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귀무쌍-93화
93화 삼령오신(三令五申) (3)
장강수로채에 새로운 채주가 올라섰다.
해백정 적향.
전 채주 공제환의 열두 제자들 중 가장 말석에 있었던 막내.
하지만 윗 서열의 모든 제자들이 죽어 사라진 지금, 채주의 정통성은 오로지 적향 한 사람에게만 있었다.
“전부 모이라 그래.”
적향은 채주 자리에 올랐음을 선포하는 동시에 열두 채의 수적들을 모두 소집했다.
백두급의 수적들이 모두 모여 적향의 앞에 섰다.
그 수는 정확히 백 하고도 여덟 명이었다.
적향은 높은 의자에 앉은 채 말했다.
“오늘 너희들 중 열두 명이 천두 계급으로 올라가게 된다.”
백두들 사이에는 복잡한 눈빛이 오간다.
불신, 기대, 호기심, 희망, 울분, 황당함 등등의 시선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다.
적향은 목소리에 내공을 섞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십두들 중 무력이 출중하고 행실이 올바른 자들은 백두로 올라가게 될 것이다.”
그 말에 백두들의 뒤에 도열해 선 십두들의 표정도 달라졌다.
그들의 수는 약 일천에 달했다.
적향은 선포했다.
“장강수로채는 현재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다. 채주 자리가 바뀌었고 천두들의 공백 역시 매우 크다. 사도십오주의 자격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그 말에 모든 수적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큰 집단이 약해지게 되면 비슷한 크기의 집단들이 시비를 걸어오는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적향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내공을 섞은 웅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새로운 채주로서 계엄령(戒嚴令)을 선포하겠다. 지금부터 장강수로채는 항상 전시 태세다. 언제 어디서 외부의 적이 싸움을 걸어올지 모르니, 다들 정신 바짝 차리고 항쟁에 대비해라!”
내부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서는 외부의 적을 상정한 뒤 경각심을 부추기는 것이 좋다.
아니나 다를까, 껄렁하게 서 있던 몇몇 백두들이 자세를 바로하기 시작했다.
뒤에 도열해 있던 십두들의 표정 역시도 결연하게 바뀌었다.
적향은 추이가 조언했던 그대로 말을 이어 나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금부터는 전시 상황이다. 그리고 전쟁 시 상급자의 명령은 곧 군율과도 같다.”
적향은 뒤를 향해 눈짓했다.
그러자 안쪽에서 몇몇의 수적들이 걸어 나왔다.
그들의 품에는 수많은 비단 옷감들이 들려 있었다.
하나같이 하늘하늘한 기녀들의 옷이었다.
“……?”
“……?”
“……?”
적향의 앞에 시립하고 있던 백두들은 자신들의 앞에 각각 놓이는 기녀 옷과 부채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내 모든 백두들이 한 벌의 기녀 옷과 부채 하나씩을 지급받게 되었다.
그때쯤 해서 적향이 외쳤다.
“내가 채주가 되어 너희들에게 내리는 첫 번째 명령이다.”
모든 백두들이 고개를 들었다.
새로운 채주가 무슨 명령을 내질지 궁금해하는 듯한 기색이었다.
이윽고, 적향의 입이 열렸다.
“백두들은 모두 이 기녀복으로 갈아입고 부채춤을 추어라.”
순간 좌중의 표정들이 일동 멍하게 바뀌었다.
대회의장의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냉랭하게 변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적향은 계속해서 지시를 내렸다.
“맨 앞의 두 백두는 들어라. 너희들을 지금부터 임시 천두로 임명한다. 조속히 치마와 저고리를 입고 부채춤을 지휘하라. 부채춤의 동작은 삼재검법의 제 일 초식으로 대신하겠다.”
삼재검법은 기초 검법 중의 기초 검법인지라 그것을 모르는 이는 이 자리에 없다.
……문제는 복장과 도구였다.
기생 복장을 하고 부채를 흔들라니.
텁석부리 근육질 덩치들에게는 난생처음 겪는 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그때.
“허허허-”
맨 앞에 있던 백두, 아니 임시 천두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 옆에 있던 천두 역시도 황당하다는 듯 두 손을 들어 허리띠 위에 올렸다.
“우리가 기녀도 아니고. 지금 이게 무슨 명령입니까?”
“내 사타구니 털 난 이래 이따위 황당한 짓거리는 또 처음일세.”
짝다리를 짚은 채 허리띠를 잡고 비웃는 천두들.
그 뒤에 있던 다른 백두들 역시도 다들 황당하다는 듯한 반응들이었다.
심지어 그중 몇몇은 대놓고 낄낄 웃기도 했다.
십두들 사이에서도 동요가 있었다.
몇몇은 대놓고 비웃었고, 몇몇은 지겹다는 듯 하품을 했으며, 몇몇은 욕지꺼리를 내뱉었다.
그러자 적향이 고개를 외로 꼬며 눈을 흘겼다.
그녀의 눈빛이 찰나 간 사납게 변했으나 워낙 빠르게 잠잠해졌기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지금은 전시 상황이라고 했다. 전시 상황에서 채주의 명령은 곧 군령 그 자체. 장강수로채의 군율에는 군령을 어긴 자들을 즉결 처형한다는 규칙이 있다.”
“나 참. 그 잘난 군령이 사내대장부에게 계집의 옷을 입힌 채 부채나 팔랑거리게 하는 거요? 이래서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더니…….”
천두는 팔짱을 낀 채 꺼드럭댔다.
뒤에 있던 다른 백두들과 휘하의 십두들에게 자신의 용맹을 과시할 목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의 기대와는 조금 다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스릉-
적향이 의자 뒤에서 거대한 도끼 두 자루를 꺼내 든 것이다.
“……!”
모든 수적들이 움찔했다.
저 쌍도끼는 거정 공제환이 늘 허리춤에 차고 다니던 것.
한번 휘둘러 태산을 쪼개 버리던 그 신위를 어찌 잊겠는가.
새삼 적향이 공제환의 진전을 이어받은 제자라는 것이 느껴진다.
그것은 이 자리에 모인 수적들의 뇌리에 다시 한번 또렷하게 각인되었다.
적향은 도끼를 든 자신의 모습을 모든 이들의 눈앞에 똑똑히 아로새겨 주었다.
그리고 스승의 음성이 그랬던 것처럼, 탁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겠다. 기녀 복장을 하고 부채춤을 추어라.”
“…….”
천두 두 명의 얼굴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단체의 일부였을 때는 함부로 비웃거나 욕하는 것이 쉬웠는데, 막상 멍석이 깔리고 그 위에 개인의 자격으로 서자 모든 위압감이 집중된다.
하지만 그들은 팔짱을 끼고 있던 손을 풀었을 뿐, 여전히 기녀복에는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그저 엉거주춤한 자세로 눈치를 볼 뿐이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허리는 굽히기 싫고, 그렇다고 마냥 개기자니 분위기가 점점 이상하게 흘러가고.
하지만 이 상황에서 여장을 하고 부채춤을 추게 된다면 그동안 부하들 앞에서 큰소리쳤던 체면은 어찌할 것인가?
두 천두는 결국 버티기로 했다.
‘최대한 버팅기다가 마지막에 못 이기는 척 고개 한번 숙여 주면 될 일이지.’
‘설마 진짜 죽이기라도 하겠어?’
……하지만 때로는 있다.
사람 잡는 설마라는 것이 말이다.
적향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도끼를 들었다.
“어쩔 수 없지.”
“……?”
“사감은 없다. 이해해라.”
“……!”
두 백두가 미처 반응할 시간도 없었다.
…퍼퍽!
검은 바람을 일으키며 날아든 쌍도끼가 각각 두 천두의 몸통을 세로로 양단해 버렸다.
푸파파파파팍! 후두둑- 후두둑- 후두둑- 후두둑- 후두둑-
피보라가 자욱하게 몰아친다.
피와 살점이 사방팔방으로 비산하여 소나기처럼 떨어져 내렸다.
“……!?”
“……!?”
“……!?”
뒤에 서 있던 백두들이 미처 뭐라고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적향이 말했다.
“군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은 채주의 죄이다. 하지만 졸개들이 제대로 전달된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은 천두의 죄일 것이다.”
“…….”
“그 뒤의 백두 두 명.”
“……!”
“너희들이 지금부터 임시 천두다.”
적향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까닥 턱짓했다.
“기녀복을 입고 부채를 들어라. 그리고 밑의 수하들을 지휘해라.”
허공으로 흩뿌려졌던 피 안개가 아직 다 가라앉기도 전이다.
어찌 감히 명령을 거역하겠는가.
“존명!”
지목당한 두 백두, 아니 임시 천두들은 황급히 기녀 옷으로 갈아입었다.
텁석부리 수염, 떡 벌어진 가슴팍에 숭숭 난 털, 알통 굵은 허벅지가 비단 옷감이 사락사락 스친다.
두 천두는 어느덧 기생 복장이 되었다.
그들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다른 백두들과 십두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뭣들 하나!? 채주님의 명령이시다!”
“빨리 환복해 이 새끼들아! 콱 마!”
그러자 다른 백두들과 십두들 역시도 부리나케 움직였다.
눈앞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가진 백두 둘이 일합에 살해당하는 것을 본 직후인지라 손들이 분주하다.
이윽고, 두 천두를 비롯한 모든 수적들이 기녀복장을 걸친 채 부채를 들었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던 적향이 비로소 두 천두에게 명령을 내렸다.
“일합. 가로베기.”
두 천두가 큰 목소리로 복명복창을 하자 휘하의 수많은 수적들이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부채를 휘둘렀다.
“이합. 세로베기.”
무수한 부채들이 척척 일사불란하게 뻗어 나간다.
“삼합. 정면 찌르기.”
적향의 명령은 마지막까지 추상처럼 지켜졌다.
“…….”
“…….”
“…….”
그 세 가지 동작을 펼치는 동안 수적들은 하나같이 묘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그것은 눈앞에서 지휘관이 살해당했다는 것에 대한 공포도 아니었고, 팔자에 없던 여장을 하고 있다는 것에서 오는 자괴감도 아니었다.
하나의 거대한 조직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에 대한 일체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거대한 유기체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에 대한 소속감.
인백정 치하에서 점점이 파편화 되어 있었던 오합지졸들이 하나의 거대한 물결을 이루는 질서 속에 편입되는 경험을 해 보았다.
부하들의 표정이 바뀌는 것을 본 적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추이의 말이 맞았어.’
수적들을 지배하는 것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공포와 힘뿐만이 아니었다.
소속감과 일체감.
개인이 아닌 집단.
집단과 규율의 논리.
그것이 강물 위를 뿔뿔이 표류하던 수적들을 하나의 세력으로 규합할 수 있었던 원동력인 것이다.
거정 공제환은 이 점을 꿰뚫고 있었고, 그의 제자였던 인백정은 이 점을 간과했다.
…착! …착! …착! …착!
그 뒤로 수적들은 적향의 명령에 절대복종했다.
기생 옷을 입으라면 입었고, 벗으라면 벗었다.
부채를 펼치라면 펼쳤고, 흔들라면 흔들었다.
말마따나, 위에서 까라면 까는 놈들이 된 것이다.
그리고 까라면 까는 자신에게 묘한 자부심이 들고 조직에 충성하는 스스로가 꽤나 멋진 놈이 된 것처럼 느껴져 갈 무렵, 적향은 지시를 끝냈다.
“…….”
“…….”
“…….”
도열해 있는 수적들의 표정과 눈빛은 상당히 바뀌어 있었다.
칼 같은 군기와 뚜렷한 눈빛.
짝다리를 짚고 있던 놈은 차렷 자세로 섰고, 팔짱을 끼고 있던 놈들은 두 주먹을 꽉 말아쥔 채 허벅지에 붙였다.
모든 이들의 가슴과 허리가 딱 펴졌고 시선은 적향 하나를 향해 고정되어 있는 채였다.
한편.
“…….”
추이는 적향의 의자 옆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서 옛날 일을 회상하고 있었다.
‘군을 다스릴 때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다섯 가지가 있다.’
한때 군에 몸담고 있었던 시절, 추이를 가르쳤던 지휘관이 했던 말이었다.
‘첫째는 명분(一曰道), 둘째는 날씨(二曰天), 셋째는 지형(三曰地), 넷째는 장수(四曰將), 다섯째는 군율(五曰法)이다.’
추이가 있던 전장은 하루에도 몇 번씩 오랑캐들과의 격전이 벌어지던 최전선.
군율이 살벌하리만치 엄격하게 지켜지던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던 추이는 어떻게 해야 군 기강이 바로 세울 수 있는지 빠삭하게 체득하고 있었다.
기강이 해이해진 수적들을 빠릿하게 만드는 것쯤이야 일도 아닌 것이다.
‘……자, 이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로군.’
아직 진짜 작업은 착수하지도 않았다.
지금부터가 재밌어질 시간이었다.
창귀무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