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장강혈사(長江血事) (4)
콰콰콰콰콰콰콰……
절벽 밑으로 장강의 본류(本流)가 흐른다.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적향과 견술의 앞에 미친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저벅- 저벅- 저벅-
인백정(寅白丁).
시뻘겋게 타오르는 그의 두 눈에서는 통제할 길 없는 광기가 엿보인다.
“오랜만이야 사제들.”
인백정이 웃었다.
입꼬리는 호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적향과 견술은 피로 물든 몸을 곧게 세웠다.
스승의 원수, 형제들의 적이 지금 눈앞에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향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 ……! ……!”
압도적인 살기(殺氣).
인백정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는 그것이 그녀의 몸을 거대한 구렁이처럼 휘감아 조이고 있는 탓이다.
이윽고, 인백정은 손을 뻗어 진백정의 머리채를 잡았다.
뿌드득!
반쯤 잘려 나가 있던 목이 뜯어져 나왔다.
인백정은 진백정의 목을 덜렁덜렁 몇 번 흔들더니 그대로 흙바닥에 집어 던졌다.
“이 녀석이 동창의 첩자였을 줄이야. 까맣게 몰랐네.”
만곡도(蠻曲刀)에 실린 인백정의 내공이 불길처럼 이글거린다.
그것은 굽이진 칼등을 타고 흐른 끝에 날카로운 칼끝에 방울방울 맺혔다.
그러고는 혈액처럼 붉은 방울로 변해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는 것이다.
“황궁의 정보 조직은 정말 넓게도 퍼져 있구나. 이거 나랏님 귀에 들어갈까 무서워서 어디 맘 편히 수적질 하겠나.”
인백정이 만곡도를 아래로 늘어트린 채 적향과 견술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마치 붉은 초승달이 밤하늘에서 내려와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스승님은 왜 이런 떨거지 같은 놈들까지 다 품고 계셨던 걸까? 이해가 안 돼.”
인백정이 멈춰 섰다.
적향과 견술은 그로부터 불과 다섯 장 거리에 있었다.
적향이 이를 악물었다.
“여기까지 직접 나올 줄은 몰랐네.”
“직접 나와야지. 무려 스승님이 가장 아끼시던 우리 해 사매를 맞이하는 건데 말이야.”
“…….”
스승에 관련된 말이 나오자 적향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인백정은 그런 적향을 놀리듯 말을 이었다.
“스승님께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내 알려 주랴?”
“……!”
적향이 눈에 띄게 동요한다.
숨이 거칠어졌고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더운 피가 점차 많아졌다.
인백정은 그런 변화를 즐기듯 턱을 쓰다듬었다.
“처음에는 그냥 노환이었지. 어느 순간부터는 거동도 힘들어 하시더군.”
“…….”
“그래서 방으로 뫼시고 침대에 눕혀 드렸어. 따끈한 탕약도 한 사발 드렸고.”
“…….”
“아 참. 그 탕약은 사 사제가 만들었던 거야.”
“……!”
인백정은 지금 사백정 당삼랑을 언급하고 있었다.
그는 맹독 제조 연구 과정에서 비인도적인 행위를 한 것이 적발되어 사천당가에서 제명당한 미치광이.
그런 놈이 만든 탕약이 정상적인 것일 리가 없었다.
인백정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탕약을 드시니까 몸이 뜨거워지셨는지 계속 물을 찾으시더군.”
“…….”
“나중에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저 이불만 쥐어뜯으면서 물을 달라고 하는데…… 그 목소리가 너무 듣기 싫은 거야.”
“…….”
“그래서 그냥 방문 앞에다가 벽돌을 쌓고 회반죽을 발라 버렸어. 끝.”
인백정은 결국 폭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스승님이 돌아가셨는지 아직 살아 계시는지는 나도 모른다 이거야.”
“…….”
“걱정되면 얼른 물 한 사발 떠서 들어가 봐. 그런데 회반죽이 벌써 꽤 단단하게 굳어서, 깨트리려면 고생 좀 할 거야.”
인백정의 마지막 말에 결국 적향의 눈이 돌아갔다.
“이 개만도 못한 새끼가!?”
적향이 두 자루의 도끼를 들고 달려 나갔다.
배를 둘둘 휘감고 있는 쇠사슬 사이로 핏물이 마구 뿜어져 나왔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깡! 쩌-엉!
인백정은 만곡도를 가로로 뉘여 적향의 쌍도끼를 막아 냈다.
둘은 순식간에 십여 합을 주고받았다.
적향의 쌍도끼는 인백정의 칼에 막혀 빗나가거나 튕겨 나갔지만 인백정의 칼은 적향의 복부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까가각! 뚝!
적향의 배에 감겨 있던 쇠사슬이 끊어지며 상처가 또다시 벌어졌다.
이대로 두면 정말로 창자가 흘러내릴 것 같았기에, 적향은 서둘러 손으로 배를 누르고 뒤로 물러났다.
인백정은 그런 적향을 느긋하게 뒤쫓았다.
“상처입은 돼지가 범을 피해 산속으로 도망치는구나. 글쎄 어떨까, 살 수 있을까?”
“…….”
적향은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이윽고, 그녀는 도끼 하나를 버리고 한 손으로는 배를 감쌌다.
그리고 다른 손에 든 도끼를 붕붕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인백정은 또다시 웃었다.
“근성 하나는 대단하구나. 이러니 스승님께서 너를 아끼셨던 게지.”
하지만 근성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쩌-억!
인백정의 만곡도가 새빨갛게 타오르는가 싶더니 그대로 적향의 도끼를 잘라 버렸다.
단단한 무쇠로 만들어진 도끼날이 잘려 나가며 적향의 가슴팍에도 긴 상처가 남았다.
…쿵!
적향은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마른 솔잎과 축축한 흙이 피범벅된 상처에 온통 범벅되었다.
그때쯤 해서, 인백정은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개작두를 든 견술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인백정이 말했다.
“술 사제. 너는 왜 안 덤비니?”
“틈을 보고 있는 중.”
“그렇구나.”
견술의 대답에 인백정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사제들 중에 너를 가장 아꼈었다. 알고 있니?”
“몰랐는데. 그럼 살려 줄 거니?”
“아니. 그건 아니고.”
“아깝네.”
“아깝긴. 그래서 내가 너에게 수차례 구애를 했잖니. 다른 사제들 오기 전에 미리 내게로 오라고. 왜 그때는 말을 안 들었니?”
인백정은 지금껏 견술을 휘하에 넣기 위해 꽤나 애를 썼었다.
하지만 견술은 지금껏 인백정의 구애를 모두 거절해 왔다.
그래서 인백정은 그것이 아무도 따르지 않는 견술의 성향이거니 하고 포기하고 있었던 참인데…….
“따라다니고 싶은 사람을 만났거든.”
견술의 대답은 인백정의 미간을 찡그려지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인백정이 물었다.
“나보다 더?”
“너는 애초에 논할 거리조차 못 됐지.”
“네가 따라다니고 싶다는 그 사람이 해 사매는 아닐 거고. 으음…….”
견술의 대답을 들은 인백정은 고민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럼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을 선택한 이유가 뭔데?”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한 인백정의 질문에 견술은 일언지하로 대답했다.
“너는 별로 재미가 없어.”
“…….”
인백정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불쾌감은 곧 살기로 변해 주변의 대기를 끓인다.
공기 중의 수분이 순식간에 말라붙었고 주변 모든 것들의 표면이 미세하게나마 쩍쩍 갈라졌다.
“내 것이 되지 않겠다면…….”
“죽으라 이거지?”
“대화가 빨라서 좋아. 그래서 아까워.”
인백정의 만곡도와 견술의 개작두가 붙었다.
콰-쾅!
쇠붙이와 쇠붙이가 만났는데 마치 대량의 화약이 터져 나가는 듯한 굉음이 울려퍼졌다.
견술은 작두날을 긁어내리는 만곡도를 위로 튕겨 내는 동시에 몸을 뒤로 회전시키며 발차기를 날렸다.
하지만 인백정은 견술의 발길질을 너무나도 쉽게 손으로 잡아챘다.
“시도는 좋았어.”
그리고 튕겨 올라갔던 만곡도를 그대로 다시 내리그었다.
발을 잡힌 견술은 별수 없이 작두를 들어 그것을 맞받아칠 수밖에 없었다.
…콰쾅!
균형을 잃은 견술은 그대로 땅바닥에 찍어 눌렸다.
인백정의 만곡도는 마치 태산을 얹고 있는 듯한 거력으로 견술을 내리눌렀다.
꽈드드드드드득!
만곡도와 개작두가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동안, 바닥에 처박힌 견술과 인백정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좆.”
“개면 개답게 바닥에 누워서 배를 보여야지.”
“까.”
견술이 피로 물든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그러고는 무릎을 세워 인백정의 사타구니를 올려 찍었다.
하지만 인백정은 몸을 옆으로 틀고는 발로 견술의 허벅지를 비틀어 밟았다.
뿌드드드득!
허벅지 안쪽의 살가죽이 비틀려 찢어졌다.
견술의 눈에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그때.
부-웅!
옆에서 날아든 손도끼가 인백정의 귀밑머리 끝을 자르며 지나갔다.
…퍽!
소나무에 박힌 손도끼.
그리고 미간을 찡그리는 인백정.
그 너머에서 적향이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일으켰다.
그때쯤 해서 바닥에 깔려 있던 견술도 몸을 데굴데굴 굴려 적향의 옆에 섰다.
인백정이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끝까지 발버둥치는 모습이 보기 좋네. 먼저 간 우리 사제 사매들한테는 그런 게 없었는데 말이야.”
“…….”
“곧 백두급들이 내려올 거야. 그때에도 이렇게 분발해 줬으면 좋겠어.”
곧 인백정의 부하들이 이곳에 당도한다.
적향과 견술에게는 더더욱 절망적인 흐름이었다.
……바로 그때.
툭-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날아왔다.
툭- 툭-
그것은 동그란 구체의 형태를 하고 있었고 색깔은 검붉었기에, 어둠 속에서는 무엇인지 한눈에 분간이 가지 않았다.
툭- 툭- 툭-
그것들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였다.
흙바닥 위를 데굴데굴 굴러오는 그것들을 인백정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뭐야 이거?”
그것은 사람의 머리였다.
인백정 휘하에 있는 백두들의 목.
그것들이 어둠 너머에서 계속해서 굴러오고 있는 것이다.
툭- 데구르르르르……
심지어 마지막에 굴러온 머리는 사백정 당삼랑의 것이었다.
“……!”
인백정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소나무숲 사이, 마른 솔잎들이 깔린 길 너머로 그림자 하나가 유령처럼 어른거렸다.
“드디어 만났군.”
추이. 무표정한 얼굴의 불청객이 그곳에 서 있었다.
인백정은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
추이의 앳된 얼굴은 도무지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인백정은 상황을 파악했다.
백두들에 이어 사백정의 목까지 들고 온 자라면 연령과는 상관없이 경계해야 할 적이다.
인백정이 헛웃음과 함께 말했다.
“내 사제들을 충동질한 놈이 너로구나. 아해야, 무슨 목적으로 이러는 것이냐?”
“새 창 값을 해야 하고, 또 겸사겸사 네 스승도 만나 볼 생각이다.”
“내 스승? 하하하- 오늘따라 스승님을 찾는 손님들이 많군. 아까 이미 다 설명 마쳤다. 벌써 굶어 뒈졌지 싶은데 말이야.”
추이의 대답을 들은 인백정이 빈정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추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스승 말고.”
“……?”
순간, 인백정의 몸이 멈칫했다.
그는 황급히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밤하늘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다.
달도 별도 구름도, 모든 것들이 두려움에 떨며 자취를 감추었다.
밤하늘의 정중앙에서 시뻘겋게 타오르는 별 하나만이 형형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분명히 아까까지만 해도 그랬을 터였다.
“!”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시커먼 밤하늘에는 붉은 별 하나가 더 떠 있었다.
같은 자리에서 불길한 빛을 발하고 있는 새로운 혈성(血星).
두 개의 시뻘건 별.
인백정이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후욱!
전방에서 검붉은 내력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수없이 많은 창귀들이 불길처럼 너울너울 춤추는 사이로 무시무시한 음성이 들려온다.
“홍공 어디 있냐.”
추이가 진짜 힘을 드러내고 있었다.
창귀무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