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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귀무쌍-86화 (86/110)

86화 장강혈사(長江血事) (2)

…우지끈!

커다란 축대가 점차 옆으로 기울어진다.

적향이 휘두르고 있는 도끼가 어느새 두 개로 늘었다.

그녀는 깽판을 치던 도중에도 무기가 부러지면 다른 무기로 바꿔 쥐어 가며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야 이 개새끼들아! 대가리들 다 튀어 나오라 그래!”

적향의 도끼질을 견디지 못한 통나무가 부러지는 것이 시작이었다.

콰콰콰콰쾅!

위쪽의 산채를 떠받치고 있던 거대한 축대 하나가 통째로 붕괴하고 말았다.

돌과 흙들이 쏟아져 내리며 아래에 있던 수적들이 속절없이 깔려 죽는다.

그 광경을 보던 견술이 휘파람을 불었다.

“역시 힘 하나는 무지막지한 계집애야. 흑선풍(黑旋風)이 따로 없네.”

그렇게 감탄하는 도중에도 견술의 개작두는 쉬지 않고 허공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써걱! 썩-둑!

작두날이 한번 내리그일 때마다 어김없이 두세 개의 목이 바닥을 굴러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원망은 말렴. 이게 다 재미있자고 하는 거니까. 이해하지?”

소리 나는 화살을 쏘려던 수적의 허리가 절단 났고, 신호탄에 불을 붙이려던 이의 몸뚱이가 세로로 쪼개졌으며, 말에 올라 파발을 전하려던 이가 말과 함께 목을 잘렸다.

견술은 우왕좌왕하는 수적들 사이에서 연락책만을 쏙쏙 골라 제거했다.

애초에 천 명의 수하를 거느리는 천두(千頭) 계급의 둘인지라 평범한 수적들로서는 방어선을 유지해 낼 재간이 없는 것이다.

이윽고, 산채 위쪽에서 기별이 돌아왔다.

“웬놈들이냐!”

묘백정, 진백정, 오백정, 미백정, 신백정, 유백정.

토끼, 용, 말, 양, 원숭이, 닭이 견술과 적향의 앞을 가로막았다.

적향이 핏발 선 눈으로 말했다.

“어이 대가리들. 늬들이 자 사형이랑 축 사형을 그렇게 만들었냐?”

그러자 여섯 천두들의 입이 일제히 다물렸다.

적향이 이를 갈던 끝에 버럭 소리 질렀다.

“니들이 그러고도 사람 새끼냐!? 스승님도 배신하고 사형제들도 배신하고! 아주 토악질이 나온다!”

“이년이 이거 말하는 싸가지 좀 봐? 누가 배신을 했다는 거야!?”

묘백정이 빽 소리 질렀다.

미백정 역시도 발끈하여 말을 이었다.

“너야말로 지금까지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왜 지금 와서 지랄이니, 지랄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우둔한 돼지 년이 이제 와서 뭔 뒷북이냐고!”

“그래. 오냐. 내가 오늘 네놈년들 모가지를 꺾어놓지 않으면 진짜 돼지 새끼다.”

적향이 쌍도끼를 들었다.

그 흉흉한 기세에 묘백정과 미백정이 시선을 교환한다.

“아무래도 이거 여자들끼리 한번 서열 정리가 필요하겠네.”

“죽이진 말자, 언니. 저년 다리 두 짝을 다 잘라 버린 뒤에 내 시녀로 쓸 거야.”

“어머? 나는 두 손을 자른 다음에 내 부하들 노리개로 던져 줄 생각이었는데?”

“그럼 둘 다 하지 뭐. 꺄르륵-”

묘백정과 미백정이 각각 무기를 꺼내 들었다.

묘백정의 쌍검과 미백정의 사슬낫이 적향을 둘러싸고 있었다.

한편, 견술 역시도 묘한 표정으로 진백정, 오백정, 신백정, 유백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내 쪽에는 넷이나 붙었수?”

“저쪽은 여자들끼리 싸운다잖냐.”

진백정의 말에 견술은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딱히 남자들끼리 싸우자고 한 적은 없는데.”

“…….”

“쪽수 좀 맞춥시다. 저쪽으로 한 명 가잉~”

하지만 견술의 너스레에도 네 천두들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스윽-

진백정의 철퇴, 오백정의 장창, 신백정의 두 손바닥, 유백정의 장검이 견술을 포위했다.

진백정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예전부터 네 뺀질거리는 낯짝이 마음에 안 들었다.”

“뺀질거리는 낯짝 하면 나보다는 인백정 쪽이 더 심하지 않나?”

“건방진 놈. 어따 대고 백정 백정 거리느냐? 인 사형은 이제 대장강수로채의 채주가 되셨다.”

“지랄하고 있네. 너는 명색이 용이란 새끼가 어째 범 꼬리에 가 붙었냐? 그냥 용이 아니라 토룡(土龍)이었나?”

견술의 비웃음에 진백정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내 오늘 너를 살려 보내지 않으리라.”

“아, 너무 무섭다.”

견술은 짐짓 오들오들 떠는 시늉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 옆에는 적향이 쌍도끼를 든 채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이, 언니들. 나는 여기 견가 놈이랑 달라서 뒤가 없어. 덤벼 봐, 육젓을 담가 줄 테니까.”

적향의 말에 묘백정과 미백정이 자세를 잡는다.

견술을 뒤쫓는 진백정, 오백정, 신백정, 유백정 역시도 포위망을 좁혀 오고 있었다.

적향이 옆에 있는 견술에게 말했다.

“이봐, 견가야. 자신 있냐?”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적향은 견술이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고는 혀를 찼다.

“내가 넷을 맡을 테니 너는 둘만 맡아라.”

하지만 이번에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

뭔가 싶은 적향이 고개를 돌려 보니.

파팟!

견술이 저 뒤를 향해 맹렬하게 도망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야이 씻팔!”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 쪽수 앞에는 장사 없는 법이다.

적향 역시도 이를 갈며 견술의 뒤를 따라 뛰었다.

“개돼지 년들이 입만 살았구나!”

“오늘 기필코 잡아 죽이리라!”

묘백정과 진백정을 필두로 한 여섯 천두들이 그 뒤를 쫓아 숲속으로 뛰어들었다.

횃불 한 점 없는 깊은 어둠 속으로.

*       *       *

추이는 어둠 속으로 녹아들고 있었다.

저벅- 저벅- 저벅-

유년시절의 훈련으로 인해 추이는 이미 묘족의 독에는 내성이 있었다.

추이의 발걸음은 구부러져 있는 소나무 기둥 사이를 지나 서까래 아래에서 멈췄다.

…퍼억!

추이의 창이 천장을 뚫고 틀어박혔다.

그러자 반응이 있었다.

“웬놈이길래 묘독에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느냐?”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감싼 사내가 추이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추이가 물었다.

“묘족이 아니라 사백정 당삼랑이었군. 네가 독 함정을 설치해 놓았나?”

“그렇다. 나를 알고도 도망치지 않느냐?”

“파문당한 놈이 뭐가 두려워서.”

“……!”

복면 위로 보이는 사백정의 두 눈이 매섭게 휘어졌다.

추이는 이미 적향과 견술에게 그에 대한 정보들을 들었다.

“사천당가에서 버려진 가엾은 셋째야. 명색이 정도문파의 공자였던 놈이 이런 궁벽한 오지에 숨어 수적질이나 해 먹고 있느냐.”

“허허-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놈에게 훈계나 듣다니. 나도 다 된 모양이군.”

사백정은 헛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추이의 조롱에 대꾸했다.

“그렇다면 네놈은 내가 왜 당가에서 퇴출당했는지도 알고 있나?”

“……?”

추이는 말을 멈췄다.

적향과 견술이 그것까지는 말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백정의 눈에 웃음기가 맴돌았다.

“남만(南蠻)의 묘족들을 학살했던 이들이 사천당가인 것은 알지?”

“……!”

그것은 추이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어린 시절, 부락에 쳐들어와서 어른들을 죽이고 어린아이들을 노예로 잡아갔던 이들이 사천당가의 무인들이었던가.

사백정은 웃었다.

“나는 그 당시 묘족 놈들을 하도 많이 죽여 대서, 그 죄로 추방된 것이다. 말하자면 꼬리자르기를 당한 셈이지.”

“…….”

“웃기지 않나? 당가는 묘족의 독 제조법을 얻기 위해 그들을 습격하고 유린했다. 그리고 그 책임을 모두 나에게 덮어씌운 뒤 독 제조법만을 빼앗아 갔고.”

“…….”

“묘족의 독에 내성이 있는 것을 보니 너는 묘족 출신인가 보구나. 그러면 혹시 나를 알지도 모르겠군.”

사백정은 자신의 얼굴을 가렸던 복면을 벗어 보였다.

오똑한 콧날에 흰 피부, 전체적으로 보면 유려하게 생긴 미남의 얼굴이었으나 눈매가 뱀처럼 찢어져 있어서 그다지 호감이 가는 인상은 아니었다.

추이는 그의 얼굴을 한동안 들여다보던 끝에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 너 같은 얼굴은.”

유년시절, 불타고 있는 마을을 등지고 정신없이 도망가던 기억이 있다.

습격자들의 칼을 피해 죽어라고 내달리는 와중에 적의 얼굴을 기억할 리가 없는 것이다.

사백정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는 품에서 비수와 송곳을 꺼내 들었다.

“모른다니 아쉽군. 나는 왠지 너를 알 것도 같은데 말이야.”

모든 것이 화광에 젖어 가던 밤.

그때 베어 죽였던 남자, 울부짖던 여자, 도망가던 자식.

“아들만큼은 살려 달라며 부르짖던 여자가 있었지. 임신을 한 상태였는데, 내가 직접 배를 갈라 죽였어. 배 속의 태아도 독에 면역이 있는지 궁금했거든. 그래서 끄집어내자마자 독물에 담가 봤는데, 놀랍게도 반 각이 넘게 살아 있는 거야. 묘족 놈들이 원래 질기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질긴 놈들은 처음이었어. 뭔가 특별했던 거지, 그 부락 놈들은 태생부터가…….”

하지만 사백정은 회상을 끝까지 할 수 없었다.

푹-

추이의 창끝이 사백정의 목을 두 치의 깊이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어?”

사백정은 입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목젖을 세로로 가르고 파고든 창날 때문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쉭쉭- 뿌글뿌글뿌글……

창날 옆으로 헛바람과 함께 피거품이 끓어올랐다.

그런 사백정의 앞으로 추이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태연한 얼굴.

무미건조한 목소리.

“관심 없다.”

증오도, 분노도, 슬픔도, 심지어 공허함마저도 느껴지지 않는, 그야말로 무생물에 가까운 태도였다.

쑥-

매화귀창의 날이 사백정의 목에서 빠져나왔다.

사백정은 허공에 대고 허우적거리며 쓰러졌다.

“마…… 말도 안…….”

초일류의 무공을 보유하고 있는 살수가 손 한 번 못 써 보고 죽을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살수는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반은 잃고 들어가는 거야.”

추이는 사백정의 목을 발로 걷어찼다.

…뚜각!

목뼈가 직각으로 꺾인 사백정은 그대로 혀를 빼물고 즉사했다.

추이는 별다른 말 없이 사백정의 품을 뒤졌다.

흑색 일색(一色)인 송곳 두 자루와 마비독이 발라져 있는 마름쇠, 그리고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얇으나 질기기는 쇠심줄보다도 더한 잠사 한 뭉치, 더불어 묘족의 독이 밀봉되어 있는 항아리가 하나.

“잘됐군. 전에 쓰던 송곳보다 이게 훨씬 나아.”

추이는 전에 쓰던 낡은 송곳들을 버리고 사백정의 검은 송곳으로 바꾸었다.

‘독아(毒牙)’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는 투박한 송곳 두 정이 마치 독사의 독니처럼 빛난다.

추이는 혹시나 망치 같은 것도 있나 해서 사백정의 품을 뒤져 봤지만 그 외에는 기형적으로 생긴 비수나 단도들만 가득할 뿐, 달리 쓸 만한 것은 없었다.

푹- 푹- 푹- 푹-

추이는 마지막으로 창을 뻗어 사백정의 미간, 목, 심장, 사타구니를 한 번씩 더 찔렀다.

강적을 죽이고 나면 반드시 하는 확인사살이었다.

츠츠츠츠츠츠……

그제야 사백정 당삼랑의 창귀가 뽑혀 나왔다.

방금 전까지는 죽은 척을 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모양.

[우우…… 우우우우……]

당삼랑은 죽어서도 영면에 들지 못했다.

그의 영혼은 이제 추이의 손아귀 속에 떨어졌다.

아마 추이가 살아 있는 한은 끝없이 끝없이 고통받게 되리라.

저벅- 저벅- 저벅-

추이는 한쪽 눈으로 사백정의 기억을 엿보는 동안 다른 한쪽 눈으로 인백정의 방을 찾아갔다.

복도를 곧장 지나면 나오는 안쪽의 내실, 두 번째 방.

그곳이 바로 인백정이 운기조식을 하는 공간이다.

…쾅!

추이는 곧장 인백정의 방문을 걷어차 부숴 버렸다.

매화귀창의 날카로운 끝이 안쪽의 욕조를 겨눈다.

추이는 욕실을 가리고 있던 천들을 모두 걷어 내 버렸다.

파악-

순간, 욕실 안쪽을 들여다본 추이의 미간이 미미하게나마 찡그려졌다.

“……!”

꽤나 불쾌한 상황이 추이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창귀무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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