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삼령오신(三令五申) (2)
무너진 석벽 너머에는 좁은 방 하나가 있었다.
가로 석 장, 세로 석 장, 높이 석 장의 텅 빈 공간.
방의 중앙에는 침대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악취는 침대 위에서 풍기고 있는 것이었다.
“……스승님.”
적향은 울었다.
붉은 피를 토하며, 손톱이 부러지도록 바닥을 긁으며 통곡했다.
침대 위에 놓여 있는 시체는 거의 해골만 남은 채로 비쩍 말라붙어 있었다.
거정(巨丁) 공제환.
장강수로채라는 거대한 의적 무리를 만들었던 사파의 거두.
그의 최후는 너무나도 비참한 것이었다.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던 견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인백정 그놈, 스승님이 어지간히도 두려웠던 모양이야. 다 죽어 가는 노인네 숨통 끊는 게 뭐가 어렵다고, 독에, 감금에, 물 한 모금 안 주고…….”
살아생전 공제환의 무력과 위명을 생각하면 이해가 아주 안 가는 것도 아니다.
그때, 적향이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침대의 뒤편에 세워져 있던 커다란 도끼 한 쌍이었다.
시커먼 도끼날이 서슬 푸르다.
적향은 손을 뻗어 쌍도끼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비로소 그곳에 글씨 하나가 보였다.
私道聯主
‘사도련주’.
공제환이 생의 마지막 순간 자신의 피로 적어 놓은 글귀.
그것을 본 적향이 이를 뿌득 갈았다.
“그랬군요 스승님. 제 부모의 원수가 바로 사도련주였군요…….”
공제환은 죽기 직전 적향의 원수가 누구인지 알려 주었다.
언젠가 이곳을 찾아올 이는 그녀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제가 이곳을 찾아올 실력이 된다면 원수가 누구인지 알 자격이 있다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복수를 꿈도 꾸지 말라는 뜻이셨겠지요.”
적향의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그녀는 공제환이 남긴 흑색의 쌍도끼를 소중하게 받아 들었다.
“스승님. 인백정은 죽었고 그를 따르던 사형들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이제 저는 스승님이 남기신 장강수로채를 접수하려 합니다.”
이제 장강수로채는 원래의 취지대로 돌아갈 것이다.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한 이들을 털어서 약하고 가난한 이들을 구휼하는 의적 집단.
그동안의 탐욕스러운 생활로 인해 반발하는 이들이 나오겠지만 상관없다.
적향은 힘으로라도 이 모든 것들을 변화시킬 생각이었으니까.
“비록 당장은 세력이 조금 축소되겠지만, 장차 힘을 길러 장강수로채를 더욱 큰 세력으로 만들겠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사도련에도 복수하겠습니다.”
사도련에는 홍공이 숨어 있다.
그 홍공으로 인해 인백정이 타락했고 그 때문에 장강수로채에도 혈사가 벌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당장 사도련을 탈퇴하고 싶지만, 그것은 아직 시기상조였다.
군자보구(君子報仇) 십년불만(十年不晩)이라.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는 법이다.
적향은 홀로 긴 싸움을 준비하려 하고 있었다.
한편, 추이는 그런 적향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마침 나도 사도련에 볼일이 있던 참이지.’
홍공이 사도련에 정식 손님 자격으로 머물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사도십오주의 한 세력과 결탁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을 수도 있고, 사도련의 한 인물을 죽이고 그의 신분으로 위장하여 살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다만 어찌 되었든 간에, 지금 그가 사도련에 몸담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것은 추이가 전생의 오자운에게 직접 들었던 정보였다.
‘그렇다면 결국 사도련과의 충돌은 필수불가결한 일.’
기이하게도 추이와 적향은 목표가 겹친다.
어쩌면 그녀를 조금 더 오래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추이는 생각했다.
* * *
한때 공제환의 방에서 인백정의 방으로 변했다가 이제는 적향의 방이 된 공간.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적향과 견술은 관계를 깨끗하게 정리했다.
“채주나 부채주 자격으로 산채에 남아 줬으면 해, 사형.”
“싫어.”
“알겠어.”
적향은 견술에게 남기를 권했고, 견술은 거부했으며, 양자 간에 두 번의 권유는 오가지 않았다.
…탁!
적향은 추이의 앞에 따듯한 차를 한 잔 내려놓았다.
“절벽이 무너졌을 때 바로 구하러 가지 못해서 미안해. 스승님이 살아 계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마음이 급했어.”
춥고, 좁고, 어둡고, 건조한 방에 갇혀 죽어 갔던 공제환.
하지만 적향은 마지막 순간까지 스승을 향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었다.
그것을 알기에 추이는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
옆에 있던 견술이 추이의 어깨를 자신의 어깨로 툭 쳤다.
“보니까 뭐, 별로 죽을 정도로 큰 상처도 아닐 것 같더구만.”
“이봐요. 가슴이랑 옆구리가 거의 다 갈라져 갖고는 얼음물에 빠졌는데 그게 어떻게 큰 상처가 아니에요? 보통 사람이었으면 죽어도 수백 번은 죽었겠구만.”
그러자 반대편에 있던 남궁율이 한심하다는 듯 쏘아붙였다.
견술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그런데 아까부터 뭐니 너는?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어?”
“저는 남궁세가의 남궁율이에요. 등천학관에서는 검화라는 과분한 별호로 불리고 있지요.”
“정파 명문가의 규수로군. 근데 둘이 뭔 사이야? 뭔데 서방님 챙기는 것처럼 우리 예쁜이 옆에 그렇게 찰싹 붙어 있지?”
견술은 추이와 남궁율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서방님’이라는 단어를 들은 남궁율의 귀 끝이 일순간 붉어졌다.
그때, 추이가 짧게 대답했다.
“무관계다.”
“무, 무관계라뇨!? 우리가 지금껏 함께한 시간이 얼만데……!”
“……?”
남궁율의 반박에 추이가 고개를 돌렸다.
‘얼만데?’라고 묻는 듯한 그 표정에 남궁율은 말을 더듬었다.
“그야…….”
그녀는 뭔가 말하려다 말고 입술을 오물거렸다.
사실 남궁율이 안휘에서부터 이곳 사천에 이르기까지, 추이를 뒤쫓아 왔던 나날은 상당히 길었다.
실로 길고도 길었던 인고의 여정이었다.
하지만 정작 실제로 둘이 함께했던 시간 자체는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즉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간에, 내적인 친밀감이 잔뜩 쌓여 있는 쪽은 일방적으로 남궁율 혼자뿐이라는 뜻이다.
‘그래도 동굴에서의 일이 있는데 어떻게 무관계라고……! 그것도 저렇게 딱 잘라서……!’
남궁율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차마 그것들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그저 그녀 스스로조차도 근원을 알 수 없는 강렬한 서운함에 몸을 파르르 떨 뿐.
그것을 쭉 지켜보던 견술이 그녀의 심기를 살살 긁었다.
“기운 내. 짝사랑은 원래 힘든 거야.”
“말을 함부로 하시는군요. 남들의 관계를 제멋대로 단정 짓는 것은 좋은 버릇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껏 사랑 같은 것에 관심을 두었던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고요.”
“원래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르는 거지~”
남궁율이 으르렁거리듯 말했지만 견술은 계속해서 실실 쪼갤 뿐이었다.
그때, 적향이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됐어 그만해. 속 시끄러워.”
그녀는 견술에게 핀잔을 주는 동시에 남궁율에게 선을 그었다.
“왜 정파의 인물이 여기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장강수로채의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면 굳이 상관 않겠어. 지금은 신경 쓸 일이 많아서 복잡하니까.”
말마따나, 적향은 심경이 복잡했다.
거정 공제환의 뒤를 이어 장강수로채를 하나로 통일하려면 많은 작업들이 필요했다.
아마 며칠 밤을 꼬박 새워도 모자랄 것이다.
적향은 추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튼, 다시 한번 고마워. 덕분에 스승님의 원수를 갚을 수 있었어. 창값은 받고도 남을 만큼 받은 셈이지.”
“다행이군.”
“이제부터 추이, 너는 내 친구인 동시에 장강수로채 전체의 친구야. 네게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가 만사 제쳐 놓고 너를 도울 거고.”
그러자 견술이 다시 한번 이죽거렸다.
“그 말을 지키려면 우선 장강수로채부터 완벽하게 통일해야겠네. 이대로라면 사형들이 이끌던 잔당이 네 통제를 들을 리 없으니까 말이야.”
“명분은 충분해. 나는 스승님의 후계자고 채주 계승권을 가지고 있어. 각 채의 백두들이라 해도 내 통제를 거스를 권리는 없을 텐데?”
“명분이야 그렇지. 그런데 수적패거리들이 그 명분이라는 것을 순순히 따르겠어? 그 무식하고 욕심 많은 바보들을 너무 높이 사는 거 아니야?”
견술의 말에 적향이 인상을 썼다.
사실 이 점이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적향은 공제환의 막내 제자이니만큼 채주직 계승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수적들의 세계에서는 힘의 논리 역시도 중요하다.
과연 남은 부하들이 순순히 자신의 말에 따라 줄지, 그것이 관건이었다.
견술이 팔짱을 낀 채 말을 이었다.
“떠나는 마당에 조언 하나 하자면…… 채주 자리에 오르자마자 칼춤을 한번 추는 것이 좋을 거야.”
“칼춤?”
“명분도 좋은데, 공포는 더 좋아. 피를 보여 줘서 본보기를 세우라는 거지. 그게 새로운 채주의 위엄을 세우는 길 아니겠어?”
공금을 횡령하거나 사적으로 약탈을 한 범죄자들을 색출해서 처형하는 것.
그것이 장강수로채가 다시 의적 집단으로 돌아가는 가장 빠른 길이기도 했다.
하지만 적향은 난색을 표할 뿐이었다.
“목에 칼 댈 놈들을 추리라 이거지?”
“그럼. 공포를 이용해서 압제하는 것이 최고야. 무식한 수적 새끼들한테는 그게 직빵이거든. 그동안 마음에 안 드는 새끼들 명단 추려 놨을 것 아냐? 안 추려 놨으면 지금부터라도 추려. 있는 죄 없는 죄 다 뒤집어씌워서.”
“으음, 뒤 구린 놈들 명단이야 있지. 물론 심증만 있어. 물증은 없지. 그리고 그놈들이 꼬불친 재물들을 어디에 숨겨 놓았는지도 모르고.”
“뭐, 요원한 일이긴 하지. 그것만 된다면 각 채들을 장악하는 데에 아무런 무리가 없을 텐데 말이야.”
견술 역시도 고개를 갸웃한다.
자기가 말을 꺼내기는 했지만 방법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때.
“충분히 가능하다. 내가 할 수 있지.”
추이가 입을 열었다.
적향과 견술, 그리고 남궁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돌아본다.
추이가 먼저 도움을 주겠다고 말하는 것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추이는 진지했다.
“자고로, 윗대가리가 바뀌었을 때 부하들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서 숙청을 하는 것은 오래된 불문율.”
물론 아무나 숙청할 수는 없다.
죄를 지은 놈들 중에서도 유독 통제가 잘 되지 않는 공신들 위주로 해야 한다.
추이는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공금 횡령 정황이 뚜렷한 놈들 중에서도 은닉 재산의 행방을 알 수 없는 놈들로 몇 놈 추려 봐라.”
“그리고?”
“구실을 내가 만들 테니 즉결처분권을 다오.”
추이의 말을 들은 적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쯤이야 얼마든지. 어차피 네게는 명예 천두직을 줄 생각이었어. 근데 그다음에는 뭘 할 생각이야? 어떤 처분을 하려고?”
적향의 질문에 견술과 남궁율 역시도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안 해도 다들 궁금한 모양.
이윽고, 추이가 대답했다.
“이제부터 나는 무림맹으로 갈 생각이다.”
“그렇군.”
“하지만 아마 쉽게 가기는 힘들겠지. 사도련에서 나를 노리고 자객들을 보내올 테니 말이야.”
“그렇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추이는 이미 업보를 많이 쌓았다.
흑도방과 패도회를 몰살했고 수금을 왔던 사도련의 곤귀까지 죽였으니 말이다.
이윽고, 추이는 태연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무림맹으로 갈 때 장강수로채의 죄수들을 고기 방패로 삼을 생각이다.”
모든 이들의 표정이 멍하게 바뀐다.
그러는 동안에도 추이는 속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죄수라는 것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보여 줄 테니…….”
추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적향을 향해 마지막 말을 남겼다.
“앞으로 잘 보고 배워라.”
창귀무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