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장강혈사(長江血事) (1)
추이는 나무 위에서 상황을 보고 있었다.
적향과 견술은 그 바로 아래의 나뭇가지 위에 올라서 있다.
현재 그들이 있는 곳은 인채의 최외곽을 둘러싼 목책 앞.
“경계가 삼엄하네.”
적향이 혀를 찼다.
무작정 돌입하기에는 목책 위로 보이는 수적들의 숫자가 제법 많다.
이대로 들어갔다가는 엄청난 소모전이 펼쳐질 것이 뻔했다.
견술이 추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진짜로 돌격할 거니?”
“그렇다.”
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뭇가지 위에 반쯤 기대어 두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한동안은 여기서 움직일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적향은 애가 타는지 한번 더 물었다.
“언제 들어가려고?”
“아직.”
“그러니까 언제?”
“기다려라.”
추이는 여전히 태연했다.
지켜보고 있는 적향으로서는 그저 가슴만 주먹으로 때릴 뿐이었다.
‘무슨 생각이지?’
견술 역시도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파악한 추이는 언뜻 보기에는 굉장히 단순무식하나, 사실 그 이면에 굉장히 많은 의도를 깔아 놓고 움직이는 인물이었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일을 벌일 놈 같지는 않고…….’
만약 그랬다면 기생으로 분장해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대지도 않았을 것이다.
견술의 눈이 가늘게 좁아졌다.
‘만약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놈이라면 따라다녀 봤자 별로 재미가 없겠어. 으응~ 그럴 바에는 일찌감치 없애 버리는 게…….’
바로 그때.
삐그덕-
목책의 문이 열렸다.
“빨리 버리고 오자.”
“더럽게 춥구만.”
“하필 재수없게 걸려서는, 에잉.”
세 명의 수적들이 밖으로 나왔다.
한 명은 삽을, 다른 두 명은 가죽 자루 두 개를 나누어 짊어진 채였다.
‘뭐지?’
견술은 그들의 행색과 동태를 자세히 살폈다.
귀를 기울이니 수적들이 나누는 대화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보니까 자천두나 축천두도 별것 아니었군 그래.”
“예끼, 이 사람. 우리 새 채주님이 대단하신 분이니까 그렇지.”
“그래. 자백정과 축백정이 별것 아닌 게 아니라 인채주님이 강하신 거라고.”
그 말에 견술이 움찔했다.
‘자백정? 축백정이라고?’
같은 천두들을 제외하고 장강수로채의 천두들을 백정이라고 부르는 놈들이 있을 줄이야.
그것도 감히 장강수로채의 산채 안에서, 하급 수적 따위가.
하지만, 뒤이어지는 말은 더욱 충격이었다.
“우리 새 채주님은 대체 무공이 얼마나 고강하신 걸까? 쥐새끼와 소대가리의 합공을 단박에 부숴 버리시다니.”
“그냥 부순 정도가 아니지. 아주 산산조각 걸레짝을 만들어 놓으셨드만.”
“자루에 주워 담느라 아주 고역이었어. 웬 살점이랑 뼛조각들이 그리도 많이 흩어져 있던지.”
견술은 입을 반쯤 벌렸다.
‘자 사형과 축 사형이 인백정 놈에게 졌다고? 그것도 합공 끝에?’
지금 저 하급 수적들이 짊어지고 가는 가죽자루에 두 사형의 주검이 담겨 있는 모양이다.
견술은 굳은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수적들의 뒤를 조용히 따라가기 시작했다.
스윽……
견술의 옆에는 적향도 있었다.
적향의 손은 아예 덜덜 떨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럴 리가 없어. 사형들이 그렇게 됐을 리가…….”
하지만 수적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간다.
이윽고, 수적들은 인적이 아예 없는 깊은 산속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옛다. 들개들아. 밥이다.”
수적들이 가죽 자루를 풀자 그 안에서 만신창이가 된 주검 두 짝이 굴러 떨어졌다.
자천두 서우학과 축천두 우철우의 시체가 풀숲에 아무렇게나 버려졌다.
수적들은 낄낄 웃으며 말했다.
“우리 위세 좋던 천두님들. 그러게 왜 우리 채주님께 반기를 드십니까, 드시길~”
“기왕 드실 거면 내 좋은 거 하나 드리겠습니다. 많이들 드십쇼.”
“우하하하- 이놈 새끼, 아무리 그래도 한때 천두 해 먹던 놈들인데, 오줌 갈기는 건 너무 심한 거 아니냐?”
두 구의 시체 위로 누런 오줌발이 후둑후둑 떨어져 내린다.
수적들은 각자 물건을 꺼내 들고는 두 구의 주검 위에 대고 탈탈 털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것을 보며 수적들은 낄낄댔다.
“이런 거 보면 참 사람 인생은 모르는 거야. 그치?”
“맞아. 천 개의 대가리 위에서 천하를 호령하던 영웅들이 설마 이렇게 비참한 몰골이 될 줄 누가 알았겠나.”
“까마득한 아랫것들의 오줌을 맞은 채로 들개 밥이 되는 최후라니. 거 불쌍하게 됐다.”
바로 그 순간.
불쑥-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난데없이 튀어나왔다.
“으응?”
수적들은 깜짝 놀란 와중에도 꺼냈던 물건을 집어넣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타난 상대가 아름다운 외모의 여자였기 때문이다.
“뭐야, 이 야밤 산중에 웬?”
“어이- 여긴 왜 왔어?”
“우리들 꺼 한번 만져 줄라고 왔다? 흐히히히히-”
여전히 낄낄거리고 있는 수적들.
하지만 어둠이 걷히고 여자의 얼굴이 점점 더 가까워지자 수적들의 표정은 점차 굳어 간다.
“어? 혹시 해천두 님……?”
개중 한 놈이 입을 반쯤 벌리는 순간.
썩썩썩-둑!
적향이 손에 들고 있던 손도끼를 휘둘렀다.
수적들의 물건에서 뿜어져 나오던 물줄기가 노란색에서 빨간색으로 변했다.
“끄-아아아아악!?”
그들은 사타구니를 움켜쥔 채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다.
그 앞으로 적향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사,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세요!”
수적들은 가랑이 사이로 피를 쏟아 내면서도 목숨을 구걸했다.
물론 적향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저 손도끼만 한번 더 휘둘렀을 뿐이다.
퍽! 퍽! 퍽!
세 개의 대가리가 어김없이, 순차적으로 터져 나갔다.
마른 솔잎 무더기에 진득한 핏물이 스며들고 있었다.
“사형들…….”
적향은 도끼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싸늘하게 식어 버린 두 주검을 끌어안고 울었다.
자천두 서우학, 축천두 우철우.
스승 다음으로 따랐던, 친오빠 같은 이들을 연이어 잃었으니 그 상실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견술 역시도 씁쓸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으음. 자 사형이랑 축 사형은 괜찮은 사람이었지.”
딱히 위로 차원에서 하는 말은 아니었다.
견술도 서우학과 우철우와는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다.
견술은 반듯하고 제대로 된 사람들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나는 뭐랄까, 좀 더 뒤틀려 있는 쪽이…….’
견술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
그의 눈에 추이의 모습이 보인다.
“…….”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는 추이.
하지만 눈빛은 이미 바뀌어 있었다.
견술은 생각했다.
‘역시 우리 예쁜이, 뭔가를 노리고 있었구나.’
아니나 다를까, 앞에서 통곡하던 적향이 벌떡 일어났다.
어느새 손에는 손도끼를 굳게 움켜쥔 채였다.
“계책이고 뭐고 모르겠어. 나는 바로 인채로 간다. 가서 인백정, 그놈의 대가리를 깨 죽일래.”
눈이 돌아가 있는 걸 보니 누구 말도 안 들을 기세다.
적향은 말을 끝내는 즉시 곧바로 뛰어갔다.
그러자.
스윽-
추이가 비로소 몸을 움직였다.
적향이 뛰어간 곳의 반대편으로 올라가는 추이를 보며, 견술이 폭소를 터트렸다.
“호호호호호- 그래! 이걸 기다렸구나!”
처음부터 적향을 미끼로 쓸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변수에 반응하는 것일까?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견술은 추이가 마음에 들었다.
“생긴 건 귀엽게 생겨서, 하는 짓은 영락없는 노마두(老魔頭)로군.”
기분이 한껏 유쾌해진 견술은 등에 짊어지고 있던 개작두를 빼 들었다.
‘기분 같아서는 저쪽을 따라가고 싶지만…….’
적향이 난동을 부릴 때 추이는 은밀하게 반대쪽을 찌를 것이다.
그렇다면 적향이 적들의 시선을 많이, 길게 끌수록 추이가 안쪽으로 치고 들어가기 편해진다.
만약 적향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기라도 한다면 추이 역시도 고되질 것이 분명했다.
‘역시, 오래 즐기려면 이쪽을 따라가는 게 맞겠지?’
이윽고, 견술은 적향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좋아. 좋아, 예쁜아, 네가 벌린 판이라면 기꺼이 말이 되어 줄게.”
입가에 삐뚜름한 미소를 건 채로.
* * *
콰-쾅!
적향은 곧바로 목책을 부수고 안으로 쳐들어갔다.
“누, 누구…… 컥!?”
보초 한 명의 머리통이 대각선으로 썰려 나간다.
적향은 무표정한 얼굴로 손도끼를 휘두르며 다섯 명의 머리통을 부수고 여덟 명의 척추를 세로로 쪼개 버렸다.
“뒈지렴.”
그 말을 했을 때 이미 목책 근처에는 살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
적향은 곧바로 횃불을 들어 이곳저곳을 쑤셨다.
…화르륵!
횃불의 불이 초가삼간과 목책으로 옮겨붙었고 이내 축대와 망루까지 번진다.
“으아아아! 적이다! 습격자가 왔……!”
멀리서 신호탄을 발사하려던 수적들의 손목이 우르르 잘려 나갔다.
견술이 개작두를 휘두른 것이다.
“자 사형이랑 축 사형은 반듯한 사람들이라서 이런 식으로 안 들어왔겠지만…… 우리는 막내들이라서 세대가 좀 다르거든~”
“어, 맞어. 우리가 원래 근본이 좀 없어.”
적향이 견술의 말을 받으며 손도끼를 집어 던졌다.
우지끈! 딱!
위로 소식을 전하러 올라가던 수적의 골통이 빠개지며 피와 뇌수가 흩뿌려진다.
바야흐로, 산중턱 일대에 끔찍한 혼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 * *
……한편.
적향과 견술이 날뛰고 있는 동안 추이는 반대편 목책을 타 넘고 있었다.
펄럭-
추이는 목책 위로 솟구치자마자 옷자락을 휘둘렀다.
…퍼퍼퍽!
마름쇠가 날아들어 이마에 박힌다.
보초 몇 명이 소리도 없이 죽어 나자빠졌다.
추이는 그중 체구가 비슷한 한 수적의 겉옷을 벗겨 입었다.
“습격이다! 아래쪽에 적들이 쳐들어왔다!”
소리를 지르자 금방 반응이 왔다.
아래쪽에서부터 화광이 번져 오르고 있으니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수적들이 패거리를 이루어 우르르 내려가는 동안 추이는 슬쩍 뒤로 빠져 오르막길을 탔다.
이윽고, 인백정이 기거하는 커다란 내원이 보인다.
추이는 중문 옆의 담을 타 넘어 누각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피잉-
추이는 무릎에 걸리는 무언가를 느꼈다.
극도로 얇은 잠사.
그것이 추이의 발에 걸려 당겨지는 순간.
츠츠츠츠츠츠…… 쉬이익-
어둠 속에 검은 안개가 퍼졌다.
밤이라서 육안으로는 관측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었지만 추이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독.’
그것도 예삿 독이 아니다.
서까래 위를 지나가던 쥐들이 코를 킁킁거리는 것만으로도 죽어서 떨어져 내릴 정도였다.
추이는 소매로 코를 가린 채 계속해서 물러났다.
‘내가 썼던 독보다도 훨씬 더 진하군.’
추이가 흑도방을 칠 당시 사용했던 독은 강족의 독.
하지만 지금 눈앞으로 퍼져 나가는 것은 그보다도 훨씬 더 독하다.
추이가 알기로는 이런 종류의 독은 단 하나뿐이었다.
‘……묘족의 독.’
바로 추이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원주민 부락에서 만들어지던 독이다.
그리고 추이는 이 독향이 묘하게 코에 익다고 생각했다.
후욱-
추이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셨다.
폐가 타들어가는 듯 뜨겁고 콧속 점막이 따끔거렸지만…….
‘못 버틸 정도는 아니야.’
추이는 자신이 이미 이 독에 내성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
그렇다면 답은 나왔다.
이 함정을 설치해 놓은 이는 분명 추이와 동향(同鄕) 사람임에 분명하다.
추이는 창을 휘둘러 기둥 뒤에 붙어 있는 독 분사기를 부숴 버렸다.
그러자.
…바스락!
저 앞쪽에 있는 기둥 사이에서 반응이 있었다.
‘잡고 가야겠군.’
인백정을 만나기 전에 할 일이 생겼다.
추이는 곧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
저 어둠 너머에 숨어 있을 동족을 향해서.
창귀무쌍