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귀무쌍-91화 (91/110)

91화 삼령오신(三令五申) (1)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 무의식의 숲속에는 다양한 심상의 나무들이 자라난다.

어둠 속에 자리하고 있는 울창한 숲.

추이는 그곳에서 잊고 있었던 유년시절의 기억을 마주하고 있었다.

…화르륵!

불타고 있는 제전.

야수 얼굴이 새겨진 가면을 쓴 주술사가 너울거리는 불길 앞에서 춤을 춘다.

붉은 얼굴, 위로 삐죽 솟은 엄니, 구리로 된 머리와 무쇠로 된 이마, 네 개의 눈, 여섯 개의 팔, 곰의 등, 소의 뿔과 발굽.

기괴한 외형의 전신탈 속에서, 주술사는 몸을 덩실덩실 흔들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千古奇才横空贤

-기이한 재주가 하늘을 덮는 천고의 현자여

可堪并论炎黄间

-염제와 황제 둘이라도 어찌 비하랴

五兵刑法君始点

-다섯 무기와 형과 법이 여기에서부터 시작했으니

九黎生气冲云天

-구리 백성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는도다

席卷中原华夏联

-염제와 황제를 누르고 중원을 석권하니

血染江河五千年

-피로 물든 강물이 오천 년을 흐르네

英名不因涿鹿败

-영웅의 이름은 탁록의 패전으로도 가릴 수 없으니

老黑石山百花鲜

-흑석산 온갖 꽃들 여전히 붉네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가면을 쓴 채 주술사의 몸짓을 따라 한다.

어린 시절의 추이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숲속에서 화살 한 대가 날아온다.

퍽-

춤을 추던 주술사의 목에 화살이 박혔다.

사람들 사이에 순식간에 혼란이 번져 나간다.

숲속에서 검은 복면을 쓴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창과 칼, 화살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 뒤, 학살이 시작되었다.

불길이 곳곳으로 번졌고 복면인들은 그 불빛에 의지해 마을 사람들을 죽였다.

추이는 도망쳤다.

부모와 형제들의 얼굴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저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는 화살을 피해, 무엇이 있을지도 모르는 어두운 숲속을 향해 달리고 또 달릴 뿐이다.

숲 곳곳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또래 어린아이들이 삶의 마지막 순간에 내지르는 단말마였다.

추이는 이를 악물고 뛰었다.

뛰고 뛰고 또 뛰고, 양쪽 폐가 터져 나갈 정도로 뛰었다.

눈앞의 어둠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고 화살은 금방이라도 등팍에 꽂힐 것 같았다.

바로 그때.

추이는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졌다.

죽음이 눈앞에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추이가 황급히 일어나서 다시 달리려 할 때.

…푹!

화살 한 대가 추이의 목을 관통했다.

*       *       *

“……!”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다.

추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두침침한 석회동굴.

바닥의 구덩이에는 작은 모닥불 하나가 피워져 있었다.

밖에서 강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니 장강의 본류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 같았다.

추이는 자신이 낙엽 더미 속에 알몸으로 파묻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 또 다른 누군가가 누워 있다는 사실 역시도.

바스락-

이윽고, 낙엽들이 흩어지며 그 속에서 누군가가 고개를 내밀었다.

“일어났군요.”

검화 남궁율. 그녀가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은 채로 추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추이는 몸을 일으켰다.

낙엽이 우르르 쏟아지자 추이의 상체가 그대로 드러난다.

남궁율은 얼굴을 붉혔다.

“아직 몸이 차요. 체온을 올리려면 조금 더 누워 있어야 해요.”

“네가 왜 여기에 있나?”

“오자운 대협 사건 이후로 계속 뒤쫓아 왔어요. 여기서 만난 것은 우연이지만요.”

남궁율은 삭정이 몇 개를 모닥불에 던져 넣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 역시도 거의 반라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자신의 옷차림을 자각한 남궁율이 한번 더 얼굴을 붉혔다.

“체, 체온을 올리려면 어쩔 수가 없어서…….”

“…….”

체온을 올리기 위해서는 둘 이상의 사람이 몸을 맞대고 있는 것이 효과적.

조난 시의 상식이다.

추이는 말없이 옷을 집어 들었다.

쉬이이익……

내공을 운용하자 옷의 물기가 순식간에 마른다.

추이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바싹 마른 피풍의를 몸에 걸쳤다.

“왜 따라왔지?”

“고맙다는 인사 같은 것은 없나요?”

남궁율은 일어나자마자 바로 추궁부터 하는 추이에게 서운함을 느끼는 듯했다.

“저도 목숨 걸고 물에 뛰어들었어요. 당신을 구하려고요.”

“구해 달라고 한 적은 없다. 그리고 역으로 올가미에 걸려 죽을 뻔했어.”

추이는 목에 난 붉은 자국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남궁율이 밧줄로 된 올가미를 걸고 끌어당기는 과정에서 난 자국이었다.

남궁율이 다시 한번 얼굴을 붉혔다.

“올가미는 미안하게 됐어요. 급한 대로 던지긴 던졌는데 하필 목에 걸릴 줄은 저도 몰라서…….”

“됐다.”

“그래도 어쨌든 제 덕에 목숨을 건진 거잖아요? 그냥 뒀으면 익사하거나 동사하거나 둘 중 하나였겠죠.”

“…….”

추이 역시도 미간을 찡그렸다.

“뭘 원하나?”

“…….”

추이의 말에 남궁율은 잠시 입을 닫았다.

이윽고, 그녀는 고심하던 끝에 대답을 내놓았다.

“당신을 만난 뒤, 제 정의관은 송두리째 흔들렸어요.”

남궁팽생 건과 오자운 건을 거치며 그녀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받은 모든 충격들을 다 합친 것보다도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늘 옳다고 믿어 왔던 본가의 정의가 뒤집어졌고 당연한 듯 따르던 정도의 정의 역시도 부정당했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

모든 집단은 이런 논리로 존속되기 마련이다.

그 기본적인 명제에 반하는 사례들을 몇 번이나 경험하며, 남궁율은 자신이 몸담고 있었던 조직과 그 정의관에 대하여 극심한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협객이라고 생각했던 남궁팽생 숙부는 추악한 악인이었고, 무림공적이라고 생각했던 오자운 대협은 의인이었어요.”

“…….”

“당신이 흑도방과 조가장, 패도회를 응징한 뒤에 붙여 놓았던 방(榜)도 다 읽어 보았고요.”

이윽고, 남궁율은 추이의 앞에 고개를 숙였다.

“당신을 따라다니며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요. 진정코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안목을 키우기 위해서요.”

추이의 미간이 한층 더 구겨졌다.

노골적으로 귀찮아하는 기색.

“안목을 키워서 뭘 하려는 건가.”

“더 강해질 수 있겠지요.”

“왜 강해져야 하지?”

추이는 적당히 말을 받아 준 뒤 남궁율의 부탁을 잘라 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남궁율은 상당히 의외의 대답을 내놓았다.

“언젠가 마교가 준동했을 때 한 사람 몫을 하려면 강해져야 하니까요.”

“…….”

남궁율의 대답은 상당히 원론적인 것이었다.

추이는 기억 속의 원마대전(元魔對戰)을 떠올렸다.

마교의 중원 침공, 그로 인해 수없이 죽어 나갔던 사람들.

추이는 지난 삶에서 그 아비규환의 참극을 이미 경험해 보지 않았던가.

남궁율이 말했다.

“조부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마교의 악적들은 지금도 시시각각 중원 침공의 야욕을 드러내고 있다고. 조만간 피바람이 불 것이라고.”

검왕 남궁천은 무림이 돌아가는 시류를 정확하게 짚을 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자세히 알지 못하는 자세한 내막들을 추이는 훤히 꿰고 있었다.

‘마교는 중원을 침공할 것이다. 하지만 그 목적은 단순한 지배가 아니지.’

그 말대로다.

마교가 중원으로 침투해 오는 것은 중원무림을 지배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사실 그보다는 마교의 본진을 뒤흔들어 놓고 도망친 배신자를 체포하여 처단하기 위한 것이 주목적.

그리고 그 배신자란 바로…….

‘혈마 홍공. 마교의 힘을 흡수하여 새로운 종교를 창시한 반역자.’

추이는 머릿속에 홍공의 얼굴을 떠올렸다.

한때 마교의 우신장차사(右神將差使)였던 홍공.

그는 현시점에도 마교의 추격을 받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를 처단하기 위해 중원으로 파견되는 이가 바로 훗날 좌신장차사(左神將差使)가 될 사망매화 오자운인 것이다.

‘홍공은 아마 마교의 자객들을 피해 사도련에 몸을 의탁하고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장강수로채의 인백정을 자신의 실험체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컸다.

사도련 내부에 자신의 세력들을 만들어 놓기 위해서 말이다.

“…….”

추이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마교를 피해 사도련에 숨어 자신의 야욕을 위한 밑작업들을 하고 있을 홍공.

그를 찾아내 죽이지 못한다면 지난 삶의 비극들이 똑같이 되풀이될 것이다.

앞으로 그가 일으킬 수많은 참극들을 떠올리자 추이의 미간이 더더욱 찡그려졌다.

그때.

“……?”

추이는 옆에서 빤히 느껴지는 남궁율의 시선을 느꼈다.

추이의 옆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남궁율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시선을 내리깐다.

남궁율은 지금껏 추이의 얼굴을 제대로 봤던 적이 별로 없었다.

추이가 항상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거나 얼굴에 잿가루를 묻히고 있었거나 하는 식으로 얼굴을 가렸었고, 남궁율 본인도 급박한 순간 늘 목을 잡히거나 바닥에 패대기쳐지거나 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남궁율은 추이의 맨얼굴을 아주 가까이서 보고 있었다.

한평생 남자를 가까이 해 본 적 없었던 그녀에게는 극도로 이례적인 경험이었다.

“…….”

“…….”

동굴 속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이윽고, 남궁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는 어디로 가시나요?”

“…….”

“혹 딱히 목적지를 두지 않으셨다면…… 함께 남궁세가로 가시는 것은 어떨까요?”

추이가 고개를 들자 남궁율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당연히, 당신에게 씌워져 있던 누명들은 제가 벗겨 드릴게요.”

“…….”

“사도련의 압박도 어느 정도 막아 드릴 수 있어요. 흑도방과 패도회의 일로 사도련주가 격노했다고 들었거든요.”

명분을 중시하는 무림맹에 비해 사도련은 실익을 상대적으로 더 중요시한다.

아마 흑도방과 패도회를 멸문시키고 곤귀 구강룡까지 죽인 추이를 그냥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추이는 장강수로채에서 큰 소란을 일으키지 않았던가.

남궁율이 말을 이었다.

“이미 사파 전체에 수배령이 내려왔어요. 개인으로서는 버티시기 고단할 것입니다.”

“…….”

“저와 함께 가셔요. 남궁세가가 뒷배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정도십오주의 한 기둥인 남궁세가가 비호하는데 어떤 누가 감히 마수를 뻗칠 수 있으랴.

남궁율의 목소리에서는 한껏 자신감이 묻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싫다.”

추이는 그녀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

홍공을 잡기 위해서 사도련과 격돌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다.

남궁율은 재차 권유했다.

“뭔가 따로 계획이 있으시겠지만, 남궁세가가 지원한다면 원하는 바를 더욱 빨리, 효율적으로 이루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

“제가 당신의 목숨을 한 번 구해 드렸잖아요. 그러니 속는 셈 치고 한 번 믿어 주세요.”

목숨을 구해 줬으니 도움을 받아 달라는 말이다.

다소 황당한 요구였다.

“…….”

추이는 잠시 고민했다.

남궁율은 저 자신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이윽고, 추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무림맹에는 한번 들를 생각이긴 했지.”

순간 남궁율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리고 그 직후, 그녀는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뭐야, 나 왜 좋아하지?’

하지만 그녀의 혼란은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추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기 때문이다.

“돌아간다. 마무리를 지어야 해.”

“아…….”

추이가 동굴을 나간다고 하니 갑자기 허전함이 밀려온다.

그녀는 추이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말고 황급히 피풍의 자락을 잡아당겨 가슴팍이 훤히 드러나 있는 자신의 몸을 가렸다.

‘이상하다, 아까부터 왜 이래 나.’

그녀는 이 동굴을 나간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이로 인한 혼란스러움을 동시에 겪고 있었다.

‘이, 이게 그건가? 옆에서 환자를 간호하다 보면 동정이 애정과 연모의 감정으로 변한다는……? 그래, 분명 그런 것일 거야. 일시적인 부작용일 뿐이야. 맞아, 그래야만 해.’

등천학관의 교양 수업에서 배운 이론까지 떠올리며 속마음을 추스르는 남궁율이었다.

*       *       *

추이는 동굴에서 나오는 즉시 장강수로채로 올라갔다.

길을 찾는 것은 쉬웠다.

봉우리 위에서 타오르고 있는 거대한 불길을 따라 올라가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이윽고, 추이와 남궁율은 불타고 있는 산채의 앞에 섰다.

잔불이 이글거리는 잿더미 사이로 한참 동안 들어가자 반쯤 무너져 있는 누각이 보였다.

그곳에는 적향과 견술이 서 있었다.

무너진 회색 벽 앞에서, 적향은 울고 있었고 견술은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벽 너머의 방, 풍겨 오는 악취.

“…….”

추이는 입을 다물었다.

무슨 상황인지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창귀무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