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장강혈사(長江血事) (3)
인백정의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이런.”
추이는 미간을 찡그렸다.
피 냄새는 짙은데 인기척이 없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추이는 상황을 파악하는 즉시 발걸음을 돌렸다.
목표는 깊은 숲속.
어둠만이 도사리고 있는 절벽가였다.
* * *
“야! 혼자 튀냐!? 이 치사한 새끼야!”
적향은 앞서 가는 견술을 향해 소리 질렀다.
그러자 견술이 경공술의 속도를 조금 줄였다.
이윽고, 적향의 옆으로 바짝 붙게 된 견술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잘 봐, 얘.”
“……?”
“이것이 숙달된 조교의 시범이란다.”
동시에, 견술은 몸을 옆으로 팩 돌렸다.
그 뒤에는 신백정이 막 두 개의 손바닥을 앞으로 뻗고 있었다.
“등짝에다가 일장을 때려박아 주마!”
신백정은 견술의 등에 손바닥을 날릴 생각이었다.
서서히 따라잡혀 가던 견술이 도중에 몸을 홱 돌리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억!?”
견술이 갑자기 멈추자 신백정이 당황했다.
원래 내뻗으려고 했던 손바닥이 잠시 엉거주춤해지는 순간, 견술은 양손으로 개작두의 양끝을 쥔 채 앞으로 내뻗었다.
썩-뚝!
가로뉘인 개작두가 신백정의 양손 엄지를 제외한 손가락 여덟 개와 목을 한꺼번에 날려 버렸다.
…쿠당탕탕!
신백정의 목과 몸뚱이는 달려오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앞을 향해 나뒹군다.
절정고수의 최후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허무한 것이었다.
견술이 어깨를 으쓱했다.
“잘 보고 배웠느뇨, 사매?”
“……잘 보고 배웠다, 사형.”
적향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이윽고, 그들의 앞으로 다섯 천두들이 내려섰다.
묘백정, 진백정, 오백정, 미백정, 유백정.
그들은 죽어 버린 신백정을 보며 이를 뿌득 갈았다.
“뒈져라!”
묘백정의 쌍검이 적향을 향해 휘둘러졌다.
미백정 역시도 사슬낫을 들어 적향에게 집어 던진다.
진백정, 오백정, 유백정 역시도 견술을 덮쳤다.
거대한 철퇴, 장창, 장검이 견술의 목을 노리고 일제히 날아들었다.
“숲으로 들어오길 잘했네.”
적향과 견술은 소나무 숲으로 더욱 깊숙하게 들어갔다.
단단한 암반 위에는 구불구불 휘어진 소나무들이 많다.
그 아래에는 장강의 본류(本流)가 시작되는 거대한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여기를 묫자리로 정했나?”
오백정이 장창을 휘두르며 달려왔다.
견술이 개작두를 들어 장창을 막아 낸다.
까-앙!
불똥이 튀며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던 윤곽들이 드러나 보인다.
진백정과 유백정이 철퇴와 칼을 들고 견술의 좌우 양쪽을 노렸다.
바로 그 순간.
…퍼억!
견술은 오백정의 가슴팍을 걷어차고는 개작두를 옆으로 틀었다.
쩌억-
소나무의 허리가 베이며 나무조각들이 튀었다.
그걸 본 오백정은 코웃음 쳤다.
“어두워서 안 보이냐? 어디로 휘두르는…… 억!?”
그는 말을 하다 말고 재빨리 눈을 가렸다.
견술이 작두로 내리찍은 소나무의 허리 부근에서 시뻘건 송진이 튀어 오백정의 눈에 들어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견술은 슬쩍 앞으로 다리를 뻗었다.
툭-
앞으로 달려오는 중이었던 오백정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오백정은 재빨리 장창을 뒤로 틀어 등으로 날아들 습격에 대비했지만, 견술은 이미 저 멀리 멀어진 뒤였다.
“……?”
오백정은 견술이 왜 뒤따라오지 않았는지 의아했지만.
“……!”
곧 그 답을 깨달았다.
오백정의 발밑에는 깎아 내지른 듯한 낭떠러지가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오백정은 속절없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퍽! …퍽! …퍼억! 뚜-둑!
그는 떨어지는 도중 툭 튀어나와 있는 바위에 머리를 몇 번이나 부딪쳤고 피를 흩뿌리며 물속으로 떨어졌다.
퍼-엉!
저 아래에서 물기둥이 솟구치는 소리가 들렸다.
견술이 씩 웃었다.
“이제 둘 남았네.”
하지만 상황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었다.
찰나의 방심으로 인해 허무하게 죽어버린 오백정과 신백정의 경우를 본지라, 남은 진백정과 유백정의 경계심은 바짝 날카로워져 있었다.
“이런 개 같은 새끼가!”
유백정이 칼을 휘둘렀다.
이글거리는 검기가 끈적한 액체처럼 흩뿌려지며 견술을 덮쳤다.
견술의 개작두에서도 시퍼런 검기가 뿜어져 나왔다.
쩌-억!
작두와 장검이 격돌하는 순간 주변에 있던 바위들의 표면이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 위로 진백정의 철퇴가 떨어져 내렸다.
“이크.”
견술은 재빨리 몸을 뒤로 물렀지만 진백정의 철퇴가 조금 더 빨랐다.
뻐-억!
견술의 몸이 철퇴에 맞아 나가떨어진다.
이마가 깨지고 피가 터져 나왔다.
“안 놓친다.”
그 뒤로 유백정의 칼침이 쏟아진다.
견술은 순식간에 팔뚝, 옆구리, 정강이 부근에 긴 상처를 입은 채 물러나야 했다.
“……이제 꼼수가 안 통하게 됐네.”
난감한 기색의 견술, 그것은 건너편에 있는 적향도 마찬가지였다.
까앙! 깡! 창-
적향의 쌍도끼는 날아드는 쌍검과 사슬낫을 막기에 여념이 없다.
묘백정이 적향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돼지 같은 년, 너는 옛날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대체 뭔 여우짓을 했길래 스승님이 맨날 너만 싸고 도셨단 말이냐! 어! 이 불여시 년아!”
미백정 역시도 적향을 찍어 누르며 소리쳤다.
그 순간.
…퍼퍽!
쌍검의 날과 사슬낫이 적향의 허리에 명중했다.
두 천두가 회심의 미소를 짓는 순간.
“……그래서 스승님을 배신했냐?”
적향의 입이 열렸다.
묘백정의 칼과 미백정의 낫은 적향의 옆구리와 팔뚝 사이의 겨드랑이에 단단히 붙잡혀 있었다.
“그깟 저열한 질투와 열등감 때문에 사형들도 배신했던 거였냐?”
묘백정과 미백정이 힘을 주어 당겨도 무기는 빠지지 않는다.
“미친! 뭔 힘이 이렇게……!”
별수 없이, 그녀들은 자신들의 무기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바로 그 순간.
퍼-퍽!
적향의 쌍도끼가 그녀들의 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꺄아아아아악!”
묘백정과 미백정은 이마를 움켜쥔 채 비명을 질렀다.
도끼날이 스치고 간 곳에서 뜨거운 피가 펑펑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적향 역시도 양쪽 옆구리가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듯, 그대로 돌진했다.
“이 미친년이!?”
“동귀어진할 셈이야!?”
묘백정과 미백정이 이를 악물고는 무기를 휘둘렀다.
퍼퍽!
두 개의 칼날과 하나의 사슬낫이 각각 적향의 가슴과 옆구리, 허벅다리를 깊게 파고들었다.
하지만 적향은 죽음을 각오한 사람처럼 그대로 내달렸다.
저돌맹진(猪突猛進).
눈이 뒤집어진 멧돼지의 돌진은 범조차도 막을 수 없는 법이다.
하물며 토끼와 양이 어찌 그것을 막을까.
“으으윽! 어, 어디까지 미는 거야, 이 광년아!”
“야, 야 이년아! 지, 진짜로? 진심이야!?”
묘백정과 미백정은 자신들의 몸을 떠미는 적향을 보며 기겁했다.
하지만 도망치기에는 늦었다.
적향은 이미 두 팔로 묘백정과 미백정의 몸을 단단히 옥죄고 있었다.
이윽고, 적향의 발이 지면에서 떨어졌다.
세 여자는 절벽 아래를 향해 곧바로 곤두박질쳤다.
“꺄아아아아아악!”
묘백정과 미백정은 내공을 뿜어내며 발버둥 쳤지만 적향 역시도 두 팔에 내공을 불어넣고 있었다.
세 여자는 허공에서 내공 싸움을 시작했다.
묘백정과 미백정이 막 내력을 끌어올려 적향의 몸을 밀어내려는 순간.
퍼-억!
절벽가에 툭 튀어나온 바위가 묘백정과 미백정의 머리를 때렸다.
두 여자는 실 끊어진 연처럼 추락하여 장강의 물살 속으로 휘말려들었다.
적향은 눈을 감았다.
그녀 또한 묘백정과 미백정의 뒤를 따라 거센 물살에 삼켜질 것이고 이번에는 절대로 살아남지 못하리라.
……바로 그 순간.
파-악!
적향은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통증에 자신도 모르게 눈을 부릅떴다.
“꺼헉!?”
옆구리에 박힌 사슬낫이 위로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었다.
미백정이 놓쳤던 사슬낫의 반대편 낫이 절벽가의 소나무 뿌리에 단단히 박혀있는 것이 보였다.
“큭!”
적향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옆구리에 박힌 사슬낫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쇠사슬을 잡고 절벽을 기어 올라왔다.
옆구리의 상처는 창자가 쏟아져 내릴 정도로 벌어져 있었지만, 일단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었다.
한편. 절벽 위에 있던 견술은 계속해서 진백정과 유백정에게 밀려나고 있었다.
“어휴, 좀 쉬었다가 하자! 둘이서 계속 번갈아 들어오니까 불공평하잖아!”
“개소리 말아라.”
도망치는 견술을 향해 진백정이 철퇴를 집어 던졌다.
견술은 개작두를 휘둘러 철퇴를 막아 냈지만 그 뒤를 따라오는 유백정의 장검은 막지 못했다.
퍼-억!
견술의 오른쪽 귓불이 잘려 나가며 목에도 긴 혈선이 그어졌다.
“뒈질 뻔했잖아, 이 닭 새끼야!”
견술은 목을 뒤로 젖히는 동시에 발길질을 날려 유백정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그러나 유백정은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다.
쭉 뻗어진 견술의 다리를 향해 진백정의 철퇴가 재차 떨어져 내렸기에 힘을 온전히 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발차기라고 찼냐? 아주 비루먹은 개가 다 됐구만.”
유백정이 삐뚜름한 미소와 함께 칼을 비튼다.
바로 그 순간.
빠-각!
옆에서 날아온 손도끼가 유백정의 칼등을 쳤다.
“!?”
유백정이 기겁을 하며 옆을 돌아보는 순간, 적향의 도끼가 재차 떨어져 내렸다.
“미친!”
유백정은 피칠갑을 한 채 돌진하는 적향의 모습을 보며 기겁했다.
그는 황급히 칼을 회수한 채 뒤로 물러났고 적향은 그대로 견술의 옆에 착지할 수 있었다.
견술이 휘파람을 불었다.
“여자가 돼서 좀 조신하게 다닐 수 없니? 창자가 다 흘러내리잖아.”
“살려 줘도 지랄이냐, 견가야.”
적향은 쇠사슬로 복부를 칭칭 동여매며 대꾸했다.
“…….”
잔백정과 유백정은 그런 둘을 질렸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유백정이 말했다.
“너희들. 그렇게까지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이유가 뭐냐?”
“몰라서 묻냐? 네놈들이 스승님과 사형들을 배신했잖아.”
적향이 대꾸하자 유백정은 머리를 긁적였다.
“인의(人義)가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닌데 계속 이러기냐? 너희 둘은 이미 몸 상태가 박살 난 것 같은데, 우리는 아직 쌩쌩하다고. 계속 싸웠다간 무조건 죽어.”
“죽여 봐. 네놈들도 몸 성히 돌아가긴 힘들 거야. 최소한 사지의 절반은 불구로 만들어 주마.”
적향의 살기 어린 말에 유백정은 표정을 와락 구겼다.
“사형. 이거 말이 안 통할 것 같은…….”
순간, 고개를 돌린 유백정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언제부터일까? 뒤에 서 있던 진백정이 자신을 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 사형?”
유백정의 목소리가 떨렸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맞아떨어지는 법이다.
이윽고, 진백정이 철퇴를 들었다.
“미안하다, 사제.”
“사, 사형! 잠깐만! 왜 나를……!?”
유백정은 비명조차 제대로 내지르지 못했다.
진백정의 철퇴가 순식간에 그의 머리통을 부숴 버렸기 때문이다.
후두둑- 후두둑- 후둑-
살점과 핏물이 비산한다.
적향과 견술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유백정을 때려죽인 진백정이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너희들은 이대로 인백정에게 가라.”
“왜 도와주냐?”
“도와주긴, 더 이상 미친개들을 상대하기 싫을 뿐이다.”
진백정은 짜증스럽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너희 같은 잃을 것 없는 것들과 개싸움을 벌이다가 잔상처라도 입으면 얼마나 손해냐?”
“…….”
“어차피 네놈들은 인백정을 절대 이기지 못한다. 보아하니 도망갈 것 같지도 않고, 이대로 인백정에게 싸움을 걸었다가 개죽음당하게 내버려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귀찮아서 베푸는 호의야. 그러니까 다른 생각은 마라. 나는 몸에 상처 하나 입지 않았고 내공 손실도 없지. 다 죽어 가는 네놈년들 둘쯤이야 반각 안에 때려죽일 수 있단 말이다.”
진백정은 느른한 어조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잠깐!”
적향이 그를 불러 세웠다.
진백정이 고개를 돌렸다.
적향이 물었다.
“너, 군관 출신이지?”
“…….”
그 말에 진백정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견술이 적향의 말을 받아 이었다.
“그러고 보니 들은 적이 있는 것 같군. 우리 강 사형이 원래 동창(東廠) 출신이라는 소문을.”
“…….”
진백정 강교(姜蛟)는 입을 다문 채 말이 없다.
적향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장강의 수적들을 약화시키기 위해 처음부터 잠입해 있었던 어린 고수라. 이거 경극 한 편 나오겠는데?”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냐?”
진백정이 묻자 적향이 바로 말을 이었다.
“스승님께서는 다 알고 계셨다.”
“…….”
“네가 무슨 목적으로 스승님의 제자가 되었는지, 왜 수적패에 들어와서 수적 행세를 했는지, 처음부터 다 알고 계셨단 말이야.”
진백정은 여전히 대답이 없다.
적향은 죽어 나자빠진 유백정을 흘끗 쳐다보며 말했다.
“장강의 수적들을 와해시키고 싶다면 지금이 기회야. 우리랑 손잡고 인백정을 치자.”
“…….”
약간을 고민하던 진백정.
하지만 그는 이내 코웃음을 쳤다.
“네놈들과 손을 잡았을 거면 그 전에 자 사형과 축 사형의 손을 먼저 잡았을 것이다.”
“만약 자 사형과 축 사형이 이겼다면 이후 장강수로채를 더욱 부흥시켰을 거야. 그러니 그때는 인백정의 편을 드는 게 맞았겠지.”
“…….”
“하지만 우리는 아냐. 우리는 그냥 인백정, 그 좆같은 새끼를 죽이는 게 목표일 뿐이라고. 그 뒤에 장강수로채 따위야 해체되든지 말든지.”
“…….”
“그게 네 정체를 다 아시면서도 묵인해 주셨던 스승님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 아니겠어?”
적향의 설득에 진백정은 잠시 고민했다.
이윽고. 진백정, 아니 강교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내가 뭘 하면 되나?”
그 질문에 적향과 견술이 쾌재를 부르려는 순간.
어두운 숲속 저 너머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죽으면 된다.”
적향과 견술, 강교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콰-직!
시뻘겋게 타오르는 칼날이 날아들어 강교의 목을 절반가량 잘라 버렸다.
“……! ……! ……!”
진백정 강교. 그는 아무런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어 버렸다.
촤악-
흩뿌려지는 핏물.
시커먼 허공에 붉은 초승달이 휘영청 떴다.
피가 섞인 꿀처럼 뚝뚝 떨어져 내리는 불길한 검루(劍淚).
기형적으로 휘어진 만곡도(蠻曲刀)가 느릿한 움직임으로 이쪽을 향한다.
“간만이야, 사제들.”
인백정 가정맹(苛政猛).
그가 이쪽을 바라보며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창귀무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