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장강혈사(長江血事) (5)
추이는 옛날의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어느 비 오는 날 밤, 홍공과 나누었던 대화다.
‘너는 운이 좋다. 너 이전에 다른 놈을 가르쳤을 때에는 이 무공이 불완전한 상태였거든. 그래. 이름이 가정맹이었던가? 그 가엾은 수적 놈이 지금은 뭘 하고 살고 있으려나?’
인백정 가정맹(苛政猛).
그는 지난 생의 홍공이 중원을 떠나기 전에 뿌려 놓았던 혈겁의 씨앗들 중 하나였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홍공이 정(定), 사(私), 마(魔)에게 쫓겨 중원을 완전히 떠나고 난 다음에야 창귀칭이라는 마공을 완성시켰다는 점이었다.
홍공이 수많은 임상실험들을 통해, 심지어 자신의 몸까지 실험체로 동원해 가며 창귀칭을 완벽하게 다듬어 냈을 그때.
그 시점에서 변방 중에서도 변방, 오랑캐들과의 전장에서 구르고 있었던 추이가 홍공과 만났던 것이다.
그러니까, 추이는 완전해진 창귀칭을 전수받은 홍공의 첫 제자이자 마지막 제자인 셈이다.
‘사실 제자라기보다는 실험체에 가까웠지만…….’
추이는 창귀칭의 힘을 끌어올렸다.
반대편에 있는 상대 역시도 창귀칭의 힘을 끌어올리고 있다.
하지만 추이의 눈에는 보였다.
‘딱 봐도 불완전한 단계군. 마공이 따로 없어.’
온전하게 완성된 창귀칭은 사실 마공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정순한 내공을 사용한다.
어느 정도의 경지를 넘어서게 되면 정신이 맑아지게 되며 몸 내부를 극단적으로 혹사시키던 것 역시도 일반적인 정종의 무공과 다를 바가 없게 된다.
심지어 추이는 묘족의 호흡법을 이용해 초반부의 부작용마저 완전하게 억제하고 있는 상황.
그래서 추이는 인백정이 현재 어떤 상태에 있는지 더더욱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었다.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고 땀에 피가 섞여 나온다. 욕망과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게 되고,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우며, 매사에 있어 자신의 힘을 과신하게 되겠지.’
지금 인백정의 상태는 개가 광견병에 걸려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그런 상태의 적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그 점에 대해 추이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죽도록 패는 것이 답이지.”
추이의 창이 기형적으로 꺾인다.
…철커덕! …철커덕! …철커덕! …철커덕!
총 네 개의 마디로 나뉜 매화귀창이 몸을 뱀처럼 꿈틀거렸다.
창대 사이에 연결된 쇠사슬 위로 붉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나기 시작했다.
촤아악-
검붉은 창날이 인백정을 향해 날아갔다.
“!?”
인백정은 황급히 만곡도를 들어 올렸다.
까-앙!
불똥과 내공의 파편들이 뒤섞여 튀었다.
칼은 휘어지고 창은 곧게 뻗어 나간다.
인백정은 칼등으로 창날을 위로 쳐올렸다.
그의 입가에 삐뚜름한 미소가 걸렸다.
“그렇군, 역시…… 홍공 그 늙은이, 나에게만 창귀칭을 가르쳐 준 게 아니었군.”
추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창을 회수했다.
현재 추이는 사백정과 인채의 백두들을 창귀로 만들어 부리고 있었다.
창귀칭의 숙련도는 무려 이올(彛兀)의 제사 층계에 속하는 수준.
회귀 전의 삶이었다면 마흔이 넘어서야 겨우 도달할 수 있었던 경지였다.
그러나.
“큭큭큭- 그렇다면 뭐라고 불러야 하나. 사제? 네놈 역시도 나의 사제가 되는가.”
인백정의 기세는 그런 추이의 것보다도 훨씬 더 크고 강대했다.
“좋다 사제. 하지만 그 정도로는 나를 누를 수 없다.”
인백정이 든 만곡도가 빠르게 휘둘러졌다.
시뻘건 참격이 날아들어 추이의 목을 노린다.
따-앙!
추이는 창대를 비틀어 인백정의 참격을 흘려보냈다.
그 위로 인백정이 휘두르는 참격의 초승달이 무더기로 떨어져 내렸다.
콰콰콰콰콰쾅!
지면이 쩍쩍 갈라진다.
절벽가의 지형이 통째로 뒤바뀌고 있었다.
인백정은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온갖 전쟁터를 떠돌며 창귀들을 모았다. 너 같은 애송이하고는 머릿수가 달라.”
그 말대로였다.
추이의 눈에는 또렷하게 보였다.
인백정의 뒤로 어마어마한 수의 창귀들이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
그리고 그중에는 얼마 전에 창귀가 된 것으로 보이는 자백정 서우학과 축백정 우철우도 섞여 있었다.
“그뿐이냐? 내가 누구를 잡아먹었는지 보아라.”
인백정이 전신의 내공을 폭사시켰다.
피의 안개가 낀 듯, 시야가 온통 붉게 물들었다.
츠츠츠츠츠츠츠츠……
만곡도의 끝에서 붉은 아지랑이들이 피어나더니 이내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다.
거정(巨丁) 공제환. 한때 장강 일대를 통째로 지배했던 초절정고수의 얼굴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인백정은 칼끝에 피어난 옛 스승의 얼굴을 황홀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스승님 하나를 잡아먹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올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
“보아하니 너도 제법 창귀들을 많이 모은 모양이다만…… 운이 나빴구나. 하필 상대가 나라서.”
인백정이 만곡도를 높게 들어 올렸다.
또다시 시뻘건 내력이 모여들어 휘어져 있는 칼끝에 응축된다.
지이이이이이이잉-
만곡도가 울어 대는 소리가 절벽가를 쩌렁쩌렁 떨어 울리고 있었다.
번-쩍!
또다시 참격이 날아들었다.
인백정이 만곡도를 한번 좌에서 우로, 위에서 아래로 휘두를 때마다 절벽의 귀퉁이가 토막토막 잘려 나가 강물로 떨어졌다.
그 가공스러운 힘 앞에 적향과 견술은 이를 악물고 있었다.
“힘으로는 못 이겨!”
“정면승부는 피해야 돼, 예쁜아!”
하지만 둘의 조언은 닿지 않았다.
퍼퍼퍼퍽!
인백정의 칼끝에서 흩뿌려진 도루(刀淚)는 추이의 전신 곳곳을 베어 가르며 선혈을 흩뿌려 놓았다.
“…….”
추이는 계속해서 창을 찔러 넣었으나 변칙적으로 움직이는 매화귀창의 움직임도 인백정의 힘을 이기지는 못했다.
핏-
추이의 창은 인백정의 팔이 접히는 부분의 팔오금을 스치고 지나갔다.
…퍼억!
반면 인백정의 칼은 추이의 가슴팍을 길게 베었다.
핏-
추이는 재빨리 몸을 옆으로 비틀어 창을 찔러 넣었으나 이번에도 인백정의 무릎 뒤의 오금을 가볍게 스치는 것에서 그쳤다.
퍼-억!
인백정은 발을 뻗어 그대로 추이의 배를 걷어찼다.
…콰쾅!
내력이 실린 발길질은 바위도 부순다.
그런 것을 배에 정통으로 얻어맞았으니 피를 토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우지지지지직!
추이는 뒤로 날아갔고 커다란 바위 하나를 부순 뒤 그 너머에 있는 소나무까지도 뿌리를 드러내게 만들었다.
“아아…….”
적향의 입에서 끊어지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믿었던 추이조차도 이 꼴이다.
인백정의 무공은 이제 절정을 넘어 초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복수의 길 앞에 점차 불가능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벽이 세워져 가고 있는 것이다.
저벅- 저벅- 저벅-
바닥을 나뒹구는 추이의 앞으로 인백정이 걸어왔다.
느긋한 발걸음, 비릿한 미소는 그가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 준다.
절대적인 확신.
인백정은 자신의 전신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거대한 힘에 흠뻑 취해 있었다.
“암만 날뛰어도 창귀의 숫자를 뒤집을 수는 없다.”
“…….”
추이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창을 휘둘렀다.
키리리릭- 피잇!
채찍처럼 날아든 창끝은 인백정의 반대쪽 팔오금과 오금을 스치며 지나갔다.
인백정의 표정이 구겨졌다.
추이는 아까부터 겨드랑이나 오금 등, 피부가 접히는 동시에 뼈와 뼈 사이가 연결되는 부위들을 집요하게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저 살가죽 표면에 미세한 상처를 입었을 뿐이다.
상대는 그 대가로 가슴팍과 허리에 깊은 검상을 입었고 저렇게 절벽 끝에 몰리기까지 하지 않았나.
이 시점에서 인백정은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때, 추이의 입이 열렸다.
“불완전한 창귀칭은 한낱 마공일 뿐.”
“큭큭큭- 마지막에 가서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인백정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내력이 핏방울처럼 뚝뚝 떨어져 내리는 만곡도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속에 담아 두었던 말을 꺼냈다.
“홍공. 그자는 내게 창귀칭을 주었다.”
“…….”
“나를 인정해 주지 않던 스승도, 항상 내 앞에 있었던 사형들도, 모두 찍어 눌러 버릴 수 있는 힘을 준 거야.”
“…….”
“그런 마당에 마공이 뭐가 어때서? 정도의 무공인지, 사도의 무공인지, 그것이 뭐가 중요하다는 말이냐?”
인백정의 눈에는 광기가 번들거린다.
위로 올라갈 수만 있다면 마공을 익히는 것이 뭐가 대수냐는 듯한 태도였다.
하지만.
“……!”
앞으로 한 발자국을 내딛는 순간, 인백정의 미소는 곧바로 사라졌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인백정은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파들파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린다.
마치 다른 누군가에게 붙잡혀 있는 듯 말을 듣지 않는 손.
‘뭐지?’
인백정은 당황했다.
뭔가 싶어 발을 뒤로 빼려 했지만.
“……!”
이제는 발도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적향과 견술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왜 저래?”
지금껏 잘 날뛰고 있던 인백정이 갑자기 굳은 몸으로 삐걱거리고 있으니 당연한 소리다.
“뭐, 뭐냐? 무슨 사술이냐 이게?”
인백정은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우득- 뿌드득! 빠각- 뿌지지직!
관절 부근이 삐걱거리며 곳곳에서 살가죽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인백정은 그제야 깨달았다.
추이의 창이 스치고 지나가며 생긴 얕은 상처들.
그 상처들이 지나가고 난 곳을 기점으로 마비가 시작되었다.
가령 팔오금이 베이고 난 뒤부터는 팔꿈치 아래 전체가 말을 듣지 않는 느낌이었다.
인백정이 버럭 소리 질렀다.
“뭐야 이게!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것이냐!?”
“그러게 말하지 않았나. 불완전한 창귀칭은 한낱 마공일 뿐이라고.”
추이의 말에 인백정의 눈이 다시 한번 돌아갔다.
“마공인 것 안다! 마공이 뭐가 어떻다는 거야! 나는 이걸로 다 손에 넣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동시에 그의 몸 곳곳에서 피 분수가 폭발했다.
…푸슉! …뿌슉! …푸슈슉! 퍼퍼퍼퍼펑!
몇 방울의 피가 배어 나오는 것이 고작이었던 잔상처들이 일제히 쩍쩍 벌어지며 엄청난 양의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우드득! 뿌드득! 뚜각!
움직이지 않던 인백정의 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악귀 같은 기세로 만곡도를 들어 올리는 인백정.
그 무시무시한 살기 앞에 적향과 견술조차도 숨을 죽이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가 좀 나쁘구나, 너.”
뒤이어지는 추이의 말이 인백정의 표정을 멍하게 만들어 놓았다.
이윽고, 추이의 창이 인백정을 겨눈다.
“불완전한 창귀칭은 한낱 마공일 뿐. 이 명제에서 중요한 것은 ‘마공’이라는 점이 아니다.”
“……?”
동시에, 추이의 몸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작살처럼 쏘아지는 추이의 창이 그대로 인백정의 심장을 향했다.
인백정은 만곡도를 휘두르려 했지만.
…떠걱!
또다시 팔이 멈춰 버렸다.
“으극!?”
순간, 자신의 팔을 돌아보는 인백정의 목과 턱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또다시 몸의 관절과 뼈의 접합부 마디마디에서 대량의 피분수가 폭발했다.
그 앞으로 추이의 그림자가 빠르게 드리워진다.
“중요한 것은.”
이윽고, 인백정의 코앞까지 다가간 추이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불완전하다’는 점이야.”
창귀무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