황색 등 다양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두 발로 걸어다니는 여자가 한 명 있었다.
그는 검은색 야차 가면을 쓰고 있었고 몸에는 흰 장포를 걸친 차림이었다.
그녀는 석실에 누워 있는 수많은 붕대 인간들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과연 비약적인 성과로군. 그 창귀칭이라는 마공…… 아주 얼토당토않은 것은 아닌 모양이야.”
그러자 건너편에서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당연하지요. 아직 산 자를 조종하기에는 미흡하다고는 하나, 죽은 자를 조종하는 것 정도는 간단한 일 아니겠습니까.”
목소리의 주인은 노인이었다.
흰 머리에 흰 피부를 가졌고 흰 옷을 입고 있었으며 붉은 것은 눈동자뿐.
그는 자신을 ‘홍노야’라고 소개했다.
“나락곡의 흑야차께서 비로소 이 홍노(洪老)를 인정해 주시는 것 같으니 새삼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나락곡(奈落谷).
사도십오주에 속할 정도로 강성한 세력을 자랑하는 살수 조직.
하지만 위명세와는 다르게, 이곳은 규모도 위치도 모두 철저히 비밀에 가려진 곳이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무림비사(武林祕史)를 좋아하는 호사가들 사이에서도 나락곡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매번 오갈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홍노야가 마주보고 있는 이 흑야차라는 인물은 이 살수 조직의 우두머리 격인 인물이었다.
흑야차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본디 죽은 살수들의 시체에 산의 정기(正氣)을 깃들게 하여 되살릴 생각이었소. 한데 그것만으로는 당최 연구가 진행되지 않아서 늘 답답하던 차였지.”
“그때 바로 이 늙은이가 시기적절하게 나타난 게지요.”
홍노야는 손가락을 뻗어 석실에 누워 있는 한 시체의 미간에 박아 넣었다.
…덜컥! …덜컥! …덜컥!
붕대에 감긴 시체의 이마가 벌겋게 물들며, 그것은 이내 갓 잡은 생선마냥 격렬하게 펄떡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흑야차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파촉설산의 원기를 끌어모아 불어넣어도 손가락 한두 마디 움직이게 하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그대의 마공을 접목하니 진행 속도가 훨씬 빨라.”
“약속은 지킨 셈이겠지요?”
“지키고도 남았지. 그러니 이제는 내가 약속을 지킬 차례로군.”
“대화가 빨라서 좋습니다.”
홍노가 고개를 숙였다.
흑야차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사도련에서 지침이 내려온 참이오. 곤귀 구강룡을 참살한 자를 잡아 죽이라고 말이야.”
“맞습니다. 삼칭황천(三稱黃泉). 그자가 바로 제 애제자인 가정맹을 죽인 원흉이기도 합니다.”
인백정 가정맹.
그리고 그를 제자라고 칭하고 있는 홍노야.
흑야차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원하는 자는 누가 됐든 간에 셋. 이 세상과 하직시킨다. 이것이 우리의 약조.”
“맞습니다. 이것이 그중 첫 번째입니다.”
“한데 삼칭황천이라…… 그런 뜨내기 고수에게 그 정도의 가치가 있소? 우리 나락곡의 인력을 그런 곳에 사용할 정도로.”
“가치가 있지요.”
홍노야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그 친구에게서 가능성 하나를 보았습니다.”
“가능성?”
“그 친구가 제 애제자를 죽이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보았으니 말입니다.”
“그대는 내내 이 동굴에 있지 않았소?”
“하늘의 별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 대략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하, 별점을 쳤던 게로군.”
흑야차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홍노야는 끌끌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하늘의 저 별들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요. 그래서 언뜻 보기에는 당장 바로바로 움직이는 것 같아 보여도…… 기실은 오래 전에 움직였던 것을 인간이 뒤늦게 관측하는 것이랍니다.”
“그렇소?”
“그렇습니다. 즉, 새로운 살성(殺星)이 갑작스럽게 출현해서 제 제자의 별을 집어삼킨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갑자기 벌어진 이변이 아니라 이미 수백 년, 수천 년, 아니 수만 년 전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운명이라는 뜻이지요.”
홍노야의 별점 이야기는 항상 의뭉스럽다.
흑야차는 그것을 알기에 중간에 손사래를 쳤다.
“나는 하늘의 일 같은 것은 모르오. 그냥 정해진 약속이나 이행할 뿐.”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흑야차와 홍노야의 대화는 이 시점에서 끝났다.
이윽고, 홍노야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흑야차는 붕대를 감고 누워 있던 남자들 몇몇을 일으켜 세웠다.
“삼칭황천의 목을 가져와라.”
나락곡.
사도십오주의 한 축.
이 세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살문(殺門).
돈만 주면 염라대왕의 목이라도 잘라 온다는 그들이 추이를 잡기 위해 나섰다.
* * *
한편.
추이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쯤 움직이고 있겠지.’
홍공. 그의 무기는 창귀칭이라는 마공 하나뿐만이 아니다.
하늘을 읽고 별의 움직임을 점쳐 천기(天機)를 읽어 내는 그의 능력은 추이조차도 미처 다 배우지 못했던 것이었다.
다만, 별의 움직임은 들여다볼 줄 몰라도 사람의 움직임은 훤히 짚을 수 있었다.
홍공이 별을 본다면, 추이는 별을 보는 홍공을 본다.
‘대비는 이미 끝내 두었다. 남은 것은 실행뿐.’
생각을 마친 추이는 고개를 들었다.
현재 추이가 서 있는 곳은 지하 감옥의 한복판이었다.
장강수로채에서 죄인들을 잡아 가두는 동굴 속.
추이는 그곳에 갇혀 있는 죄수들을 쭉 훑어보고 있었다.
“천두님! 여기 좀 봐 주십쇼! 저는 죄가 없습니다요!”
“제발 살려 줍쇼! 살려만 줍쇼!”
“저는 진짜 무고하다구요!”
철창 속에 갇혀서 무거운 칼을 쓰고 있는 죄수들.
그들은 하나같이들 다 자신의 억울함을 성토하며 울부짖는다.
하지만 이들 중 죄가 없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적향이 직접 하나하나 골라서 잡아넣은 죄수들이기 때문이다.
일단 감옥에 가둔 명분은 ‘부채춤을 추었을 때 안무를 틀렸다’라는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적향은 부채춤을 추는 수적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안무를 틀린 이들을 색출해 냈는데, 사실 그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장강수로채가 의적 집단으로 돌아가려면 그동안 쌓였던 업보를 청산해야 해.’
적향의 심지는 곧았다.
그녀는 지금껏 힘없는 양민들을 약탈했거나, 혹은 공금을 횡령하여 제 배를 불렸던 이들을 모두 색출해 냈다.
다만 그 핑계를 ‘부채춤 당시 명령불복종’이라는 것으로 삼았다는 것은 모든 이들이 알면서도 묵인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뜻 있는 자들은 적향의 처사를 못 본 척했고, 죄 있는 자들은 언제 자기 차례가 올지 몰라 벌벌 떨며 지었던 악행들을 자수하고 선처를 구했다.
그러니까, 이곳 지하 감옥에 남아 있는 백팔 명의 죄인들은 마지막까지 자수를 하지 않은 독종들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런 악바리들을 바라보는 추이의 시선은.
“…….”
지금껏 전례가 없었을 만큼 다정하고 따듯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추이의 뒤에 서 있는 적향, 견술, 남궁율 등이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도 이해가 되는 일이다.
‘저 녀석이 원래 저런 표정도 지었던가?’
‘우리 예쁜이, 오늘따라 더 살벌하게 예쁘네.’
‘우와- 뭔가 무시무시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 표정이다.’
그들의 말마따나, 철창 너머에 있는 죄수들 중 감이 좋은 이들은 추이의 눈빛이 닿을 때마다 오싹오싹 몸을 떨고 있었다.
이윽고, 추이는 순시 끝에 감옥의 마지막 구역까지 도달했다.
그곳은 정말 악질 중의 악질 죄수들만이 갇혀 있는 곳이었다.
적향이 작은 목소리로 귀띔했다.
“여기 갇힌 놈들은 절대 죄를 인정하지 않는 독종들이야. 횡령한 재물도 어디에 숨겼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어. 어떤 자백도 안 하고 그냥 무조건 모르쇠로만 일관하는 악바리들이지. 뭐, 차차 고문을 가할 생각이긴 한데……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어.”
그러자 추이의 눈빛이 더욱 다정하게 변했다.
“…….”
“…….”
“…….”
죄수들은 비좁은 감옥에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들은 추이의 시선에도 기죽지 않고 오히려 독기 어린 눈을 뜬다.
추이는 제일 앞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는 죄수를 향해 말했다.
“눈을 깔아라.”
“…….”
죄수는 말을 듣지 않는다.
오히려 기선제압을 하겠다는 듯 눈을 더욱 부릅떠서 이쪽을 쏘아볼 뿐이다.
그때, 추이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퍼억!
손가락 튕기기. 일명 ‘딱밤’이라고 불리는 것이 죄수의 눈알에 작렬했다.
“끄아아아아아악!?”
죄수가 터져 나간 눈알을 손으로 받치며 비명을 질렀다.
이윽고, 추이의 말이 조금 더 짧아졌다.
“눈 깔아.”
“뭔 개 짓이야 이 미친……!”
그러자 추이가 다시 한번 손을 올렸다.
…퍼억!
죄수의 반대쪽 눈알이 연이어 터져 나갔다.
“끄어어어어어어!”
두 눈을 잃어버린 죄수는 자리가 좁아서 주저앉지도 못한 채 피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추이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마치 날벌레 하나를 잡아 죽인 것 같은 태연함이었다.
“…….”
“…….”
“…….”
비로소 감옥 안 죄수들의 표정에 변화가 일어났다.
추이를 죽일 듯 노려보던 시선들이 일제히 바닥을 향한다.
딱히 자백을 하라고 요구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눈을 깔라는 요구에 반항하다가 두 눈알이 터져 나가는 것은 수지타산이 너무 안 맞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작은 굴복 하나하나가 모여서 곧 큰 굴복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죄수들은 모르고 있었다.
군 복무를 오래했던 추이는 잘 알고 있었고 말이다.
“방을 붙일 것이다.”
방의 내용은 흑도방과 조가장, 패도회에서 붙였던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一. 장강의 수적패 일부가 힘없는 양민들을 수탈하여 재물을 착복했다.
二. 그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을 대신해 벌을 내린다.
여기의 죄수들이 감옥에 갇히게 된 이유들이기도 했다.
추이는 방을 들고 서서 죄수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지금부터 피해를 입힌 이들과 그들의 가족들에게 배상을 하여야 한다. 또한 집단의 명예를 실추시킨 대가 역시도 치러야 하고.”
그러자 죄수들 중 하나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 그 배상이라는 것을 저희들이 어찌합니까요? 저희는 정말 모아 둔 재물이 없습니다만…….”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설사 죽더라도 재물을 숨겨 놓은 곳의 위치를 말하지 않을 생각인 것 같았다.
하지만 추이는 그다지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걱정 마라. 방법은 내가 찾는다.”
듣기에 따라 오싹하게 들리기도 하는 말이다.
추이는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서 있는 적향에게 말했다.
“이놈들에게 나흘간 아무것도 주지 마라. 밥도, 물도, 빛도. 그다음에 출발할 것이다.”
“어디로?”
적향 옆에 있던 견술이 물었다.
남궁율 역시도 궁금하다는 듯한 기색이었다.
이윽고, 추이의 입이 열렸다.
“나락(奈落).”
죄수들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오싹 끼쳐 오는 소름에 몸을 떨었다.
한 귀에 듣기에도 별로 좋은 곳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창귀무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